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제국의 폐급장교 19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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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31회 작성일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193화
193화 발악 (3)
본래 아군의 측면은 유고슬라비아군이 지키고 있다고 들었다.
그런데 측면에서 독일군이 나타났다는 것은, 유고군이 붕괴했다는 뜻일 터였다. 별로 기대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렇게 빨리 뚫릴 줄이야. 겨우 12일 만에 독일에게 수도까지 털리고 항복한 나라의 군대다웠다.
"다시 한번 말한다. 측면에 적이 나타났다!"
나는 중대 무전망에 적의 출현을 알린 뒤, 보리스에게 전차를 뒤로 후진시키라고 명령했다.
"후진이라굽쇼?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내 지시를 받은 보리스는 내 명령을 이해하지 못해 얼빠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야 이 새꺄! 일단 후진이나 하고 말해!"
보리스가 전차를 전차호에서 빼내자, 나는 격파된 물개 3의 뒤로 이동하라고 지시했다. 물개 3의 잔해가 정면의 적들로부터 우리를 지켜줄 것이다.
중대의 다른 전차들은 정면에서 오는 적을 상대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코멧 한 대가 뒤로 빠져서 나를 지원하기 위해 달려왔지만, 오는 도중에 포탄을 맞고 그대로 산화하고 말았다.
물개 3의 뒤로 이동하기 무섭게 포탄 두 발이 전면장갑을 노크했다. 관통되지 않았지만, 차체 전면에 부착한 예비용 무한궤도가 떨어져 나갔다.
다행스럽게도, 적들의 대다수는 상대적으로 만만한 4호 전차였다. 거리만 충분히 유지하며 침착하게 한 대씩 제거해나가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으리라.
"좌측으로 우측으로 이동하며 해치운다. 철갑탄 장전."
"장전!"
"10시 방향, 발사!"
"쏴!"
17파운더의 위력은 과연 상당했다. 차체 전면에 포탄을 맞은 4호 전차는 완전히 유폭하며 포탑을 허공으로 날려 보냈다.
"다음!"
두 번째 4호 전차도 앞의 놈과 같은 최후를 맞이했다. 연이어 세 번째 전차는 무한궤도가 날아갔고 승무원들이 전차를 버리고 탈출했다. 나는 탈출한 승무원들을 내버려 둔 채 다음 표적을 찾았다.
4호 전차들 사이로, 낮은 차체의 돌격포가 보였다. 3호 돌격포인 줄 알았지만, 그보다 차체가 더 납작한데다 차체 전면이 경사져 있었다.
게다가 저 특유의 포방패. 줄여서 '4호구'라 부르는 4호 구축전차였다.
역사대로라면 1944년 중반에 나타났어야 하는 놈이지만, 무슨 사유로 역사보다 일찍 전장에 모습을 드러낸 듯했다. 그래봤자 17파운더 앞에선 한방 컷이지만.
"11시 방향에 4호 구축전차! 조준!"
"어떤 놈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다시 말씀해주십쇼!"
아차차. 아직 게이츠 원사는 4호 구축전차(Jagdpanzer IV)란 말을 모른다. 아군 중에서 저놈의 존재와 제식명까지 알고 있는 사람은 어디까지나 나 한 명뿐이었다.
"전면이 경사지고 차체가 낮은 돌격포요! 찾았습니까?"
"조준했습니다! 쏩니다!"
4호 구축전차는 차체 전면이 60mm 경사장갑으로 이루어져 있어 티거의 100mm 전면장갑과 맞먹는 방호력을 가졌다. 허나 사기적인 관통력을 가진 17파운더 앞에선 거기서일 거기일 뿐.
예상대로 놈은 단 한방에 전면이 관통되어 격파되었다. 유폭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승무원이 한 명도 나오지 않는 것을 보면 몰살당한 게 틀림없었다.
독일군은 동료들이 격파당하는 것을 보고도 악착같이 접근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우리는 침착하게 17파운더를 발사해 접근해오는 적들을 날려버렸고, 어느새 전장에는 불길을 뿜어대는 전해들로 가득해졌다.
우리의 가장 큰 문제는 적 전차들보다 탄약이었다. 쉬지 않고 포탄을 쏘아댄 탓에, 어느새 탄약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닉! 철갑탄 몇 발 남았어?"
"이제 겨우 4발 남았습니다!"
4발 남았다는 소리가 끝나기 무섭게 판터가 나타났다. 게이츠 원사가 장전된 포탄을 쏘았지만, 놈은 그걸 튕겨냈다. 차체가 비스듬히 틀어져 있었는데 그 때문에 포탄이 튕긴 것 같았다.
