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믿는 것은 검 60화
무료소설 내가 믿는 것은 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51회 작성일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60화
060. 정리
황제에게 시집갈 예정이던 공주가 일주일 전 사라졌다.
한바탕 왕궁에서 난리가 벌어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제국의 기사들까지 포함하여 몇 날 며칠이고 총력을 동원하여 수색에 나섰음에도, 사건은 쉽게 수습되지 못했다.
대낮에 복도에서 시녀에게 목격된 것을 끝으로, 어떠한 단서도 찾아내지 못한 것이다.
당연히 제국의 추궁이 있었다.
그리고 핫산은 그 추궁에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공주의 신변을 지키고 있던 것은 왕국 측이었으니 명백히 핫산 측의 과실이었던 것이다.
그가 제국의 도움만 받고 대가를 치르지 않으려 한다고, 황제가 오해를 해도 어쩔 수 없었다.
심지어 오해도 아니었다.
핫산은 안톤에게 미리 들어 사건의 진상조차 알고 있지 않은가?
서둘러 제국과의 조율 자리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 협상에서 핫산은 최대한 저자세로 일관했다.
그로서는 아직 왕실에 어수선함이 가시기도 전에, 제국과 힘겨루기를 하는 것은 최대한 피해야 할 일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제국 측의 대변인인 클린턴과 핫산이 친분이 있었기에, 사태가 최악으로 번지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비록 거액의 보상을 펠샤인을 대신해 지불하게 됐지만, 협상은 잘 마무리 지어졌다.
그리고 그 협상을 끝마치고 즉시 안톤을 찾은 핫산은 바로 넋두리를 한참이나 쏟아 냈다.
“그 지불한 돈 역시 펠이 없었다면 얻지 못했을 터이니 아깝진 않네만……. 후! 다음부터는 이러지 말아 주게. 아니, 적어도 상의라도 해 주게. 나는 제오르 경이 그렇게 무서운지 오늘 처음 알았네.”
“죄송합니다.”
“아니……. 내가 사과를 받겠다는 게 아니라……. 에휴. 알았네. 더 해 봤자 나만 못난 놈이 될 것 같군. 근데 펠은 잘 지내고 있겠지?”
그녀가 왕궁을 떠나간 지 일주일이 넘게 지났다.
그날 바로 배를 타고 떠났다면 이미 해린의 영토를 벗어났을 것이다.
“그럴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럼 다행이지만…….”
펠샤인을 생각하며 잠시 말꼬리를 흐렸던 핫산이 화제를 돌렸다.
“아, 그리고 소우든과 조약을 맺기로 했던 것이 조금 미뤄질 것 같네. 그리고 계속 조율을 해 봐야 알겠지만, 아무래도 대대적인 군사적 지원보다는 소수 정예가 될 것 같더군. 미안하네.”
소우든.
해린과는 바로 국경선을 맞댄 이웃나라이며, 팔대세가와 한 명의 왕으로 이루어져 있는 독특한 체계의 국가.
조르디가 또한 소우든의 팔검주들 중 하나였다.
그렇기에 소우든의 왕실과 조약을 맺지 않으면, 핫산은 안톤을 군사적으로 도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안톤은 핫산의 말에도 전혀 실망치 않았다.
“괜찮습니다.”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군.”
“그보다 드릴 말이 있습니다.”
“뭔가?”
“그게…….”
안톤이 말을 멈추고 계속해서 이어 가길 주저하자, 핫산의 얼굴에 의문기가 잔뜩 어렸다.
이윽고 입에서 망설임을 지운 안톤이 말했다.
“이제 슬슬 조르디가로 돌아가 보려 합니다.”
부딪친 벽은 깨어질 조짐이 없다.
언제쯤 온-누르가 당부했던 그 경지에 도달할지 기약조차 없는 상황.
안톤은 이제 직접 몸으로 부딪치며 성장해야 할 때라고 판단했다.
그로서는 많은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었지만, 핫산에게는 뜬금없는 소리였을 것이다.
그가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게 무슨 말인가? 지금 당장은 내가 아무런 지원도 해 줄 수가 없는데?”
“……솔직히 말해서, 군사적인 지원은 안 해 주셔도 될 것 같습니다.”
“……그건 또 무슨 뜻인가? 지원이 필요가 없다니?”
안톤은 근래 들어 자주 하던 회의적인 생각들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았다.
해린의 군사를 빌려 봤자 조르디가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다고 말이다.
“…….”
핫산 또한 그 말에 어느 정도 수긍하는 눈치였다.
그도 그럴 게, 해린은 상업적으로나 뛰어나지 군사적으로는 변변치 못했으니 말이다.
애초에 해린의 국민들은 태생적으로 오러를 사용치 못한다는, 무인으로서는 치명적인 단점을 지니고 있었다.
