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믿는 것은 검 12화
무료소설 내가 믿는 것은 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88회 작성일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12화
012. 시험
흑의 노인, 아니 온-누르의 손 위로 잔뜩 머금어진 푸른색의 광채가 안톤의 몸으로 휘감겨 들어간다.
‘이래서 오러 마스터가 필요하다고 한 건가.’
재각인 과정을 진행하고 있자니 아까 전 정예병 우두머리가 하던 말이 절로 납득이 갔다.
우선 재각인을 하는 데에는 막대한 양의 마나가 필요했다. 그런데 마나의 주입이 도중에 한 번이라도 멈추면, 여태껏 주입된 마나가 뿔뿔이 흩어졌다.
그렇기에 재각인 의식의 주체는 흔히들 명인이라 부르는 오러 마스터, 또는 왕급 마도사급은 되어야 한다.
각성을 통하여 신체가 재구성된 초인들만이 그 방대한 마나를 능히 감당해 낼 수 있을 테니까.
“음…….”
그의 손등 위로 빛나던 마나의 구체가 모조리 안톤의 이마를 투과했다.
이내 안톤의 피부에 새겨진 마법각인이 마지막으로 잠시간 빛을 내다가 꺼졌다.
온-누르가 안톤의 이마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평생을 마법과는 동떨어져 살아온 그였기에, 조금은 얼떨떨했다.
“정말로 이걸로 끝인가?”
별 탈 없이 제대로 끝마친 것인지,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안톤이 깨어나면 결국 자연스레 알게 될 일이다.
온-누르가 흑의 여인, 넬-린디아스 조르디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린디아스 공녀님, 일단 이 녀석에게는 비밀로 해 주시겠습니까?”
“왜요? ‘부탁’이라도 사용하시게요?”
아까 전 일들이 떠오르기라도 한 것일까. 린디아스는 새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걸 본 온-누르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하하! 공녀님께서 많이 서운하셨던 모양이군요. 정 아까 일이 그렇게 걸리시면 삼주령(三主領)은 다시 원점으로 돌리셔도 됩니다만?”
잠깐 린디아스의 동공이 흔들렸다.
안 그래도 홧김에 소중한 부탁 하나를 사용한 것이 맘에 걸리던 그녀였다.
그런데 그걸 무효로 돌려주겠다니. 참으로 달콤한 제안이 아닌가.
제안을 듣자마자 그녀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일 뻔했었다.
‘참 짓궂기도 하지.’
한순간을 기점으로, 그녀의 눈빛에 잠시 머물던 욕심이란 감정이 가라앉았다.
그녀가 온-누르를 향해 시선을 옮긴 직후였다. 그 역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서글서글 웃는 인상과는 달리, 거산처럼 흔들림 없이 굳건한 눈동자.
이를 마주한 그녀는 마지막 미련마저 털어 내기라도 하듯, 완고하게 고개를 저었다.
“휴……. 그럴 필요는 없으세요. 제가 한 번 부탁을 사용한 것이니까.”
여전히 느글한 미소를 짓고 있는 온-누르를 바라보며 그녀는 다시 한 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저나 이 남자가 그렇게 마음에 드셨어요?”
질문을 받은 온-누르가 다시금 안톤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참 특이한 놈 아닙니까?”
“어떤 면에서요?”
“도대체 어떻게 수련을 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가진 마나는 쥐꼬리만 한데 그 응용법이라거나 검술에 대해서는 한참이나 앞선 실력을 지녔습니다. 아마 이 녀석, 마나의 양으로 따지자면 공녀님의 절반도 되지 않을 겁니다.”
“……그게 진짜인가요?”
그 말인즉, 순수하게 검술적인 부분에서 기량이 현저하게 밀렸다는 뜻이다.
린디아스가 이를 악물었다.
한 줌도 채 남지 않은 자존심마저 갈가리 찢겨져 나가는 순간이었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알기나 할까.
온-누르는 무심하게 대화를 계속 이어 나갔다.
“존재 자체가 모순이라고 해야 할지, 아무튼 그 존재 자체가 의문인 놈이지요. 궁금한 게 참 많습니다.”
