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레나, 이계사냥기 197화
무료소설 아레나, 이계사냥기: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53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아레나, 이계사냥기 197화
카자드는 조용히 등장했다.
“위!”
데이나가 소리쳐 경고하고 나서야 나를 비롯한 모두가 그의 등장을 알아차렸다.
깡마르고 큰 키의 노인이 하늘에 붕 떠 있었다.
로브 밖으로 나온 얇은 팔과 목에 문신처럼 잔뜩 새겨져 있는 마법진이 기이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것만 빼면 어딜 봐도 볼품없는 노인이었건만, 이상한 박력이 느껴졌다.
서늘한 눈빛.
어떤 감정도 담지 않은 눈길로, 신이 피조물을 내려다보듯이 우리를 바라보았다.
“귀찮구나.”
노인이 우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흑마력이 주먹만 한 크기로 그의 손에 맺혔다.
겉보기에는 그다지 막대한 기운 같지 않았는데, 데이나가 보기에는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큭!”
데이나도 급히 두 손으로 수인을 맺었다.
푸른 기운과 하얀 기운이 하나로 섞이기 시작했다. 저게 바로 마나와 영혼력의 듀얼서클인 모양이었다.
노인, 카자드의 손에서 시작된 작은 흑마력 덩어리가 이윽고 점점 확장되기 시작했다.
이윽고 흑마력 덩어리에 의하여 공간이 일그러지더니, 마치 시험의 문처럼 허공에 통로가 생겨났다.
‘저거 전에 해적군도의 그 대사제랑 싸울 때 본 적 있는데?!’
그때도 저런 통로를 열더니, 그 안에서 괴물들을 잔뜩 쏟아냈던 기억이 있었다.
카자드도 저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려는 모양이었다.
아마도 잡다한 언데드 괴물을 잔뜩 꺼냈던 대사제와는 비교도 안 되리라.
내 예상대로였다.
검은 통로에서 무언가가 나오기 시작했다.
머리부터 천천히 나오는 그것은 사람이었다.
머리서부터 발끝까지 온통 은색의 두꺼운 갑주로 무장한 기사였다. 금속처럼 광채가 흐르는 붉은 망토까지도 범상치가 않았다.
‘엄청 강한 놈이겠지? 카자드가 꺼낸 놈이니까…….’
나는 침을 꿀꺽 삼킨 채 쌍권총으로 카자드를 겨누며 경계했다.
은색의 기사가 상반신을 막 꺼냈을 때였다.
“웃기지 마라! 가만히 지켜볼 것 같으냐?!”
데릭이었다.
최고의 베테랑 엘프 전사답게, 모두가 놀라고 있을 때 즉각 무기를 들고 나선 것이다.
“카사!”
화르르르르!
데릭이 마침내 자신의 본 실력을 드러냈다.
카사와 융합된 데릭이 두 자루의 검에서 불꽃을 미친 듯이 쏟아내기 시작했다.
화르르르! 콰르릉―!
불길이 은색의 기사와 카자드를 한꺼번에 덮쳤다. 나는 카자드에게 전혀 압도되지 않은 데릭의 용맹에 감탄했다.
카자드는 다른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콰르르르르!
검은 불꽃이 손에서 튀어나와 카사의 불꽃과 충돌했다.
하지만 은색의 기사는 카사의 불길을 방어하지 못하고 그대로 불에 휩싸였다.
-크어어어!
은색의 기사가 괴로움에 찬 비명을 지르며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휘둘렀다.
카사의 불길이 검에서 폭사되어 나온 오러 블레이드에 의하여 갈아져 버렸다. 맙소사, 오러 마스터였다.
오러 블레이드를 본 데릭은 놀라 일단 한 걸음 물러섰다.
하지만 전혀 겁먹지 않은 듯, 다시 한 번 쌍검을 꼬나 쥐고 달려들 준비를 했다.
데릭의 용맹에 감명을 느낄 때, 데이나가 소리쳤다.
