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믿는 것은 검 26화
무료소설 내가 믿는 것은 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02회 작성일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26화
026. 조우
린디아스가 안톤을 데리고 향한 곳은 오리 고기를 전문으로 취급하는 가게였다.
아침 일찍 가서 그런지 가게 내부에는 사람이 몇 없었고, 육질도 갓 잡은 듯 신선했다.
남부 특유의 음식답게, 단순한 고기 요리에도 수많은 향신료가 들어갔는데 북부인인 안톤에게도 제법 입맛이 맞았다.
다만 안톤은 음식에서 조금 맵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는데, 린디아스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했다.
“그럼 입가심을 해 볼까요?”
식사를 마친 안톤과 린디아스는 시장 거리를 돌아다녔다.
검객의 나라 소우든답게, 시중에조차 병장기를 소지하고 배회하는 이들이 많았다.
대전쟁이 발발하기 이전까진, 일반인들의 병장기 소지가 엄격히 제한되던 북부와는 조금 다른 풍토였다.
이후 해가 중천에 떴지만 점심은 거르기로 했다.
대신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시도 때도 없이 군것질을 해 댔다.
입만 닿았는데 혀가 미치도록 아려 오는 매운 닭 꼬치.
사람의 얼굴만 한 크기의 왕만두.
이것들은 그러려니 해도 사람 먹는 음식인가 싶을 정도로 기상천외한 것들도 많았다.
음식뿐만 아니라 이곳의 지역민들의 문화, 다양한 용도의 물건들을 구경하다 보니 어느새 서서히 해가 저물기 시작했다.
이제 슬슬 성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온종일을 돌아다녔음에도 아직 기운이 남는지, 린디아스는 아쉬운 얼굴이었다.
석양을 등지고 선 그녀는 작게 홍조 어린 얼굴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우리…… 술이나 한잔할래요?”
“술…… 말씀이십니까?”
생각지도 못했던, 뜻밖의 말이었다.
‘술이라…….’
안톤은 전생에서도 술을 그리 즐기지 않는 편이었다.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술에 취해 정신이 몽롱해지고 흐릿해지는 것이 거북했다.
그렇게까지 술이란 것이 맛있는지도 모르겠고 말이다.
혹시 술잔을 기울이며 속 얘기를 풀어 놓을 대상이라도 있었으면 모를까, 그런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뭐, 조금이라면야…….”
긴장하던 린디아스의 얼굴에 그제야 화색이 돌았다.
“네. 여기 근처에 굉장히 유명한 곳이 있어요. 그쪽으로 가요.”
발검음을 다시 옮긴 둘은 얼마 가지 않아 걸음을 멈추었다.
영빈루(迎賓樓).
4층 규모의 으리으리한 전각 앞에서였다.
“손님을 맞는 다락이라……. 외관에 비해 검소한 이름이군요.”
“이제는 잘 읽네요.”
린디아스가 입가를 가리며 조곤하게 웃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넷이나 되는 종업원들이 고개를 숙이며 맞아 주었다.
“두 분이십니까?”
“네.”
둘은 종업원의 안내를 받으며 3층에 위치한 자리에 앉았다.
잠시 고민을 하던 린디아스는 거침없이 음식들을 주문했다.
“이거랑 이거…… 그리고 술은 음…… 이거로 주시겠어요?”
“동파육과 백로탕, 금존청 주문받았습니다. 금방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허하기만 하던 넓은 식탁은 금방 술상으로 차려졌다.
그렇게 첫 술을 따르고 있자니, 문득 전생의 일이 떠올랐다. 그리 좋지 않은 기억이었다.
안톤이 술을 처음 마신 것은 코르보 백작 부인에 의해서였다.
그녀는 각인 명령을 사용해 안톤의 한계치까지 억지로 술을 마시도록 했었다.
인사불성이 되어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안톤을 보며 백작 부인은 즐거워했었다.
‘이번 생에 첫 술도 여자와인가…….’
앞에 앉은 린디아스는 즐거운 얼굴로 재잘재잘 떠들고 있었다.
‘나쁘지 않을지도…….’
“그럼 건배할까요?”
“건배 말씀이십니까? 여기 남부에도 그런 문화가 있었나 보군요.”
사람 사는 곳은 어디든 비슷한 것 같았다.
술이 한두 잔 오가자, 린디아스의 낯빛이 눈에 띌 정도로 붉게 물들었다.
벌써 술기운이 오르고 있는 듯했다.
먼저 술을 마시자고 제안을 하더니, 조금은 어이가 없었다.
