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믿는 것은 검 9화
무료소설 내가 믿는 것은 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85회 작성일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9화
009. 여인
교관의 주검 속에서 검을 주워 든 안톤은 그대로 옆의 담장을 넘어섰다.
노예를 다루는 장소인지라 일반적인 벽에 비하면 그 높이가 상당했지만, 안톤에겐 문제가 되지 않았다. 사뿐히 지면에 착지한 안톤은 곧장 달리기 시작했다.
“탈주 노예다!”
경비병들이 자신의 정체를 알아보고 소리를 지르든 말든 안톤은 달리고 또 달렸다. 중간에 막아서는 이들도 있었고 쫓아가려고 하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단순한 순찰 경비병들로는 안톤을 막아 내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
‘탈주한 소식을 듣고 실력자들이 따라붙기 전에 최대한 도망가야 해.’
댕댕댕!
콜로세움의 비상 종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지며, 안톤은 건물 밖으로 발을 내디디며 세상과 마주했다. 사막의 열기가 담긴 모래바람이 그의 볼을 스치고 지나갔다.
어째선지 이제껏 그가 겪어 본 그 어떤 바람보다 시원하게 느껴졌다.
‘아직 갈 길이 멀어.’
콜로세움이 위치한 곳은 도시의 최중심부.
맘을 놓기엔 아직 이르다.
자유를 만끽하는 것은 이 도시를 완전히 벗어나, 추격자들을 모조리 물리친 다음이다.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정신을 차려야 할 때다.
“꺄아아!”
일순 비명 소리가 탈로스 중앙 광장을 덮는다. 그의 앞에는 장바구니를 바닥에 떨군 여성이 겁먹은 표정으로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순식간에 모든 이목이 이쪽으로 쏠린다.
갑작스레 광장에 출몰한 피범벅의 괴한.
일대 소란이 벌어지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젠장.”
그 소란을 지켜볼 새도 없이 안톤은 다시 몸을 날렸다.
콜로세움이 위치한 탈로스의 중앙 광장을 벗어난 안톤은 처음 도시에 들어왔던 길을 떠올리며 그대로 따라 달렸다. 그새 장이라도 열렸는지 골목골목이 인산인해였다.
안톤은 지면을 박차고 지붕으로 뛰어올랐다.
“잡아라!”
아래를 보니 치안대가 하나둘 모여 조 단위로 뭉쳐서 움직이고 있었다.
안톤은 더욱더 뜀박질에 열을 다했다.
하지만 장터를 벗어나 조금 한산한 거리가 나오자, 조금 굼뜨던 치안대도 말에 올라타 추격에 박차를 가하며 거리가 좁혀지기 시작했다.
‘이제 조금만 더!’
저기 멀리서 보이던 성벽이 어느새 눈앞에 다다랐다.
건물들 틈새로 성문의 일각이 보였다. 가장 활발한 정오였지만, 성문은 천천히 닫히는 중이었다. 하지만 성문의 도르래는 이제 막 굴러가기 시작했고, 완전히 닫히기까지는 일말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휘잉-.
안톤은 검을 이용해 정면에서 날아드는 화살을 베어 냈다.
성문 앞에, 스물이 넘는 병사들이 방패와 석궁으로 방어진을 치고 있었다.
‘여기서 멈추면 성문이 닫힐 거야.’
안톤은 속도를 줄이기는커녕 외려 높였고, 더 많은 화살들이 그를 향해 쏘아졌다. 안톤은 근접 거리에서, 직선상으로 날아오는 석궁 화살을 모조리 검으로 쳐 냈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안톤이 화살 공세에도 아랑곳 않고 지척까지 다가서자, 이런 상황은 예상치 못했다는 듯 병사들은 짐짓 당황했다.
안톤은 그런 병사들의 방패를 발로 딛고 도약했다.
새처럼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쿵!
닫히기 직전의 성문 틈새로 안톤의 몸이 지나쳤다.
‘밖이다……!’
바깥으로는 도시 출입을 대기 중이던 인파의 행렬이 이어져 있었다.
안톤은 그 너머를 바라보았다.
광활한 하늘과 끝이 보이지 않는 지평선.
마법각인의 제약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바라보는 그 광경은 그에게 묘한 감회를 갖게 했다.
그때였다.
“핫!”
좀 전에 날아들던 석궁 화살보다도 빠른 속도로 검이 날아들었다.
안톤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어떻게 공격은 반사적으로 막아 내었지만 그 검에 실린 힘이 상당했다.
‘누구지? 벌써 기사들이 나섰을 리는 없는데?’
검에 마나를 주입하지 않았으면 그대로 검이 부서질 뻔했다. 일순 피어오른 모래먼지가 걷히고 한 사람의 인영이 드러났다.
“우리의 입성 절차가 길어지는 건 암만 생각해도 당신 때문인 것 같군요.”
