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믿는 것은 검 11화
무료소설 내가 믿는 것은 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761회 작성일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11화
011. 제압
“소리가 가까워진 걸 보니 곧 도착하겠구나. 이만 자고 있거라.”
안톤은 눈 한 번 깜박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반응할 새도 없었다.
한순간에 시야에서 노인의 모습이 사라지고, 그 사실을 인지한 순간과 동시에 뒤통수에서 강한 충격이 전해져 왔다.
그리고 그것이 의식의 마지막이었다.
“읏…….”
마치 장난을 치듯 툭 치는 손짓에 안톤은 그대로 앞으로 꼬꾸라졌다.
그럼으로써 붙잡혀 있던 흑발의 여인 또한 풀려났다.
“후아!”
바닥에 넘어져 숨을 몰아쉬는 여인을 향해 노인이 다가갔다.
“괜찮으십니까, 공녀님?”
“누르 공! 정말 너무하신 거 아니에요?”
“그래도 구해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이번에 것은 부탁에서 제하지 않겠습니다. 그럼 조금 화가 풀리실는지요?”
“으으…….”
그 능글맞은 태도를 보고 있자니, 여인의 속에서 뭔가 울컥하고 치솟는다.
그럼에도 뭐라 대꾸할 수 없다.
도망가지 못하게 해 달라고 부탁한 것도 자신이었고, 저기 쓰러진 저 남자에게 패배한 것도 자신이었으니까.
무엇보다도 그 사실이 가장 분했다.
“도대체 이 사람은 뭐죠?”
덩치는 컸지만 앳된 얼굴을 보자니 암만 생각해도 자신의 또래다.
비슷한 나이대에서는 적수가 몇 없으리라고 내심 자부하던 여인은 충격을 받았다.
여인의 가문처럼 대륙에서 이름난 무가의 사람이면 그 충격이 덜했을 텐데.
저기 저 누추한 꼴을 보면 그럴 리도 없어 보이지 않는가.
“글쎄요. 저도 궁금하군요. 뭐, 이제 도착할 자들이 설명해 주겠지요.”
“아, 그러고 보니 아까 누가 온다고……?”
“조금만 있으면 공녀님한테도 보일 겁니다.”
노인은 비록 장난기는 많아도 허튼소리를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거기다 자신과는 비교하는 것이 실례일 만큼 지고한 경지에 이른 무인이었고.
금방 누군가 모습을 드러내겠지.
여인은 그런 생각으로 노인을 보채지 않고 차분히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막 언덕 너머로 수십의 인파가 나타났다. 모두 낙타에 올라타 저마다 다른 병장기로 무장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언덕을 내려와 그들과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멈춰 섰다.
어깨에 달고 있는 휘장엔 사자 얼굴의 거인이 수놓아져 있었다. 탈로스의 정예병들이었다.
가장 선두에 서 있는, 우두머리로 보이는 남자가 얼굴 아래를 감싼 천을 내렸다. 오른쪽 볼에 큼지막하게 팬 흉터가 있는 우락부락한 남자였다.
“직접 그 노예를 잡은 거요?”
아직 탈것에서 내리지도 않았고, 통성명을 하기도 전이다.
그런데 대뜸 본론부터 꺼내 오다니. 참 예의가 없는 것들이란 생각을 하며 흑의 노인이 앞으로 나서려는 찰나.
옆에 있던 여인이 그의 팔을 붙잡았다.
“누르 공, 제가 얘기해 볼게요. 이봐요! 아까 이 남자가 노예라고 한 것 같은데, 그게 사실이에요?”
여인의 조국, 소우든에는 노예가 없었지만 그녀도 노예가 무엇인지는 안다.
그렇기에 더욱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나를 제압한 이 남자가 노예라고?’
그간 키워 왔던 자존감이 조각조각 나는 소리였다.
그나저나 여인이 앞으로 나선 게 맘에 안 들었던 것일까.