물론 그를 대체하는 검혼이라는 기술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절정무사라 부르는 그 경지에 접어든 무사는 극히 소수였다.
그리고 그마저도 실질적으로 핫산이 동원 가능한 전력은 절정무사 서른이 한계일 것이고 말이다.
‘화경급, 아니 화경이라기에도 애매한 무인 서른이라…….’
분명 절정무사들은 해린 내에선 손꼽아 셀 정도의 강자다.
허나 그들의 위치는 대륙으로 나가는 순간 한없이 추락한다.
레몽드 백작만 보아도 알 만하지 않은가?
그는 왕국 최고 고수라는 삼대호장 중 하나였으나, 안톤이 느끼기에 그의 실력은 검은 늑대단의 일개 단원보다 조금 나은 정도였다.
해린의 대장군이라는 삼대호장의 나머지 한 명은 만나 보지 못했지만, 아마 그 또한 비슷한 실력일 거라고 예측할 수 있었다.
유일하게 스스로의 한계를 부수고, 자신만의 길을 걸어가는 레버르트 남작만이 예외였다.
그는 대륙으로 나가서도 충분히 강자 대접을 받을 만한 실력자였다.
허나 그렇다고 한들, 안타깝게도 그 한 사람만으로 전세가 뒤바뀌진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나 혼자가 나아.’
양보다는 질이라고, 천 명의 병사보다는 한 명의 고수가 낫다는 말이 있다.
전생에는 그리 공감치 못했던 말이나, 온-누르와 은발의 여인이 치렀던 전투를 직접 목격한 이후, 안톤은 그 말에 부쩍 동의하는 입장이었다.
그 비인간적인 규격 외의 전투에서는 주변의 모든 것들이 무의미했다.
나름 고수라 칭할 수 있는 화경급의 무사들마저, 그들 앞에선 주변에 흔히 널린 나무, 돌 따위와 하나도 다를 것 없도록 격하되었으니 말이다.
‘괜히 데리고 가 봤자 개죽음만 되겠지. 가장 최선인 것은 내가 그들과 같은 선에 설 수 있게 되는 것이겠지만…….’
안톤은 결심을 다잡았다.
항상 그랬듯 가장 중요한 것은 본인의 능력이었다.
그나저나 너무 직설적이게 말을 한 탓일까.
핫산은 시무룩한 얼굴이었다.
“그럼 내가 도울 게 없는 것인가……?”
“사실 지금까지만 해도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대체 내가 무슨 도움이 됐다고?”
핫산은 말뿐인 위로라며 믿지 않는 눈치였지만, 진심이었다.
우선 그 덕분에 조르디가에서 무사히 탈출을 했고, 이어 결과적으로 자신의 성장을 한껏 촉진시켜 준 펠샤인도 만나게 됐지 않은가?
그러나 핫산은 그런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대에게 참 많은 도움을 받았는데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없군.”
핫산은 문득 자신의 머리 위에 올려진 왕관이 무척이나 작고 하찮게만 여겨졌다.
“정말로 내가 도울 게 없겠는가? 자네가 말했지 않은가? 사람이면 은혜를 갚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일세. 부디 나를 짐승으로 만들지 말게.”
역설적이게도, 핫산은 도움을 주겠다고 간곡히 청해 왔다.
아무래도 뭔가 작은 부탁이라도 하나 해야지 그의 마음이 편해질 것 같았다.
“그럼 한 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꼭 떠나기 전에 내게 말해 주게. 어떻게든 자네를 돕고 싶네.”
핫산이 떠나간 이후, 안톤은 간만에 레버르트 남작과 친선 대련을 했다.
말이 친선 대련이지, 실상은 인정사정없이 서로 전력을 다하는 실전 대련이었다.
“후. 역시 자네는 이제 못 당하겠군.”
안톤의 검 끝이 목젖에 닿자 레버르트 남작은 미련 없이 항복을 외쳤다.
“모두 남작님 덕분입니다.”
“엥, 이게 무슨 내 덕인가? 외려 내가 자네 덕을 보고 있는 중이지. 보게나. 작위뿐이던 내가 이렇게 출세하지 않았는가?”
레버르트 남작이 상의 왼쪽 상단에 붙어 있는 하얀 늑대 수실을 가리켰다.
그 문장이 새롭게 만들어진 왕의 친위대, 그리고 그 집단의 수장임을 증명함을 안톤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럼 서로가 서로를 도왔다 치지요.”
“하하! 뭔가 자네가 더 손해인 것 같다마는…… 그러세.”
안톤이 기분 좋은 미소를 내지었다.
나이로 봤을 때 레버르트 남작은 안톤보다 한참이나 윗사람이었으나, 그는 그런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었다.
