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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믿는 것은 검 3화

무료소설 내가 믿는 것은 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879회 작성일

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3화

003. 회귀

 

 

“정신 바싹 차리고 똑바로 휘둘러!”

 

멍한 정신, 먹먹한 귀로 한 남자의 노성이 들려온다.

 

언젠가 들어 보았던 것 같은 목소리다.

 

기억이 날 듯 말 듯, 머리가 간지러운 감각을 느끼며 안톤은 눈을 떴다.

 

“여긴……?”

 

험상궂게 생긴 교관의 호통 소리와 훈련생들의 열띤 기합 소리가 섞여 울려 퍼진다.

 

묘하게 눈에 익은 곳이다 싶던 것도 잠시, 퀴퀴하면서도 시큼한 짙은 땀내를 맡고 있자니 금세 기억이 났다.

 

벨토스 노예 검투사 양성소.

 

그런 이름을 지닌 곳이었고, 안톤은 과거 이 기관에서 3년 동안 훈련을 받으며 지낸 경험이 있었다.

 

그렇기에 더욱 혼란스러웠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꿈인가? 아니 그보다, 나는 죽었는데…….’

 

혹시 그조차 꿈이었나 싶었다.

 

물론 정말로 그럴 리는 없다. 다만 그 정도로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렇게 엉망진창인 사고의 흐름을 차차 정리하던 때였다.

 

“거기 너! 왜 가만히 쉬고 있는 거지?”

 

씩씩거리면서 다가온 교관의 우악스러운 손짓에 의하여 안톤의 육신은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그리고 안톤이 뭔가 항거할 겨를도 없이 그 위로 무자비한 채찍질이 가해졌다.

 

“너희들이 이렇게 하라는 대로 안 하니까!”

 

촤악.

 

“성적이 안 나오는 거잖아!”

 

촤악.

 

교관의 본격적인 가혹 행위가 시작됐다.

 

연약한 육신의 살가죽이 찢어지며 빨갛게 퉁퉁 부어올랐다. 안톤은 본능적으로 몸을 웅크렸다. 고통을 조금이라도 줄이려는 행동이었다. 극심한 고통을 느끼는 몸과는 다르게, 안톤의 정신은 멀쩡했다.

 

이 정도 통증이야 익숙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머릿속에 가득 찬 의문덩어리 덕분에 아픔을 느낄 새가 없었다.

 

“이 자식이 반항하는 거냐!”

 

그러나 비명을 내지르지 않는 것이 못마땅했던 것일까.

 

교관의 채찍질은 더욱 매섭게 변했다.

 

안톤은 이를 악물었다.

 

피부로 전해지는 이 선명한 통증은 지금 이 상황이 꿈이 아니라는 사실만을 알려 줄 뿐이지, 이 사태에 대해선 그 어떠한 것도 설명해 주지 않았다. 다만 주변의 모든 정황들이 한 가지 사실만을 가리키고 있었다.

 

‘과거로…… 되돌아왔다……?’

 

촤악-! 촤악-!

 

정상적인 사고를 방해하는 채찍질이 무심코 거슬린다는 생각이 들 때였다.

 

어느샌가 안톤은 교관의 채찍을 잡아채고 있었다.

 

“어? 어?”

 

교관의 얼굴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미처 생각지도 못한 일을 당했다는 표정.

 

안톤은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교관에게 복종할 것.’

 

각인령을 어김으로써 각인마법의 징벌이 가해졌다.

 

“끄어어…….”

 

안톤이 가슴을 부여잡으며 그대로 흙바닥으로 쓰러졌다.

 

누군가 심장을 거세게 움켜쥔 듯 숨이 막혀 왔다.

 

그 탓에 뇌를 불로 지지는 듯한 끔찍한 통증 속에서도 안톤은 비명조차 내지를 수가 없었다.

 

안톤이 그렇게 몸부림치고 있을 때였다.

 

“네가 미쳤구나! 감히 내게 반항해? 그래, 어디 한번 오늘 죽어 보자고. 야, 너희들! 당장 저 녀석 잡아다 묶어 세워.”

 

안톤은 동료 훈련생들의 손에 의하여 목마에 몸이 묶였다.

 

교관의 매질은 해가 반쯤 저물 무렵까지 이어졌다. 안톤은 그 동안 기절하고, 또 깨어나길 총 네 번이나 반복했다.

 

안톤은 반쯤 기절한 상태로 동료 훈련생들의 손으로 막사로 옮겨졌다.

 

그것이 안톤이 28년 전으로 회귀하고서 첫날의 기억이었다.

 

 

* * *

 

안톤은 자조적인 웃음을 띠었다.

 

이 정도로 진득하게 망가져 본 것이 과연 얼마 만인 것인지.

 

온몸이 곤죽이 났다고 하면 적절한 표현이 될까.

 

멀쩡한 살가죽이 없었고, 벌어진 상처 사이로 누런 고름이 새어 나와 딱지가 생겼다.

 

누가 보아도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하는 데 무리가 있는 몸 상태.

 

몸이 다 회복될 때까지 안톤은 모든 훈련 일정에서 제외됐다. 다른 훈련생들에게 듣기로 안톤을 체벌한 교관은 입소한 지 얼마 안 된 신입에게 너무 심하게 대했다고 윗선에서 한소리 들은 모양이었다.

 

교관의 그 불같은 성정을 보자니 자신의 행동을 반성할 리는 없다. 아마 자신이 어서 훈련에 복귀하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을 터.

 

허나 그러한 걱정을 하기엔 마음이 여유롭지 않다.

