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제국의 폐급장교 20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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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93회 작성일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205화
205화 떨어지는 태양 (6)
-각 길목마다 적들이 숨어있다. 전 차량은 주의하며 기동하도록.
"수신 완료."
방콕 시내에는 일본군과 그들의 지시를 받는 태국군으로 득실거렸다.
아무리 대세가 기울었다지만, 그래도 방심하다가 훅 갈 수도 있기에 늘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보병들을 좌우로 배치하여 천천히 움직이다가 적이 숨어있을 곳으로 추정되는 곳이 나타나면 포탄을 쏘거나 기관총을 퍼부었다.
하지만 아무리 신경을 써도 적은 늘 예상치 못한 곳에 나타나 수류탄을 던지거나 기관총을 퍼부어댔다. 그때마다 서둘러 포탑을 돌렸지만, 좌우의 보병들이 처리해버린 뒤였다.
"자식들, 처음엔 영 못 미더웠는데 생각보다 쓸만한 것 같습니다?"
게이츠 원사가 다시 봤다는 듯이 말했다. 우측에 자리잡은 광복군의 셔먼은 조금 전 보병 서너 명만 데리고서 골목길에 숨어있던 일본군을 쓸어버렸다. 덩치가 큰 센추리온이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은 한정되었기에, 센추리온보다 덩치가 작은 셔먼과 스튜어트가 더욱 유용하게 쓰였다.
"정면에 적 대전차포!"
아니나 다를까 또 일본군이 나타나 대전차포를 발사했다. 놈들의 목표는 우리가 아니라 우리 옆에 있는 셔먼이었다.
통상시라면 셔먼의 전면장갑이 일본군의 1식 기동 속사포를 튕겨냈겠지만,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불과 50m 거리에서 발사된 47mm 철갑탄은 셔먼의 전면장갑을 관통했다.
"저런!"
전면장갑이 관통당한 셔먼 내부에서 누군가의 비명이 들렸다. 하지만 셔먼은 침착하게 포탑을 돌려 정면의 대전차포를 박살 냈다.
그러나 셔먼의 수단은 아직 끝이 아니었다.
"덴노 헤이카 반자이!"
대전차포가 격파당하기 무섭게 귀퉁이에서 한 무리의 일본군 보병들이 튀어나와 총탄을 퍼부어댔다. 관통당한 셔먼을 살피던 광복군 병사들이 줄지어 쓰러지자, 자돌폭뢰를 든 일본군이 셔먼을 향해 냅다 뛰어들었다.
"으아아아!"
괴성을 지르며 달려오던 일본군이 셔먼의 측면에 자돌폭뢰를 부착하자, 폭발이 일어났다. 측면에 구멍이 뚫린 셔먼은 즉시 불길에 휩싸였다.
"저 새끼가!"
공축 기관총으로 조금 전의 일본군을 벌집으로 만들었지만, 이미 셔먼은 불길에 휩싸여 처참하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포탑 상부의 해치를 열고 밖으로 나온 전차병은 온몸이 불타고 있었다.
"살려줘! 사람 살려!"
바닥에 몸을 던진 그 병사는 분명한 한국어로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쳤다. 그 광경을 보자 나도 모르게 포탑 밖으로 나갈뻔했다. 적의 총격만 없었다면 말이다.
"우왁!"
"이번엔 또 어디야?"
한바탕 총탄이 쏟아져 전차 상부를 긁자 나는 냉큼 포탑 내부로 들어왔다. 차체 상부에 맞아 튕겨 나가는 총탄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원사! 정면에 있는 건물 옥상입니다! 포탑 돌려요!"
건물 옥상에 자리 잡은 일본군의 96식 경기관총의 총구에서 화염이 튀고 있었다.
포탑을 돌려 주포를 올렸지만, 각도가 나오질 않았다. 놈을 조준하기 위해선 뒤로 후진해야 했다. 나는 뒤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후진 명령을 내렸다.
"됐어, 정지!"
적을 조준하는 데 성공한 게이츠 원사가 말했다. 닉이 유탄을 장전하자, 지체 없이 주포를 격발시켰다. 열심히 기관총을 쏘던 일본군 3인방은 로켓단마냥 폭발과 함께 허공으로 날아갔다.
"좋았어!"
우리의 피해는 전혀 없었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나는 해치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셔먼을 바라봤다. 셔먼은 이제 석탄처럼 새까맣게 타버렸고, 전차에서 뛰어내린 전차병도 숯덩이처럼 변해 있었다.
원래 전쟁터에서 사람이 죽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지금까지 셀 수 없이 많은 죽음들을 봤고, 친하게 지내던 부하들도 잃어봤다.
이번에 죽은 저 병사들은 나와 같은 동포였다. 그것도 조국의 독립을 위해 타지의 전쟁터까지 온 동포들. 그 생각을 하니 입맛이 썼다.