“비키십시오!”
데이나가 카자드와 은색의 기사를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데릭은 공격을 하지 않고 잠시 멈췄다.
은색의 기사는 이제 다리도 하나 통로 밖으로 꺼내진 상태였다.
데이나는 마나와 영혼력이 융합된 에너지를 은색의 기사를 향해 던졌다.
번쩌억―!
눈부신 빛이 주위를 온통 휘감았다.
-끄아아아아!
방금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처절한 비명 소리.
은색의 기사에게서 기이한 검은 연가가 새어 나왔다.
이를 본 카자드는 신속하게 검은 통로를 열던 왼손을 휘저었다.
파앗!
은색의 기사가 통로 안으로 사라지고, 통로는 닫혀 사라져 버렸다.
데이나는 연이어 한 번 더 듀얼서클을 펼쳐, 융합된 에너지를 눈앞에 있는 카자드를 향해 휘갈겼다.
카자드도 이번에는 여유를 차리지 못하고, 두 손을 모아 흑마력을 일으켰다.
파아아아아앗!
눈부신 백색 섬광과 시커먼 흑마력의 충돌!
빛과 어둠이 얼기설기 혼재된 기상천외한 상황이었다.
데이나의 듀얼서클이 만든 백색 섬광은 주변에 있던 스켈레톤들을 순식간에 녹여 버렸다.
스켈레톤들은 빛에 닿을 때마다 몸에서 검은 연기가 빠져나가더니 와르르 뼈 조각이 되어 무너졌다.
눈부시게 밝기도 하고 앞이 캄캄할 정도로 어둡기도 한 기이한 충돌이 멎어들고, 데이나는 지면에 착지했다.
카자드 또한 멀쩡한 모습 그대로 공중에 떠 있었다.
“내가 꽤나 아끼는 라피린 경을 단번에 격퇴하다니, 역시 내가 눈여겨볼 만한 자로구나.”
“라피린이라고?!”
오딘이 경악에 찬 얼굴로 반응했다. 왜 저렇게 반응하지? 뭔가 유명한 이름인가?
궁금해하는 내 마음을 귀신같이 눈치챈 차지혜가 옆에서 설명했다.
“대륙 정복에 앞장섰다는 전설의 무장입니다. 용맹과 지혜와 충성을 두루 갖춘 가신의 모범으로 추앙됩니다.”
“자기 충신을 언데드로 만들었다고? 저런 미친!”
내가 욕지거리를 하자 카자드가 어깨를 으쓱했다.
“본인의 동의를 받아 육신만 썼지. 육신이나마 죽은 뒤에도 충성하고 싶다는 본인의 의사였다.”
휴우, 가짜 영혼의 구슬을 불어넣어서 헤이싱 때처럼 부활시켰나 보군.
카자드는 데이나를 응시했다.
“하나의 몸에 두 가지 기운이라. 역설을 몸소 실현하다니, 정말 재미있구나. 그것은 죽어야 할 자가 살아난 것만큼이나 불가능한 일이거늘.”
“저는 시험자이니까요.”
“그래, 나는 섭리를 거역했지만 넌 율법의 허락을 받았지.”
카자드의 눈빛에 기이한 광채가 서렸다.
“한 번에 두 가지 기운을 지닐 수 있다, 라…….”
“…….”
괴물 카자드의 지대한 관심에 부담스러울 만도 하건만, 데이나는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렇군, 그런 방법이 있었군.”
“무엇이 말입니까?”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이 떠올랐다.”
“문제의 원인이 무엇인지 자각은 있으신지요?”
데이나의 물음에 카자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말고. 나를 보아라. 괴물이 된 이 실패작을 보아라! 얼간이 같은 후손 녀석이 말귀도 못 알아듣고 내 대계를 이따위로 망쳐놓았어. 내가 무엇이 문제인지도 알지 못할까?!”
놀라운 일이었다.
