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믿는 것은 검 5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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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99회 작성일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53화
053. 심문
카린은 거실에서 벌어진 참극에 한참이나 아연실색하며 어쩔 줄 몰라했다.
그대로 졸도하지 않은 것이 다행일 정도로, 그녀는 이런 피비린내 나는 일에 익숙하지 않아 보였다.
안톤은 뱀을 집어넣은 것이 이자라는 것은 알려 주지 않았다.
지금 그 사실을 알려 봐야 불안감만 더 가중시킬 뿐이란 판단이이다.
진즉에 상황은 종료되었으나, 카린은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고 꽤나 오랜 시간을 뒤척겨렸다.
결국 안톤을 향해 몇 차례나 거기 있냐는 물음을 던지던 카린은 새벽 언저리에나 겨우 짧게 눈을 붙였다.
밧줄로 묶어 제압한 사내의 옆에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안톤은 날이 밝자마자, 카린과 함께 왕궁으로 향했다.
사내를 담아 둔 수레를 가지고 궁전 내부로 들어갈 순 없기에, 안톤 혼자 입궁하여 서둘러 핫산과 클린턴을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예상했던 대로, 사내에겐 심문을 받을 바에야 자결을 택하겠다는 결단 따위는 아예 없었다.
그저 상처 부위를 지그시 꾹 눌러 주는 것만으로 묻지도 않은 질문에까지 구구절절 늘어놓았다.
정보를 캐내는 것에는 문제가 없었다.
다만 명색이 검은 늑대단의 단장이라기에 그 실체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겠다던 짐작은 빗나갔다.
그 또한 실상은 말단과 다름없는 위치였다.
하지만 그가 내놓은 몇 가지 정보들만으로도 경악의 연속이었다. 모든 심문이 끝난 후 일동은 모두 굳은 얼굴이었다.
“이자는 어떻게 할까요?”
혹시 사용 가치가 남았나 싶어서 한 질문이었고, 더 없다면 죽이겠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죽이게.”
주저 없이 내뱉는 핫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안톤의 검이 그대로 사내의 목을 꿰뚫고 지나갔다.
이런 일에 익숙한 클린턴과 안톤은 별다른 내색이 없었으나, 카린이나 핫산은 달랐다.
카린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어떻게든 버텨 내는 기색이 역력했고, 핫산은 착잡한 눈으로 입술을 질겅 씹었다.
“혹시 제가 이자의 심장을 가져가도 되겠습니까? 중요한 증거가 될 것 같습니다.”
“……그러도록 하게.”
핫산의 승낙을 받은 클린턴은 사무적인 태도로 주검이 된 남자의 시체를 칼로 도려냈다.
“으윽.”
그 끔직한 광경에 카린이 고개를 돌렸다.
단도로 피부를 과감하게 그어 심장을 꺼낸 클린턴은 그것이 잘 보이게 손으로 들었다.
울긋불긋한 가시 종기가 나 있는 사내의 심장은 잔뜩 변형되어 본형태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그의 말이 정말이었군요. 진혈종의 심장은 본 적이 없어서 비교가 안 되지만, 일단 일반적인 인간의 심장은 아닙니다.”
그는 품에서 꺼낸 손수건으로 조심스레 심장을 감쌌다.
“저는 그럼 먼저 돌아가 본국으로 향할 채비를 하고 있겠습니다.”
“제국까지 가는 동안에 다 썩을 텐데, 괜찮겠나?”
“그 문제라면 평소 음식을 넣고 다니던 주머니에 넣어서 옮기면 될 것 같습니다.”
“아, 그게 아티팩트였나? 어쩐지…….”
그렇게 클린턴이 먼저 자리를 떠나고, 자리에는 셋이 남았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평범한 인간을 한순간에 그런 괴물로 탈바꿈시킬 수 있다는 것이 난 아직도 잘 믿겨지지가 않네.”
심문 중에 가장 놀랍던 사실은, 블라디미르가 가진 괴이한 능력이었다.
