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남녀 135화
무료소설 이계남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2,198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이계남녀 135화
135 시작되는 전투(3)
무혼과 베트란의 눈이 점점 붉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전신에서 기세가 피워 오르고 기류는 잔잔한 흐름에도 반응을 하며 그들의 의지에 이끌려가고 있다.
검은 안개도 그들이 밟고 있는 대지도 두 사람을 보며 숨죽이고 있었다.
그리고 무혼의 왼발 그리고 오른팔, 베트란의 왼발, 그리고 오른팔.
동시에 움직이는 순간 두 사람의 중심에서 거친 폭음과 함께 서로를 가로지르는 두 개의 긴 선이 대지를 파고들었다.
‘빠르다.’
무혼은 자신의 손끝에 느껴지는 감각을 통해 베여진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았으나 그것이 베트란의 몸이라고 자신하지 못했다.
어쩌면 그의 갑옷과 그 속에 입고 있는 옷만 벤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느낌을 통해 그의 허리 부분의 옷이 베어졌다는 걸 느꼈다.
그러나 그것에 더 이상 신경 쓸 여유가 없다. 무혼의 손에 이끌리는 백색의 신검이 베트란의 심장을 향해 돌진하고 있음에도 그의 롱소드가 무혼의 머리를 향해 달려오는 속도가 조금도 줄지 않고 있었다.
무혼은 머리를 한쪽으로 살짝 기울이며 찌르는 속도에 박차를 가했지만 베트란은 왼쪽 가슴을 살짝 젖히면서 무혼의 검을 피해냈다.
두 사람이 교차하는 순간 베트란의 왼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느새 손톱이 길게 솟아나며 날카로운 예기를 뿌리는 것으로 보아 무혼의 몸을 감싸고 있는 두꺼운 가죽의 덧옷쯤은 단숨에 뚫고 무혼의 몸을 헤집을 듯하다.
그러나 베트란의 왼손은 무혼이 몸을 젖혀 피하여 비어버린 공간으로 뻗어나갔고 그의 등 뒤로 백색의 검은 맑고 검붉은 기운을 맹렬히 회전시키며 파고든다.
제비돌기 식으로 상체를 앞으로 숙인 후 다리를 뒤로 들어 올려 무혼의 뒤통수를 향해 강렬하게 날렸다. 그의 공격을 눈치챈 무혼은 오른팔을 뒤로 댕기며 팔꿈치로 베트란의 발목을 노리고 다리로 베트란의 왼쪽 어깨를 노렸다.
콰콰쾅.
흙먼지가 주위를 감싸며 무혼의 전신을 휩쓸자 뒤로 몸을 날려 오십여 미터를 물러났다. 그리고 숨을 잠시 가다듬으니 가라앉는 흙먼지 사이로 베트란의 모습이 보였다.
망토와 갑옷에 엉망으로 내려앉은 먼지를 털고 있던 베트란은 무혼의 모습이 보이자 입가에 미소를 띠더니 투덜거렸다.
“잠시 구경한다는 것이 하마터면 신체 한 곳이 완전히 박살 날 뻔했군.”
“마나를 지면에 폭발시키다니, 좋은 생각이었다.”
그렇게 말하는 무혼의 입가에는 씁쓸함이 있었다. 베트란의 판단이 조금만 늦었어도 발목이나 어깨 정도는 부숴버릴 수 있었는데 그걸 놓치고 나니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너무 아쉬워하지 마라. 덕분에 난 이렇게 먼지를 다 덮어썼으니까.”
먼지를 다 털어낸 베트란은 턱에 손을 대고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무혼을 향해 질문을 던진다.
“그런데, 확실히 어디선가 만난 적이 있는 것 같군. 당신과 싸워본 기억이 있어.”
“그럴 테지.”
무혼이 끄덕이자 베트란은 다시 그의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그가 서두르지 않고 무혼과 이야기를 나누는 이유는 그의 혈관에 흐르는 쾌감을 길게 느끼기 위해서다.
그를 흥분시킬 만한 실력자와 겨룰 기회가 없어 꽤 오랫동안 느껴보지 못한 쾌감이기에 쉽게 날려버릴 생각이 없었다.
“이상하군. 자네가 황토인인 것은 접어두더라도 자네 정도의 실력자를 내가 잊을 리가 없는데?”
“잊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떠올리지 못하고 있을 뿐.”
“흐음. 탐색전 정도로는 기억을 떠올릴 수가 없다는 말인가?”
베트란은 롱소드를 수평으로 들더니 왼손의 검지를 이용하여 살짝 튕겼다. 그러자 롱소드는 맑은 검명(劒鳴)을 내며 살짝 떨렸다.
누가 봐도 그저 검을 가지고 장난친 것으로 느낄 만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무혼의 감각은 지금 무섭게 부풀어 오르고 있는 베트란의 기세를 감지하고 있다. 검명과 함께 시작된 베트란의 기세는 길게 그리고 점점 크게 울리고 있는 검명만큼이나 주위를 장악하고 있었다.
“좀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는 자세히 알아야겠지?”
