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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믿는 것은 검 63화

무료소설 내가 믿는 것은 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816회 작성일

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63화

063. 서막

 

 

안톤은 쟝-그리던을 벗어난 이후 서쪽으로 이어진 길을 따라 걸었다.

 

주변 풍경들과 지나는 사람들의 모습을 하나하나 눈에 새기면서 천천히.

 

‘낯설군.’

 

마차 안에 꼭꼭 틀어박혔던 여행이어서였을까.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감에도 모든 것이 생소했다.

 

‘그래도 길을 잃을 걱정은 없어서 다행이군.’

 

해린은 무역을 주업으로 살아가는 국가이기에, 도시와 도시 사이에 관로가 이어져 있었다.

 

몇 개의 도시를 지나 길을 따라 서쪽으로 걷다 보면 결국 국경선에 도착할 것이다.

 

‘굳이 급할 건 없겠지.’

 

처음 조르디가에서 쟝-그리던에 도착하기까지, 마차를 타고 근 한 달의 시간이 걸렸다.

 

안톤은 그 시간을 최소 10배는 단축할 자신이 있었다.

 

전력으로 서두르고자 하면, 적어도 3일 이내에는 조르디가에 도착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안톤은 그러지 않기로 결정했다.

 

어차피 그가 조르디가를 떠난 지도 벌써 1년이 넘게 지났다.

 

그러니 지금에 와서 며칠 더 늦게 간다고 별다른 일은 없을 터.

 

게다가 아예 천천히 걸어가겠다는 건 아니었다. 적당한 시기가 됐을 때, 목표를 향해 뛰기 시작할 생각이었다.

 

안톤은 주변 모습들을 감상하면서, 쉬지 않고 길을 걸었다.

 

그러다 문득 간간이 스쳐 지나치는 행인들이 조금 이상하단 사실을 깨달았다.

 

‘아, 이 투구 때문인가?’

 

그것을 제외하고는 처음 보는 사람이 괜히 저런 눈빛을 보낼 연유가 없다.

 

하기야, 인적 드문 대로에 전신 무장을 하고 얼굴까지 가린 남자가 홀로 길을 걷고 있다.

 

그들로서는 괜히 수상하고 불안한 마음이 드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리라.

 

‘뭐, 어쩔 수 없나.’

 

그렇다 해도 안톤은 투구를 벗을 마음은 없었다.

 

애초에 남의 시선에 그리 연연하지 않는 성격도 성격이거니와, 투구를 벗으나 쓰나 어차피 사람들의 눈에 띈다는 건 똑같은 까닭이다.

 

남부인들과 확연히 대조되는 이 하얀 피부는 이곳 지역에선 확실히 드물었으니까.

 

그게 아니더라도 애초에 조르디가에 도착해, 린디아스 쪽 일행과 만나기 전까진 모습을 감출 생각이었다.

 

밤이 되자 안톤은 적당한 자리에 불을 피우고 야영할 준비를 했다.

 

땅을 파고, 나뭇잎을 까는 등 군대에서 배운 생존법들은 아직 그의 머릿속에 똑똑히 기억났지만, 이젠 그럴 필요 없었다.

 

안톤의 몸은 이제 이 정도 추위쯤이야 맨몸으로도 충분히 견뎌 내는 것이다.

 

사실 불을 피운 것도 지나가는 누군가나, 짐승이 다가오지 않게 하려는 이유였지, 딱히 보온을 위해선 아니었다.

 

또 해린의 겨울은 그다지 춥지도 않았다. 심지어 안톤은 며칠쯤 잠을 자지 않아도 멀쩡했으니, 이렇게 홀로 노숙을 할 필요도 없었다.

 

그저 기분을 내는 것일 뿐이지.

 

급조해 만든 모닥불을 바라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중, 안톤은 상의에 넣어 둔 물건을 꺼내 들었다.

 

영롱한 빛을 내는 푸른색 보석이었다.

 

‘내가 이걸 갖게 될 줄이야.’

 

묘한 감회를 느끼며 안톤은 카린과 헤어지기 전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 * *

 

“그럼 난 이만 가 보겠소.”

