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믿는 것은 검 3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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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73회 작성일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37화
037. 정리
그리고 그 시각.
인적 드문 수풀가에 마차 한 대가 우두커니 세워져 있었다.
그 주위에 두 명의 남성이 약간 거리를 두고 앉아 있었는데, 핫산 왕자와 그의 임시 호위기사인 클린턴 제오르였다.
그들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오지 않으려나 봅니다. 이제 슬슬 떠나시지요.”
“나는 왠지 이제 금방이라도 올 것만 같네. 그러니 조금만… 조금만 더 기다려 보지 않겠나?”
“이러다가 혹시 일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일이 상당히 복잡해질 것입니다.”
약속된 시간은 이미 한참을 지났지만, 클린턴의 재촉에도 핫산 왕자는 요지부동의 태도를 고수했다.
“그럼 10분만…… 딱 10분만 더 기다리는 걸로 하세? 분명 올 것이네. 그사이에.”
진심으로 그 말대로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클린턴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온-누르와 안톤을 돕겠다는 핫산 왕자의 계획을 들었을 때, 클린턴은 순순히 이에 대해 승낙했다.
한 번 고집을 부리면 짐짓 그 뜻을 돌리기 어려운 핫산의 성정을 익히 아는 바도 한몫했지만, 무엇보다 자신이 그들에게 빚을 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호의에는 호의로라는.
그 북부의 격언을 상기하며 안톤 일행을 돕겠다고 결심을 굳혔다.
안톤과 관계가 좋지 않은 동생인 헤일스 제오르에게 편지 한 통만 남겨 두고 도망치듯 떠나온 것도 그래서였다.
하지만 클린턴은 펭 제국의 기사다.
황제로부터 핫산 왕자가 해린에 도착할 때까지 무사히 보호하라는 명을 받았다.
사적인 정보다는 공적인 업무를 우선해서 신경 쓸 수밖에 없는 신분인 것이다.
고요한 침묵 속에서도 회중시계의 초침은 계속해서 움직였다.
그리고 시간이 되자, 클린턴은 매정하리만치 칼같이 입을 열었다.
“말씀하신 시간이 지났습니다. 이제 출발하시지요.”
“……알겠네.”
핫산 왕자도 이제 그의 말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또한 무리한 부탁을 흔쾌히 승낙해 준 클린턴을 상대로 더한 고집을 부릴 만큼 꽉 막힌 사람은 아니었다.
둘은 서둘러 마차에 몸을 실었다. 짐이랄 것들은 모두 마차에 실려 있었고 순식간에 출발할 채비가 끝났다.
허나 금방이라도 움직일 것만 같던 마차는 계속해서 멈춰 서 있었다.
핫산은 마부석에 앉은 클린턴에게 말을 걸었다.
“뭐하는가? 출발하지 않고!”
“왔습니다.”
“……그게 정말인가?”
핫산 왕자는 즉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예. 조금 많이 늦기는 했지만 말입니다.”
당장에 마차에서 뛰다시피 내린 핫산 왕자는 곧장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이내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으어억!”
배에서 등까지 관통한 푸르스름한 팔 한 짝을 주렁주렁 달고 다니는 피투성이의 남자가 인기척 없이 서 있었던 것이다.
처참하기 그지없는 온-누르를 보며 핫산 왕자는 아연해했다.
“아이고, 이게 어찌 된 일이시오? 그리고 안톤은 또 어디가고 혼자요? 혹시 일이 뭔가 잘못된 것이오?”
동시에 여러 질문이 쏟아졌지만, 온-누르는 그에 대해 하나도 대답해 주지 않았다.
“기다려 주어서 고맙다. 하지만 시간이 없군. 뒤의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이 녀석에게 듣는 걸로 해라. 이 녀석도 안에서 모두 지켜보았을 테니까.”
온-누르의 목소리에는 예전처럼의 힘은 느껴지지가 않았다.
다만 핫산은 그에게서 어떻게든 자신이 맡은 일만큼은 끝마치겠다는 곧은 의지를 느꼈다.
온-누르는 자신이 끼고 있던 팔찌를 조심히 어루만지며 주문을 읊조렸다.
“밤그림자.”