단색 흑의 무복의 풍성한 소매가 나풀거리며 그 사이로 하얀 팔뚝이 드러난다.
낮에는 뜨겁고 밤에는 차가운, 상시 건조한 모래바람이 불어오는 츠레이바의 기후와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은 옷차림새며, 보기 드문 검은 머리며.
여러모로 눈에 띄는 인물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자?”
쏴아-.
모래 알맹이와 함께 여인의 흑발이 바람에 흩날린다.
“하, 또 여자라고 무시하는군요. 하여간 이곳 사람들은 하나같이 마음에 들지 않아.”
안톤이 남존여비의 사상을 지닌 것은 아니다. 아니 노예 주제에 누가 누굴 아래로 본다는 것이 가당찮기나 한가.
단지 여자 무인을 겪어 본 적이 몇 번 없었기에 의외란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그렇다고 이 상황에서 구구절절 변명을 늘어놓기도 뭐하다.
그럴 이유도 없고.
안톤은 입을 열기보단 검을 꽉 쥐었다.
‘남쪽에서 왔나 보군……. 그곳은 여자도 평등한 대우를 받는댔었지.’
말투와 의상, 그리고 저 검은 머리색으로 짐작컨대 남부 출신인 것은 확실해 보였다.
‘나이 차이도 나와 얼마 안 나는 듯싶은데…… 이 정도 실력이라니.’
아마도 무명을 떨치는 명가의 자녀이리라.
앞에 선 상대가 어느 정도의 실력을 지녔는지, 아까 전 일격에 실린 무게와, 지금 검을 쥐고 있는 자세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지금 자신의 수준으론 지나쳐 온 경비들처럼 금세 제압할 수 있는 적이 아니다.
‘큰일이군……. 여기서 발목이 잡힐 줄이야.’
도시를 벗어나 본격적인 추격이 시작되기 이전에 최대한 거리를 벌리는 것이 이번 탈출극의 핵심이었다.
‘일단 이 자리는 벗어난다.’
만약 그러고도 이 여인이 집요하게 따라온다면 그땐 피치 못하게 싸워야겠지만, 당장 이곳에서 싸우는 것은 미련한 짓이었다. 안톤은 여인의 반대 방향으로 등을 돌리고 그대로 뜀박질을 시작했다.
“거기 서세요!”
등 뒤에서 들려온 외침에 안톤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역시 따라오는군…….’
영웅 심리? 아니면 단순히 심심했기 때문에?
츠레이바의 국민도 아닌 것 같았으니 애국심도 아닐 것이다. 근데 왜 처음 만난 여인이 어째서 이렇게까지 오지랖을 부리는지, 안톤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발이 느리다는 건가.’
기초 체력도 조금 부실한 듯했다.
반면 안톤은 지구력과 체력만큼은 자신 있었다. 장기전으로만 간다면 얼마가 걸리든 간에 결국엔 떨쳐 낼 수 있을 터다.
“하아, 하아…….”
추격을 시작한 지 얼마나 됐을까.
뒤에서 쫓아오는 여인의 숨결이 흐트러지고 있음이 느껴졌다.
마스터의 경지쯤 된 것이라면 모를까. 여기 내려쬐는 이 강렬한 햇살은 체내에서 마나를 계속 순환시킨다고 아무렇지 않게 버텨 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거기다 전력질주를 함에야 체력은 몇 배로 소모될 터였고.
물론 안톤도 지금 온몸이 땀범벅이었지만 흑의 여인보단 상태가 훨씬 괜찮았다.
적어도 한 시간은 더 뛸 체력이 남아 있었다.
“하아, 당장…… 멈추지 못해요!”
악에 받친 듯한 여인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이제 조금만 더.
안톤은 정신력을 발휘해 더욱더 속도를 높였다. 여인과의 거리가 확연히 벌어지기 시작했다.
이제는 포기하겠지.
그렇게 안일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누르 공! 구경만 말고 좀 도와주세요, 이제! 이러다가 놓치겠어요!”
갑자기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릴까도 잠시.
여인의 외침을 이해한 안톤은 등줄기가 쭈뼛 섰다.
“껄껄. 그럼 이제 두 번의 부탁만이 남은 겁니다, 공녀님.”
중년 남자의 음성이 들렸지만, 여전히 기감에 잡히는 것은 여인 하나였다.
육안으로 확인해 보기 위해 안톤은 뒤로 고개를 돌렸다.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무언가가 그를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그것은 날카롭게 벼린 한 자루의 검이었다.
“큭.”
피하기 위해서 몸을 완전히 틀어야 했던 안톤이 모래 바닥 위를 한참이나 굴렀다.
아직 여인과는 거리가 상당히 벌어져 있었지만 그는 망설임 없이 도주를 포기했다.
‘젠장……. 이건 또 어디서 나타난 괴물이지?’
여인과 비슷한 무복 차림을 한 노인이 어느새 나타나 앞을 가로막고 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