살면서 무공이라곤 한 번도 접해 본 적 없던 평범한 인물마저 단숨에 오러 유저로 만드는 규격 외의 능력.
한밤중의 습격자이자, 이제는 주검이 된 가든이라는 이 남자는 그것을 피의 계약이라 칭했다.
여러모로 말이 되지 않는 능력이었으나, 안톤으로서는 설득력 있게 들렸다.
지난밤, 가든이라는 남자와 대적하며 느꼈던 위화감의 앞뒤가 딱 들어맞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물질적인 증거까지 있었다.
바로 클린턴이 떼다 간 그 심장.
“정말로 진혈종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워낙 고대의 존재라 정보에 신빙성이 없지만……. 그들의 고유 능력의 특별함은 워낙 유명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왜 그들은 진즉에 대륙을 정복하지 않았을까?”
“목적이 다르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럴 수도 있지만, 내 생각엔 그 능력에는 제한이 상당히 많은 듯해 보였네. 계약이라는 말마따나, 가든이라는 남자에게도 의사를 먼저 물었다고 하지 않았던가? 아마 우리가 모르는 약점이 더 있을 것이네.”
확실히 일리가 있었다.
“맞는 것 같습니다.”
“그나저나 암만 힘이 간절했다고 해도 인간이길 포기하다니…….”
핫산은 그런 그들이 이해가 가지 않는 듯했지만, 안톤은 그들이 어떤 심정으로 그런 결정을 내렸을지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꼭 그가 힘을 숭상하는 무인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저 약육강식의 법칙 속에서 도태된 약자는 죄인과 다름없음을 알고 있을 뿐이다.
만약 핫산이 제국으로 향하던 중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면, 그 마지막 순간에 과연 힘에 대한 열망이 그들보다 적었을까?
안톤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가끔 인간은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이뤄 내고 싶은 것이 있기 마련입니다.”
“…….”
안톤의 말을 통해 무언가 느낀 것이 있었는지, 핫산은 한동안 말을 아끼며 상념에 잠겼다.
그리고 이내 생각이 끝나자 조금 멋쩍었는지 분위기를 전환할 겸 헛기침을 두어 번 내뱉고는 카린에게로 시선을 보냈다.
“아무튼 위험한 일에 휘말리게 한 것 같아 미안하네.”
“기회엔 위기가 함께하는 법이죠. 왕위 계승뿐만 아니라, 이런 배후가 도사리고 있는 줄은 몰랐지만……. 아무튼 왕자님께서 붙여 주신 여기 이 안톤이 절 지켜 줬으니까요.”
“잠깐만, 안톤이라고?”
핫산이 은근한 눈빛으로 둘을 흘겼다.
“전음이 아니라 입으로 말을 할 때부터 이상하다 했네만, 이름까지 알려 줬을 줄이야……. 도대체 언제 그렇게 친해진 건가? 설마 한집에서 며칠 같이 있더니…….”
안톤은 재빨리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런 거 아닙니다.”
의미심장한 시선을 보내며 음흉한 미소를 짓는 핫산을 보며 카린이 안톤을 돕기 위해 나섰다.
“제가 먼저 이름을 물어봤어요.”
하지만 그 말은 핫산의 의심을 더욱 부추길 뿐이었다.
“그랬더니 그냥 말해 줬다고? 도대체 무슨 마법을 부린 겐가?”
부득이하게 알몸을 보였던 이야기를 하긴 남세스러운지 카린이 말을 돌렸다.
“그게 마법이라고 칭할 정도로 놀라운 이야긴가요?”
“물론! 우리 해린의 최고 미인이라는 내 동생이 그렇게 관심을 보였는데도 정체를 알려 주지 않던 게 바로 안톤일세!”
비록 그 관심이 과해서, 결국 그녀 스스로 뒷조사를 통해 안톤의 정체를 알아냈지만 말이다.
어쩌면 그것은 관심이라기보단 집착이라 표현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싶었다.
“흐음……. 그래요?”
대답을 들은 카린은 핫산 이상으로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안톤을 슬쩍 쳐다봤다.