검을 향해 숙였던 고개를 들어 올린 베트란의 눈은 중급의 마인들과 같이 칙칙하고 검붉게 변해 있었지만, 그 속에 음산한 빛이 점점 강렬하게 떠오른다는 것이 다른 마인들과 달랐다.
그리고 웃으며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에서는 톱니와도 같은 이들이 시뻘겋게 물들어 가고 있다.
무혼도 명혼흡정술과 흑명공의 구결에 따라 온몸으로 검은 안개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이미 무혼의 검에 걸린 흑색의 기류는 더 이상 검신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진해져 있었고 피부는 옷과 구분을 하기 힘들 정도로 검게 물들어 있다.
흑발의 긴 머리카락이 일렁이는 가운데 떠진 무혼의 눈은 선명한 붉은빛을 띠고 앞을 바라본다.
베트란도 준비가 끝났는지 주위에 있는 검은 안개들이 수축과 팽창을 계속하며 그의 움직임에 민감한 반응을 한다. 계속 검명을 내던 롱소드는 어느새 조용해졌으나 검의 주위에서 검과 같이 진동을 하고 있는 대기는 은은하며 반투명하고 날카로운 공기의 검날을 형성하였다.
둘의 사이는 겨우 오십여 미터. 이번에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일제히 뒤로 몸을 날리며 검을 앞으로 뻗었다.
휘이이이이.
반투명한 공기의 검이 길게 뻗어 나오며 무혼이 있던 위치를 꿰뚫었으나 빈 공간이기에 땅으로 파고든다.
그러나 뒤로 몸을 날리고 있는 무혼의 발아래에 모습을 드러낸 검날이 무혼을 반으로 쪼개려는 듯 날카로움을 과시하며 무혼을 쫓는다.
쐐애애애액.
태애앵.
무혼의 검에서 회전하던 기류가 드릴처럼 쇄도하며 롱소드가 토해낸 공기의 검날을 깨트리고 대지의 표면을 스치듯이 날아 베트란의 배를 향해 이를 드러내며 파고들고자 한다.
베트란의 왼손에서 길게 솟아나온 손톱이 할퀴고 롱소드가 반으로 가르자 무혼의 검에서 뛰쳐나온 흑색의 기운은 힘을 잃고 대기에 흩어져 버렸다.
두 사람의 사이에 있는 공간을 거침없이 가르며 주인의 적을 향해 전광석화와 같은 속도로 날던 롱소드는 무혼의 의지를 따르는 백색의 신검과 격돌했다.
카아아아아.
크르르르르.
미타모할 성의 성벽 뒤에서 그들의 격돌을 보고 있던 연합군과 뒤로 멀리 물러나 격돌을 하는 곳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동맹군은 변해 가는 검은 안개의 형상을 보며 입을 벌리기 시작했다.
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곳을 에워싼 검은 안개들이 포효와 함께 거대한 형상이 이루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 거대한 늑대의 형상을 하고 무혼의 의지를 따르는 검은 안개와 베트란의 움직임에 반응하며 머리에 세 개의 뿔이 달린 거인의 모습을 한 안개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서로를 노리고 있다.
그들의 몸을 이루는 검은 안개에서 뜨거운 연기처럼 흐트러지는 모습은 분노에 불타는 모습을 연상케 했고 분명한 적의를 드러내며 빈틈을 찾고 있다.
크아아아앙!
늑대의 형상이 갑자기 달려들며 거인의 가슴을 길게 긋자 거인은 주먹을 들어 늑대를 내려친다.
그러나 늑대는 주먹을 피하지 않고 굳건한 어깨로 받아내고 이로 거인을 위협하며 기다란 발톱을 가진 앞발로 거인의 얼굴을 노렸다.
카아아아아!
그러자 거인이 머리에 달린 뿔로 늑대의 앞발을 휘저어 공기 중에 흩트리고 주먹으로 늑대의 배를 노린다.
그러나 광분한 늑대는 거인의 팔을 훌쩍 피하고 거인에게 달려들어 어깨를 물어뜯고 찢어발겼다.
카아아아아!
크르르르릉!
서로 치열하게 물고 뜯는 안개 속에서 쉴 새 없는 폭음이 들려오고 무혼과 베트란이 뿌리는 기세의 영향 안에서 거스르는 모든 것이 부수어지며 거인과 늑대의 형상도 그들의 충격파에 흐트러지기도 한다.
그들 아래에 있는 대지는 이제까지 겪은 적이 없는 강렬한 힘에 베이고 파이고 갈라지며 비명을 지르다 그 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어느새 늑대와 거인의 형상도 사라졌고 검은 안개들이 다시 끌려오는 격전장의 중앙에 무혼과 베트란이 백여 미터의 거리를 두고 서로 노려보고 있었다.
“아주 화끈했어. 마인이 된 뒤 이렇게 정신없이 싸워보기는 처음이군. 당신 정말 대단해. 온몸 구석구석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도록 말이야.”
환희에 가득 찬 베트란의 눈은 번들거리며 무혼을 훑어보고서 혀로 입술을 적셨다.
