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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믿는 것은 검 40화

무료소설 내가 믿는 것은 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966회 작성일

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40화

040. 왕성

 

 

똑똑.

 

문을 두들기는 공허한 노크 소리에 금발의 남자가 문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남자는 음미 중이던 차를 한 번 홀짝인 후 밖을 향해 읊조렸다.

 

“들어오게나.”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온 중년 남성은 곧장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이어 명이 떨어지기 전까지 그 자세를 유지했다. 그는 무관 출신의 귀족답게 갑주 차림을 하고 있었다.

 

“신 쿠두 레몽드. 페올 카르티온 에르단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금발 남자, 아니 해린의 1왕자이기도 한 페올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여인처럼 가는 팔과 다리를 움직이며 레몽드 백작에게 다가갔다.

 

“과례일세. 일어나게.”

 

레몽드 백작은 군말 없이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렇다고 편안한 자세를 취한 것은 아니었다.

 

양손을 허리 뒤춤에 얹은 그는 어깨를 활짝 펴고 간단명료하게 전달 사항을 보고했다.

 

“방금 핫산 헤이젤 에르단 왕자님이 쟝-그리던에 도착했습니다. 현재 치안대와 합류하여 왕성으로 곧장 향하는 중이라고 합니다.”

 

할 말만을 빠르게 끝마친 레몽드 백작은 가만히 페올의 말을 기다렸다.

 

창 너머로 시선을 고정한 페올은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그는 회한이 섞인 얼굴로 한숨을 내쉬듯 말을 꺼냈다.

 

“기어코 돌아온 건가……. 그냥 어디론가 사라졌으면 좋았을 것을……. 그래, 레몽드 백작. 그나저나 내 아우에게 어디 다른 특이 사항은 더 없었던가?”

 

“제국 기사 클린턴 제오르가 핫산 왕자님의 신변을 호위 중인 것은 여전하나, 본래 일행 중 하나였던 헤일스 제오르가 귀국하고 그 자리에 새로운 인물이 채워졌습니다. 칼이라는 남자입니다.”

 

“칼? 뭐 하는 놈이지?”

 

“지아누 출신의 검사로 펭 제국에서 활동하다 핫산 왕자님께 고용되었다고 하더군요.”

 

“분명 조르디가에 있을 때만 해도 그런 놈은 없었지 않은가?”

 

“그 부분은 다시 확인 중인 사항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자세한 경위를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용병이라……. 대체 무슨 생각이지? 그 칼이란 자의 실력은 어떻다고 하던가?”

 

“그 부분 역시 아직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아, 그리고 그는 신분 확인 시에 얼굴이 노출되는 것을 거부했다고 합니다. 사유는 얼굴에 심한 화상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만……. 그 소탈하던 핫산 왕자님께서 권위를 사용하면서까지 신분 노출이 되지 않도록 했다니, 충분히 의심스럽고 확실히 확인해 봐야 할 사안이라고 판단됩니다.”

 

“그래. 그 부분은 자네가 잘 확인해 보게나. 어차피 왕성으로 들어올 것 아닌가?”

 

“무슨 말씀이신지 잘 알겠습니다. 얼굴도 모르는 놈을 감히 왕성에 들일 수는 없는 일이지요.”

 

“더 보고할 사안이 남았나?”

 

“없습니다. 추후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그러게.”

 

레몽드 백작이 나간 방 안에 홀로 남은 페올은 턱을 짚고 생각에 잠겼다.

 

“칼이라……. 이미 궁지에 몰릴 대로 몰린 동생이 이제 와서 뭘 할 수 있겠느냐 싶지마는……. 이상하게 신경이 쓰인단 말이지.”

 

 

* * *

 

해린 왕궁으로 통하는 내성벽에선 뜻밖의 악다구니가 벌어지고 있었다.

 

“아무리 그러셔도 안 됩니다.”

 

“이보게, 레몽드 백작! 이 내가! 해린 왕실의 피를 계승한 2왕자인 나 핫산 헤이젤 에르단이 보증한다는데도 자꾸 그럴 겐가?”

 

이렇게 언성이 높아지는 대화를 하고 있자니, 화가 나기도 전에 신선하단 생각이 먼저 전해지는 레몽드 백작이었다.

 

감히 왕성에서, 그것도 해린의 무장으로 명망 높은 자신의 면전에서 이렇게 악을 쓰는 귀족은 결코 없었으니까.

 

그랬기에 이렇게 핫산이 고집을 부리면 부릴수록 칼이란 용병에게 무언가 수상한 점이 있다는 의심은 커져 갔다.

 

“지금 제게 권위를 사용하시는 겁니까?”

 

레몽드 백작이 핫산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 기세에 핫산은 짐짓 기가 죽은 듯 한 걸음 물러나며 지금까지와는 반대로 소극적인 모습을 보여 주었다.

 

“이 용병과 약속했단 말일세. 절대 얼굴을 보일 일 없게 해 주겠다고. 부디 나를 약속도 못 지키는 파렴치한으로 만들지 말아 주게.”

 

“어쩔 수 없습니다. 왕실의 안전을 책임지는 제 입장을 생각해 주시지요.”