우두머리로 보이는 남자가 인상을 찌푸렸다. 볼에 흉터가 살벌하게 뒤틀렸다.
“그렇다. 저놈은 우리 도시에서 탈주한 노예이며, 우리가 여기까지 온 것도 모두 그 녀석을 잡기 위해서지.”
다짜고짜 하대라니, 이번엔 여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녀의 목소리도 조금 날카롭게 변했다.
“고작 당신들로요?”
정예병들의 기세를 느껴 보건대, 대다수가 마나에 입문은 하였다. 하지만 말 그대로 입문만 하였을 뿐이지 그 실력이 대단치는 않아 보인다.
물론 그 수가 많기는 하다.
하지만 왠지 그들만으로 저 남자를 잡아내기엔 역부족같이 느껴지는 것이 그녀의 솔직한 감상이었다.
흉터의 남자가 발끈했다.
“지금 우리를 모욕하는 건가?”
“모욕이 아니라 사실이 그런 거예요.”
깔아보는 시선으로 여인과 노인을 훑어보던 남자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국인이라고 참아 주는 것은 이번까지니, 앞으로는 말을 가려서 하도록.”
“뭐라구요?”
“우리가 나선 이상 잡는 건 시간문제였겠지만, 그래도 그대들이 탈주 노예를 잡은 것은 사실이니, 일단 포상금은 지불하겠다. 그럼 되겠지?”
어차피 너희가 바라는 것도 이것이겠지?
입으로 내뱉은 말은 아니었지만 표정에서부터 그런 속내가 드러났다.
주머니에서 금화 뭉치를 꺼낸 남자가 그것을 여자의 앞에다 던졌다.
“3골드다.”
“뭐라고요?”
흑의 여인의 입이 살짝 벌어진다.
많이 놀란 듯한 그 표정을 보며 남자는 비소를 지었다.
“탈주 노예를 잡으면 절반의 값을 치르는 것이 츠레이바의 관례다. 운이 좋았군.”
3골드가 값의 절반이라면 이 남자의 가치는 겨우 6골드라는 것인데, 정말 이 정도의 검사가 고작 그 정도 값어치밖에 하지 못한다는 것일까?
그렇다면 좀 가소로운 일 아닌가.
정작 비웃음 날리는 그들 무리가 그보다 못한 가치를 지녔다는 뜻이니까.
‘이 사람들……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게 틀림없어.’
흉터의 남자는 여인의 생각을 짐작하기는커녕 신경도 쓰지 않았다.
“아까 경비대 놈들이 뭐라 그랬더라? 석궁 화살을 칼로 쳐 내며, 성문을 뛰어넘어 도망갔다라……. 그런데 노인과 여자에게 붙잡히다니, 아마 책임을 피하려는 헛소리였나 보군. 빨리 노예 녀석을 챙기지 않고 뭣들하고 있어! 오늘 여기서 밤새울 거야?”
남자의 말에 따라 부하로 보이는 정예병 둘이 밧줄을 들고 안톤을 향해 다가갔다.
노인은 그 앞을 가로막고 나섰다.
“껄껄. 보자 보자 하니, 보면 볼수록 버릇없는 아해들이로고…….”
그리고 툭툭, 마치 노고를 치하하는 듯한 손짓으로 그 둘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런데 그 가벼운 손짓을 받은 남자 둘이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휙휙 지면을 향해 몸을 뉘었다.
“이런!”
챙!
대치 중이던 정예병 무리들이 일제히 무기를 뽑았다.
순식간에 흉흉한 분위기가 조성됐다.
“난 탈로스 제1 정규경비대 대장 인슈르다. 정체를 밝혀라!”
안톤을 내려다보며 혀를 끌끌 찰 뿐, 노인은 남자의 말을 귓구멍으로 듣는 시늉조차 하지 않았다.
“그래도 이 녀석은 보는 눈은 있었는데…….”
“정체를 밝히지 않으면 적으로 간주하겠다.”
“그래, 어디 맘대로 해 보려무나.”