온-누르의 팔목에 끼워진 팔찌가 녹색 광채를 흩뿌린다.
어두운 숲 속을 환하게 비출 만큼 찬란한 광채였다.
그 빛무리가 형체를 갖추고 사람의 형상으로 변하는 데에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안톤!”
제일 먼저 그를 알아본 핫산이 탄성을 내질렀다.
“설마 계속 그 팔찌 속에 들어가 있던 것이오? 아! 마령구! 북부에선 아티팩트라고 하던가?”
상황도 잊고 마냥 신기해하는 핫산 왕자를 보며 온-누르는 잠시 이 상황이 부질없게 느껴졌다.
수다스러운 성향은 장소를 가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무튼 이걸 선물로 주마. 안톤을 숨기고 이곳을 벗어나는 데 큰 도움을 줄 것이야.”
“하긴……. 원래는 기사 갑주를 입혀 얼굴까지 모두 가릴 속셈이었는데 훨씬 더 안전하고 좋은 방법이오.”
“내 제자 녀석을 잘 부탁한다.”
그 언제나 꼿꼿한 태도의 대명사이던 온-누르가 핫산 왕자를 향해 작게나마 고개를 숙였다.
팔찌 속 무형의 공간에서 바깥으로 나온 이후 육신의 감각이 실감이 나지 않는 듯 재차 주먹을 쥐어 보던 안톤이 그제야 화들짝 놀라며 기겁했다.
“부탁이라니요? 설마 스승님은 같이 가지 않으시려는 겁니까?”
“내가 이곳에서 사라지면 모든 의심이 핫산 왕자에게 쏠린다. 적어도 마차가 가문령을 벗어날 때까진 이목을 다른 곳에 주목시켜야 해.”
“그 몸으로 대체 뭘 하신단 말씀이십니까?”
“이런 몸이기에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고집이 느껴지는 그 한 문장에, 안톤은 그가 자신을 희생하려 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믿기지 않았다.
도대체 왜? 내가 뭐기에 이렇게까지?
안톤과 온-누르.
그 둘은 사제지간이란 인연의 끈으로 묶이긴 하였지만 그 기간은 아직 2년도 채 되지가 않았다.
유대감이라는 것은 시간과 전혀 무관하게 커지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서로를 떼 놓을 수 없는 상관관계에 놓여 있다.
물론 매일같이 서로 부대끼다 보니 정이 쌓인 건 부정하지 못한다.
허나, 근본적으로 온-누르와 자신의 관계는 서로의 목적이 맞물려서 성립이 된 관계라고 생각했다.
온-누르는 불완전한 검학을 안톤을 통해 완성시켜 그를 패배시킨 남자에게 설욕하고 싶어 하고, 안톤은 그 약속을 이루어 주고 무력과 자유를 얻는다.
어떻게 보면 거래라고 볼 수도 있었다.
독보적으로 안톤에게 유리한 거래. 그렇기에 안톤은 그동안 온-누르에게 은혜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 감정은 결코 은혜로만 끝날 감정이 아니었나 보다.
“그리고 내가 죽으면 너한테도 나쁘지 않은 것 아니더냐? 자유의 몸이 되는 것이니.”
이 회의적인 한 마디에 이렇게까지 감정에 큰 파문이 일어나는 걸 보니 말이다.
“그걸 말이라고 합니까!”
감정에 복받쳐 소리를 지르는 안톤의 모습이 오랜만이었다. 그러고 보니 전에도 그가 이렇게 울부짖던 때가 있었다.
그 첫 만남 당시를 회상하며 온-누르는 특유의 털털 웃음을 내지었다.
“껄껄. 너도…… 그리고 나도 참 많이 변한 것 같구나.”
“같이 갑시다. 이런 건 스승님이랑 어울리지 않는단 말입니다. 일단은 같이 이곳을 벗어나서 천천히 치료부터 합시다. 그리고 후일 다시 돌아와 복수든 뭐든지 간에 같이하면 되잖습니까?”
“……치료할 수 없다.”