그래도 그녀는 아직 정신은 멀쩡한지, 말은 또박또박 잘했다.
“왠지 오늘은 내가 더 신이 나서 돌아다닌 것 같네요.”
“아닙니다. 저도 굉장히 기분 전환이 됐습니다.”
“이렇게 바깥을 돌아다닌 게 얼마 만인지. 정말 오래됐네요.”
한참이나 들뜬 기색을 내비치던 린디아스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저도 당신처럼, 순례가 끝나고 별로 돌아다니질 못했거든요.”
이후 잠깐 말을 멈춘 그녀가 고개를 세차게 내저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그녀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였을지, 안톤은 알지 못한다.
“고마워요.”
다만 작게 고개를 숙이는 린디아스를 보고 있자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왠지 이유 모를 동질감이 느껴졌다.
가주를 비롯한 친형제들의 냉대.
장로들의 따가운 눈초리와 그녀가 지나갈 때면 귀엣말을 나눠 대는 시녀들.
대륙제일검가 조르디 가문의 차녀라는, 누구든 부러워할 지고한 신분이라기엔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알 수가 있다.
하지만 안톤은 그들 중 누구에게도 린디아스에 대한 것을 묻지 않았다.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도 있었지만, 그녀에게 관심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어색하기 그지없었기 때문이다.
“분위기가 많이 어수선하죠? 소천교가 거의 다가온 시점이라 그래요.”
그녀는 이후 재차 활기찬 모습을 되찾으며 평상시처럼 이런저런 얘기를 해 왔다.
하지만 그녀만의 고충과 사연은 털어놓지 않았다.
어쩌면 이런 술자리에 안톤을 불러 세운 것 자체가 그런 이야기들을 털어놓고 싶다는 마음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안톤은 그에 대해서는 한 점의 질문도 던지지 않았다.
그렇게 린디아스가 주된 얘기를 하고, 안톤은 호응만 하다 간간이 질문을 던지는 형식으로 대화가 이어지던 때였다.
불청객이 있었다.
“아가씨. 아가씨는 이름이 어떻게 돼?”
빤질빤질한 인상을 한 금발 남자였다.
북부인들 특유의 하얀 피부를 지녔지만, 시뻘겋게 달아오른 낯빛과 흐트러진 자세로 보아 그가 만취한 상태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수작 부리지 말고 자기 자리로 돌아가세요.”
린디아스는 고갯짓도 하지 않고 말했다.
안톤을 대할 때와는 천양지차의 냉소 어린 말투였다.
명확한 의사 표현에도 금발 남자는 질척거리는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예쁜 얼굴 망가질라. 그런 무서운 표정 짓지 말고, 그냥 이름만 묻는 건데 뭐가 어때서 그래?”
촥!
린디아스는 자신의 어깨로 손을 감으려는 남자의 팔을 거칠게 밀어 쳤다.
“어라? 이게!”
술에 이성을 잡아먹혀서인지, 아니면 원체 천성이 그러한 것인지 금발 남자는 발끈하며 우악스러운 손을 린디아스를 향해 뻗었다.
이제 안톤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뭐야, 넌! 이거 안 놔?”
안톤에게 팔을 붙잡힌 금발 남자는 이리저리 팔 근육에 힘을 줘 봤지만 소용없었다.
외려 반발력 때문에 고통만 더욱 가중될 뿐이었다.
“이 새끼 무슨 힘이!”
“많이 취한 것 같은데 그냥 가시오.”
갑작스러운 난동에 안톤도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약간 화가 나기도 했다.
허나 안 그래도 끝나 가던 자리였기에 최대한 좋게 좋게 마무리 짓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그의 노력은 아쉽게도 통하지 않았다.
“당장 안 놓으면 벤다. 그래도 할 말 없지? 여긴 검객의 나라니까 말이야.”
까드득.
이를 갈던 금발 남자가 나머지 한 손을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허리춤에 매어진 검을 뽑아내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행동은 금방 안톤의 손에 의하여 제지됐다.
“그냥 가라는데, 그게 그렇게 어렵나?”
안톤은 금발 남자의 검 손잡이 끝을 지그시 누르며, 그의 귓가에 조용히 읊조렸다.
“이 자식이! 이거 안 놔? 죽고 싶어!”
그때, 가장자리에 위치한 계단 쪽에서 음성이 들려왔다.
“이게 무슨 소란입니까!”
묵직한 중저음의 음성은 이 소란 속에서도 선명하기만 했다.
안톤 쪽으로 쏠리던 장중의 시선들이 그쪽을 향해 돌아갔다.
동시에 린디아스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오라버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