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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믿는 것은 검 29화

무료소설 내가 믿는 것은 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820회 작성일

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29화

029. 예선

 

 

안톤은 어서 그 시선의 주체를 확인해 보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찰랑이는 금발에 푸른 눈동자.

 

이곳에선 드문 북부인 특유의 하얀 피부.

 

일전에 영빈루라는 이름의 객잔에서 시비가 있었던 그 남자 자신을 쏘아보고 있었다.

 

‘저 녀석도 여기 참가하나 보군.’

 

금발 남자는 안톤의 눈을 피하지 않고 되려 뚫어지게 응시했다. 어렴풋이 느낀 악의가 사실로 판명되는 순간이었다.

 

슬며시 입꼬리를 올린 남자자 자리에서 일어나 안톤을 향해 다가온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하더니, 그짝이 따로 없구나.”

 

바로 지척까지 걸어와서 안톤을 내려다보는 남자의 눈빛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그나저나 원수라니.

 

조금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박수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것이다. 그런데 그의 형인 클린턴 제오르라면 모를까.

 

사실 그간 안톤은 그에 대하여 그다지 깊게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잠시 그를 올려다보던 안톤은 다시금 눈을 감았다.

 

이런 부류를 상대하는 것은 시간 낭비라는 생각에 아예 신경을 꺼 버린 것이다.

 

그런데 그런 행동이 못내 그의 화를 부추긴 것일까.

 

“감히 노예 따위가 나를 무시해?”

 

씩씩거리는 금발 남자가 언성을 높였다.

 

그리고 동시에 안톤의 멱살을 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

 

예전과 마찬가지로 그 행동은 실행되지 못하였다.

 

착!

 

어느새 눈을 뜬 안톤이 그 손을 거세게 내쳐 버린 것이다.

 

안톤은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신중히 생각했으면 좋겠군. 지금 이 자리엔 당신의 형이 없으니.”

 

마지막 말이 남자의 역린을 건드리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이 망할 노예 새끼가!”

 

온 힘을 다한 주먹이 안톤의 안면부를 향해 날아왔다.

 

하지만 그 행동은 안톤이 이를 피하거나 막아 내기도 전에 제지되었다.

 

“그만하십시오! 대전 외의 장소에서 상해를 입히면 곧바로 실격입니다!”

 

황급히 뛰어온 이십 대의 남성이 뒤에서 그를 끌어안아 말린 것이다.

 

왼쪽 어깨에 찬 흰색 완장이 그가 소천교의 진행을 돕는 행정관 중 하나라는 걸 알려 주었다.

 

안톤은 가만히 있지 않고 한 마디를 첨언했다.

 

“그렇다는군.”

 

“이 자식이! 비아냥거리는 거냐?”

 

“그렇게 들었다면, 제대로 들은 게 맞다.”

 

양측 모두 물러섬 없이 날 선 대화를 이어 가자 분위기가 가열될 조짐이 보였는지, 행정관이 그 중간에 끼어들었다.

 

“그만들 하시지요!”

 

먼저 물러난 것은 금발 남자였다.

 

“젠장…… 지금 당장은 그렇게 기세가 등등하지만 머지않아 울상으로 만들어 주마.”

 

“그래, 언젠가 그럴 수 있다면.”

 

안톤의 대답에 뭔가 의문점이라도 생겼는지, 금발 남자의 표정이 애매모호하게 변했다.

 

“너 설마 아직도 대전표를 확인 안 한 거냐?”

 

그제야 안톤은 고개를 돌려 벽보를 확인했다.

 

다들 자신의 대전표를 다시 확인하는 것을 끝마쳤는지 앞은 한산했고, 가려지지 않은 시야로 대전 상대의 이름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헤일스 제오르.

 

“아. 헤일스 제오르가 당신이었군?”

 

안톤은 원래 그가 안중에도 없었다는 듯 되물었다.

 

어느 정도 옳은 말이긴 하지만, 대전표를 확인했다면 바로 상대가 누군지 알 수 있었을 것이다.