안톤은 그의 그런 소탈함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레버르트 남작 또한 마찬가지였고, 그 결과 둘 사이에는 꽤나 많은 친분이 생겼다.
그러다 보니 레버르트 남작 역시 안톤의 속사정을 어느 정도 알게 되었고, 이제는 굳이 목소리를 숨길 필요도 없게 됐다.
물로 목을 축인 레버르트 남작이 문득 물음을 던져 왔다.
“그래서, 떠난다고?”
아무래도 그 짧은 사이에 벌써 핫산에게 언질을 받은 모양이다.
안톤은 별다른 부정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됐습니다.”
“벽을 넘기 전에는 돌아가지 않겠다더니? 설마 신안 개방을 끝마친 겐가?”
“그건 아닙니다만…… 그저 심경의 변화가 있었습니다. 가만히 시간을 보내며 수련을 해 봤자 진척이 없을 것 같더군요. 그래서 일단 몸으로 부딪쳐 보려고 합니다.”
“그렇군. 잘 생각했네. 그럼 이번에도 한 번 몸으로 부딪쳐 보지 않겠는가?”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방금은 보여 주지 않았지만, 사실 근래에 개발한 비기가 하나 있네. 검혼과 오러, 그리고 자네의 의검을 조금 섞어 보았지. 내가 보기엔 아직 모자란 점이 많지만…… 한 번 봐 주겠는가?”
“좋습니다. 그럼 바로 하지요.”
둘은 다시금 서로를 마주 보며 섰다.
가만히 검을 든 레버르트 남작은 눈을 감았다.
집중력을 높이고 감각을 극대화하기 위함이었다.
안톤은 한층 호기심을 키우며 그를 지켜보았다.
‘세 개를 합쳤다니, 과연 어떤 검일까?’
레버르트 남작의 검에서 가장 먼저 푸른색의 오러가 피어났다.
그리고 그 위에 검혼이 덮어지면서 색은 변했다.
회색검이라는 별칭을 갖게 한 투박한 색의 기운.
여기까지는 안톤이 평소 보아 왔던 그의 검과 다름이 없었다.
그 이후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검날 부분에만 색이 변질되더니 이윽고 극점에 달한 것마냥 하얗게 변한 것이다.
손을 가져다 대는 것만으로 뼈까지 베일 것 같은 한기가 느껴졌다.
‘놀랍군.’
이제 레버르트 남작이 눈을 떴다.
그리고 그는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사실 왕자님께 자네를 붙잡아 보라는 요청을 받았네. 아무래도 자네가 걱정되는 모양이야.”
“그랬군요.”
“꼭 왕자님뿐만 아니더라도…… 나 역시 자네가 좀 성급한 것 같다고 생각하네. 하지만 결국 자네는 우리 말을 듣지 않겠지?”
“잘 알고 계시는군요.”
안톤이 농담조로 진심을 답하자, 레버르트 남작이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니 증명해 보게! 자네가 들고 있는 그 검으로 말일세!”
안톤은 레버르트 남작이 평소 달고 살던 입버릇 하나가 떠올랐다.
‘검사는 검으로 말하는 법……이랬나?’
사실 안톤은 그들에게 시험을 받을 이유가 없다.
앞으로의 행보를 제지당할 이유는 더더욱 없고 말이다.
허나 안톤은 기분이 좋아졌다.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해 주는 그들의 마음이 전해진 탓이다.
그것이 아니었다면, 레버르트 남작도 이렇게 제대로 완성도 되지 못한 비기를 오늘 꺼내 들 일도 없었을 터.
“알겠습니다.”
“크큭. 그렇게 말할 줄 알았네.”
안톤은 꺼내 놓은 검을 그를 향해 치켜세웠다.
‘그걸 한 번 써 볼까…….’
레버르트 남작이 이렇게 새로운 비기를 만들어 낸 만큼, 안톤도 새롭게 연구하던 기술이 하나 있었다.
예전에 펠샤인을 카르셍 부두로 데려다주던 중, 정신검의 원리를 활용하면 신체의 중량 조절이 가능하단 것을 깨닫고, 이를 검술에 접목해 본 것이다.
그 결과는 놀라웠다.
타격점에 도달하는 순간 바위처럼 무거워진 검은 그것만으로도 위력이 몇 배나 증가한 것이다.
비록 완벽하게 숙달시키진 못했으나, 위력만큼은 안톤이 지닌 그 어떤 기술 중에서도 가장 빼어날 정도.
안톤은 검자루를 꽉 쥐었다.
앞에선 레버르트 남작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준비됐으면 오게!”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안톤의 몸이 레버르트 남작을 향해 빠른 속도로 쏘아졌다.
그리고.
콰와아아아앙-!
해린 왕성은 의문의 굉음에 뜻밖의 소란이 벌어져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