 

금방이라도 뛰쳐나갈 사람처럼 안톤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카린도 황급히 따라 일어나 그를 붙잡고 나섰다.

 

“잠깐만요. 진짜 이대로 가려고요?”

 

“용건이 끝났으니 이제 가 봐야지 않겠소.”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냐는 듯한 눈초리랄까. 카린은 잠시 벙찐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당신…… 진짜 대책 없는 사람이네요. 이대로 떠나면 앞으로 연락은 어떻게 하려고요?”

 

“때가 되면 내가 찾아가겠소. 그때 당신은 유명해져 있을 테니 찾기도 쉽겠지.”

 

“듣긴 나쁘지 않지만, 근거 없는 믿음인 거 알죠? 그리고 혹 일이 잘못될 수도 있는데, 그때 연락할 방법이라도 있어야 할 거 아니에요. 그땐 뭐, 내가 당신을 직접 찾아야 돼요? 당신도 유명해져 있을 거니까?”

 

“그런 건 아니지만…….”

 

카린은 안톤이 그 전에 했던 말을 응용해 비꼬면서 말하자, 안톤은 내심 반성의 마음이 들었다.

 

너무 자신의 입장에서만 서서, 일방적으로 대화를 진행하고 또 멋대로 끝내 버린 것이다.

 

하지만 연락과 관련된 문제는 딱히 어떻게 할 방도가 없었다.

 

앞으로의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니까.

 

“일이 완전히 틀어져도 나는 괜찮소. 나는 개의치 말고 알아서 하시오. 그냥 언젠가 찾아갈 때만 모른 척하지 않으면 되오.”

 

안톤으로서는 나름 괜찮은 방법이라 생각했으나, 카린에겐 되도 않는 헛소리였나 보다.

 

“됐고! 이거나 받아요!”

 

카린은 거실 바닥의 자재를 그대로 뜯어냈다.

 

그리고 그 안에 숨겨져 있던 상자를 꺼낸 후, 쿵 소리를 내며 거칠게 식탁에 내려놓았다.

 

“……?”

 

“연락책이에요. 정말 비싼 거니까 함부로 망가트리면 안 돼요. 알았죠?”

 

이게 무엇이냐는 물음을 담아 바라보자, 짧은 설명과 함께 상자를 열었다.

 

그리고 모습을 드러낸 푸른색의 보석.

 

안톤은 상자를 열기도 전, 연락책이라는 말만 듣고도 그 물건이 뭔지 알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게 워낙 유명한 물건이었으니까.

 

 

* * *

 

위스퍼 스톤.

 

블루 머챈트 공방의 한 인챈터가 개발한 대량 양산이 가능한 아티팩트이자, 훗날 블루 머챈트를 대륙 최고의 상단으로 만들게 한 일등 공신.

 

아티팩트의 능력은 딱 하나다.

 

장거리 음성 전달이 가능하다는 것.

 

매우 간결한 능력이지만, 이것이 사사하는 바는 놀라웠다.

 

일반적으로 지면으로 정보를 담아 옮기던 시대에, 그것 하나면 그로 인한 시간 낭비를 없애 버릴 수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정보의 중요성이 극대화되는 상인들의 세계에서, 그 능력이 얼마나 반칙적인 것인지 두말할 필요는 굳이 없을 것이다.

 

실제로 이를 효율적으로 사용한 블루 머챈트는 세계 최고의 상단이 되었으니 말이다.

 

물론 이와 비슷한 능력을 똑같이 재현할 수 있는 방법이 그 이전에도 존재는 했다.

 

바로 고가의 마법 스크롤이나, 고위 마법사를 직접 이용해 양방향 통신을 하는 것이다.

 

허나 일국의 왕쯤 된다면 모를까.

 

현실적으로 웬만큼 급한 일이 아니면, 평상시에 그 방법을 사용하는 건 무리였다.

 

그래서 초창기에도 고위 귀족이나 왕족들이 그 가치를 미리 알아보지 못했다.

