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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믿는 것은 검 36화

무료소설 내가 믿는 것은 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1,067회 작성일

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36화

036. 사투

 

 

한 수에 나무가 뽑혀 나가고 땅이 파인다.

 

둘 중 하나는 인간이 아니었고, 하나는 인간이되 인간을 초월한 자였다.

 

빗나간 일격에 온갖 지형지물이 흐트러지는 규격 외의 싸움.

 

감히 이 일전에 끼어들 정신머리 없는 자는 이곳에 없었다.

 

다들 한참이나 떨어진 자리에서 잔뜩 긴장하며 결전의 행방을 기다릴 뿐이다.

 

온-누르와 여인 사이에 거리가 벌어지며 잠시 소강상태가 생겨났다.

 

앞선 전투로 인해 여인의 가뜩이나 얇던 옷이 곳곳이 헤쳐져 있었다.

 

검흔이 생긴 곳에는 어김없이 덜 마른 피가 묻어 있었으나, 상처는 보이지 않았다.

 

‘재생 능력인가? 골치 아프군. 한 방을 노려야겠어.’

 

그런 생각을 하며 상대방을 탐색하고 있을 때, 여인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상하네요.”

 

“뭐가 이상하단 말이냐?”

 

“당신은 분명 그 가주라는 자보다 훨씬 강한데, 왜 당신의 지위는 그보다 아래인 거죠?”

 

사실 전투를 치르면서도 내심 느끼고 있었다.

 

슐츠 조르디를 죽인 범인이 있다면, 이 여인일 것이 분명 하다고.

 

그리고 이번 질문으로 그 예감은 더 이상 예감만이 아니게 되었다.

 

“……네년이었구나.”

 

“아, 몰랐던 건가요?”

 

천연덕스러운 말투에 온-누르가 입술을 질겅 씹었다.

 

“슐츠 조르디였나? 그 아저씨, 내가 죽였어요. 기세등등하던 거에 비해 쉽던데요?”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무언가가 속에서부터 열화처럼 일어나는 기분이다.

 

하지만 온-누르는 분노에 사로잡혀 이성을 잃어버리진 않았다.

 

전투에 있어 냉철은 요소가 아니라 필수이니까.

 

“죽여주마.”

 

“당신 지금 심장이 쾅쾅 뛰고 있네요. 혹시 이게 복수심이라는 건가요?”

 

“수작 부리지 마라.”

 

조금이라도 정신을 흩트려 놓아 동요시킬 목적이 빤히 보였다.

 

온-누르는 즉시 대화를 끊고 재차 몸을 날렸다.

 

“대화 도중에 달려들다니, 너무 무례한 거 아닌가요? 어차피 소용도 없는데.”

 

“그거야 해 봐야 아는 법이지.”

 

허나 그런 확언과는 달리, 실질적인 유효타는 없이 의미 없는 공방이 지속된다.

 

‘이대로는 승부가 나지 않겠군.’

 

상대는 쉽사리 틈을 보이지 않았다.

 

차라리 전력으로 부딪쳐 주었다면 혹여 그 상황 속에서 결판이 날 수도 있었지만, 은발의 여인은 그러지 않았다.

 

마치 술래잡기라고나 할까.

 

물론 술래는 온-누르였다.

 

“시간을 끌려는 거냐?”

 

“음……. 일단은요? 아까야 내가 당신을 붙잡아야 하는 위치였지만, 지금은 아니잖아요? 당신이 ‘원수’인 나를 두고 등을 돌릴 일은 없을 것 같은데요?”

 

“…….”

 

“어, 설마 도망갈 생각인가요? 그럼 안 되는데…….”

 

여인의 말투와 표정은 얄밉기 그지없었다.

 

복수는 후일로 미루고 그냥 이대로 몸을 돌려 성 바깥으로 도주할까 하는 고민마저 들었다.

 

온-누르는 반드시 저 여인을 묵사발 내겠다고 다짐하며 검병을 잡은 손에 힘을 더했다.

