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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믿는 것은 검 20화

무료소설 내가 믿는 것은 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951회 작성일

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20화

020. 호의

 

 

어느새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비인도적인 수련이란 무엇인가에 관해 직접 몸으로 겪은 나날들이었다.

 

밖에서 들린 인기척에 안톤은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껄껄. 이만 가자꾸나. 도착한 에스닌 님이 기다리고 계신다.”

 

서둘러 세수를 마친 안톤이 의복을 갖춰 입기 시작했다.

 

하얀색 속바지를 입고, 그 위에 무릎까지 내려오는 겉옷인지 상의인지 모를 옷을 걸친다.

 

처음엔 어려웠지만 익숙해진 지금은 이제 시녀들의 도움 없이도 혼자 입을 수가 있게 되었다.

 

그렇게 곧장 밖으로 나가려는데, 문득 방구석에 비치해 둔 거울이 그의 눈에 띄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었다.

 

‘피부색 때문인가?’

 

넉넉한 소매가 바람만 불면 나풀거리는 것도, 걸을 때마다 밖으로 속에 입은 하얀 바지가 드러나는 것도 익숙해졌다.

 

그런데 아직도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은 어색하기만 했다.

 

“빨리 안 나오느냐?”

 

“지금 나갑니다.”

 

“이거야 원, 쯧쯧. 제자가 스승을 마중 나올 줄은 모르고.”

 

문을 열고 나가니 온-누르 외에도 한 사람의 인영이 더 있었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린디아스 공녀님이 여긴 왜?”

 

두 달간의 여정을 함께하기는 했지만 조르디가에 도착하고 나서부터 얼굴을 볼 기회가 몇 없었다. 그마저도 몇 번 스쳐 지나가면서 보았을 뿐이었고.

 

그래서인지 의외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네가 걱정이 돼서 왔다는구나. 껄껄.”

 

린디아스는 주책을 부리는 온-누르를 타박하며 나섰다.

 

“제발 이상한 소리 좀 하지 마세요, 누르 공. 저는 단지 지금이라도 이 비무를 무르라고 말하러 온 거예요.”

 

“그게 바로 걱정이라는 겁니다, 공녀님.”

 

린디아스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 안톤에게 말을 건넸다.

 

“당신! 나를 한 번 이겼다고 자신만만한 모양인데요. 에스닌 언니는 나보다 훨씬 강해요.”

 

“저도 알고 있습니다.”

 

“나와는 달리 실전 경험도 풍부하고요. 무정검이라는 무호에 걸맞게 손속에 자비도 없다구요.”

 

“그렇습니까?”

 

그 스승에 그 제자라고.

 

만나고서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어쩜 이리 답답한 면은 꼭 빼닮은 것일까.

 

린디아스가 그 앙증맞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크게 다칠 수도 있어요. 아니, 분명 그럴 거예요. 도대체 왜 이렇게 무모한 짓을 하려는 거예요?”

 

안톤은 질문에 질문으로 답했다.

 

“제가 무모해 보입니까?”

 

“좋아요. 당신이 나보다 강한 건 인정해요. 하지만 에스닌 언니는 정말로 강하단 말이에요.”

 

언제까지고 평행선을 달릴 것만 같은 대화가 이어지자, 온-누르가 대화에 껴들었다.

 

“껄껄. 이게 걱정이 아니면 뭘까. 그렇지 않느냐, 안톤?”

 

그저 낄낄거리는 온-누르를 보며 안톤이 이마를 부여잡았다.

 

“그만하시지요, 스승님.”

 

“걱정 마십시오, 공녀님. 설마 제가 말도 안 되는 싸움을 붙여 놓았겠습니까? 이렇게 소중한 제자에게?”

 

지난 한 달간의 수련을 떠올린 안톤은 그 말에 위장이 뒤틀리는 것 같았지만 참았다.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 거예요? 그냥 가만히 넘어갔으면 되는 거잖아요. 정말로 저 때문에, 절 위한답시고 이러는 거예요?”

 

“그런 건 아닙니다. 고작 이런 일로 공녀님이 무를 접는다는 것이 아깝게 느껴져서 나섰을 뿐입니다. 게다가 제안한 것은 저이지만, 승낙한 것은 안톤입니다. 그러니 이 녀석에게도 물어보시지요.”

 

한숨을 깊게 내쉰 린디아스가 안톤을 향해 애증의 눈초리를 날렸다.

 

“누르 공은 그렇다 치고, 당신은 왜 승낙한 거예요? 당신이 날 위해서 그럴 리는 없잖아요.”

 

“왜 아니라고 생각하십니까?”

 

안톤의 능글맞은 물음에 그녀는 일순간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어, 어……. 그럼, 그럼 날 위해서……?”