 

자신들이야 연락이 필요하면 가문의 마법사를 이용하면 되니까.

 

그들이 위스퍼 스톤이 지닌 진정한 가치를 알아챈 건 한참이나 지나고였다.

 

허나 그때가 되어서 제작 방법을 탐내 봤자, 이미 블루 머챈트는 일국을 능가하는 힘을 지닌 거대 상단으로 성장한 이후라 힘으로 빼앗는 것도 불가능했다.

 

블루 머챈트는 끝까지 위스퍼 스톤을 철저히 독점했다.

 

어떻게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모조품도 만들어지지 않았다.

 

전생에 안톤이 죽기 전까지, 위스퍼 스톤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건 오로지 블루 머챈트의 공방뿐이었다.

 

위스퍼 스톤을 가진 이들은 블루 머챈트의 지부장이나, 혹은 심사 기준을 통과해 자격이 있는지 검증된 인물들뿐이었다.

 

안톤이 카린에게 이걸 받고서 묘한 감상에 젖은 것도 그 이유다.

 

‘키르넨 대제. 오르메넨 여왕. 살롯타 성주…….’

 

더 열거하자면 꽤나 많은 인물이 나오겠지만, 그들의 공통점은 하나다.

 

바로 역사를 움직이는, 시대의 거인들이었다는 것.

 

그리고 그런 자들이나 가질 수 있었던 그 물건을 전생에 한낱 노예였던 자신이 받은 것이다.

 

사실 블루 머챈트로부터 위스퍼 스톤을 선물받는다는 것은, 상단주와 직통으로 연락을 나눌 수 있다는 것에 의의가 있긴 하지만 그게 어딘가.

 

‘어차피 차기 상단주는 카린이다.’

 

그러나 한 가지 의문점이 있었다.

 

‘분명 아직까진 그들 집단 내에서도 상용화되지 않은 시기일 텐데…… 어떻게 그녀가 이걸 갖고 있었지?’

 

그녀가 물론 상단주의 직계 혈손이긴 하지만, 가문에서 내쳐지듯 좌천된 자식 아닌가.

 

그리고 그러한 의문점을 직접 물어볼 기회가 왔다.

 

들고 있던 위스퍼 스톤이 옅은 빛을 내며 진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투구를 벗어 바닥에 내려놓은 안톤은 카린에게 언질받았던 주문을 외웠다.

 

“산을 덮는 파도.”

 

-아아. 잘 들려요?

 

푸른빛의 보석에서 음성이 흘러나왔다.

 

익숙한 카린의 목소리를 들으며 안톤은 물음을 던졌다.

 

“아직 헤어진 지 몇 시간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 연락이라니. 혹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것이오?”

 

-잘되나 시험은 해 봐야 되지 않겠어요? 그리고 물어볼 것도 있고요.

 

“물어볼 거라니?”

 

-뭐예요, 그 말투는? 투자금이 무려 70만 골드인데, 설마 내가 정말로 그 말들로만 납득하고 보내 준 줄 알았어요? 자세한 이야기를 하려면 앞으로 길어질 것 같은데. 딱히 곤란한 상황은 아니죠?

 

“괜찮소. 숲에서 야영을 하고 있는 중이오.”

 

-그래요? 다행이네요. 일단 그레일시아로 가서 곡식을 매입하라는 것에서부터 질문할 게 있는데…….

 

“잠깐. 나도 한 가지 물어볼 게 있소.”

 

-뭔데요?

 

“이걸 어디서 구했소?”

 

-그게 갑자기 왜 궁금한데요?

 

안톤은 어쩔 수 없이 적당히 말을 둘러댔다.

 

블루 머챈트 내에서도 외부에 노출되는 것을 꺼리는 물건을 어떻게 당신이 갖고 있냐.

 

이렇게 솔직히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냥 상당히 귀해 보여서 말이오. 이런 물건이 여러 개 있다면, 한자리에서 온 대륙의 소식을 전해 들을 수 있지 않겠소.”