검술과 마나 연공법의 출처며 그 노예라는 특이한 신분까지, 원초적인 호기심을 자극하는 무언가를 안톤은 잔뜩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이 남자를 데려가길 원하신 거구요?”
“그것만은 아니지만…….”
갑자기 하던 말을 멈춘 온-누르가 눈을 빛낸다. 린디아스는 영문을 모르겠단 표정을 지었다.
온-누르가 안톤의 어깨를 발치로 툭툭 건드렸다.
“잘못하면 깜박 속아 넘어갈 뻔했구나. 언제부터 일어나 있던 것이냐?”
둘의 시선이 한곳에 모아진다.
그리고 그 속에서 안톤이 몸을 일으켰다.
안톤이 정신을 차렸을 때, 노인과 여인은 한창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서두를 빼고 들어서인지, 모두 영문을 알 수 없는 얘기들이었다.
아직 자신이 정신을 차린 것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아서 그냥 가만히 숨죽이고 있었다.
별다른 선택지가 없는,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
기습을 노린들, 갑작스레 도주를 시도한들.
결국 이 노인 앞에서는 무의미한 짓이었으니까.
그래서 그저 의식이 없는 척 대화를 엿듣기로 했다.
지금 이들이 안톤에 대하여 궁금해하는 것처럼, 안톤 역시 이들의 정체가 궁금했다.
보다 집중하여 이어지는 대화에 온 신경을 쏟았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머리 굴리는 소리가 들리기라도 했던 것일까.
“잘못하면 깜박 속아 넘어갈 뻔했구나. 언제부터 일어나 있던 것이냐?”
그 말을 듣자마자 순간 온갖 상념이 들었다.
허나 이미 노인은 확신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안톤은 허릿심을 이용해 몸을 재빠르게 일으켜 세웠다.
노인은 무언가 행동으로 이를 제재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이렇게 하는 게 맞나? 각인 명령. 무릎을 꿇어라.”
“그게 무슨……!”
숨이 턱 하고 막혀 왔다. 무언가가 정신을 옥죄이는 듯 속이 답답했다.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한 머릿속에는 지금 당장 무릎을 꿇어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가득 찼다.
도무지 잊을 수 없을 만큼 익숙한 감각이었는데, 이것이 의미하는 바도 단 하나였다.
“어, 어떻게……!”
내뱉고 나서 부질없는 물음이라는 걸 깨달았다.
분명 정신을 잃고 있던 사이에 무언가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이 노인이 자신의 새로운 술주가 된 것일 테고.
털썩.
모래 위로 쓰러지듯 무릎을 꿇은 안톤이 분노에 찬 눈빛으로 노인을 쏘아봤다.
“내가 당신들에게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렇게까지!”
한 줌의 망설임도 없이 노인은 가차 없이 대답했다.
“우린 아니더라도 누군가에게 죄를 지었기에 그 모양 그 꼴인 거 아닌가?”
죄인이 아니라면 노예가 될 리도 없다.
남국에서 온 노인에게 노예란 그러한 개념으로 정립된 듯했다.
그렇기에 분통했다.
태어난 것이 죄라면 죽음으로 용서받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렇지도 않지 않았는가.
한 번의 죽음을 경험했지만, 여전히 안톤은 노예였다.
“당신들이 뭘 안다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
“모르지. 그러니까 하나도 빠짐없이 알아야겠다.”
속의 울분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악에 받친 외침이었지만, 정작 노인의 표정은 무감흥하기만 했다.
“각인 명령. 앞으로 내가 묻는 말에 진실로 답하여라.”
여기까진가.
안톤은 허탈한 심정에 사로잡혔다.
분한 마음에 세게 깨문 입술로 피가 새어 나왔다.
하지만 이 비릿한 혈향은, 이 잔인한 현실에서 눈을 돌리지도 못하게 만들었다.
눈앞의 노인이 입을 열었다.
“너에게 검을 가르쳐준 사람이 누구냐?”
음성의 고조가 없는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귓가로 전해진다.
안톤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데.