노인의 눈매가 좁아진다. 명백히 기분이 상했다는 의미였다.
여기서 좀만 더 갔다간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을 만큼 극악으로 치달리겠다는 생각이 든 여인이 황급히 대화에 끼어들었다.
“넬-린디아스 조르디입니다. 이분은 제 조부님의 친우분 되시고요. 싸울 의도는 결코 없습니다.”
상대의 태도는 분명 짜증이 날 정도였지만, 애초에 처음부터 선행을 하자고 벌였던 일이다.
그러니 귀찮게 굳이 사태를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미련한 짓이다.
그런 여인의 마음을 알기나 할까.
“싸울 의도가 없었다고? 이미 그대들은 우리를 공격했다.”
여전히 꼰대 같은 태도를 고수하는 남자를 보며 여인이 골머리를 싸매고 있을 때였다.
“잠깐 조르디라고? 내가 알고 있는 그 조르디가 맞나?”
“당신이 알고 있는 게 도대체 뭔데요?”
남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대륙제일검가.”
가우스트 조르디라는 전대 최고의 검객을 배출한 데 이어서 당대의 가주 역시 명인의 경지에 올랐다는, 명실상부 대륙의 명문 무가.
늘 조르디가(家)의 혈족들은 나이가 차면 대륙 곳곳을 순례하였기에 그 유명세가 유달리 강했다.
“흥! 들어 본 적은 있나 보군요?”
콧방귀를 찼지만 내심 자부심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과거에 조르디가의 순례자를 본 적이 있다. 헤스갈. 분명 그런 이름을 지닌 남자였지. 이후에 용살검(龍殺劍)이라는 무호를 들었다는 소식은 들었다. 과연 그 이름에 걸맞은 남자였지. 그와는 어떤 관계지?”
“제 오라버니예요.”
결국 가문의 이름을 빌리고 말았다는 사실 때문일까.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닌데 여인은 마음 한구석이 무겁게 느껴졌다.
그녀가 신분을 밝힌 덕인지 남자의 말투가 한층 변했다.
“그건 그렇고, 도대체 왜 우리를 공격한 거요? 우리는 정당한 대가를 치렀는데.”
“그것은…….”
사실 그 이유는 여인도 알 수가 없었다.
저 남자는 탈주한 노예고, 아무래도 소유권은 이들에게 있는 듯했으니 그냥 넘겨줬으면 끝나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대답을 요하는 듯한 여인의 시선에도 노인은 일관된 태도를 유지했다.
“이 녀석은 내 거다. 어딜 넘보려고.”
노인의 꼿꼿한 태도에 여인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절반이라고 준 것이 3골드였으니, 이 남자의 값어치는 6골드인 것이겠지요? 우리가 그 값에 이 노예를 산다면 어떠시겠어요?”
“그 노예의 소유권은 내게 없소.”
즉각적인 대답이었지만, 여인은 남자의 말에 여지가 남아 있음을 느꼈다.
“좋아요, 그 두 배를 지불하겠어요.”
“그 남자는 살인을 저지른 죄인이고, 내게는 녀석을 붙잡아 도시로 끌고 가야 할 의무가 있소.”
여인은 이마를 부여잡으며, 노인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절대 안 된다는 듯 노인은 고개를 젓고 있었다.
“하아……. 40골드. 도착했을 땐 이미 죽어 있었다고 하세요. 그럼 되잖아요? 우리 서로 복잡하게 가지 말자구요.”
잠시 고민하던 남자가 못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대신 비밀 유지는 확실하게 해 주시오.”
“그건 걱정 마요. 안 그래도 순례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이었으니까. 앞으로 만날 일도 없을 거예요.”
여인은 품에서 꺼낸 전낭에서 큼직한 금화 4개를 꺼내어 남자에게 건네주었다.
하나에 10골드의 가치를 하는 제국 금화였다.
