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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믿는 것은 검 27화

무료소설 내가 믿는 것은 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838회 작성일

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27화

027. 충고

 

 

안톤은 그녀의 시선을 따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 끝에는 붉은 수실로 용이 새겨진 흑포를 입은 흑발의 남자가 있었다.

 

분명 방금 전에, 린디아스는 저자를 보고 오라버니라고 했다.

 

‘그렇다면 저 남자가 바로 그 용살검 헤스갈 조르디겠군.’

 

다부진 체격과 반듯한 자세. 그리고 풍기는 분위기에서 상대가 수준급의 무인이라는 걸 경험으로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용을 죽인 검이라기엔 꽤나 평범하지 않은가.

 

안톤은 눈살을 찌푸렸다.

 

‘여러모로 편리한 몸이긴 하다만……. 상대의 수준을 알 수 없다는 건, 이건 꽤나 답답하군.’

 

파의 과정을 겪으며 안톤은 단전을 부쉈다.

 

안톤은 이것을 반쪽짜리 각성이라고 불렀다.

 

평상시 숨을 내쉴 때마다 공기 중에 분포한 마나가, 폭발의 여파를 이용해 넓어진 전신의 세맥들을 순환한다.

 

그 덕에 추위도, 더위도 느끼지 않으며 상시적으로 초인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몸을 얻었다.

 

대신, 단전이 없기에 기의 운용은 불가능하다.

 

검기나 검강을 뽑아낸다거나 하는 발현은 물론, 기를 이용해 상대방을 탐색하는 식의 운용법 또한 마찬가지다.

 

‘아무튼 저 나이에 오러 유저라니. 역시 조르디가라는 건가.’

 

안톤은 전생의 자신이 사십이 되어서야 오러 유저가 되었던 것을 떠올렸다.

 

“넬. 몸이 안 좋아 집회에 참가하지 못하겠다던 네가 왜 여기 있는 것이냐? 그리고 이건 또 뭔 소란인 것이고?”

 

“그게…….”

 

헤스갈은 자신의 물음에 말꼬리를 흐리는 린디아스를 보며 매몰찬 태도를 이어 나갔다.

 

“됐다. 자세한 건 이따가 듣기로 하고, 일단 상황부터 정리하자꾸나. 이보게, 자네가 그 온-누르 공께서 데려와 제자로 삼았다는 북부의 노예, 안톤이라는 자인가?”

 

헤스갈이 풍기는 지고한 분위기 탓일까.

 

하대는 없었지만, 자연스레 아랫사람에게 말을 이르는 듯한 말투였다.

 

“그렇소. 그러는 당신이 소공자 헤스갈 조르디요?”

 

“하하. 통성명을 하기 전에 일단 그 손부터 놓아주는 게 어떤가? 그는 일단은 내 일행 중 한 명인데.”

 

안톤은 곧바로 대답하기보단, 먼저 린디아스에게 눈짓을 보내 의사를 물어보았다.

 

의미를 전달받은 그녀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안톤이 금발 남자를 잡은 손에서 힘을 풀었다.

 

“이 자식이!”

 

“헤일스!”

 

계단에서 들려온 격노한 외침에, 금방이라도 안톤을 향해 덤벼들 것 같던 금발 남자가 몸을 움찔했다.

 

그 외침은 헤스갈이 아니라, 후에 내려온 다른 한 남자의 것이었다.

 

귀밑까지 짧게 친 금발에 호쾌한 인상.

 

남자의 키는 작은 편이었지만 어깨는 떡 벌어져서 그런지 그리 작아 보이지만은 않았다.

 

‘어쩐지 눈에 익은데……. 아!’

 

아까 전의 린디아스처럼, 안톤의 눈이 놀란 듯 치켜떠졌다.

 

‘클린턴 제오르?’

 

펭 제국의 세 번째 오러 마스터이자, 전생에 안톤이 마지막 일전을 벌였던 상대였다.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이야…….’

 

전생에선 전쟁 중에 만난 것이니 어쩔 수 없는 만남이라 쳐도, 이번엔 아니었다.

 

이 넓은 대륙에서 우연히 마주칠 확률이 몇이나 될까.

 

무언가 보이지 않는 인연이라도 있는 것 같지 않은가.

 

“헤일스, 또 내 말을 어겼구나. 내가 분명 조용히 다니라고 말했을 텐데?”

 

이미 몇 차례나 비슷한 경우가 있었던 듯, 그는 자세한 경위도 묻지 않았다.

 

“아니, 형님! 그게 아니고요…….”

 

그는 무언가 변명을 하려는 듯했지만 클린턴은 들어주지 않았다.

 

짝!

 

그 누구도 반응하기 전에 매서운 손길이 날아들었다.

 

이에 가격당해 저 구석에까지 날아가 패대기쳐진 금발 남자는 주변 기물들을 부수며 그대로 혼절했다.

 

이후 클린턴 제오르는 총 세 번 고개를 숙였다.

 

그 첫 번째는 린디아스를 향해서였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겠소. 막냇동생을 오냐오냐 키운 내 잘못이오. 진심으로 사과드리겠소.”

