내가 믿는 것은 검 67화
무료소설 내가 믿는 것은 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17회 작성일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67화
067. 생사
“끄으읏…….”
쑤셔 오는 골반을 문지르며, 린디아스가 일어섰다.
날아가는 도중에 기공을 발휘해 몸을 보호하지 않았다면, 분명 어딘가 하나쯤은 부러졌으리라.
그녀는 일어나자마자 건너편의 절벽을 바라보았다.
어둠에 파묻혀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만큼 거리가 멀었다.
콰앙! 콰앙!
허나, 커다란 소음과 함께 미미하지만 진동의 여파가 여기까지 전해지고 있다.
‘또 빚을 지고 말았어…….’
짙은 무기력감이 몸을 덮는다.
안톤이 항상 힘을 추구하던 걸 쉽게 이해하지 못했던 린디아스다.
허나 이제는 그의 마음이 이해가 간다.
‘내가 힘이 있었다면……!’
그랬다면 분명, 안톤뿐만 아니라 모두의 발목을 붙잡지 않아도 됐으리라.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스스로를 질책하며 시간을 낭비할 때가 아니었다.
‘서둘러야 해!’
언제 그렇게 강해졌는지 모르지만, 안톤으로서도 그 괴물은 당해 내지 못할 것이다.
그 또한 같은 판단이었기에, 이렇게 위험한 방법을 쓰면서까지 자신을 도주시킨 것일 테고.
린디아스는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뛰기 시작했다.
‘일이 잘못된 걸 지금쯤 알았을 테니, 조부님도 우릴 찾고 계실 거야.’
검성.
가우스트 조르디.
그라면 분명 그 괴물을 상대로 안톤을 구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희망으로 린디아스는 산길을 쉬지 않고 내달렸다.
쌔애애-.
그러던 중 귀에 새소리 비슷한 음성이 들린다.
평소 조르디가의 무인들이 신호를 보낼 때 쓰는 피리였다.
혹시 적의 유인책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으나, 린디아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조금만 버텨 줘요, 안톤!’
* * *
은발의 여인, 아니 카트락시아는 정신을 차렸다.
그녀의 몸은 평소의 몸으로 돌아와 있었다.
비록 옷이 모두 갈가리 찢기고, 절단된 팔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말이다.
‘부상 때문인가? 하마터면 잠식당할 뻔했네.’
카트락시아는 슬그머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치 운석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초토화된 주변엔,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고기 조각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녀는 그것이 자신의 부하였다는 것도, 이렇게 만든 것이 다름 아닌 본인이라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었다.
허나 그녀의 눈은 여전히 무심했다.
‘어차피 몇 번 쓰고 버릴 소모품들이었다마는…… 그래도 조금 아깝긴 하네.’
겨우 그것이 감상의 전부였다.
혀로 입술을 적신 카트락시아가 안톤을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반잠식 상태에 빠졌었는데도 아직 살아 있을 줄이야. 뭐, 살았다고 하기도 뭐한가?”
사지가 산산이 조각난 옆의 시체들보다는 그나마 사정이 나았지만, 안톤의 몰골 역시 처참했다.
일단 걸치고 있던 갑옷들은 찌그러지고 부서졌다.
탈골된 왼쪽 어깨가 덜렁거렸고, 배에는 주먹만 한 구멍 세 개가 등까지 뚫려 있었다.
피부에는 긁히고 파인 상처들도 자욱했으며, 허벅지에서는 아직까지도 출혈이 지속되고 있었다.
거의 이쯤 되면 살아도 살아 있는 게 아니다. 그냥 숨을 쉬는 시체지.
허나 안톤은 꿋꿋이 서 있었다.
그것도 검을 치켜세운 채로.
“자론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지도…….”
카트락시아는 질린다는 얼굴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죽은 듯 눈을 감고 있지만, 지워진 의식을 대신할 투쟁의 의지가 느껴진다.
다가가는 순간 휙 하고 검이 휘둘러질 것만 같다.