 

그날로부터 3일이 지났다.

 

과거로 돌아왔다는 그 사실을 실감하기는 아직 어려워도, 얼추 인지하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허나 안톤은 아직도 믿기지가 않았다.

 

‘벌써 3일이 지났다. 더 부정하는 건 의미가 없겠지…….’

 

요 3일 동안에 침대에 누워 하릴없이 시간을 죽이며 참 많이도 생각해 봤다.

 

어째서 자신에게 이러한 현상이 벌어졌는지. 그렇다면 자신은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또 과연 자신이 무얼 할 수 있는지까지.

 

그러나 생각의 끝은 늘 암울할 뿐이었다.

 

안톤은 하루에도 수십 번 천국과 지옥을 오갔다.

 

과거로 돌아왔다.

 

제국력 412년. 노예 검투사 양성소에 갓 입소한 열두 살 당시로.

 

그것만큼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뭐가 달라지지?’

 

혹여 누군가에게 과거로 돌아왔다는 것은 큰 기회가 될 수 있으나, 자신에겐 아니다.

 

안톤은 고개를 들어 자신의 몸을 재차 훑어보았다.

 

태어났을 때부터 그러하였듯이 상반신엔 마법각인이 또렷이 박혀 있었다.

 

진물이 새어 나오는 덧난 상처보다도 그 사실이 더욱 쓰라렸다.

 

과거로 돌아왔음에도 이 빌어먹을 몸뚱이는 여전했다.

 

자신이 노예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이전의 삶과 똑같이 숨을 쉬고, 밥을 먹고, 잠을 자는 것조차 주인이 허락해 줘야 하는 신세인 것이다.

 

콜로세움에서 더 많은 돈을 주인에게 벌어다 주고, 백작 부인의 밤 시중을 보다 능숙하게 들고, 또다시 전쟁터로 끌려가 보다 많은 적을 죽일 수는 있겠지.

 

혹여 그로 인해 미래가 조금은 변할 수는 있을 터다.

 

하지만 결국 누군가의 노예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모습만 바뀌었지 실상을 들여다보면 똑같은, 그러한 삶을 반복하게 되리라.

 

언젠가 죽음이 선사해 주리라 여겼던 자유.

 

그 자유라는 것은 마치 자신 따위는 영원히 잡을 수 없는 존재라는 듯, 결국 또다시 멀리 도망가 버렸다.

 

“아아…….”

 

문득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그간의 서러움이 왈칵하고 올라온다.

 

가슴이 공허했다.

 

지난 40년간 그의 삶은 본인의 것이 아니었다. 탄생을 비롯해 죽음 그 자체까지, 그 긴 시간 동안 안톤의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지나간 삶에 대해 몇 번이나 되짚어 보아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또 한 번 되풀이하라는 거냐? 그 삶을?”

 

더 이상 타인을 위한 삶을 살고 싶지 않다.

 

또다시 그 삶을 반복하기엔 지칠 대로 지쳐 버렸다.

 

이제 안톤의 영혼엔 한 줌의 기력도 남아 있지 않았다.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 느껴졌다. 그렇게 지독한 허무감에 몸부림치던 때였다.

 

‘있다.’

 

딱 하나가 있었다.

 

안톤이 살아온 시간 속에서 있었던 그만의 것이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이, 단 하나뿐이지만 분명히 있었다.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라 함은 꼭 자네를 보고 쓰라는 말이라는 생각이 드는군.

 

죽기 전, 오러 마스터 제오르 경이 해 주었던 말이다.

 

그는 안톤을 보잘것없는 노예라고 무시하지 않았다. 한 사람의 검사로 대접하며 진심을 다해 검을 나누어 주었다.

 

진주 목걸이라고, 분명히 그렇게 말하여 주었다.

 

‘그 시간은 나만의 것이었다.’

 

안톤은 눈을 감고 기억을 되살렸다. 황홀했던 검의 영역, 그와 검을 나누며 정말 오랜만에 검이 지닌 본연의 매력을 맘껏 느낄 수가 있었다.

 

‘원래 검이란 그토록 즐거운 것이었는데.’

 

참 오랜 세월을 잊고 살았지만, 원래 안톤에게 있어서 검이란 것은 그런 존재였었다.

 

검은 그의 유일한 친구였다.

 

외롭고 갑갑해서 문득 힘겹게 느껴졌을 때, 밤새도록 검을 휘두르면 모든 걸 내던질 수 있었다.

 

다시 생각해 보니 훈련장에서 검을 휘두르고 땀을 흘리던, 검이라는 것에 대해 고민하고 또 연구하던 그 시간들 또한 자신의 것이다.

 

그리고 끝내 그 시간들이 쌓이고 쌓여 명인의 반열에 오른 제오르 경의 인정을 받아 낼 수가 있었지 않은가.

 

자신의 인생은 보잘것없지 않았다.

 

‘검을 휘두르고 싶다.’

 

가슴을 타고 머리로 전해진 몸의 외침이었다. 마지막, 제오르 경과의 전투에서 배우고 느낀 것들을 내 검신으로 녹여내고 싶었다.

 

허나 연약하고 상처 입은 이 몸뚱이로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기에 안톤은 눈을 감고 상상했다.

 

그러자 갉아 먹힐 듯한 살갗의 통증도, 침대의 쉰내도 저 멀리 연병장에서 들려오는 다른 훈련생들의 기합 소리도 점점 흐려지기 시작한다.

 

백작 부인의 밤 시중을 들던 그때처럼, 안톤의 머릿속 세계에서 무한히 자유로운 검의 궤적이 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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