 

“아, 아니. 괜찮아요…….”

 

두 번째는 노심초사 발을 동동 굴리던 종업원에게였다.

 

“망가진 기물에 대해선 합당한 금액을 제시한다면 후일 찾아와 대가를 치르겠소.”

 

하얗게 질려 있던 종업원의 얼굴에 혈색이 돌았다.

 

클린턴은 마지막으로 헤스갈 조르디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유감이지만, 오늘은 함께 자리를 못 할 것 같습니다. 저는 못난 동생을 데리고 돌아가 보겠습니다.”

 

헤스갈은 다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지요.”

 

클린턴은 안톤과 린디아스를 지나쳐 정신을 잃은 동생을 어깨에 들쳐 멨다.

 

큰 덩치를 지닌 동생에 비하면 근 두 배가량 작은 체구의 클린턴이었지만, 그 동작은 아주 가벼웠다.

 

뚫어져라 쳐다보는 안톤의 시선이 못내 마음에 걸린 것일까.

 

클린턴이 안톤을 향해 물음을 던졌다.

 

“음…… 혹시 날 본 적이 있나? 묘하게 낯이 익은 것 같기도 하고.”

 

“초면이오.”

 

“그런가? 나는 또 우리가 어디서 만난 적이 있는가 싶었지. 아무튼 이런 곳에서 같은 북부인을 만나니 반갑군.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또 보세.”

 

클린턴은 그렇게 갑작스레 등장해 순식간에 상황을 정리시키고 자리를 떠났다.

 

이제 이곳에는 헤스갈과 안톤, 무언가 초조한 기색을 띠는 린디아스만이 남았다.

 

“넬.”

 

“네, 오라버니.”

 

“일단 오늘은 시간이 늦기도 하였고, 나도 다시 위층의 모임에 돌아가야 하니 오늘 일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본가로 돌아가서 하도록 하겠다.”

 

“네…….”

 

헤스갈의 시선을 받은 린디아스는 안톤이 보기에도 뭔가 겁에 질려 있었다.

 

안톤은 속에서 알 수 없는 답답함이 느껴졌다.

 

스스로가 먼저 그 감정을 정의 내릴 수 없었기에 그 감정은 더했다.

 

“그리고 자네. 안톤이라고 했던가?”

 

안톤은 시선을 피하지 않고 헤스갈과 눈을 마주쳤다.

 

그의 눈은 시종일관 고요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읽을 수가 없었다.

 

“넬이 이렇게 남자와 단둘이 술을 마시는 광경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어서 그러는데, 혹시 자네와는 무슨 관계인지 알 수 있겠는가?”

 

“그냥 아는 사이입니다. 오늘은 그저 공녀님께서 제 부탁을 거절치 못하고 한차례 어울려 주신 것뿐입니다.”

 

“그런가? 그럼 다행이군. 아무튼 오늘은 날이 늦었으니 돌아갈 때까진 내 동생을 잘 부탁하네.”

 

“알겠습니다.”

 

이렇게 상황이 일단락되어 가나 싶던 찰나였다.

 

헤스갈은 굳은 표정으로 서 있는 안톤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다음부터는 이렇게 사석에서 둘이 만나는 것은 되도록 피해 줬으면 하네.”

 

헤스갈은 인자한 웃음을 떨궈 내며 말을 이었다.

 

“이해해 주게. 벌써부터 외간 남자와 돌아다닌다고 소문이 나면 내 동생의 혼삿길에 방해가 되지 않겠는가?”

 

툭툭.

 

헤스갈이 안톤의 어깨를 토닥였다.

 

“조르디가의 장남으로서 어쩔 수 없는 고민이니, 그럼 부탁 좀 하겠네.”

 

안톤은 린디아스를 바라보았다.

 

아까처럼 그녀의 의중을 먼저 묻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안톤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명심하지요.”

 

안톤은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도망이라도 가는 사람처럼 황급히 계산하고, 조르디가의 성채까지 돌아오는 길 내내 둘은 어색한 침묵 속에서 이보가량 떨어져 걸었다.

 

성문 앞에 도착해서는 어느새 어두컴컴하니 날이 완전히 저물어 있었다.

 

둘은 그 앞에서 아무런 말 없이 잠시 머뭇거렸다.

 

“미안해요.”

 

“뭐가 말씀이십니까?”

 

아무렇지 않은 듯한 태도로 되묻는 안톤을 보며, 린디아스는 울컥했다.

 

“……미안하다는 말은 취소할게요. 당신은, 아무렇지도 않군요.”

 

나와는 달리.

 

린디아스는 뒷말을 꿋꿋이 참아 냈다.

 

그리고 흔들리는 눈망울을 다잡아 내며 고개를 들어 안톤을 바라봤다.

 

“이만 들어가 보세요. 오늘은 꽤 즐거웠어요. 당신은 아닐 수도 있겠지만.”

 

처음 보았을 때처럼, 넬은 쌀쌀한 말투로 작별을 고하며 먼저 성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어렵군…….”

 

세상에는 참 알 수 없는 것이 많다는 생각을 하며, 안톤은 한참이나 앞을 서성이며 감정을 정리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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