카트락시아는 처음으로 인간을 향해 경이롭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의 말대로 10년만 더 늦게 만났다면, 얘기가 달랐을 수도 있겠어. 하지만 너무 일찍 세상에 나온 게 네 실수였다. 이만 죽어라.”
슈욱!
카트락시아의 손끝이 안톤의 목을 향해 찔러졌다.
짐작대로 근처에 가자 안톤의 검이 휘둘러졌지만, 그의 검에는 조금 전에 보았던 그 기세는 담겨 있지 않았다.
서걱.
카트락시아의 손이 공중을 가르며 날았다.
말 그대로, 날았다.
턱.
주인을 잃은 손 하나가 바닥에 떨어진다.
“끄아아아아!”
카트락시아는 갑작스러운 고통에 비명을 참지 못했다.
잘린 단면으로 피분수가 뿜어져 나오는 팔목으로 앞을 가리켰다.
“검성? 당신이 여길 어떻게?”
“약속했던 지점에 하도 나오지 않기에 직접 찾아왔다네. 그렇게 궁금했던 얼굴을 이제야 보는구려. 날 바람맞힌 대가는 톡톡히 치러야 할 게요.”
‘도대체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빠른데……?’
생각보다 반잠식 상태에 빠져 있던 시간이 길었던 듯하다.
카트락시아는 재생 능력을 발휘해 잘린 팔목을 다시 자라나게 하며, 한 눈으로 안톤을 흘겼다.
‘그럼 그 시간 동안 계속 나와 싸우고 있었단 말이야? 그것도 반잠식 상태인 나를 상대로?’
놀라운 일이었으나, 안타깝게도 그럴 시간이 없었다.
카트락시아는 재빨리 머리를 굴리며 타개책을 구했다.
‘단환은 이미 써 버렸다. 마지막 한 개가 남아 있긴 하지만…….’
그것은 최후의 보루다.
솔직히 지금 상태로 마지막 단환을 먹는다면 다시 원래 형태로 돌아올 자신이 없다.
‘그렇다고 이 모습으로 검성을 상대하는 건 무리겠지. 결국…… 물러날 수밖에 없다는 건가?’
하지만 무려 검성이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경계하는 지금.
그조차도 쉽지 않은 일이다.
이윽고 결정을 내린 카트락시아는 안톤을 향해 몸을 날렸다.
‘인질이라도 잡으려는 건가?’
가우스트가 이를 막기 위해 검을 내찔렀다.
푸슉!
차가운 검신이 여인의 복부에 깊이 파고든다.
하지만 그녀의 속도는 줄지 않았다.
기어코 무방비한 안톤을 향해 손을 내뻗었다.
가우스트는 이를 막기 다시 한 번 검을 출수했다.
하지만.
카트락시아는 안톤을 스쳐 지나치며 절벽 아래로 몸을 내던졌다.
가우스트는 잠시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완전히 속았군. 처음부터 도망칠 생각이었던 건가?”
가우스트가 추격을 위해 마찬가지로 절벽 아래로 뛰어내리려던 찰나였다.
“조부님!”
뒤늦게 린디아스와 본대 병력들이 절벽에 당도했다.
그리고 그녀는 쓰러진 안톤을 보고선 기겁하며 옆으로 다가갔다.
“안톤은, 안톤은 살릴 수 있겠지요?”
눈물방울을 뚝뚝 떨어트릴 것 같은 손녀의 모습에 가우스트는 자신의 뜻을 꺾을 수밖에 없었다.
“휴우……. 어떻게든 해 봐야겠지. 어서 돌아가자꾸나.”
* * *
안톤은 눈을 떴다.
몸 위로 이불이 덮여 있었고, 푹신한 침대 위였다.
‘어떻게든 살아남은 건가? 근데 여긴 어디지?’
주위를 둘러보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윽!”
안톤은 지독한 고통에 다시 몸을 바닥에 누일 수밖에 없었다.
힘도 잘 들어가지 않는 팔로 이불을 걷어 내고, 고개만을 겨우 내려 자신의 몸 상태를 확인했다.
온몸이 붕대로 감싸여 있었다.
‘몸이 말이 아니군.’
