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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믿는 것은 검 47화

무료소설 내가 믿는 것은 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925회 작성일

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47화

047. 장례

 

 

국왕의 서거를 알린 무사의 말에, 핫산은 넋을 잃은 사람처럼 멍하니 있었다.

 

‘이렇게 갑작스러운 승하 소식이라니……. 분명 형님이 무언가 수를 썼을 것이다. 도대체 무슨 수를 쓴 거지? 아버님의 호위는 문제가 없었는데! 아니지, 아니야……. 그건 중요치 않아.’

 

자식으로서 부모의 죽음에 슬퍼할 새도 없었다. 그는 이미 벌어진 사태에 어떻게 반응하고 움직여야 할지 하나하나 계산해야 했다.

 

‘클린턴이 있어서 조심하는 줄로만 알았는데, 사실 그게 아니라 준비를 하고 있던 거였어. 그 어느 때보다 과감하고 치명적인 한 수를 던질 준비를! 이런 멍청아, 넌 그동안 뭘 하고 있던 것이냐!’

 

자신의 안일함을 탓하던 핫산이 이윽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하지만 일은 이미 벌어졌다. 그리고 승하 소식이 알려지기 전에도, 나는 적왕전에 참가할 결정을 내리지 않았던가? 하나도 달라진 건 없다.’

 

“…….”

 

핫산은 조용히 주변을 한 번 쓱 돌아보았다.

 

다들 숨죽인 채 핫산이 마음을 추스르고 입을 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을 끌어 미안하군. 서둘러 대왕전으로 갑시다. 그리고 이보게…….”

 

“젤트입니다.”

 

“그래, 젤트 경. 혹시 대왕전 앞에 내 형님이나 법관장이 있던가?”

 

“두 분 다 계셨습니다.”

 

“알려 주어서 고맙네. 자, 어서 가세.”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이처럼, 앞장서서 힘 있게 내뻗는 그의 발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하지만 안톤은 그가 지나가고 남은 자리에, 어째선지 그가 두고 간 무언가가 남아 있는 것만 같아서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 * *

 

왕이 기거하는 곳인 대왕전.

 

그 앞에 위치한 공터는 어두운 밤임에도 환하게 밝혀져 있다.

 

안톤 일행이 그곳에 도착했을 때는 조금 늦었는지, 왕의 승하 소식을 듣고 찾아온 귀족들로 북적거렸다.

 

불빛 아래서 주저 없이 맨바닥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는 수많은 귀족들.

 

안톤은 이렇게 많은 사람이 한데 모였는데도 그저 간간이 비통한 신음이 흘러나올 뿐, 잡다한 웅성임조차 없이 엄중한 분위기를 풍기는 장내를 보고 조금 압도되는 기분이었다.

 

‘이게 해린의 장례 문화인가…….’

 

핫산은 이미 도착해 가장 문에 가까운 위치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페올에게 잠시 눈인사를 한 뒤, 그 옆에 조금 떨어진 곳에 가 바닥에 엎드렸다.

 

“…….”

 

뒤에 수백의 귀족들이 늘어져 있는 페올과는 다르게 그의 주변은 아직 휑했다.

 

그렇게 대비되는 초라한 모양새가 나온 이유는 꼭 그가 대왕전에 늦게 도착해서만은 아니다.

 

그것을 증명하듯, 계속해서 물밀듯이 들어오는 귀족들은 저마다 잠시 눈치를 살피다가 이미 포화상태에 가까운 페올의 줄로 가고 있지 않은가.

 

계속해서 입장하는 귀족들 틈으로 익숙한 얼굴들도 많이 보였다. 모두 다 연회에서 핫산과 함께 웃고 떠들고 하였던 귀족들이었다.

 

‘모두 다 저리로 가는군.’

 

그 사실이 마치 지난 두 달간 그의 노력들이 모두 다 무의미했다고 말하는 듯하여 조금 처량한 기분이었다.

 

사실 그들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왕이 죽은 이상, 그들로서는 차기 왕이 확실한 페올에게 조금이라도 더 잘 보이고 싶은, 아니 적어도 밉보이지 않으려는 어쩔 수 없는 행동인 것이다.