-여기는 범고래. 물개 응답 바람.
"아, 여기는 물개."
-피해 상황 보고하기 바란다.
"아직까지 피해는 없다. 소대 전차들 모두 이상 없음.
-알겠다. 방금 2중대가 적의 방어선을 뚫었다는 소식이다. 속히 진군하기 바람, 이상.
"수신 완료."
이미 죽은 사람은 다시 되살릴 수 없다. 그리고 아직 전투가 한창이다.
우리는 죽은 병사들을 뒤로 한 채 전진을 계속했다.
***
"후... 좆같은 전쟁."
겨우 벽돌더미 뒤로 몸을 피한 니헤이 카츠오, 한국식 본명 김호식 일병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사방에서 총성이 울리고, 총알이 바람을 가르며 날아갔다. 폭음이 울릴 때마다 누군가의 비명이 들렸다. 비명은 대부분 일본어로 이루어져 있었다.
"씨발. 그냥 얌전히 집에서 농사나 짓는 것이었는데...."
김호식은 자신의 선택에 대해 땅을 치며 후회하고픈 심정이었다. 거창 시골마을에서 태어난 김호식은 고향 마을 사람들처럼 집안 대대로 농사꾼이었고, 김호식도 부모를 따라 농사를 지었다. 1년 전까지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김호식은 일본군에 입대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이장의 말을 듣고 무작정 경성으로 상경했다. 김호식의 부모는 자식이 일본군에 입대하는 것을 결사반대했지만, 고되기만 한 농사일에 싫증이 날 대로 난 김호식의 의지를 꺾을 순 없었다.
백날천날 뼈 빠지게 농사를 지어서 남는 게 뭐가 있던가. 차라리 일본군에 입대하면 위험할지언정 농사를 짓는 것보다 돈도 많이 받고, 일본인들한테서 조센징이라고 멸시를 받지 않아도 된다.
일본군에 입대한다고 일본인 취급을 받는 것도 아니지만, 적어도 군복만 입고 있으면 그 서슬 퍼런 순사들조차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는 것을 김호식을 알고 있었다.
그렇게 김호식은 창씨개명으로 이름까지 바꾸고 일본군에 입대했다.
비록 출신이 조선인인 탓에 조센징이라고 대놓고 차별을 받았지만, 김호식은 그럴수록 더욱 몸을 낮추고 고참들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 부지런히 노력했다. 이러한 노력을 빛을 발한 것인지 고참들의 갈굼과 구타는 갈수록 줄어들었고, 동기들 중에서 가장 먼저 일등병으로 진급까지 했다.
하지만 그의 행운은 거기까지였다. 전황이 악화되자, 베트남에 주둔 중이던 그의 중대는 서쪽에서 몰려오는 영국군을 막기 위해 태국으로 보내졌다. 그가 태국에 도착했을 땐 이미 버마가 영국군의 수중에 떨어진 뒤였고, 김호식의 부대는 곧바로 방콕 방어에 투입되었다.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최일선에 있던 김호식의 중대는 문자 그대로 박살이 났다. 대전차포들이 쉬지 않고 불을 뿜었지만, 영국군의 중전차는 그 어떤 공격에도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
적 전차가 발포할 때마다 일본군은 일고여덟 명씩 쓰러졌다. 단 몇 분 만에 중대는 와해되었고, 김호식은 겨우 목숨만 건져 도망쳤다.
"적 전차다!"
"쏴라!"
영국군 전차가 나타나자, 대기하던 90식 75mm 야포가 불을 토해냈다. 1식 기동 속사포보다 훨씬 크고 무거워 이동 및 은폐가 어렵다는 단점이 있지만, 위력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1식 기동 속사포가 격파하지 못하는 거리에서도 90식 야포는 셔먼을 격파하는 게 가능했다.
90식 야포의 화력이라면, 틀림없이 영국 놈들의 중전차를 격파할 수 있으리라.
그렇게 굳게 믿고 있었는데....
캉!
"튀, 튕겼다!"
"저 괴물은 대체 뭐야?!"
믿었던 90식 야포조차 통하지 않자 일본군은 그대로 패닉에 빠져 얼어붙었다. 센추리온이 발포하자, 일본군은 90식 야포와 함께 증발했다.
절망에 빠진 일본군에게 또 한 번 충격을 안긴 것은 광복군이었다. 광복군 병사들이 들고 있는 태극기를 본 일본군 병사들은 자신들의 눈을 의심했다.
"저거 뭐야? 저거 조센징들 깃발 아냐?"
"조센징들이라고?"
"진짜 조센징들이잖아?"