“예전에 팔이 날아갔을 때, 포션으로 이어 붙였던 적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선 그때의 나보다 더 중해 보이지만 괜찮을 겁니다. 술법이든 마법이든 포션이든 영약이든, 왕자가 다 지원해 줄 테니 말입니다. 명색이 내 친우라고 하였으니 그 정도는 흔쾌히 해 줄 겁니다. 그렇지 않소?”
안톤의 날카로운 시선을 마주한 핫산 왕자가 저도 몰래 고개를 수어 번 끄덕였다.
“……무, 물론이네.”
“추격은 저와 클린턴 경이 어떻게든 해 보겠습니다. 전면전이라면 모를까 가문령 바깥으로 도주하는 정도라면 충분히 할 수 있을 겁니다.”
일목요연한 말이었지만 온-누르는 별다른 감흥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하아……. 단 한 번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군.”
“……?”
“나는 회생이 불가하다. 장기가 아니라 단전을 다쳤기 때문이지. 아직 이 팔을 빼내지 않았기에 어떻게든 기가 모여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조차도 시간문제이고.”
“단전……. 마나 홀이 다쳤단 말입니까? 아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단전은 외적인 힘에 의해 타격을 입지 않는다. 여타 장기들처럼 실재하는 기관이 아니기 때문이다.
단전이 망가져 폐인이 되는 무인들은 이곳에서 흔히 말하는 주화입마에 빠지거나, 목숨이 경각에 달한 상태에서 무리하게 기 운용을 해서 기혈이 역류했을 때이다.
물론 그 기혈을 의도적으로 역류시켜 단전을 부수는 특수한 기공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것은 절대로 실전에서 사용할 만한 수법이 아니고, 제압된 죄인에게 형벌의 의미로 가해지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안톤이 그 모순을 짚고 넘어갔지만, 온-누르는 그저 힘없이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너도 보았듯이 그 여자는 인간이 아니라 요괴였으니 무언가 내가 알지 못하는 힘이 작용했을 터.”
“무언가…… 무언가 방법이 있을 겁니다!”
“없다. 그만해라. 내 체내의 기들이 모두 사라지기 전에, 아직 싸울 수 있을 때 무인으로 죽겠다.”
“스승님!”
“그만하라 하지 않느냐! 각인 명령! 내가 이곳에서 떠날 때까지 가만히 입 닥치고 조용히 있거라.”
“…….”
“절대 이것을 쓰지 않겠다 다짐했는데……. 너는 내가 스스로 약속을 어기도록 하는구나.”
노예각인마법의 발동으로 안톤은 순식간에 산송장과 다름없게 변해 버렸다.
그 모습을 잠시 처연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온-누르는 핫산 왕자를 향해 터벅터벅 걸음을 옮기고는 그의 손에 팔찌를 쥐여 주었다.
“그럼 약속은 꼭 지킬 거라 믿겠다.”
“……알겠소. 걱정 마시오.”
잠시 정적이 찾아왔다.
항상 유들유들하던 핫산조차 이럴 때엔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 몰라 몇 번이나 무언가 말을 하려다가 머뭇거리는 상황을 반복했다.
결국 끝내 핫산은 온-누르에게 다른 어떠한 말도 전하지 못했다.
온-누르는 다시금 안톤을 향해 시선을 보냈다.
“동정…… 아니 걱정받는다는 건 생각 외로 꽤나 괜찮은 기분이었다. 고맙다, 안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당부 하나만 하마. 물론 이것에는 어떠한 강제성도 없고, 또 애초에 네게 그러겠다는 의지가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마지막 경지에 오르기 전까진 절대로 이곳에 돌아오지 마라.”
“…….”
“거참, 눈빛 하고는. 그리고 핫산 왕자를 잘 도와주거라.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받은 은혜는 갚아야 하지 않겠느냐?”
“…….”
“그럼…… 이만 가 보마.”
인기척 없이 등장한 온-누르는 소리 없이 떠났다.
그로 인해 안톤 또한 이제 다시 멀쩡히 움직일 수 있는 몸이 되었으나, 그는 미동할 기미도 없었다.
“어떻게 할 텐가? 그분과 약속은 하였네만, 자네가 그를 따라가겠다고 하면 말리지는 않겠네.”
핫산의 물음에 안톤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지 않으면 가슴 속에 무언가가 그대로 흘러넘쳐 내릴 것만 같았다.