먼지로 누더기가 된 갑옷을 입고 있는 그의 왼팔과 왼쪽 어깨에 있던 갑옷이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고 어깨에서 흘러내린 피가 팔을 적시고 있었지만, 그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무혼의 사정도 베트란보다 나을 것이 없었다. 왼쪽 다리의 옷이 갈기갈기 찢겨 있었으며 그 위에 보이는 핏빛의 선들 사이로 피가 흘러나오고 있다.
“이곳에서 이 정도로 겨뤄보는 것은 처음이군.”
“흐흐흐, 나를 다른 자와 비교하는 것은 말도 안 되지. 그런데 황토인, 당신은 미라크네의 공주와 무슨 관계지? 그 계집이 당신을 소환했다는 말은 들었다만 단순히 소환을 한 것은 아닌 것 같은데?”
“이제야 모레스 성이 생각났나 보군.”
베트란은 무혼을 다시 한번 살펴보며 조금 전의 격전을 떠올렸다.
검의 궤적부터 상대에 대한 대응. 그의 사촌 동생 베르노를 벤 계집과 거의 흡사했다.
‘아니, 그 계집의 껍데기만 뒤집어썼다면 검술만으로는 그 계집이 맞다고 생각했을 정도인데… 가만? 껍데기?’
베트란은 다시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검술이 같은 것은 황토인과 공주가 똑같은 검술을 익혔다고 생각하면 설명이 된다.
그러나 같은 검술을 남자들이 같이 연마를 해도 신체적인 차이 등으로 반응이 여러 가지로 나누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눈앞의 황토인과 계집은 그러한 반응까지도 거의 유사하다.
검술을 익혀본 자라면 쉽게 알 수 있겠지만 남자와 여자가 똑같은 반응을 일으킨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똑같다면 한 가지 경우뿐이다. 두 사람이 실제로는 한 사람인 경우.
베트란은 무혼을 노려보았지만 아무리 보아도 그 공주가 분장하거나 변장한 것 같진 않다. 저 황토인에게서 풍겨 나오는 기백은 여러 고난을 당당하게 헤쳐 나온 사내의 것이다.
‘그렇다고 저놈이 공주로 분장했을 리가 없잖아?’
풀리지 않는 문제를 잠시 고민하던 베트란이 입을 열었다.
“그때의 공주가 당신인가?”
무혼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서 그때는 공주의 모습이었지?”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
무혼의 대답에 베트란의 심장은 점점 빨라지며 흥분하기 시작했다.
“블랙 블러디의 기사를 죽인 공주도 당신인가?”
“그렇다. 난 분명 무인의 예를 다했다고 말해 주었다.”
“으하하하하, 그랬었구나. 하하하.”
무혼의 답을 들은 베트란은 갑자기 광소를 터뜨렸다.
베르노의 최후의 복수 대상인 미라크네의 공주가 황토인을 소환하고 사라졌다는 것을 알았을 때 베트란은 분노에 이성을 잃을 정도였었다.
그날 폭주한 베트란은 연합군이 지키고 있던 국경의 성인 퀄레타 성으로 뛰어들어 수많은 사람들의 몸을 찢고 심장을 터뜨리며 분노를 달래야 했었다. 그리고 다시는 최후의 복수를 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인간계의 최대 강적이 그 복수의 대상인 것이다.
베트란은 확신했다. 무혼을 갈가리 뜯고 그의 뇌수와 심장을 움켜쥔다면 복수의 마신 콜레나루트의 빙의가 완벽하게 끝날 것이다.
“넌, 정말 최고의…….”
“응?”
무혼이 나직하게 울리는 베트란의 말을 자세히 듣지 못해 반문했을 때 베트란은 무혼을 향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사냥감이닷!”
쿠와와와왕!
베트란의 발아래에 있던 대지가 그의 기세를 이기지 못해 짓눌러지며 푹 꺼졌다. 순간 공기마저 밀려난 듯 그를 중심으로 직경 십오 미터 정도의 구(毬)가 만들어지며 그 속으로 검은 안개가 급속히 모여든다.
사방으로 뻗친 베트란의 머리카락 사이에는 힘을 이기지 못하고 작은 벼락과도 같은 기운이 일렁인다.
펑! 핑! 펑!
부풀어 오르는 베트란의 몸을 이기지 못한 갑옷들이 튕겨 나가는 소리 속에 그의 눈과 입이 옆으로 찢어지고 입술 사이로 기다란 송곳들이 삐져나왔다.
무혼은 그의 모든 내력을 끌어내기 시작했다. 눈앞에 보이는 거대하고 반투명한 구(毬)는 이미 새까맣게 변했고 오로지 베트란의 붉은 눈밖에 보이지 않는다.
무혼의 주위에도 무혼을 중심으로 구(毬)가 만들어졌다. 내력의 붉은빛과 안개가 가진 흑색의 빛이 무혼의 주위를 아주 빠르게 맴돌고 있다. 무혼의 눈이 떠지며 입술 사이에서 조용한 목소리가 흘렀다.
“그럼 모레스 성에서의 결론을 내어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