그리고 그때, 왕궁을 중심으로 고아한 종소리가 도시 전체로 울려 퍼졌다.
“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군. 이제 나도 왕궁으로 돌아가 봐야겠네. 아무튼 카린, 출항 전까지 안톤을 잘 부탁하겠네.”
“걱정 마세요.”
“그 말은 제게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하하! 그게 그 말 아니겠나. 아! 그리고 이걸 주는 걸 깜빡했군.”
핫산이 꺼내서 준 것은 작은 편지였다.
“나중에 시간이 날 때 읽어 보게나. 그럼 가 보겠네.”
핫산이 떠난 뒤.
안톤은 우선 검은 늑대 단장의 시신을 상자째로 바다에 던져 버렸다.
그러고 나서 카린의 집으로 돌아와 남아 있는 혈흔들을 모두 치운 이후에야, 안톤은 핫산이 전해 준 편지를 꺼내 들었다.
-자네가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던 조르디가의 현재 정황들이네. 자네가 읽기 쉽도록 글로 정리해서 보내네.
안톤은 핫산의 섬세함에 새삼 감탄하며, 천천히 글자들을 읽어 내렸다.
편지의 본격적인 내용은 조르디가에서 내전이 발발했다는 첫 문장으로 시작했다.
‘내전이라고?’
초장부터 흥미롭기 그지없는 사안.
안톤은 그 뒤에 적힌 자세한 경위를 빠르게 읽어 내리며 궁금증을 해소했다.
내전의 전조는 사실 가주 암살의 진정한 암막이 헤스갈이라는 의혹이 제기되면서였네. 자네도 권력자들의 행태를 알다시피 평소라면 그저 악질적인 헛소문으로 치부됐겠지만…… 이는 그럴 수가 없었네. 왜냐면 그 말이 처음 나온 곳이 전대 가주이자 검객들의 우상인 가우스트 조르디의 입에서였기 때문이네.
안 그래도 가문 내에서 이상한 소문이 돌던 차에, 그에 불을 지핀 격이었지. 아무튼 은거하던 그가 공식적으로 나선 이상, 원로원이 이를 뒤따르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네. 그들은 그런 의혹이 있는 헤스갈을 가주 자리에 그대로 놔둘 수 없다며, 에스닌 공녀를 차기 가주로 내세웠네.
하지만 확실한 물증이 있다면 모를까. 모두가 그런 의혹을 믿는 것은 아니었네. 그 결과, 조르디가는 두 개의 파벌로 나뉘었네. 그리고 그 두 파벌의 목적이 너무나 뚜렷했기에 필연적으로 직접적인 분쟁이 시작될 수밖에 없었지. 그렇게 조르디가에는 지금 유례없는 혼란의 도가니가 펼쳐진 상태네.
초기에는 그 두 파벌의 힘이 엇비슷하여서, 쉽게 내전이 종식될 기미가 없었다고 하네. 하지만 이름 없던 젊은 신예들이 연이어 출현해 헤스갈 측에 가세하며 상황은 반전됐네. 이제 에스닌의 파벌은 약세를 거듭하다 못해 거의 해산 직전까지 몰려, 지금은 가문령 내에 만든 근거지에서 숨어 지내고 있는 실정일세.
안톤은 그 이름 없는 젊은 신예가 블라디미르의 인간들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은 핫산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혹시 자네도 갑자기 등장한 젊은 신예라는 단어에서 이상한 점을 느끼진 않았나? 아마 그랬다면 그 석연찮은 점은 그대가 예상한 그대로일 것이네.
내전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끝난 후, 핫산은 안톤이 정말로 궁금해했을 부분들을 적었다.
온-누르 공은 아직도 종적이 묘연하고, 린디아스 공녀는 다른 팔대세가 중 하나와 강제적으로 혼사가 진행되던 중 행방불명 상태가 되었네. 이에 대해서는 알게 되는 대로 그대에게 알려 주겠네.
안톤은 잠시 눈을 감고 감각들을 깨웠다.