 

잠깐 자리에 서서 주변을 둘러보던 안톤은 핫산의 뒤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뒤에서 무릎을 꿇은 첫 번째 인물이 되었다.

 

털썩.

 

핫산은 잠시 안톤을 흘깃 쳐다본 후 다시 눈을 감았다. 고맙다는 의미가 담긴 짧은 시선이었다.

 

비록 쓴 철투구 때문이 아니라도 눈을 감은 그에게는 보이지 않았겠지만, 안톤은 그에 화답이라도 하듯 작게 미소 지었다.

 

그렇게 침묵 속에서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났을까.

 

츠윈카 공작과 함께 레버르트 남작이 대왕전에 도착했다.

 

츠윈카 공작은 고민 없이 페올 쪽으로 가서 자리를 잡았지만, 레버르트 남작의 경우는 달랐다.

 

그는 안톤의 옆자리로 다가와 주저 없이 무릎을 꿇었다.

 

자리를 잡은 그는 잠시 안톤에게 무언의 인사를 보낸 후, 전음입밀의 수법으로 의사를 표했다.

 

-저쪽은 너무 좁아 보여서 말이네.

 

-고맙소.

 

-자네가 고마울 게 뭐 있나? 그저 왕의 서거를 추모하는 것마저 정치와 연관 짓는 귀족들이 한심할 뿐이네. 정말로 기리는 마음이 있다면 공간도 넓고 문에도 가까운 이곳에 냉큼 자리를 잡아야지. 쯧쯧. 아무튼 딱히 2왕자를 지지한다거나 하는 건 아니니, 이상한 기대는 하지 말게나.

 

레버르트 남작의 말이 빈말이 아님을 알지만, 그래도 고마운 것은 고마운 것이었다.

 

남들의 눈에는 삼대호장 중에 일인인 그가 핫산 왕자를 지지하는 것으로 보일 테니 말이다.

 

아무튼 안톤은 레버르트 남작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귀족들이 조금 더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바로 정치적인 의도 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국왕을 추모하기 위해 이곳을 찾은 이들 말이다.

 

그리고 그 예상이 들어맞은 건지, 아님 레버르트 남작이 첫발을 떼 주어서 그런지.

 

비어 있던 핫산의 뒤에도 인파가 서서히 들어서기 시작했다.

 

왕이 죽은 이래로 상당한 시간이 지났고, 그동안에 계속해서 쉴 새 없이 새로운 귀족들이 추모를 위해 이곳을 찾았다.

 

허나 대왕전 앞에 있는 인원의 수는 하루가 지난 지금도 거의 엇비슷했다.

 

세 시간 전 자신의 방으로 돌아간 클린턴처럼 자리를 떠나는 이들의 숫자가 들어오는 이들과 얼마 차이가 나지 않은 탓이다.

 

-원래는 3일간은 음식도 물도 손을 대지 않고 자리를 지키는 것이 전통이었네만…… 지금은 많이 바뀌었네. 하루에 한 번, 서너 시간 정도면 다들 최선의 예의를 지켰다고 생각하지. 그런 점에서 제국의 기사면서도 쉬지 않고 하루 반나절을 넘게 자리를 지킨 그 클린턴이란 기사도 참 의리가 있구만.

 

자주는 아니었지만, 장례를 치르는 동안 가끔 안톤이 의문이 생겼을 때 그 둘은 전음을 통해 대화를 주고받았다.

 

잡담을 나누는 것이 남들 눈에는 불경으로 비치겠지만, 실제로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지 않은가. 레버르트 남작도 굳이 이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는 듯싶었고.

 

-아, 저기 1왕자가 식사를 하러 가는군. 가신들의 원성에 못 이기는 척 따라가고 있지만, 다 연출이네. 사실 한계였을 거야. 밥도 먹고 볼일도 보고 한숨 자다가 오겠지.

 

레버르트 남작에게서 페올에 대한 묘한 적개심이 엿보였다.

 

반면 핫산 왕자에게는 묘한 친밀감을 느끼는 듯했고.

 

-그나저나 핫산 왕자님께선 아무래도 전통을 그대로 지키려는 모양이군. 꽤나 힘든 싸움이겠어. 저분은 우리와는 다르게 무인도 아니잖은가?