“……?”
충분한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감각도 전해지지가 않는다.
아까 전과 마찬가지로, 이번 역시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각인마법이 작동하지 않아.’
아까 행해진 그것은 각인마법이 확실했는데, 이게 무슨 일일까.
그로서도 예상치 못한 일이라서 안톤은 그만 놀란 표정을 곤히 내비쳤다.
어떻게든 이를 이용했어야 했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지만, 이미 노인은 이상함을 느낀 상태였다.
노인은 잠시 자신의 손을 내려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음……. 각인 명령. 자리에서 일어나라.”
이번엔 연기 같은 게 아니었다.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하여 안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한 번 자신의 손을 내려다본 노인이 재차 입을 열었다.
“각인 명령. 너에게 검을 가르친 사람이 누군지 말해라. 없으면 없다고 말하면 된다.”
안톤은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곧바로 대답했다.
“벨토스 노예 검투사 양성소의 훈련 교관 잭 레보닌입니다.”
슬그머니 살펴본 노인의 안색이 묘하다.
무언가를 곱씹는 듯 그의 아미가 찌푸려졌다.
“……거짓말이군. 아까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렇고, 기의 흐름이 안 느껴져.”
기의 흐름이라니. 그게 무엇일까.
평생 마법각인술에 속박되어 살아온 안톤이었지만 그동안에 그런 걸 느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물론 세상을 이루는 만물의 근원이 바로 마나였으니, 그 범주에 속하는 마법각인술 또한 안톤이 알지 못하는 어떠한 작용이 있긴 있을 터.
‘오러 마스터 정도 되는 경지라면 그런 것도 알 수 있는 건가? 만약 그렇다면 어차피 연기를 해 봤자였겠군.’
“각인 명령. 내가 좋다고 할 때까지 호흡을 멈춰라.”
이번엔 제대로 노예각인마법이 발동됐다.
몸에 새겨진 마법이 육체의 주권을 앗아 갔고, 안톤은 더 이상 자신의 의지로 숨을 쉴 수조차 없게 되었다.
“……흐읍.”
숨을 멈추고 어언 3분이 지나고, 안톤의 피부색이 투명하리만치 창백하게 질렸다.
하지만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볼 뿐, 아직도 노인의 입은 열릴 기미가 없었다.
일반인에 비하면 뛰어난 폐활량의 소유자인 안톤이었지만, 거기서 몇 분이 더 지나자 어느덧 한계에 이르렀다.
안톤이 목 주변을 붙잡았다.
“꺼어……흐어…….”
벌어진 입으로 침이 줄줄 흘러나와 모래 위로 떨어졌다.
시야가 점점 까맣게 물들고 정신은 한없이 아득해져 간다. 안톤의 눈이 까뒤집혀지고 흰자위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이렇게 죽는 건가. 무의식중에 그런 생각까지 들던 때였다.
굳게 다물어진 노인의 입이 열렸다.
“……이제 숨을 쉬어도 좋다.”
“흐하아아, 하아…… 컥컥!”
바닥에 쓰러져 거칠게 숨을 내쉬는 안톤을 바라보는 노인은 냉정하리만치 굳은 표정이었다.
그는 좀 전에 경비대장과 있었던 대화를 떠올리고 있었다.
“재각인이라서 그 효과가 전에 비하면 약할 거라더니 그것 때문인가 보군.”
온-누르는 잠깐 상념에 잠겼다.
그리고 스스로 생각을 정리하듯 혼잣말을 이었다.
“조금 더 실험해 봐야 확실해지겠지만, 육체의 통제권만이 넘어온 건가? 뭐, 아무튼 그건 차차 해 보기로 하고……. 이제 슬슬 시작해 볼까?”
받은 선물의 포장지를 뜯는 아이처럼, 온-누르의 눈이 호기심으로 물들었다.
“자, 받아라.”
그의 손에서 던져진 검이 서걱 소리를 내며 모래 위로 박혔다.
“각인 명령. 온 힘을 다해서 덤벼 봐라.”
그의 말대로 온 힘을 다하여 안톤은 검자루를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