 

-흐음. 혹시나 했는데 당신은 역시 그 가치를 알아보네요. 우리 가문의 공방에서 처음으로 개발한 아티팩트예요. 가문 내에서도 극비로 다루는 물품이지만, 저는 우연히 그 물건을 개발한 인챈터분과 친분이 있어서 예전에 하나 얻었어요.

 

충분히 납득이 가는 답변.

 

안톤은 상대방에게 보이는 것도 아닌데도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 사람을 내가 만나 볼 수는 없겠소?”

 

-으음……. 꽤나 곤란한 부탁을 하네요. 딱 잘라 말해서 지금은 불가능해요. 하지만 언젠가 그럴 기회가 된다면 그렇게 해 드릴게요. 아무튼 그래서 궁금증은 모두 풀린 거예요?

 

“그렇소.”

 

-알겠어요. 그럼 이제 저도 좀 물어볼게요. 연락하기 전에 미리 대충 정리를 해 봤는데 종이로 세 장이나 되더라고요. 각오해야 할 거예요.

 

“…….”

 

대화는 아침이 될 때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안톤은 그날 밤을 유독 길게 기억해야만 했다.

 

 

* * *

 

야밤에 산을 올라 본 사람은 모두 알겠지만, 산속에서 지새우는 밤은 유독 어둡다.

 

달이라도 환히 떴다면 모르겠으나, 오늘은 하늘까지 흐렸다.

 

그야말로 칠흑 같은 어둠이 산 전체를 휘감고 있었다.

 

그 속을 헤집고 미친 사람처럼 뛰어가는 이 남성에게는 불행한 일이었다.

 

“허억. 허억!”

 

숨을 헐떡이며 줄기차게 뜀박질을 내딛는 남자는 조르디가의 검사였다. 아니, 검사였었다.

 

그는 작년, 조르디가가 두 파벌로 양분될 때 아버지를 따라 에스닌파에 가담했다.

 

비록 지금은 에스닌파가 몰락 직전까지 내몰렸지만, 그 선택에는 후회가 없었다.

 

그는 자신이 조르디가를 위해 진정으로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여겼다.

 

사실 처음부터 각오는 했었다.

 

언젠가 그래야 될 날이 온다면, 대의를 위해서 자신을 아무렇지 않게 희생하겠다고.

 

허나 남자는 살기 위해 뛰었다.

 

그 옛날의 각오를 잊은 것은 아니었다. 그저 그는 아직 삶을 체념할 단계가 아니란 걸 알고 있었을 뿐이다.

 

‘집결지까지만 가면 살 수 있어.’

 

그 마지막 희망이 남자로 하여금 사력을 다해 달리게끔 만들었다.

 

그때 어둠을 가르고 화살이 날아왔다.

 

쉬이잉!

 

다행히도 그 화살은 피부 살갗만을 스치며 그의 몸을 지나쳐 나무에 깊게 박혔다.

 

한 치만 틀어졌다면, 아니 이 어둠이 아니었다면 정확히 몸에 적중했을 것이다.

 

그 사실에 오한이 들면서도 남자는 발을 멈추지 않았다.

 

이대로 멈추면 곧장 추격자의 손에 당하고 말 것이다.

 

‘얼마 남지 않았어!’

 

이제 고지가 얼마 남지 않았다.

 

그곳에만 당도한다면 수십이 넘는 동료들과 힘을 합쳐 적을 상대할 수 있으리라.

 

그러한 일념으로 남자는 목적지까지 남아 있는 최후의 둔덕 하나를 넘었다.

 

그러나 둔덕 너머는 사내가 기대하던 모습과는 달랐다.

 

시야에 잡힌 것은 처참한 광경에 남자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바닥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이게…… 이게 무슨!”

 

동료들은 약속한 대로 집결지에 모여 있었다.

 

다만, 살아생전의 모습이 아니었다.

 

같은 뜻을 나누던 동료들이 참혹한 모습으로 아무렇게나 차가운 지면에 나뒹굴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한 명의 복면 사내가 그의 앞에 나타났다.

 

“그러게 왜 그런 어리석은 선택을 했나.”

 

어리석은 선택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일까.

 

남자는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고개를 들었다.