 

그렇지만 그런 다짐이 무색하게, 여인을 잡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온-누르는 산등성이로 저물어 가는 석양을 바라보았다.

 

‘다행히도 이제 곧 밤이다. 그러면 그걸 쓸 수 있다.’

 

밀암무사 시절에 배운 암혼지공은 암살에 특화된 무공이다.

 

기척을 숨기거나 몸을 운신하는 데는 최고의 무공이지만, 정통 무공으로서는 그 한계가 명백했다.

 

그러나 온-누르는 지닌 바의 재능으로 무공을 끊임없이 자신의 식으로 개량하며 한계를 돌파했다.

 

월단(月斷) 또한 그런 과정 중에 만들어진 초식이었다.

 

암살이 아니라, 정공법을 통해 강대한 적을 상대해야만 할 때를 대비해 만들어진 초식.

 

비록 어두운 공간이 아니면 효과가 절감된다는 약점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석양조차 그 모습을 감춘 지금.

 

하늘은 일분일초가 다르게 어두워지고 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아직 최대 출력을 내기엔 충분히 어둡지는 않다는 것이었지만.

 

‘약속 시간이 다 되어 가니, 어쩔 수 없나.’

 

끈질기게 달라붙으며 공세를 일삼던 온-누르가 멀찍이 거리를 벌리고 검을 검집에 꽂아 넣었다.

 

갑작스러운 태세 변환에 여인이 의문을 표하는 것도 잠시였다.

 

“어?”

 

육안으로도 주변의 공기가 일그러지는 것이 보일 정도로 밀집되는 기의 응축.

 

그 주변의 공간마저 비틀리는 것을 바라보며 여인은 빠르게 판단을 내리기 시작했다.

 

‘이건…… 위험하겠는데?’

 

온-누르가 본격적으로 발검 자세를 취하기도 전에 본능이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막는 건 불가능하다고.

 

‘이런 건 시작 전에 기습하는 게 최선이지만…… 그것도 이미 늦었나? 어떻게든 보고 피하는 수밖에 없겠어.’

 

검이 휘둘러지기도 전이었지만, 그 일각의 순간 속에서 여인은 빠르게 판단을 내렸다.

 

‘온다!’

 

제자리에 우두커니 선 여인은 마지막까지 온-누르를 향해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찢겨진 소매 사이로, 그의 팔 근육이 움직인다.

 

그렇게 검집에서 검이 뽑히는 순간.

 

마치 공간 전체가 가로로 절단이 나듯, 온-누르의 위치서부터 원뿔 모양의 반경으로 거대한 선이 그어졌다.

 

휘이이이잉!

 

공기가 찢어지는 거대한 파공음이 들려온 것은 그 이후의 일이었다.

 

꿀꺽.

 

누군가 침 삼키는 소리를 시작으로 반경에 있던 나무들과 석제 건축물이 매끄러운 절단면을 남기고 바닥에 쓰러지며 흙먼지를 일으켰다.

 

단 일검에 이 모든 일을 불러일으킨 온-누르가 나지막한 감상을 내뱉었다.

 

“아무래도 생포는 포기해야겠군.”

 

은발의 여인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그렇다고 멀쩡한 상태는 아니었다.

 

목 아래 왼쪽 쇄골부터 사선으로 어깻죽지가 그대로 날아가 있었다.

 

비록 출혈이 벌써 눈에 띌 정도로 멎기는 하였지만, 저 기괴망측한 재생 능력으로도 단숨에 팔죽지를 만들어 내진 못하는 듯했다.

 

아무튼 이번 일격으로 전세는 뒤집혔다.

 

치명상은 아니지만, 그래도 균형을 완전히 일그러트릴 만큼의 중상을 입혔다.

 

만약 여인이 평소에 팔 하나를 잘라 놓고 움직이는 훈련을 했다면 모를까. 이제 예전만큼 재빠르게 움직이지는 못할 것이다.

 

“어디 이번에도 피할 수 있나 보자고.”