 

안톤은 온-누르가 왜 항상 린디아스에게 짓궂게 구는 것인지 그 마음을 조금 이해했다.

 

“저도 스승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무인의 길을 포기하시는 공녀님이 아까웠습니다.”

 

“아…….”

 

그것은 안도의 한숨이었을까.

 

멎은 숨을 내쉰 린디아스는 잠시 기묘한 감정을 얼굴에 내비친다.

 

“저는 분명 말렸어요. 이제 알아서 하세요.”

 

그렇게 등을 돌려 떠나는 그녀의 귓불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제자야. 여인의 마음은 참으로 어려운 것 같지 않으냐?”

 

온-누르의 말을 하나하나 대꾸해 주다간 끝이 없다는 걸 안톤은 알았다.

 

“저희도 이만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 그래.”

 

조르디의 성채로 향하며 안톤은 방금 린디아스에게 한 말을 떠올렸다.

 

무인의 길을 포기하기는 아쉽다는 것.

 

그 말은 진심이었다.

 

무인으로서의 종결지라는 현경의 경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녀의 나이는 이제 겨우 열일곱.

 

그녀의 자질과 환경을 고려하면 언젠가 그녀 또한 화경의 경지에 도달할 테고, 시간이 지나 경험과 독기가 쌓이면 어엿한 무인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 말은 거짓이기도 했다.

 

애초에 안톤은 그때 무호라는 것이 소우든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도, 이로 인해 린디아스가 속으로 무에 대한 미련을 털어 내려는 것도 몰랐으니까.

 

그저 온-누르가 그러길 원하였기에 승낙한 것이지, 비무에 대하여 그리 깊게 고민하고 내린 결정도 아니었다.

 

‘다시 생각해 보면 꼭 그것만은 아닌 것 같지만.’

 

아무리 온-누르의 제자가 되었다 한들, 또 노예에 대한 개념이 없는 소우든에서 왔다고 한들.

 

린디아스는 안톤을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비록 거래의 형식을 따기는 했지만, 소우든의 글자를 가르쳐 주면서도 절대 안톤을 아랫사람으로 여기지 않았다.

 

‘호의에는 호의로……였던가.’

 

북부의 유명한 격언이었지만, 이 격언을 상기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애초에 호의를 겪을 일 자체가 그다지 없었으니까.

 

정말로 오랜만에, 안톤의 입가에 자그마한 실미소가 그려졌다.

 

 

* * *

 

장소에 도착하니 참관인들 몇몇이 모여 있었다.

 

가주인 슐츠 조르디와 그 외에 장로들과 두 사람의 여인이었다.

 

안면이 있는 린디아스를 제외하면, 저기 남은 여인은 한 사람뿐이었기에 안톤은 오늘 비무의 상대가 앞에 서 있는 아담한 체구의 여인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당신이 넬이 데리고 왔다는 그 북부의 노예야?”

 

대륙제일검가라는 조르디가의 장녀, 무정검 에스닌 조르디.

 

그녀는 먼지 한 톨 묻지 않은 순백색의 의복을 입고 있었다.

 

온-누르의 제자라는 것을 미리 고지받았을 것인데도 그녀의 말에는 거침이 없었다.

 

일전에 장로들 앞에서 발끈하였던 때와는 다르게 온-누르는 가만히 있었다.

 

“안톤입니다.”

 

“당신. 넬이랑은 도대체 무슨 관계야? 왜 이런 귀찮고 멍청한 짓을 하는 거야?”

 

형식상 이름을 밝혔지만 그녀는 무시하고 외려 질문을 던졌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넬이 자기는 무서우니까 대신 싸워 달라고 막 그랬어?”

 

같은 피가 흐르는 자매라고 여기기엔 그 관계가 미심쩍을 정도였다.

 

안톤은 장로들 틈에서도 조금 거리를 두고 혼자 서 있는 린디아스를 보았다.

 

불안한 기색이 가득했다.

 

“그런 게 아닙니다. 그저 제게는 이런 비무가 별거 아니기 때문에 승낙한 겁니다.”

 

“별거 아니라고……?”

 

“그냥 이길 자신이 있어서 그랬다고 받아들여 주시면 좋겠군요.”

 

에스닌이 깔깔 웃었다.

 

“북부의 노예들은 모두 다 당신처럼 웃겨?”

 

재밌네.

 

그렇게 말하는 에스닌은 그 단어완 상반된, 무서울 만치 굳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럼 이제 양측 모두 대화는 대충 어느 정도 나눴으니, 슬슬 시작하지요.”

 

온-누르의 말에 슐츠가 고개를 끄덕였고, 비무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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