 

안톤은 핫산 또한 검술을 배우기는 했다고 말하려 했지만, 핫산의 얕은 수준이 생각나 그만두었다.

 

핫산은 그저 몸이 건강한 일반인,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으니까.

 

-자네는 어쩔 건가? 핫산 왕자를 따라서 남은 이틀 동안 계속 여기 있을 겐가?

 

해린의 장례는 죽음 이후 3일간 우선 추모를 한 뒤에 본격적으로 치러진다. 그 이후부터는 여타 대륙의 장례와 딱히 다르지는 않다고 했다.

 

‘동대륙과 서대륙의 문화가 어느 정도는 섞였나 보군.’

 

그냥 앉아서 슬퍼하는 것도 아니고,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는 자세로 그만큼의 시간을 견딘다는 건 그 누구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다.

 

심지어 음식은커녕 물에도 손을 대지 않는다면 그 난이도는 곱절로 증가할 터.

 

안톤은 걱정 어린 눈으로 핫산의 등을 바라보았다. 이제 겨우 하루가 지났을 뿐이고, 이틀이란 시간이 더 남았다.

 

그와 함께 이루어야 할 목적이 있는 이상, 그의 건강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호위 무사이니 어쩔 수 없지요. 같이 자리를 지킬 수밖에.

 

안톤은 그저 그가 정말 한계에 도달했을 때, 남은 오기를 부리지 말고 물러나 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런 안톤에게 의미심장한 시선을 보내는 이가 있었다.

 

-돈을 좇는 용병이란 소문이 왜 났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의도한 건가?

 

-…….

 

-음……. 그렇군. 더 묻진 않겠네. 왜 그래야 했는지는 짐작이 가니까.

 

 

* * *

 

길고도 길었던 3일째 날이 밝았다.

 

초췌한 몰골로도 핫산은 아직까지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많은 시선과 관심의 말이 그에게 향했다.

 

의식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었다.

 

가장 앞에 선 곳에서 구부리고 있는 작은 등에서, 항거할 수 없는 어떤 의지가 풍겨 나오는 듯했으니까.

 

“놀랍다고밖에 할 수 없군…….”

 

“하긴 헤이젤 왕자님은 선왕 전하를 유독 따르긴 했었어.”

 

“그런데 지금, 카르티온 왕자님은 어디 계신 거지?”

 

옛 시대의 전통이 희미해진 지금, 딱히 1왕자 페올의 부재가 흠이 되는 것은 아닐 터다.

 

하지만 그 아우인 핫산이 떡하니 고집을 부리며 전통을 지키고 있는 중에 그의 부재는 꽤나 크게 다가왔다.

 

물론 모두가 핫산 왕자가 명예로운 행동을 하고 있다며 경외의 시선을 던지는 것은 아니었다.

 

정치적인 연출이라며, 그렇게 비꼬는 귀족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숫자는 결코 많지 않았다.

 

해린의 귀족들은 대부분 고지식한 면이 있었고, 옛 전통을 따르는 핫산 왕자를 대견하게 생각했다.

 

그 덕일까.

 

핫산을 본받아 잠도 자지 않고 자리를 지키는 귀족들이 늘어났다.

 

젊은 귀족들의 수가 많았다. 그리고 그들은 대부분이 핫산의 뒤에 섰다.

 

아침이 끝나고 해가 중천에 뜰 때쯤, 1왕자가 도착했다.

 

그는 핫산과는 대비되게 아주 멀끔하고 화려한 차림새였다.

 

분명 오후부터 행해질 성대한 장례식을 의식해서 갖춰 입은 옷일 것이었다.

 

몇몇 늙은 귀족들이 그런 그에게 눈총 어린 시선을 보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왕실의 행사를 주관하는 법관장이 나이 어린 수도사들을 이끌며 등장했다.

 

“모두들 일어나십시오.”

 

순백색의 의복을 걸친 법관장은 경건한 태도로 고개를 숙였다.

 

“선왕께서 마지막으로 가시는 길을 함께 배웅하도록 합시다.”