일단 치료가 되어 있는 것을 보아, 적지는 아니라는 판단이 섰다.
안톤은 차분히 기억을 되살리며 누군가 오길 기다렸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철컥.
문이 열리며 여리여리한 외모의 여인이 들어왔다.
“어, 어! 깼어요?”
들고 있던 은쟁반을 옆 탁자에 올려 둔 린디아스가 안톤의 옆으로 후다닥 다가왔다.
그리고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안톤과 눈높이를 맞추었다.
흰색 치마가 더러워졌지만, 그녀는 그런 사소한 건 신경도 쓰지 않는 눈치였다.
“몸은 어때요? 괜찮은 거예요? 아! 어서 의원님을 모셔 올게요!”
안톤은 일어서는 린디아스의 손가락을 붙잡았다.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인지 그대로 손이 미끄러져 흘러내렸다.
린디아스가 휙 고개를 들어 안톤을 바라보았다.
“그것보다 여긴 어디오?”
“조부님과 함께 묵고 있는 은신처예요.”
“의원을 부르기 전에 우선 상황을 좀 설명해 줄 수 있겠소?”
린디아스는 자신이 절벽 너머로 내던져진 후, 가우스트의 도움을 받아 안톤을 구출한 것까지 간단명료하게 설명을 마쳤다.
“그럼 그 여자는 어떻게 되었소?”
“백무대주를 말하는 건가요?”
“그런 직함을 달고 있다는 걸 얼핏 듣기는 했소.”
“그 여자라면 조부님이 도착하고서 바로 도망쳤다고 들었어요.”
“그렇군.”
검성.
가우스트 조르디.
그 괴물을 겨우 등장만으로 도망치게 하다니, 대단하다 싶으면서도 입안이 쓰게 느껴진다.
‘그런 무위를 지녀 놓고 어째서 상황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아무것도 못 한 거지?’
그런 생각이 들던 찰나.
린디아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어서 의원님을 불러올게요.”
“아 참, 혹시 스승님도 이곳에 계신 거요?”
“네. 안 그래도 누르 공께선 이미 수차례 다녀가셨었어요. 아마 깨어났다는 소식을 들으면 금방 오시려 할 거예요.”
“부탁하겠소.”
린디아스가 종종걸음으로 뛰쳐나가고 닫힌 문은 머지않아 다시 열렸다.
“생각보다는 빨리 일어났구려.”
들어온 이는 사십 대 중반의 남성이었다.
아무래도 의원인 듯 보였는데, 아까 나간 린디아스는 어디 갔는지 혼자였다.
“그럼 상태 좀 한 번 봅시다. 팔을 한 번 들어 보겠소?”
안톤은 의원의 요구에 따르면서도, 그의 안색을 샅샅이 관찰했다.
별 소득은 없었다.
‘의원들은 원래 이런가?’
처음 들어왔을 때와 비교해도 낯빛이 전혀 달라지지가 않아 도무지 표정을 읽을 수가 없던 것이다.
“여긴 어떠시오?”
“통증이 느껴집니다.”
“그럼 여긴?”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습니다만…… 제대로 한 게 맞습니까?”
차분하게 신체 곳곳을 침으로 찔러 보던 의원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듣기로 굉장한 검사라던데…… 한쪽 다리에 감각을 상실했다니, 이거 큰일이군.”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설마 고칠 수 없단 얘깁니까?”
“글쎄. 의원에게 확답은 금언과 다름없으니, 일단 상태를 지켜봐야겠지. 아무튼 이제 다 끝났소. 의식을 차린 지 얼마 안 되어 힘겨웠을 텐데, 고생 많았구려.”
“잠깐 기다려 보시오!”
안톤이 서둘러 자리를 일어나는 의원의 팔목을 붙잡았다.
다급한 마음에서 생긴 의지 때문이었을까.
그의 손은 아까처럼 미끄러지지 않았다.
“그 상태면 수저 들 힘도 없어야 할 것을, 이 무슨 힘이……!”
“제대로 설명해 주고 가시오.”