카자드는 스스로가 잘못되었음을 알고 있었고, 그것에 분노하고 있었다.
“공정하며 정의로우며 영원불멸한 세상의 지배자이자 영원한 세상의 율법이 되고자 하였다. 그렇게 인간을 고통으로부터 구원하고 싶었고,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아니, 아직 딱 한 사람은 더 그럴 자질을 가지고 있지.”
“방금 전에 스스로를 실패작이라 일컫지 않으셨습니까?”
“내가 아니다.”
“그럼…….”
거기까지 말하다가 데이나는 말을 멈췄다.
그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런 그의 반응을 보며 카자드는 씨익 웃었다.
“역시 총명하구나. 어떠냐? 나의 후계자가 되지 않겠느냐?”
‘뭐?!’
나는 기겁을 했다.
이 자리에 있던 모두가 놀랐다.
카자드가 말을 이었다.
“내가 너에게 모든 힘과 지혜와 지식과 경험과 지위를 물려주겠다. 나는 비록 이렇게 실패하였으나, 한 몸에 두 가지 기운이 허락된 너라면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저더러 영원불멸한 이 세상의 왕이 되라는 겁니까?”
“그렇다.”
“웃기지 마라―!!”
고함을 터뜨린 것은 오딘이었다.
“그래!”
“어디서 수작을!”
다른 시험자들 역시 적개심 어린 얼굴로 무기를 고쳐 쥐었다.
저 작자가 지금 우리가 빤히 보는 앞에서 데이나를 포섭하려 드는 것이다!
그런데 의외의 말이 이어졌다.
“내 모든 걸 물려받고, 나를 죽여라. 그럼 너희는 시험을 이룰 수 있고, 나도 너를 통해 뜻을 이룰 수 있고, 너로 인하여 이 세상도 평화를 맞이할 것이다.”
금방이라도 카자드에게 덤벼들 것 같았던 시험자들은 움찔했다.
뜻을 위해 스스로 죽음을 택하겠다니?
그 말대로라면 정말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었다.
괴물 같았던 카자드는 생각보다 더 냉정하고 이성적이었다.
“……그게 진심이십니까?”
“그렇다. 어떠냐? 결코 쉬운 길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너로 인하여 모두가 행복한 결말을 맺겠지.”
영원불멸의 지배자.
나더러 그런 걸 해보겠냐고 묻는다면 거절할 것이다.
그런 삶은 그다지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죽음이 두려워 시험자가 되길 선택했지만, 역설적으로 죽음이라는 끝이 존재하지 않는 무한한 생애도 원하지 않았다.
당연히도, 데이나도 그런 것을 원하지는 않을 터였다.
하지만 데이나는 쉬이 거절하지 못하였다.
자신이 희생하여 저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정말로 그를 제외한 모두가 행복해지게 되는 것이었다.
“어떠냐? 선택해라.”
“저는…….”
잠시 말끝을 흐린 데이나가 이윽고 큰 결심을 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받아들이겠습니다.”
“현명한 선택이다.”
카자드는 흐뭇하게 웃으며 손을 뻗었다.
파아아아앗!
그의 손에 막대한 양의 흑마력이 뭉쳐지기 시작했다. 아까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많은 양이었다.
“자, 이리로 와라. 이건 내 모든 것을 담은 것이다. 넌 두 가지 기운을 겸비할 수 있으니 가진 하나를 버리고 이걸 받아라.”
“함정일 수도 있어요!”
내가 경고했다.
그제야 오딘과 몇몇 시험자가 만에 하나를 대비해 전투태세를 취했다.
데이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염려 마십시오.”
내 염려를 뒤로하고, 그는 카자드를 향해 날아갔다.
데이나의 오른손에 막대한 푸른 에너지가 뭉쳤다. 저 푸른 기운은 바로 마나였다.