 

헤일스라는 이름은 알지 못하지만, 제오르라는 성이 그리 흔한 편은 아니니까.

 

“기분 나쁜 새끼. 금방 곤죽을 내 주지.”

 

퉤.

 

어정쩡하게 대치 중인 행정관을 잠시 째려보던 헤일스는 보란 듯이 바닥에 침을 내뱉고는 사라졌다.

 

“에휴…….”

 

행정관은 그 무례한 행동에 무언가 한차례 쏘아 내고 싶은 듯하였지만, 한숨으로 대체하였다.

 

그러고는 안톤에게 다른 소란을 벌이지 말라고 주의를 주며 본래 자리로 떠나갔다.

 

‘그나저나 다음 상대가 저 녀석이라니. 기대되는군.’

 

헤일스는 안톤을 보고 원수라고 말하였다.

 

그것도 이까지 바득바득 갈면서 말이다.

 

틀린 말은 아닐지 모른다.

 

물론 헤일스만큼이나 격한 감정은 아니겠지만, 자신 또한 헤일스에게 앙심을 품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재밌겠어.”

 

안톤은 다시금 호명되기 전까지 무기를 닦기 시작했다.

 

 

* * *

 

“조르디가의 안톤과 펭 제국 제오르가 사남 헤일스 제오르. 양측 모두 본인이 맞습니까?”

 

“그렇다.”

 

“그렇습니다.”

 

의무적인 신분 확인이 끝나고 둘은 시합장으로 들어섰다.

 

사실 시합장이라고 하기에도 무색하다.

 

그저 맨바닥에 선을 그어 놓았을 뿐이고, 그마저도 숫자가 열이 넘어간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옆의 시합장에서는 예선을 치르고 있다.

 

관중도 없다.

 

참관을 원하는 지인이나 동료들이 간혹 가다 자리를 지킬 뿐이다.

 

안톤은 잠깐 신경을 다른 곳에 집중했다.

 

시합장 바깥, 심판의 근처에서 무심한 시선을 보내오는 남자에게였다.

 

‘클린턴 제오르, 여기서 또 보는군. 그래도 동생이라는 건가?’

 

하긴 그러니까 본인은 참가하지도 않는 대회에 따라온 것일 테다.

 

‘먼 길을 왔지만 아깝게 됐군.’

 

헤일스 제오르는 예선에서 떨어질 테니까.

 

그렇게 안톤이 속으로 업신여기는 것을 알기나 하는지, 헤일스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비릿한 미소를 지어냈다.

 

“암만 수련해 봤자 외공은 기공을 넘어설 수 없다는 걸 알려 주마.”

 

순간 안톤은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내가 외공을 익혔다고 생각하나?”

 

헤일스는 마치 안톤이 숨기고 싶어 하는 비밀을 알아챈 것처럼 기세등등해졌다.

 

“그럼 네 몸에 마나가 없다는 것을 모를 줄 알았냐? 멍청한 놈. 이래서 근본 없는 것들은 안 된다니까?”

 

마나 유저란 마나를 느끼고 사용하는 경지를 얘기한다.

 

그리고 마나를 느낀다는 것은 상대방의 무위를 어느 정도 추측할 수 있다는 뜻이다.

 

물론 정말 수준이 높은 무인들은 지닌 마나를 감추는 것도 가능해지지만, 헤일스는 그러한 경우는 염두에도 두지 않는 듯했다.

 

“내 팔을 잡은 그 악력. 외공이 아니라면 설명이 안 되지.”

 

“그래서? 내가 설령 외공을 익혔다 한들, 그게 지금이랑 무슨 상관이지?”

 

“삼류도 안 되는 찌끄러기들만 상대하다 보니 감이 안 잡히나 본데, 나를 만난 이상 너는 이제 끝이라 이거지.”

 

“그런가?”

 

“이 자식이 아직도 상황을 파악 못 하고!”

 

상황 파악을 못 하는 건 과연 어느 쪽을 말하는 것일지.