그러기 전엔 절대 보내지 않겠다는 의지가 음성에서 묻어난다.
의원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일단 당신도 예상했겠지만, 단전이 산산조각이 났소.”
“나는 원래 기공을 배우지 않았으니 그건 상관없습니다.”
“그럼 대체 뭐가 궁금한 것이오?”
“내가 다시 걸을 수 있는지.”
“일단 단전은 그렇다 친다 하여도, 세맥과 근육들의 손상이 너무 심하오. 특히 오른쪽 다리 같은 경우는 더 심각하지. 감각이 없다는 건 치유가 불가능하다는 뜻이오. 이미 말을 시작했으니 끝내는 건데, 이미 속에서 상처가 썩어 가고 있는 중이라오. 아마 높은 확률로 한쪽 다리는 아예 잘라 내야 할 거요. 살려면.”
“무슨 수가 없겠소?”
“글쎄. 전설 속에나 나오는 회생단이나, 북부 연금술의 비전인 엘릭서가 있다면 또 모르겠지.”
회생단은 안톤으로서는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의 물건이었으나, 반면 엘릭서는 다행히도 그가 아는 물건이었다.
죽은 이도 살려 낸다는 비약.
당연히 그 효능만큼 매우 비싼 값을 자랑하며, 돈이 있다고 구할 수 있는 물건도 아니었다.
“궁금증이 다 풀렸다면, 이만 나가 보리다.”
철컥.
열린 문 뒤에 기다리듯 서 있던 인물이 둘 있었다.
“큼큼!”
그 둘과 시선이 마주친 의원은 멋쩍은 얼굴로 그들 사이를 비켜 지나갔다.
“오랜만이구나.”
음성의 파생지로 고개를 돌린 안톤은 그만 말을 잃고 말았다.
그곳엔 예전 모습을 잃어버린 온-누르가 있었다.
윤기를 잃은 백발에 찌글찌글한 얼굴 주름.
항상 꼿꼿하던 허리는 구부정하게 굽어 있다.
지팡이의 도움을 받아 겨우겨우 걸음을 내딛는 그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병약한 노인의 모습이었다.
왠지 모르게 그 모습을 보기가 힘겨웠으나, 안톤은 시선을 옮기지 않았다.
외려 평소처럼, 그에게 인사했다.
“그렇군요. 오랜만입니다, 스승님.”
둘은 한참이나 서로를 바라봤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서로 입이 떨어지지 않는 듯했다.
하기야. 꼴이 말이 아닌 건 피차일반이리라.
“걱정하지 마라. 어떻게든 방법을 마련해 보마.”
진심은 확 와 닿았으나, 아쉽게도 그게 전부였다.
만약 그런 방법이 있었다면, 진즉에 그가 먼저 그 방법을 썼으리라.
허나 안톤은 그런 내색은 하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공녀, 혹시 제 짐들을 못 보셨소?”
“입고 있던 옷은 다 해져서 버렸고, 그 외에 갖고 있던 물건은 다 옆에 뒀어요. 왜요? 뭐 찾는 거라도 있어요?”
린디아스가 침대 옆에 내려 둔 배낭을 집어 들었다.
“뭘 찾는데요? 제가 찾아 줄게요.”
“푸른 색깔의 보석이오.”
“아! 그거요? 도대체 어디다 쓰는 물건인가요? 매일같이 진동이 울리던데.”
“멀리서도 연락을 할 수 있게 해 주는 아티팩트요.”
린디아스가 과장스럽게 감탄했다.
안톤의 기운을 북돋아 주려는 것이다.
“와! 그런 게 있다니 편하겠네요. 근데 일어나자마자 누구랑 연락을 하려고요?”
이미 시간이 3주나 지나갔다는 걸 의원에게 들은 직후였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카린이 엄청나게 신경을 쓰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뿐 아니라, 다른 속셈도 있었다.
그 목적이 아니었다면, 솔직히 이처럼 바로 그녀에게 최우선적으로 연락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1년 동안 알게 된 사람이 있소. 혹시 그 사람에겐 방법이 있을까 싶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