 

겉보기에는 기세등등한 모습의 온-누르였지만, 속으로는 혹시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승리를 벌써 확신하기엔 상대에 대한 정보가 너무 적다.

 

온-누르는 그간의 경험을 통해 언제나 화를 부르는 것은 방심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렇게 운에 맡겨야 하는 싸움은 마음에 안 들지만 어쩔 수 없나.’

 

온-누르가 상대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기껏해야 상대가 인간이 아니라는 것과, 병장기가 아닌 자신의 육체를 무기로 사용한다는 점뿐이었다.

 

시간의 여유가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완전하게 상대방의 능력을 파악한 이후에 결정적인 수를 나누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없었다.

 

아직 상대방의 패가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못내 그를 찜찜하게 만들었지만, 온-누르는 마음을 다잡았다.

 

이미 결정을 내린 이상 불안 따위는 쓸모없는 감정이었다.

 

지금 이 순간 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닌 확신.

 

‘숨겨 둔 패가 있었으면, 진즉에 사용했을 거다. 시간을 주지 않고 단숨에 끝낸다.’

 

만약 그것이 실패로 돌아가면, 복수는 후일로 미루고 주저 않고 도주한다.

 

짧은 시간 계획을 정리하고 결심을 끝마친 온-누르는 다시 발검 자세를 취했다.

 

은발의 여인 또한 가만히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번에도 가만히 당할까 봐서요?”

 

그녀는 부상도 아랑곳 않고 온-누르를 향해 일직선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팔 하나가 통째로 날아간 사람이라기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온-누르는 그 행동에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준비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모양이군.’

 

월단을 펼치려면 일말의 시간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 시간은 사실 그리 길지 않다. 겨우 3초쯤 될까.

 

하지만 온-누르는 첫 번째 월단을 펼칠 때 일부러 시간을 더 끌었다.

 

혹시나 이번 일격으로 해치우지 못했을 상황을 염두에 둔 잔재주였다.

 

‘조금만 더 가까이……. 그래, 지금이다.’

 

온-누르의 검이 반달 모양의 궤적을 남기며 휘둘러짐과 동시에, 여인은 초인 같은 반사 신경으로 공중으로 도약한다.

 

지면을 박차고 허공에서 회전하는 그녀의 몸 아래로 온-누르의 검격이 스치듯 지나간다. 비록 몸뚱이째로 양단을 내지는 못하였지만, 나머지 오른쪽 팔이 몸과 분리되며 피가 흩뿌려진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여인은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외려 공중에서 무언가 발을 디딘 것처럼 한 번의 가속을 거친 후, 보다 민첩하게 한 줄기의 선을 그리며 온-누르를 향해 날아들었다.

 

‘살을 버리고 뼈를 취하겠다는 건가?’

 

그 순간의 간극 속에서 온-누르는 신중히 판단을 내리기 시작했다.

 

두 팔은 베었다.

 

이제 그녀에게 남은 공격 수단은 두 다리뿐.

 

방심은 금물이나, 이렇게 되면 위협적인 공격 경로를 예측하긴 한결 쉬워진다.

 

‘암만 괴물이래도 심장이 찔리면 어쩔 수 없겠지. 끝이다.’

 

온-누르는 다시금 검을 회수한 이후 여인의 심장을 향해 검을 내찔렀다.

 

푹.

 

살을 꿰뚫는 불길한 소리와 함께 단말마의 신음이 들려온다.

 

“큭.”

 

온-누르의 입에서 파생된 소리였다. 그는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내려 자신의 복부를 확인했다.

 

분명 앞선 전투 속에서 두 팔을 잃었던 여인의 팔이 근육을 꿰뚫고 팔뚝까지 깊게 박혀 있었다.

 

‘겨우 그 짧은 사이에 팔을 재생해 냈다고?’

 

이 정도의 재생 능력을 갖고 있을 거라곤 예상치 못한 자신의 실수였다.

 

“밤이 되면 강해지는 건 당신뿐만이 아니라고요?”

 

‘시간을 끌던 건 그래서였나.’