 

물론 자신이 상식이나, 인간관계에 대한 눈치가 적은 편이기는 하다.

 

그러니까 린디아스와의 관계가 서먹해져 한 달이나 얼굴을 보지 못한 것일 테고.

 

하지만.

 

“상황은 파악 못 할지 몰라도, 이거 하나는 알지.”

 

안톤이 씨익 웃었다.

 

“입으로 떠드는 놈치고 제대로 된 놈 없다는 거.”

 

헤일스의 하얗던 낯빛이 붉게 물들었다.

 

오를 대로 열이 뻗쳤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무인으로서의 마지막 평정심을 지키려는 것일까.

 

외려 마음을 다잡은 헤일스는 이를 꽉 물었다.

 

“단 한 번에 검과 함께 통째로 이등분 내주마.”

 

꼭 그러겠다는 집념이, 헤일스의 눈에 비쳤다.

 

이에 따라 안톤도 그에게 약속을 해 주었다.

 

“그 말 똑같이 돌려주지. 살인을 하면 실격이 되니 통째로는 아니고, 검만 이등분을 내 주마. 단 한 번에.”

 

서두가 너무 길었던 탓일까.

 

상황을 유심하게 관망하던 심판이 어느 때보다 힘 있게 깃을 내렸다.

 

그럼으로써 안톤의 예선 마지막 시합이 시작됐다.

 

‘으음.’

 

썩어 빠진 것은 인성일 뿐.

 

무인으로서 완전히 글러먹은 건 아니었다는 것일까.

 

헤일스는 분노와 이성은 양립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 냈다.

 

시합이 시작하고 곧장 달려들 것만 같던 헤일스는 예상과 달리 잠시간 거리를 유지하며 안톤을 탐색했다.

 

물론 그 시간이 길지는 않았다.

 

금방 단전의 기를 체내에 순환시킨 헤일스는 순식간에 자리를 박찼다.

 

재빠르게 휘둘러지는 그의 검신에는 붉은빛의 검기가 은은하게 흐르고 있었다.

 

‘검기라니, 설마 오러 유저였을 줄이야….’

 

이로써 마나 유저 정도 될 것이라던 예상은 빗나갔다.

 

‘그래도 뭐, 상관은 없나.’

 

세찬 기세로 휘둘러지는 붉은빛의 검기.

 

그러고보면 전생에서의 클린턴 또한 붉은빛의 마나를 사용했었다.

 

아무래도 붉은색의 마나는 제오르가만의 특성인 듯하다.

 

안톤은 이를 보며 씩 웃었다.

 

‘그와 비교하기엔 턱없이 부족해.’

 

검강이 아닌 검기.

 

게다가 이를 펼치는 검술 또한 깊이가 얕기 그지없지 않은가.

 

매섭게 검기가 날아들고 있는 와중이었으나, 안톤의 표정은 무덤덤했다.

 

그리고 그게 반응조차 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여긴 헤일스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금방이라도 무식하리만치 커다란 대검을 비롯해 몸까지 통째로 베어 낼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담긴 미소였다.

 

하지만 그 미소는 둔탁한 마찰음과 함께 지워졌다.

 

팅!

 

안톤은 헤일스의 검을 막는 데 그치지 않고 그대로 힘을 주어 튕겨 냈다.

 

“이런!”

 

육중한 대검이 휘둘러지며 그에 대한 반발력으로 헤일스의 몸이 공중에 떴다.

 

하지만 헤일스 또한 단련된 무인.

 

허공에서도 금방 무게중심을 되찾은 헤일스는 두 다리로 지상에 착지했다.

 

그러나 그의 눈은 믿을 수 없다는 듯 크게 치켜떠져 있었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돼.”

 

분명 헤일스는 안톤이 검에 마나를 주입하는 기색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안톤의 대검은 부러지기는커녕, 흠집조차 나 있지가 않았다.

 

평범한 철검이 검기를 막아 내다니.

 

헤일스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가만, 설마 아티팩트?”

 

실로 올바른 추측이었다.

