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믿는 것은 검 45화
무료소설 내가 믿는 것은 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744회 작성일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45화
045. 공주
낭패였다.
첫 선공의 기회를 허투루 낭비한 이후, 안톤은 내내 수세에 몰려 그의 빗발치는 검격을 받아 내기 바빴다.
뒤늦게 전력을 다해 상대해 보았지만, 전세를 뒤바꾸기엔 역부족이었다.
온-누르에게 전수받은 의검을 사용해도 도무지 레버르트 남작의 검을 베어 낼 수 없었다.
고작 버텨 내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이런 자가 있었다니!’
온-누르가 오러를 발현했을 때도, 안톤은 전력을 다한 일검으로 검에 상처를 입힐 수 있었다.
하지만 레버르트 남작의 검은 아니었다.
검기마냥 검신 위로 은은하게 흐르는 무언가가 오러보다 날카롭고 단단하게 그의 검을 보호해 주고 있었다.
안톤과 레버르트 남작.
둘 모두 평범한 무학과는 동떨어진 무공을 익힌 자들이었다.
안톤은 의검이라는, 기공 대신 의념을 검에 불어 넣는 정신검을 사용했고, 레버르트 남작의 경우는 서대륙과 동대륙의 무학이 합쳐진 새로운 형태의 검리였다.
혼종과 혼종의 대결.
둘 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무학이었기에 지닌 무학의 수준을 논할 수는 없었다. 단지 실력의 차이가 존재할 뿐이다.
그리고 보다 실력이 뛰어난 쪽은 레버르트 남작이었다.
“…….”
안톤은 빠르게 내구도가 닳아 가는 검을 보며 침음을 삼켰다. 이대로 가다간 검이 먼저 조각날 판이었다.
과연 세상은 넓다는 걸까?
그는 레버르트 남작이 현재 자신의 수준으로는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강자라는 걸 깨달았다.
‘어째서 전생에서도 이런 자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던 거지?’
군중들의 반응을 보니 짐작이 가는 게 하나 있었다.
“회색 검이라기에 기대했는데, 생각보다 볼거리가 없군.”
“저 정도면 레몽드 백작이 쉽게 이길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레버르트 남작은 레몽드 백작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되는 강자였다.
하지만 군중들은 감히 그를 레몽드 백작과 견주고 있었다.
어째서 이런 고수의 실력이 과소평가되어 있는 것일까?
이유는 간단했다.
‘오러 마스터가 아니니까.’
검혼이라는 동방의 기술을 쓸 수 있었기에, 어떻게 삼대호장이란 지위에는 올랐지만 대륙으로까지 명성을 뻗기에는 부족했을 터.
무엇보다 그의 검술은 공격적이지도, 화려하지도 않았으니까.
‘애초에 그가 명성을 원했다면 쉽게 얻었겠지만……. 아무튼 이 비무는 포기해야겠군.’
물론 항복을 외치며 백기를 들 생각은 없었다.
날이 나가고 검이 부러질 때까지 끝까지 버텨 내며 그의 검을 한 번이라도 더 겪어 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 비무의 행방은 뜻밖의 상황으로 치달았다. 1왕자가 연회에 도착했고, 그만 비무가 중단되고 만 것이다.
“페올 카르티온 에르단 전하께서 드십니다!”
군중들의 시선이 연회의 중심에서 바깥으로 옮겨진다.
그런 시선 속에서도 미동도 없이 페올은 고고하게 발을 뻗었다. 그때마다 주변에서 탄성이 튀어나왔다.
레몽드 백작을 비롯해서 여러 무사들을 대동한 페올은 남다른 위상을 선보이고 있었다. 주변의 인물만 보아도 앞서 등장했던 핫산의 행색이 초라해 보일 만큼의 거창한 인사였다.
그는 일단 연회의 주최인 츠윈카 공작에게 향했다.
츠윈카 공작은 핫산의 때와는 다르게 아주 공손한 태도로 그를 반겼다.
“반갑습니다, 카르티온 전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반갑네, 츠윈카 공작. 그나저나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가?”
간단한 인사를 나눈 후, 페올이 주변을 쓱 둘러보며 상황을 물어 오자, 츠윈카 공작은 지금껏 있었던 일들에 대해 소상히 설명해 주었다.
“음……. 그런 일이 있었구려. 하하, 즐거운 때 내가 방해를 하게 되었군.”
“아닙니다. 다들 왕자님께서 언제 도착하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건 그저 그동안 돋운 작은 흥이었을 뿐이지요.”
“아무튼 미안하게 됐군. 이보게, 레버르트 남작! 그리고 칼이라 했나? 어쩌다 보니 내가 중간에 끊게 되었지만, 이왕 시작했던 거 계속해 보지 않겠나? 이런 구경거리를 나만 빼고 즐길 순 없지.”
먼저 그들의 의사를 존중하는 듯한 말이었으나, 실속은 전혀 달랐다.