 

다만 팔 하나를 통째로 순간 재생시키는 일은 여인에게 있어서도 다소 무리가 있었던 듯하다.

 

여인의 모습은 이전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괴물 같은 게 아니라 정말로 괴물이었군.”

 

힘을 과하게 쓴 탓일까.

 

여인의 창백하던 피부는 불그스름하게 달아오르다 못해 펄펄 수증기를 내뿜고 있었고, 온갖 힘줄들이 두껍게 돋아나 기이한 행색이었다.

 

“그런 말…… 실례라구요?”

 

“그래, 아직 여유가 있단 말이지…….”

 

이 얼마나 반칙적인 신체 능력이란 말인가.

 

이에 대해 온-누르는 가타부타 쏟아 내고 싶은 불평이 많았으나 삼켜 냈다.

 

지금은 상대의 가공할 능력에 감상평을 늘어놓을 때가 아니었다.

 

이미 상대에게 치명적인 일격을 입고 말았다.

 

아직 통증조차 제대로 전해지지는 않았지만, 몸에서 기력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진다.

 

하지만 다행히도 아직 완전히 수 교환이 끝난 건 아니다.

 

한차례의 기회가 남아 있다.

 

그 기회를 살려 적어도 상대에게 어느 정도의 부상을 입혀야 한다.

 

온-누르는 이를 악물었다.

 

검을 쥐지 않은 왼쪽 팔로 여인의 팔을 움켜잡았다.

 

지금 자신이 뭘 하려는지 알아챈 것일까?

 

여인의 얼굴에 낭패한 기색이 어린다.

 

온-누르는 전력을 다해 사선으로 검을 휘둘렀다.

 

“읏!”

 

그 누구도 피할 수 없을 것이라 여긴 일격이었다.

 

그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앞서 재생한 오른팔처럼, 이미 떨어져 나가 아직 출혈도 멎지 않은 왼 팔이 순식간에 재생한 것이다.

 

도마뱀이 꼬리를 자르듯, 여인은 새로이 자라난 왼팔로 온-누르에게 단단히 붙잡힌 자신의 오른팔을 내리침과 동시에 지면을 박차며 그에게서 떨어졌다.

 

“끼으야아야야!”

 

그 어떤 짐승에게서도 들어 본 바 없던 비명이 울려 퍼진다.

 

그 소름 끼치는 비명에 장중에 인파들은 한결같이 인상을 찌푸렸다.

 

이십 보가량 떨어진 곳에 착지한 여인의 몰골은 더욱 기괴해져 있었다. 피부는 시뻘겋다 못해 터질 것처럼 속에서 흐물거렸다.

 

온-누르는 입가에 흐르는 피를 대충 소매로 닦아 낸 뒤 씨익 웃었다.

 

“이건 기념품으로 가져가마.”

 

온-누르는 자신의 하복부를 관통한 여인의 팔을 뽑아내지도 않고 즉각 자리에서 사라졌다.

 

“아앗!”

 

숨죽이며 이를 지켜보던 헤스갈이 고통스러워하는 여인을 향해 뛰어갔다.

 

“빨리 잡으러 가시오! 놓치면 안 된단 말이오!”

 

그러나 헤스갈의 재촉은 더 이어질 수 없었다.

 

“어헉, 컥!”

 

“어서, 어서 피를 내놔……!”

 

어느새 목을 옥죄고 공중에 치켜 올린 여인이 그의 목에 이빨을 박아 넣은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헤스갈의 몸이 눈에 띄게 야위어 갔다.

 

그리고 그와 반대로 만신창이였던 여인의 몸 상태는 눈에 띄게 호전됐다.

 

이윽고 헤스갈이 거의 피골이 상접한 몰골로 변할 때가 되어서야, 여인은 그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다행히 아직 그의 숨은 붙어 있었다.

 

여인은 온-누르가 사라진 방향으로 무시무시한 눈빛을 쏘아 보냈다.

 

“온-누르라……. 반드시 뼈째로 씹어 먹어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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