 

경악하던 헤일스의 눈에 경멸의 기색이 어렸다.

 

“비겁한 자식. 믿고 설치는 이유가 그거였단 말이지.”

 

육중한 대검을 실전에서 사용할 수 있을 만큼의 외공.

 

마나를 사용하지 못한다는 약점을 보완해 주는 검기조차 막아 내는 단단한 마법검.

 

결코 후일 높은 경지에는 오르지 못하겠지만, 지금 당장은 나름대로 꽤나 균형이 잡혀 있기는 하다.

 

다만 헤일스는 안톤이 검술 측면에서는 한참이나 부족하리라 여겼다.

 

“그럼 언제까지 버티나 보자고!”

 

헤일스가 다시금 재빠르게 몸을 날렸다.

 

검을 베어 낼 수 없다면, 이를 피해 몸을 노리면 된다는 생각에서였다.

 

물론 착오였다.

 

헤일스는 가문의 검술을 그 어느 때보다 유연하게 펼쳐 내었으나 번번이 안톤의 검에 가로막혔다.

 

“젠장. 젠장!”

 

분통을 금치 못하던 헤일스의 검세가 점점 더 난폭하게 변하였다.

 

평정을 잃었다는 뜻이다.

 

왠지 모르게 그 모습을 보자니 조금 우스웠다.

 

“한 번에 통째로 베어 내겠다더니, 그 한 번이 너무 길군. 말뿐이었던 건가?”

 

헤일스는 수치와 모멸감에 몸을 바르르 떨었다.

 

그리고 이내 무언가 결심했는지 악을 쓰듯 소리쳤다.

 

“이것까지는 사용하지 않으려 했는데. 네가 명을 줄이는구나!”

 

그때 헤일스가 차고 있던 팔찌가 눈부신 광채를 내기 시작했다.

 

동시에 팔찌의 푸른 보석으로부터 육안으로 확인이 될 정도로 방대한 양의 마나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 마나들은 모조리 헤일스의 검으로 스며들다 못해 넘치듯 일렁거렸다.

 

“오러?”

 

검 위에 마나가 넘치듯 일렁거리는 모습은 불안정하였지만 분명히 오러였다.

 

“헤일스!”

 

장외에 참관하던 클린턴이 무언가 말리고 싶은 듯 소리를 쳤지만, 헤일스는 못 들은 척 무시했다.

 

안톤의 검은 프로텍트 마법만이 삼중으로 중첩된 무기로, 검만으로도 검기를 막아 낼 만큼 단단하다.

 

하지만 검강. 오러의 경우는 다르다.

 

단순한 보호 마법으로 막아 내기엔 오러가 지닌 위력은 절대적이었다.

 

“죽여주마!”

 

안톤은 그 일각의 시간 동안 눈을 감고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그 집중의 시간 동안 필히 베어 낸다는 강렬한 의지를 그의 검에 고스란히 담아냈다.

 

톤은 눈을 떴다.

 

“내가 아까 약속했지.”

 

주춤할 것이라 생각한 것도 아니었고, 또 그럴 목적으로 꺼낸 말도 아니었다.

 

“닥치고 이제 그만 죽어라!”

 

공기를 찢는 오러의 파공음이 매섭게 들렸다.

 

그리고 그와 함께.

 

“단 한 번에 베어 버리겠다고.”

 

슥.

 

마치 유들한 봄바람이 불듯.

 

미약한 소리와 함께 휘둘러진 안톤의 대검은 헤일스의 오러를 반으로 가르고 지나가 그의 목젖 부분에서야 멈춰 섰다.

 

“이런 말도 안 되는…….”

 

그렇게 헤일스가 부러진 검을 내려다보며 망연자실해하고 있을 때.

 

심판이 시합장에 들어섰다.

 

그러나 심판은 안톤의 손을 들어주지 않고, 예상치 못한 말을 던졌다.

 

“양측 모두 아티팩트를 사용한 것으로 확인되었으니, 규칙을 어긴 것으로 판명되어 실격이오!”

 

다소 어이없는 결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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