이렇게 집중을 해야 감지할 수 있을 만큼 미세했으나, 아직 온-누르와의 마법적인 유대는 끊기지 않고 지속되어 있었다.
그 말인즉, 아직까지 그가 살아 있다는 뜻이었다.
안톤은 왠지 모르게, 급작스레 사라진 린디아스가 스승님과 함께 에스닌의 편에서 신변을 위탁하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혹시 자네에게 도움이 될까 싶어 조르디가를 조사하며 알게 된 것들을 뒷장에 적어 두었으니 마저 확인해 보게나.
안톤은 나머지 장을 펼쳐 보았다.
두 번째 장에는 주로 집단 혹은 특정 인물들에 대한 정보들이 담겨 있었다.
그 항목들을 쓱 훑어보던 안톤은 어느 부분에서 시선이 고정됐다.
가주 암살 사건으로 공석 자리가 된 백무대주 직위를 새롭게 차지한 인물의 설명 부분에서였다.
널리 알려진 정보가 없었는지, 다른 인물들에 비해 적혀 있는 내용이 부족했다. 기껏해야 외견에 대한 정보뿐이랄까.
허나 안톤을 주목하게 한 것은 바로 그 외견에 대한 정보였다.
‘은발의 여인이라……. 다른 자는 생각할 수도 없군. 분명 그때 보았던 그 여자가 틀림없어.’
무사히 탈출을 끝내기 일보 직전에 나타나, 대적할 자가 없으리라 여겼던 온-누르를 정면 대결로 사경까지 몰아붙인 그 괴물.
안톤은 그 여자가 보여 줬던 비현실적인 신체 능력을 떠올렸다.
‘지금 내가 그 여자와 싸운다면 이길 수 있을까?’
최근 안톤은 자신의 실력에 자신감이 붙었다.
레버르트 남작과도 다시 붙는다면 승리를 점쳐 볼 수 있을 정도로, 근래 들어 수련에 있어 많은 성취가 있던 덕이다.
하지만.
‘그래도 안 돼.’
안톤은 팔찌 속에서 그 싸움을 톡톡히 지켜보았다.
지금도 떠올리려고만 하면 그 과정 한순간 한순간이 세세하게 떠오른다.
안톤은 머릿속에서 그 전투에서 온-누르를 대신하는 상상을 수차례 해 보았다.
그리고 이는 항상 마지막에 비관적인 결과를 내보였다.
안톤은 온-누르와 헤어질 당시, 그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마지막 경지를 밟기 전엔 돌아오지 말라고 했었지. 그 말은 그때가 되면 그 여자를 이길 수 있다는 뜻일까?’
파-의-안으로 이루어진 정신검의 마지막 단계.
신안 개방.
사물이 아닌 신체에 의를 불어 넣어 활용하는 경지.
그동안 부단히 노력하고 고뇌하며 그 경지에 오르고자 했지만, 그 경지에 오르는 것은 참으로 고단한 일이었다.
그러나 많은 노력 끝에 이제 최후의 관문만이 남았다.
허나 그 마지막 벽이 너무나 두터워 쉬이 부서질 기미가 없다는 것이 문제다.
‘보는 경지라니…….’
애초에 스승 역할을 도맡은 온-누르 또한 무학의 이론만 알고 있을 뿐, 실제로 익힌 것은 아니기에 설명 자체가 너무 애매모호했다.
‘스승님이 말했던 그 남자를 찾아보기라도 해야 하나……?’
과거 온-누르를 패배시키고, 안톤이 익히고 있는 무학의 이론을 전수한 그 의문의 남자.
그라면 속 시원하게 안톤에게 가르침을 내려 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넓은 대륙에서 그를 찾아내기엔 신상 명세에 대한 정보가 미미했다.
게다가 핫산과의 문제로 이곳을 벗어나기도 어려운 실정이었고 말이다.
‘혼자서 해낼 수밖에 없어.’
여지껏 그래 왔듯, 먼저 자신을 믿어야 했다.
그러지 않고선 그 무엇도 벌어지지 않는다는 걸, 안톤은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