 

“멍청하긴. 그렇게 순진하게 최단거리로 달려갔는데, 우리가 그 목적지를 짐작할 수도 있겠단 생각은 안 해 봤나? 진즉에 미리 지원 요청을 해 두었지. 이렇게 싹 쓸어 놨을 줄은 몰랐지만.”

 

“그럴 수가…….”

 

남자의 초점이 하염없이 떨리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살아 보겠다고, 자신이 저지른 어수룩한 행동 때문에 많은 동료들이 떼죽음을 당한 것이다.

 

밀려오는 죄책감에 남자는 더 이상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죽여라. 내게선 어떤 말도 들을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처연한 얼굴로 눈을 질끈 감았다.

 

심문 따위 해 봤자 어림도 없을 것이라는 듯한 결사적인 태도.

 

허나 이를 보는 복면 남자의 눈빛은 조소 어릴 뿐이었다.

 

“그래, 너는 그런 녀석이었지.”

 

듣자니 자신을 아는 듯한 말투에 남자는 눈을 떠서 다시금 복면 사내를 바라보았다.

 

“넌 누구지?”

 

“후후후…….”

 

남자는 문득 복면인의 웃음소리가 낯익다는 것을 깨달았다. 허나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분명 아까 본 복면인의 무공은 맹세코 처음 겪어보는 것이었으니까.

 

아무튼 이제 더는 정체를 감출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일까.

 

복면 사내는 웃으면서 자신의 얼굴을 가리던 천을 벗어 던졌다.

 

“넌!”

 

남자가 눈을 부릅떴다.

 

복면인은 안면만 튼 정도가 아니라 꽤나 친분까지 있던 녀석이었다.

 

허나 그것뿐이었다면 그가 이렇게 놀라워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한 가문 내에서 벌어진 파벌 싸움이다 보니, 친분 있던 자와 칼을 겨누는 것은 일상사가 되어 버린 지 오래였으니까.

 

다만, 그의 기억 속에 눈앞의 복면인은 이렇게 강력한 무공을 갖고 있지 않았다.

 

새로 배웠다 쳐도, 고작 1년 내에 이런 성취를 낼 재능의 소유자도 아니었고.

 

“크큭. 네가 내 앞에서 무릎을 꿇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난 항상 네가 마음에 안 들었어. 반역자 무리들의 편에 들어가 줘서 고맙다.”

 

“그게 무슨 말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이런 날이 오지도 않았을 테니까! 그들의 손을 잡은 덕분에 난 이렇게 강해질 수 있었다.”

 

그의 기억 속에 복면인은 자존감이 낮기는 했지만, 이처럼 악한 심성의 인간이 아니었다.

 

분명 무언가 암막이 있었으리라.

 

“정신 차려! 넌 이용당하고 있을 뿐이야!”

 

살기 위해서 막 던지는 말이 아니었다.

 

이런 참상을 불러들인 주제에 무슨 낯짝으로 삶을 구걸하겠는가.

 

남자는 복면인 또한 이번 전쟁의 희생양 중 하나라 생각했다.

 

그래서 진심으로 그에게 깨달음을 주고 싶었을 뿐이다.

 

허나 복면인은 한 번 어깨를 으쓱했을 뿐, 들은 시늉도 하지 않았다.

 

“그게 뭐 어때서? 어느 쪽에서나 이용당하는 건 매한가지다. 좀 더 이 순간을 즐기고 싶지만, 시간이 촉박해서 아쉽군. 그래도 마지막 정을 생각해 편하게 보내 주마.”

 

스릉!

 

서늘한 소리를 내며 복면인의 칼이 뽑혀 나온다.

 

‘이렇게 죽는군.’

 

사내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어서 이 순간이 끝나길 기다리던 때였다.

 

공중에서 포물선을 그리며 하나의 인영이 그들 사이로 떨어져 내렸다.

 

쾅!

 

남자는 때아닌 소음에 황급히 눈을 떴다.

 

그의 정면에는 전시에나 입을 법한 중무장 상태의 기사 하나가, 여유로운 모습으로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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