“아닙니다……. 가시지요.”
“……잘 생각했네.”
한참이나 우두커니 서 있던 마차가 이제 저만의 궤적을 남기며 굴러가기 시작했다.
아침이 되어서 조르디 가문령을 완전히 벗어나기 전까지 마차는 멈추지 않았다.
* * *
처음 검을 잡은 날.
이 칼로 누군가를 해하기 위한 방법을 익히게 된 그 첫날, 잔뜩 언 입문자들에게 행해진 교관의 장대 연설이 아니라도 알 수 있었다.
자신 또한 결국 끝에선 남의 칼에 맞아 죽을 운명일 거라는 걸.
그는 인과응보라는 말을 믿지 않을 만큼 순진치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온-누르는 검을 놓지 않았다.
검이야말로 그의 유일한 생존 수단이자, 유일한 무기였으니까.
시간이 지나며 그는 숱한 아수라장을 겪었고, 여러 감정들은 서서히 마모되어 갔다.
죽음에 관한 두려움 또한 그 과정에서 옅어지다 못해 가루가 되어 으스러졌다.
그러면서도 마음속 한켠에는 작은 두려움이 살아 있었다. 언젠가 필히 자신을 찾아올 그날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오늘이 그날인가…….”
온-누르는 눈을 감았다.
기감으로 느껴지는 적의 숫자는 마흔. 그마저도 지척 거리에 있는 자들만 세었을 경우의 이야기다. 저 멀리에 있는 적들까지 더하면 그 수는 네 배를 넘는다.
“서서히 말려 죽이겠다는 건가.”
포위망은 온-누르의 움직임을 토대로 유동적으로 움직였다.
다가가려 하면 멀어지고, 멀어지려 하면 다가온다.
조르디가의 1급 무사들이면 필수적으로 배워야만 하는 포위진을 그가 모를 리가 없었다.
“잘 배웠구먼그래.”
그런 감상도 잠시였다. 뒤늦게 진한 씁쓸함이 느껴져 와서 입맛이 썼다.
이는 외부의 적이 아니라, 결국 모두 조르디가의 무사라는 소리였으니까.
“내가 예상했던 죽음은 이런 게 아니지만…….”
스스로 무인으로 살아가길 결정한 자들 중에, 자신의 죽음을 상상해 본 적 없는 자가 과연 있기나 할까?
온-누르도 그랬다.
그는 백 명이든 천 명이든, 굳이 그게 아니라 단 한 명의 적이라 하든지 간에, 최선을 다해서, 필사적으로 사투를 나눈 후에 죽을 줄 알았다.
하지만 자신의 그 순간은 지난날의 예상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뭐, 이것도 나쁘지 않나……?”
온-누르는 적당한 나무를 찾아 그곳에 등을 대고 앉았다. 그리고 자신의 애검을 어깨에 비스듬히 세워 두고는 눈을 감았다.
그 와중에도 그의 구멍 난 단전의 틈새로 쉴 새 없이 기가 새어 나오는 중이었다.
푸르스름한 안개 같은 모습으로 육안으로 확인될 정도로 방대한 기.
포위진을 펼치는 무인들이 물에 빠진 것처럼 숨 막히는 기분이 들 정도로 막대한 양의 기였다.
그들로서도 이런 광경은 단 한 차례도 목격한 적도 들어 본 적도 없었다.
인간의 몸에 이만큼이나 많은 양의 기를 축적시킬 수 있다는 것에서 그들은 무인으로서의 경외심을 느꼈다.
“…….”
그래서였을까.
마치 어린아이라도 날붙이 하나만 있으면 목숨을 앗아 갈 수 있을 것처럼 무방비해 보이는 온-누르에게, 주변의 무인들 중 그 어떤 누구도 감히 다가서지 못했다.
마치 잠들기라도 하듯, 지저귀는 새의 울음소리 하나 없는 적막한 숲 속에서 그는 한참이나 그렇게 있었다.
온-누르는 목젖까지 다가온 죽음을 느꼈다.
그리고 그때, 마실이라도 나오듯 유유한 걸음을 옮기는 한 노인이 나타났다.
“……자네, 꼴이 말이 아니군. 어서 함께 가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