 

“하……. 그럼 어쩔 수 없군. 칼! 미안하지만 얼굴을 보여 줄 수 있겠소?”

 

대화 내내 조용히 물러서 있던 안톤은 핫산을 향해 주먹을 한번 오므렸다가 두 손바닥을 모두 활짝 폈다.

 

“금화 열 개? 하! 비싸기도 한 얼굴이구먼그래. 알겠네. 부탁 좀 하겠네. 아, 선불이 아니면 안 된다고? 참……. 지금 내가 돈이 없는데…….”

 

자신의 주머니를 뒤적거리던 핫산이 레몽드 백작을 향해 슬그머니 시선을 옮겼다.

 

“혹시 백작은 돈이 있는가?”

 

“돈…… 말씀이십니까…….”

 

“그래, 내가 후일 반드시 갚겠네. 그리고 기어코 얼굴을 봐야겠다고 한 건 자네가 아닌가?”

 

“……알겠습니다. 금화 열 개면 됩니까? 이봐라!”

 

다소 어이없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레몽드 백작은 부관이 가져온 돈을 핫산에게 건넸다.

 

받은 돈을 전낭에 챙겨 넣은 안톤은 천천히 손을 얼굴로 올려 조심스레 투구를 벗었다.

 

주변 곳곳에서 기괴한 탄성이 피어났다.

 

“……음!”

 

“으에!”

 

그런 신음들은 안톤이 다시 투구를 써서 얼굴을 가린 후에야 사라졌다.

 

“크흠! 그렇게 기를 써 가며 감추고 싶어 할 만한 얼굴이군요.”

 

“이제 됐는가?”

 

“됐습니다. 이제 저쪽도 몸수색이 다 끝났으니 들어가 보시지요.”

 

안톤 일행은 왕당에서 귀족들과 왕실 일원들에게 복귀 인사를 하기 전 몸단장이 필요하단 이유로 잠시 핫산의 대전으로 이동했다.

 

한차례 수색 후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확인이 떨어지자 안톤도 굳게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굳이 그런 연기가 필요했습니까?”

 

좀 전에 성문에서 있었던 촌극을 얘기함이었다.

 

돈 버는 일이 쉽지 않단 걸 새삼 깨달았던 기억이 있는 안톤으로서는 고작 주먹 하나와 열 손가락으로 순식간에 10골드를 벌어 낸 핫산이 신기하게 보일 따름이었으나, 괜한 부스럼을 만든 것 같게도 느껴졌다.

 

“비싼 물건이니까 이렇게라도 손해를 메워야지.”

 

핫산과 지낸 시간이 안톤보다 많은 클린턴조차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제 보니 돈을 갚을 생각이 조금도 없었군요.”

 

“이렇게 해 놔야 다른 누군가가 감히 그걸 들춰 볼 생각을 안 하지 않겠나? 한 번 구경하려면 무려 10골드인데!”

 

그렇게 변명 아닌 변명을 하는 핫산이었지만, 클린턴의 눈초리는 싸늘하기만 했다.

 

“크흠!”

 

안톤은 목에 걸고 있는 철제 펜던트를 어루만졌다.

 

이것은 과거 핫산이 어느 이름 모를 신의 유적에서 발굴한 유물로, 하루 동안 사용자의 모습을 원하는 형태로 변신시켜 주는 아티팩트였다.

 

하지만 이 아티팩트를 지녔어도 안톤은 여전히 철투구로 얼굴을 감추어야만 했다.

 

핫산이 시답잖은 이유로 실컷 써 재껴 댄 탓에 사용 가능한 마력량이 바닥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안톤, 이제 오늘이 지나면 모습을 감출 수 있는 건 두 번뿐이니 꼭 필요할 때가 아니라면 최대한 아껴 주게.”

 

아티팩트의 마력을 충전할 수준 높은 인챈터가 옆에 있다면 또 모르겠지만, 그들은 아주 희귀한 존재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이제 준비도 대략 끝났으니 가 보세. 형님에게 자네 얼굴을 보여 줘야 할 것 아닌가?”

 

 

* * *

 

“왔느냐?”

 

1왕자 페올의 짧디짧은 인사말과 함께 안톤과 클린턴은 자리에 부복했다.

 

클린턴과 핫산은 안톤이 이러한 것들에 익숙하지 않을 것이라 걱정했지만, 사실 그는 이런 허례허식에 익숙했다.

 

“못난 아우가 형님께 인사드립니다.”

 

핫산은 안톤처럼 바닥에 무릎을 대는 예식까지는 하지 않았다. 대신 팔짱을 끼고 허리를 40도로 숙였다.

 

주로 귀족들 사이에서 사용하는 해린 특유의 인사법이었다.

 

그리고 핫산은 방금 왕태자라는 호칭이 아니라 그저 형님이라고 그를 칭했다.

 

그 짧은 인사말 속에 담긴 의미는 명백했다.

 

‘당신은 아직 왕이 아니야. 병상에 누운 국왕이 승하하기 전까지 일개 왕자일 뿐.’