페올은 해린의 최고 권력자였으니까, 그가 하는 말은 빈말이라도 반드시 행해져야만 하는 것이었으니까.
그러나 그의 말에 반기를 드는 이가 있었다.
“황공하오나 대결은 이미 끝났습니다.”
페올을 향해 짧게 인사를 한 레버르트 남작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연회장을 벗어났다.
그 모습에 실색한 츠윈카 공작이 그를 말려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이보게, 체오르! 감히 왕자님께 그 무슨 실례인가? 잠깐 기다려보게!”
“그만하게나, 츠윈카 공작. 대결이 이미 끝났다고 하지 않는가? 늦게 온 내가 잘못인 게지.”
“정말 너그러우십니다.”
다들 페올과 츠윈카의 대화에 집중하고 있을 때, 안톤은 멀어져 가는 레버르트 남작의 등을 끝까지 바라보았다.
군중들은 그를 손가락질하며 무례한 행동에 대해 비난을 하고 있었으나, 안톤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진심으로 대결이 끝났다고 생각해서 이 자리를 떠났다. 내게 더 이상 볼 게 없다고 판단한 것이겠지. 그게 아니라 정반대였다면, 왕자가 그만하라고 해도 볼장을 다 봤을 것이다.’
분했고, 동시에 부러웠다.
그는 강했으며, 무엇보다 자유로웠으니까. 그는 마치 세상의 어떤 규칙에도 얽매이지 않는 사람 같았다.
‘야생마 같은 남자로군.’
레버르트 남작이 돌아간 후 연회는 싱겁게 끝났다.
어쩌면 싱겁다는 표현은 옳지 않을지도 모른다.
많은 정성이 담긴 연회는 성황리에 끝맺음을 맞았으니까.
그저 별다른 사건이 없었을 뿐이다.
대결이 중단된 것이 아쉽다고 말하던 핫산이었지만, 레버르트 남작이 엄청난 강자라는 얘기와 몇 초만 더 지났으면 자신의 검이 부러졌을 것이란 얘기를 해 주자 오히려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참 다행인 일이구만! 아무튼 그건 그렇고……. 어때? 그와의 대련을 통해 원하던 건 얻었나?”
참 아쉬운 일이지만, 자신 있게 말할 만큼의 이렇다 할 소득은 없었다.
허나 아예 무소득인 것은 아니었다. 다만 형언키 어려운 감상만이 남아서, 그 감상을 구체적으로 형체화시킬 수가 없을 뿐.
‘손에 잡힐 듯하면서도 잡히지가 않아. 아쉽게 됐군.’
그렇게 놓친 기회에 대해 안타까움을 토로하던 때.
레버르트 남작으로부터 서신이 비밀스럽게 도착했다.
따로 만나서 대화를 나눠 보고 싶다는 내용의 서신이었다.
당시에 그런 내색은 안 했지만, 사실 자신에게 큰 흥미를 느끼고 있던 게 틀림없었다.
“어머? 체오르 레버르트 남작님의 편지네요?”
그때 등 뒤에서 들려온 미성에 안톤의 어깨가 쭈뼛 섰다.
‘도대체 언제부터 뒤에 있었던 거지? 핫산은 어딜 간 거고?’
안톤은 급히 고개를 돌렸다.
열린 방문 틈으로 핫산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고개를 떨구고 있었는데, 어떠한 상처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곤히 잠든 듯 편안해 보였다.
‘침까지 뚝뚝 흘리는 걸 보니 마법을 썼군.’
마법에 조예가 없는 안톤으로서도, 정신 계통의 마법이 어려운 마법이라는 것쯤은 안다.
그리고 지금 핫산에게 행해진 수면 마법 또한 정신 계통의 마법 중 하나다.
‘실력을 속였군.’
핫산은 펠샤인 공주의 마법사로서의 실력은 보잘것없다고 말한 바가 있었고, 그 말은 즉 펠샤인이 핫산마저 속이고 있다는 뜻이었다.
‘믿을 수 없는 여자야. 도대체 무슨 속셈이지?’
만약 방금 그녀가 핫산에게 해를 입혔다고 한다면, 굳이 의도를 파악할 필요도 없이 검을 휘둘렀을 것이다.
하지만 핫산은 아무런 해도 입지 않았다. 그저 잠들었을 뿐이다.
아직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안톤에게 펠샤인은 천연덕스러운 말을 건넸다.
“많이 피곤하셨나 봐요.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잠이 들어 버렸지 뭐예요.”
“…….”
안톤은 가만히 서서 펠샤인을 노려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생글생글한 웃음을 입가에 머금고 있었다.
“화내지 마요. 단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을 뿐이니까.”
다시금 느끼는 것이지만, 그녀의 말에는 사람의 정신을 흔드는 힘이 있었다.
안톤은 펠샤인의 말에 대꾸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녀의 말을 계속 듣고 있다간 정신이 이상해져 버릴 것만 같았다.