 

법관장은 왕의 직계 후손인 페올과 핫산, 펠샤인을 따로 앞으로 불러내 문 앞에 세웠다. 드디어 3일 내내 굳게 닫혀 열린 적 없던 대왕전의 문이 서서히 열렸다.

 

검은색 깃발을 높게 든 수도승 하나를 선두로, 금실로 화려하게 치장된 가마에 국왕의 사체가 실려 나왔다.

 

지난 3일 동안 어떠한 수를 부린 건지, 늘 잔병치레가 많던 국왕은 생전 어느 때보다 건강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건장한 체격의 수도승 여덟이 짊어진 마차는 일정한 보폭으로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길을 터준 군중들은 모두 이를 향해 크게 절을 올렸다.

 

핫산과 페올, 펠샤인은 세 걸음 정도 물러나 그 마차 뒤를 쫓았다.

 

고된 고생을 하고 난 후인지라 핫산의 걸음걸이는 불안정하기 짝이 없었다.

 

안톤은 무의식적으로 비틀거리는 핫산의 체중을 대신 받아 냈다.

 

그가 잡아채지 않았으면 그대로 넘어졌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안톤은 황급히 그에게 전음을 보냈다.

 

-괜찮습니까?

 

“버틸 수…… 있네.”

 

3일간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그는 한 마디의 말조차 힘겹게 보였다.

 

이미 그는 서 있는 것조차가 한계였다.

 

-도와 드리겠습니다.

 

“부탁하네…….”

 

왕의 장례 행렬은 수도 쟝-그리던을 크게 한 바퀴 돌아서 다시 궁전으로 향했고, 핫산은 안톤의 부축을 받으면서까지 그 과정을 함께했다.

 

그리고 궁전 내부 대강당.

 

온 귀족들이 다 모인 이곳에서 법관장이 단상에 올랐다.

 

“이제 우리가 새로운 지도자를 영접할 차례입니다. 현재 해린 왕실의 율법에 따라 그 지도자의 자질이 있는 분은 두 분이십니다. 따라서 적왕선이 열렸음을 선포하며…….”

 

법관장의 말을 끊으며 단상에 올라서는 이가 있었다.

 

“나 페올 카르티온 에르단, 이 자리를 빌려 적왕선에 참가함을 알리오.”

 

성급하고도 버릇없는 짓이었으나, 법관장은 이 자리에서 그 무례를 탓하고 나서진 않았다.

 

그저 나머지 후보인 핫산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온 군중들의 시선이 그를 따라 움직이기라도 한 듯, 귀족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어쩔 테냐, 내 아우야?’

 

그중 가장 뜨거운 시선의 주체는 페올이었다.

 

“칼. 그럼 다녀오겠네.”

 

위태로운 걸음으로 핫산은 단상에 올랐다. 중간에 수도승들이 그를 도우려 했지만 그는 그들의 도움을 한사코 거절했다.

 

잠시 서서 단상 아래 귀족들을 노려보던 그는 쇳소리처럼 거친 목소리로 외쳤다.

 

“나 핫산 헤이젤 에르단! 왕실의 율법에 따라 적왕선에 참가할 것을 공언하겠소!”

 

마지막 심력을 다 끌어다 쓴 것일까.

 

핫산이 픽 하고 쓰러졌다.

 

그 누구도 반응키 전에 가장 먼저 달려간 것은 안톤이었다.

 

핫산은 바닥에 쓰러지고서도 웃으며 무언가 중얼거리고 있었다.

 

“제론 후작. 카빌 남작. 에스건 백작과 소공자. 라원 준남작. 갸륜 자작…….”

 

무언가에 씐 사람처럼 그의 입에서는 막힘없이 누군가의 이름이 쏟아져 나왔다.

 

“끝까지 자리를 지켜 준 귀족들의 이름이라네. 파벌 따위와는 관계없이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이 나라의 충신이지. 난 그들을 얻고야 말 거네. 그들이야말로 희망이니까.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

 

바보처럼 한결같은 모습에 그만 실소를 내뱉을 뻔한 안톤이 그를 일으켜 세웠다.

 

-그건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일단 쉬시지요.

 

“그럼 또 부탁하겠네.”

 

곯아떨어진 핫산의 얼굴은 아주 편안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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