 

1왕자 페올이 대전에 위치한 상석에 앉기는 하였지만, 왕좌는 빈자리로 남아 있는 것도 그러한 이유였다.

 

페올의 입장에서는 자칫 속이 쓰릴 수도 있는 인사였으나 그는 기분 나쁜 내색을 전혀 하지 않았다.

 

그저 미소 띤 얼굴로 비수를 던졌다.

 

“그래, 그나저나 무슨 일이 있던 것이냐? 동행하던 치들은 모두 어디로 사라지고 혼자 돌아온 게냐?”

 

안톤은 이를 악문 핫산을 향해 염려의 눈빛을 보냈다.

 

습격 사건의 배후가 피해자에게 태연히 사건의 경위를 묻고 있는 것이었다.

 

그 당사자의 심정이 어떨지 충분히 짐작할 순 있었다.

 

아마 비통하고 참담한 심정일 것이다.

 

“……펭 제국으로 유학을 가던 중 습격이 있었습니다.”

 

그런 안톤의 걱정이 무색하게 핫산은 침착하게 있었던 일들에 대하여 소상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

 

“그런 일이!”

 

왕자를 향한 암살 시도가 있었단 사실에 왕당에 자리하던 귀족들이 놀란 얼굴로 제각기 웅성이기 시작했다.

 

그들로서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안톤은 귀족들의 얼굴을 세심히 훑어보았다.

 

이미 이 사건을 알고 있기라도 했다는 듯, 표정에 작은 미동조차 없는 귀족들의 얼굴을 기억하는 중이었다.

 

그저 단순히 심지가 굳은 성정의 부류일 수도 있지만, 그게 아니라 1왕자의 편에서 암약을 부리는 귀족들 중 하나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근데 어찌 본국에 그 소식을 알리지 않았단 말이냐? 알기만 했다면 당장 원군을 보내 널 지켰을 텐데.”

 

1왕자 페올은 진심으로 놀라고 염려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누군가에겐 동생을 걱정하는 자상한 형으로 보일 수 있겠으나, 습격 사실이 적힌 서신들을 중간에서 인멸시킨 것이 바로 그라는 걸 아는 핫산에겐 본심을 숨긴 위선자의 가증스러운 모습일 뿐이었다.

 

까드득.

 

핫산의 얼굴엔 여전히 실낱같은 미소가 떠 있었으나, 안톤은 어째선지 그런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아무튼 살아남았으니 다행이다. 아버님까지 병세에 든 지금, 너에게까지 무슨 일이 벌어졌다면 정말 큰일이었을 것이다. 이제 내가 의지할 건 너밖에 없지 않느냐?”

 

“……분에 넘치는 말씀이십니다. 형님껜 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능력이 출중한 인재들이 함께 있지 않으십니까?”

 

“하하! 그들은 진정한 충신들이지. 근데 아우야, 아무리 그래도 혈연보다 진하기야 하겠느냐?”

 

“……그렇습니까?”

 

“그나저나 네 옆의 분들은 언제쯤 내게 소개시켜 줄 참이냐?”

 

귀족들의 따가운 시선이 쏘아지듯 한 군데로 모였다.

 

사실 그들로서는 첫 등장 이래부터 그들에 대한 궁금증과 관심이 있었지만, 감히 어전에서 그런 걸 물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여기 이분은 제국 기사 클린턴 제오르 경으로, 제가 본국으로 돌아가는 길까지 호위를 해 주라고 황제 폐하께 명을 받은 분이십니다.”

 

“음……. 그럼 임무가 끝났으니 곧 돌아가시겠구나.”

 

페올은 아쉽다는 듯 말했으나, 암중에 한시라도 빨리 돌려보내려는 의지가 깔려 있었다.

 

“하하. 먼 길을 도와주셨는데 그냥 보낼 수는 없지 않습니까? 몇 달간 우리나라를 소개시켜 주며 잘 대접해 드릴 참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바쁜 신분이실 것을. 더 이상 폐를 입힐 순 없지 않느냐? 너를 여기까지 무사히 지켜 주었으니 형님 된 도리로써 내가 그에게 대신 대접을 해 주마. 여봐라!”

 

미리 준비를 해 두었는지, 시종 하나가 보석함 하나를 들고 다가왔다.

 

그 상자만으로도 상당한 값어치가 있을 것 같았지만, 그 안에 들어 있는 물건들은 더욱더 귀한 것들이리라.

 

당연히 클린턴은 그 대가를 사양했다.

 

이 자리서 밝힐 순 없지만 그가 황제에게 받은 임무는 호위 말고도 있었으니까.

 

“황공하오나, 괜찮습니다. 황상의 명을 받는 대가로 그런 걸 받을 순 없습니다. 그저 잠시 이곳에 머물며 쉬다가 떠나려 합니다.”

 

클린턴이 소신 있게 자신의 의지를 밝히자, 페올도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부디 이곳에 있는 동안은 편안히 지내다 가시길 바라오.”

 

페올은 이제 시선을 안톤에게로 옮겼다.

 

“그럼 옆에 있는 그자를 소개시켜 주겠느냐?”

 

이제 안톤의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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