그는 곧바로 방을 나가 핫산의 어깨를 흔들며 그를 깨웠다.
“음……. 음? 아! 안톤?”
잠결에 행한 말실수.
안톤이 무서운 기세로 그를 노려보자, 그는 어깨를 움찔하며 확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칼……. 내가 깜박 잠들었나 보군. 펠은 어딨나? 혹시 돌아갔나?”
“…….”
안톤은 펠이 있는 방 쪽으로 고갯짓을 했다. 시선을 따라 옮긴 핫산이 펠샤인을 발견하곤 무안한 듯 연거푸 기침 소리를 냈다.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것이다.
“크흠! 다행히 아직 있었구나. 미안하게 됐다. 아무래도 내가 피곤했나 보구나. 그나저나 깨우지 그랬느냐?”
‘혹시 들었을까?’
그런 생각으로 펠샤인의 안색을 천천히 살펴본 안톤이었으나, 그녀는 평소와 똑같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니에요. 너무 곤히 주무시기에 내버려 뒀어요. 시녀에게 말해서 보약이라도 지으라고 해야겠어요. 그리고 정말 괜찮아요. 여기 안톤 경이 저랑 놀아 주셨거든요.”
지나가면서 툭 던지는 듯한 말투.
너무 자연스러워서 안톤마저도 차마 늦게 반응할 정도였다.
그가 황급히 핫산에게 고개를 돌리며 무언의 시선을 보냈을 땐, 이미 늦은 때였다.
“안톤이? 그가 그럴 리가 없는데……. 엇! 그게 무슨 소리냐? 안톤이라니?”
“흐음……. 칼의 본명이 안톤인가 보네요?”
“하하! 딱히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애칭 같은 거지.”
“아! 그렇군요. 애칭이라니 정말 두 분은 친밀한 사이인 것 같아요. 부럽네요. 혹시 저도 칼 님을 안톤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방금은 내가 잠결에 그만 실수로 그를 그렇게 부르고 말았지만, 사실 칼은 자신을 본명으로 부르는 걸 싫어하네.”
안톤은 진심으로 달려가 핫산의 입을 쥐어 막고 싶었다.
“아! 그럼 안톤이란 이름은 애칭이 아니라 본명이었던 거군요? 음……. 이상하네요. 굉장히 평범한 이름인 것 같은데……. 그렇게까지 싫어하다니, 무언가 사연이라도 있는 걸까요?”
“그건…….”
“뭐, 그거야 제가 이런 자리에서 물어보면 굉장히 실례겠죠?”
펠샤인의 말에 이리저리 끌려다니던 핫산은 구원자를 만난 듯 반색했다.
“그, 그야 그렇겠지……?”
“풋! 알겠어요. 오늘은 이만 가 볼게요. 더 늦었다간 아네스가 화를 낼 것 같아서요.”
펠샤인이 떠난 후, 다리에 힘이 빠진 핫산은 그대로 의자에 널브러졌다.
* * *
털컥.
방문이 닫히고,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붉은 눈의 남자가 조용히 펠샤인의 뒤에 섰다.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으며 나지막한 어조로 말했다.
“페르트.”
“예, 공주님.”
“지금 당장 자결하세요.”
“알겠습니다.”
페르트라 불린 기사는 즉시 칼을 뽑아 역수로 쥔 후, 자신의 심장을 향해 검을 찔렀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임에도 그의 행동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만.”
펠샤인 공주의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남자의 움직임이 멈췄다.
동시에 그의 왼쪽 가슴 부분의 천이 붉게 물들었다.
펠샤인이 조금만 더 늦게 입을 열었다면, 살가죽만이 아니라 심장까지 검날이 파고들었을 것이었다.
허나 그런 잔혹한 명을 내린 펠샤인 공주의 표정은 무감흥하기만 했다.
그저 작은 고민이 있는 듯 고운 아미가 작게 찌푸려졌을 뿐이다.
“이상하네요. 내 마법엔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왜 그에게는 통하지 않는 걸까요? 벌써 세 번째라구요. 혹시 그에겐 정신 마법에 면역이라도 있는 걸까요?”
“…….”
“전신을 갑옷으로 감추어 놓았는데 거기다가 이름까지 숨겼다니, 더더욱 호기심이 나잖아요. 페르트, 안톤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에 대해 정보를 알아봐 주세요.”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오늘은 아무래도 스승님을 찾아뵈어야겠어요.”
“아네스에겐 연락해 두겠습니다.”
펠샤인 공주는 천천히 조신한 발걸음으로 어디론가 향했다. 그녀는 정말로 오랜만에 진심 어린 미소를 띠고 있었다.
‘과연 오라버니는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걸까요? 뭐, 아무래도 좋아요. 아무튼 이 지겹기 짝이 없는 왕궁에도 드디어 재미난 일들이 펼쳐지려 하는 것 같으니.’
“후후. 기대되네요.”
“예? 뭐라 말씀하셨습니까?”
“아니에요. 어서 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