“이렇게 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는데, 결국 이 녀석을 당신들에게 파는 모양새가 되었으니 대충 말해 주겠소. 이 녀석은 스티그마인데, 방금 술주가 죽어 공백이 되어 버린 상황이라오.”
“스티그마가 뭐죠?”
“하긴…… 남쪽엔 노예도 마법사도 드물다고 그랬던 걸 깜박했군. 저기 문신이 보이시오? 저게 마법진이라오. 주인의 명령이라면 뭐든지 행하게 만들어 주는 마법이 실려 있소. 가문으로 돌아가면 재각인을 하셔야 할 거요.”
“재각인?”
“술주가 공백이니 새로 채워 넣어야 하지 않겠소?”
“그럼 지금 하면 되잖아요?”
여인의 말에 남자는 어린아이를 가르치듯 하나둘 설명하기 시작했다.
조르디 가문의 사람이라는 것을 밝히기 전을 떠올리면 상상도 못 할 대접이었다.
“하하. 지식이 없으니 그럴 수도 있겠구려. 갓난아기라면 모를까, 재각인을 하려면 막대한 마나가 필요하오. 그마저도 저기 저 마법진의 영향이 아직 남아 있기에 가능한 거지.”
“얼마나 필요하기에요?”
“적어도 명인의 경지에 오른 무인이 필요하다오. 그대가 조르디가의 사람이란 걸 듣지 않았다면 재각인에 대해선 말하지도 않았을 것이오. 말해도 소용이 없으니까.”
대외적으로 알려진 것만으로도 조르디가엔 명인의 반열에 오른 무인이 둘이나 된다.
일이 착착 진행되는 것을 보고 잠자코 있던 노인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껄껄! 주인의 말에 무조건 복종한다라? 그거 더욱더 마음에 드는군. 좋아, 그럼 그 재각인이라는 걸 어떻게 하는 건지 방법을 말해 봐라.”
암만 나이가 많다지만 아랫사람 대하는 듯한 말투에 남자는 살짝 기분이 상했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그냥 이마에 손을 대고 ‘술주 각인’이라고 주문을 외면서 마나를 주입하면 되오.”
“이렇게?”
노인이 쓰러져 있는 안톤의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아까 말했지 않소? 적어도 명인급에 이른…….”
“괜찮아요. 누르 공은 당신들이 말하는 그 오러 마스터니까.”
그러고 보니, 좀 전에 여인이 저 노인을 설명할 때 그 가우스트 조르디의 친우라 했던 것이 떠오른 남자는 헛웃음을 지었다.
이거 정말 큰일 날 뻔했지 않은가.
잠깐 굳어 있던 남자가 숨을 크게 내쉬었다.
“허……. 이번 일로 느끼는 게 없잖아 있구려. 우리들은 이제 돌아가 보겠소. 그리고 아마 재각인이 성공한다 하여도 아까 말한 무조건적인 복종은 아닐 거요. 정확히 구체적으로 시킨 일만 한달까. 뭐, 그게 어디요. 명령만 해 둔다면 적어도 주인은 물지 않을 테니.”
재각인 과정에 대한 설명을 간략하게 마친 후, 탈로스의 정예병 무리는 그대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그들이 떠나간 자리에서 여인, 아니 넬-린디아스 조르디가 입을 열었다.
“도대체 이자를 어디에 쓰시려고요? 의문점도 많고 강한 것도 알겠지만…… 누르 공께는 다 필요 없는 얘기잖아요?”
“요즘 안 그래도 가문 내에서도 후계자, 후계자 말이 많지 않았습니까? 내심 신경 쓰이지 않는 척했지만, 늙어서 그런지 조금 그 단어가 귀에 밟히긴 하더군요.”
“설마……!”
‘그 암검(暗劍) 온-누르에게 제자라고?’
경악을 금치 못하겠다는 듯, 여인이 눈을 치켜뜬다.
“뭐, 그렇게까지 쳐다볼 건 없잖습니까?”
껄껄껄.
조금 무안하다는 듯 고개를 돌린 노인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