사신이나 다름없는 영국군 옆에 자신들이 그토록 우습게 여기던 조선인 병사들이 있다는 사실은 일본군에게 적지 않은 충격을 안겼다. 광복군 병사들의 수는 소수였지만, 그들이 일본군에 준 충격은 그 이상이었다.
"설마, 지금까지 우리가 싸웠던 놈들이 조센징들이었던 건가?"
"천하의 황군이 겨우 조센징들한테 밀리다니...."
적들이 조선인인 것도 놀랄 일인데, 자신들이 하찮게 여기던 그 조선인들에게 밀렸다는 사실은 일본군을 더더욱 충격에 빠뜨렸다. 혼란에 빠진 일본군은 급기야 영국군의 센추리온 전차까지 조선인들이 모는 것이라 착각하기에 이르렀다.
멘붕한 일본군을 향해 광복군 병사들이 일본어로 소리쳤다.
"너희들은 이미 포위당했다! 무기를 버려!"
"항복해라! 해치지 않겠다!"
"이미 일본은 전쟁에서 졌어! 살고 싶으면 지금 즉시 투항해라!"
태생이 그들과 같은 조선인인 김호식에겐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 광경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설마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 하지만 그의 뺨에 난 상처에서 흐르는 피는 진짜였다. 꿈이 아니라 현실이다.
김호식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어차피 일본은 전쟁에서 졌다. 이미 진 전쟁에서, 굳이 목숨을 버릴 필요는 전혀 없다. 일본군에 몸담은 이유도 천황에 대한 충성심 따위가 아닌, 어디까지나 돈이나 벌자는 생각이었기에 죽을 필요는 더욱 없었다.
결심한 김호식은 상의를 벗은 뒤 총에 걸어 내저었다. 백기가 없으니, 군복이라도 벗어 흔들면 의미가 대충 통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항복하겠소! 쏘지 마시오! 난 같은 조선인이오!"
김호식이 항복하자, 이를 본 다른 일본군들도 마음이 흔들렸다. 말이야 천황과 황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했지만, 죽기 싫은 것은 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소련도 너희 일본에게 선전포고했다! 이미 일본에 희망은 없어!"
"투항해라! 안전은 보장하겠다!"
"천황이 니들 인생 대신 살아줄 것도 아니잖아! 항복해!"
한 번 흔들리기 시작한 마음을 도로 바꾸기란 불가능했다.
이미 전쟁에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던 일본군 병사들은 무기를 내려놓고 조용히 밖으로 나오는 편을 택했다.
***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이야?"
"소대장님, 보고 계십니까?"
"그래. 보고 있어."
"세상에, 저놈들이 알아서 항복해오다니. 이 무슨...."
한두 명씩 양손을 들고 나오는 일본군 병사들을 본 부하들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몇 분 전까지 죽어라 달려들던 놈들이 갑자기 얌전한 개처럼 변해 항복해오니까 이상하지 않을 리가 없지.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렇게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아무리 단체로 미쳐있던 일본군이라고 해도, 죽기는 싫은 법이니까.
특히 본인 신념에 상관없이 전쟁터로 억지로 끌려온 개개인이라면 더더욱.
"쟤네들이 한 말이 대체 뭐길래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걸까요?"
닉이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글쎄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어깨를 으쓱거렸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기분이 이런 것이구나.
***
이오지마가 사실상 함락되고, 영국군이 방콕까지 진군했다는 소식도, 소련의 참전 소식에 비하면 새 발의 피 수준이었다.
믿었던 소련까지 전쟁에 끼어들자, 대본영은 완전히 망연자실했다.
일본의 살아있는 유일신, 히로히토조차도 소련의 참전 소식에 할 말을 잃었다.
"...이제 어찌하면 좋겠소."
소련의 대일 선전포고 소식을 전해 듣고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입을 연 히로히토는 자기가 묻고도 답변 따위 바라지도 않는다는 듯이 천장을 올려다봤다.
"소련까지 참전했으니, 더 이상 방법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사옵니다. 송구합니다, 폐하."
스즈키는 고개를 숙였다. 어차피 히로히토 자신도 더는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를 책망하지 않았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로군. 현 위치에 있는 짐이 이런 말을 해선 안 되는 것을 알지면, 아무래도 황국은 전쟁에서 진 것이 확실한 것 같구려."
"그렇습니다, 폐하."
"...황국의 명운은 여기까지인 것 같소. 저들에게 전하시오. 항복하겠노라고."
마침내 히로히토의 입에서 항복이란 두 글자가 나오자 스즈키는 눈을 질끈 감았다. 70대 후반에 접어든 노인의 목소리는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폐하의 뜻을 받들겠사옵니다."
그러나,
천황의 신하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다.
"항복? 하앙복?"
"말도 안 되는 소리!"
"항복은 있을 수 없다!"
눈에 흙이 들어가도 항복만큼은 결코 용납하지 않는 자들이 남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