“마나를 포기하려고? 그래, 현명하다. 마법을 버리고 영혼력을 지니고 있는 편이 좋지. 내가 물려줄 흑마력과 합쳐지면 영원불멸을 더 쉽게 완성할 수 있을 테니까.”
“그렇습니다.”
“자, 와서 이것을 받아라.”
“그렇게 하겠습니다.”
카자드는 손에 흑마력을, 데이나는 손에 마나를 모은 채 서로에게 다가갔다.
두 사람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나는 쌍권총을 카자드를 향해 겨눈 채 긴장했다.
어떤 결과가 이어질지 알 수 없어 숨 막힐 것 같았다.
지척에 이르렀을 때, 두 사람의 눈이 서로 마주쳤다.
그리고…….
화르르르르―
카자드의 반대편 손에 검은 불꽃이 해일처럼 일어났다.
“크하하!”
검은 불꽃이 데이나를 덮쳤다.
하지만 동시에, 데이나 역시 반대편 손으로 영혼력을 일으켜 두 에너지를 융합시켰다.
“그럴 줄 알았다!”
번쩌억―!!
검은 불꽃과 듀얼서클의 섬광이 충돌했다.
“살아 있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데 이렇게 포기하란 말이냐!! 크하하하!”
카자드는 내밀었던 흑마력을 다시 회수하고는 검은 불꽃에 더욱 힘을 가했다.
콰르르르르!!
데이나의 빛이 밀리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에 범벅이 된 땀이 이를 증명했다.
“공격하세요!”
내가 소리치며 쌍권총을 휘갈기기 시작했다.
“공격!”
오딘도 오러 블레이드를 카자드를 향해 휘둘렀다. 시험자들도 저마다 공격을 가하였다.
데릭까지 카사의 불꽃으로 합류했다.
총공세였다.
“크아아아! 걸리적거리지 마라!”
카자드가 이성을 잃고 고함을 지르며 다른 손을 휘저었다.
검은색 장막이 그를 둘러쌌다.
모든 공격이 그 장막을 뚫지 못하고 가로막혔다.
“크윽!”
데이나의 입에서 신음이 튀어나왔다.
‘위험하다!’
직감적으로 위기를 느낀 나는 실프에게 소리쳤다.
“실프, 융합!”
-냥!
나는 데릭이 카사와 융합했듯, 실프와 융합했다. 뿐만 아니라,
“바람의 가호!”
특수스킬 바람의 가호로 실프의 힘을 몇 배로 증폭시켰다.
나는 그대로 데이나를 향해 달려갔다.
데이나의 빛은 점점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검은 불꽃이 금방이라도 그를 잡아먹을 듯했다.
나는 회오리를 몸에 두르고 검은 불길을 돌파했다.
콰아아아아!
불길을 뚫고 들어와 회오리를 확장해 데이나까지 보호했다. 나는 그대로 데이나를 부축하고 지상으로 도망쳤다.
검은 불꽃이 쫓아왔지만 위력이 증폭된 실프의 회오리로 막아냈다.
“큭!”
나는 신음을 삼켰다. 어마어마한 압력이었다.
이윽고 검은 불꽃이 멎어들었다.
시험자들과 데릭 또한 공격을 잠시 중단하고 숨고르기에 들어갔다.
카자드로서도 쉬운 공방이 아니었는지 지친 표정이었다.
“잘 알아차렸구나.”
“그렇게 자기 뜻을 관철할 의지력이 남아있었다면, 진작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겠지요.”
데이나의 대꾸에 카자드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지……. 나는 끝내 그러지 못하고 이 지경이 되었지……. 나는 결국 이 결여된 영혼을 끝없이 채우려는 괴물 같은 욕망에 잡아먹혔다.”
“…….”
“네 가능성을 보고 잠시 이성이 돌아왔었는데…… 이제 다 끝내고 싶구나.”
지친 그의 표정은 아마도 그의 심경을 나타낸 것이리라 싶었다.
하지만 그와 비슷하게 데이나의 표정 또한 그다지 좋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