놈도 그걸 아는지 더 이상 움직이지 않고 포탑을 돌려 우릴 조준했다. 놈의 주포에서 불꽃이 튀기 무섭게 전차에 진동이 가해졌다. 곧이어 헤드폰에서 보리스의 비명이 들렸다.
"보리스?! 무슨 일이야!"
보리스는 죽지 않고 살아있었다. 몸도 멀쩡했다. 단지 존나게 놀랐을 뿐.
판터의 75mm 철갑탄은 센추리온의 장갑을 관통하지 못했다. 정확히는 '관통할 뻔'했다. 판터가 쏜 포탄은 아슬아슬한 차이로 센추리온의 장갑판을 움푹 뚫고 들어와 있었다.
"보리스, 차체 틀어! 잘못하면 관통당한다!"
"예, 옙!"
보리스가 차체를 트는 사이, 나는 게이츠 원사에게 따로 지시를 내렸다. 차체를 튼 판터의 전면장갑을 뚫기 어려우니, 다른 부분을 노려야 한다. 내가 주목한 부분은 포탑이었다.
"원사, 판터의 차체가 아니라 포탑을 노려요. 할 수 있겠습니까?"
"포탑 말입니까?"
"네. 차체를 틀었으니 포탑을 노리는 편이 더 나을 겁니다. 그리고 되도록이면 하단을 조준하십쇼. 조준 끝나는 즉시 바로 쏘고."
"한 번 해보겠습니다!"
판터의 포방패 장갑의 두께는 100mm, 티거의 전면장갑과 동급이다. 그러나 포방패가 원형으로 되어 있어 실질적으론 더 두껍지만, 대신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바로 샷 트랩. 판터의 둥근 포방패는 그만큼 포탄을 튕겨낼 확률도 올라가지만, 포방패 하단에 맞을 경우, 포탄이 아래로 튕겨 차체 상부를 관통할 위험이 있다.
이런 식으로 격파당한 판터가 한 두대가 아닌지 독일은 1944년 후반에 샷 트랩 문제 해결을 위해 판터의 포방패를 개량해야 했다. 샷 트랩 문제는 사실 판터 뿐만 아니라 T-34와 KV, IS-2 같은 원형의 포방패를 가지고 있는 전차들 모두에게 나타나는 공통점이었지만.
"조준 끝, 발사!"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판터를 바라봤다. 주포에서 섬광이 뿜어져 나오기 무섭게 판터의 포방패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리고 폭발.
"해냈다!"
도박의 결과는 성공이었다. 차체 상부를 뚫고 들어간 포탄에 의해 유폭이 일어났는지, 포탑이 허공으로 솟구치며 차체 전면부에도 균열이 일었다.
이로써 측면에서 다가오는 적들은 모두 처리했지만, 정면의 적들은 아니었다. 정면에서 온 독일군은 어느새 아군 진지 코앞까지 쇄도한 상태였다.
그만큼 수많은 전차들이 당했지만, 아군의 피해도 상당했다. 피격되어 연기를 토해내는 코멧과 센추리온이 곳곳에 널려 있었다.
-적이 근접해온다! 모두 뒤로 후진해!"
거리가 좁혀지자, 무어 소령은 중대에 후진 명령을 내렸다. 이 거리에서라면 4호는 몰라도 티거나 판터에겐 확실하게 관통당한다.
전차호에서 전차들이 물러나자, 참호의 보병들도 참호를 벗어나 뒤로 물러섰다. 그때 코앞까지 다가온 독일군 보병들 중 한 명이 화염방사기로 공격하자, 대여섯 명의 병사들이 화염에 휩싸여 그대로 녹아내렸다.
"이 새끼!"
게이츠 원사가 공축 기관총으로 곧장 응징을 가했다. 그때 티거가 나타나 주포를 쏘았고, 우측 궤도가 날아갔다.
"궤, 궤도 파손!"
"1시 방향, 빨리!"
이미 망가진 궤도는 어쩔 수 없었다. 지금 급한 것은 눈앞의 티거부터 처리하는 것이었다.
놈이 티타임 각도에 맞춰 차체를 튼 상태였기에 포탑을 노렸다. 포탑 포방패의 조준경 바로 아래 움푹 들어간 부분을 향해 포탄을 쏘자, 포방패에 구멍이 났다.
그런데도 놈은 숨이 끊어지지 않았는지 계속 움직였다. 서둘러 두 번째 포탄을 장전한 뒤, 차체에 쏘자 놈은 완전히 기동을 멈췄다.
"이게 마지막 철갑탄입니다!"
닉이 포탄을 장전하면서 소리쳤다. 궤도는 망가졌고, 철갑탄은 겨우 한 발뿐. 유탄과 기관총 탄약이 남아있지만, 그것들로 전차를 상대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마지막 철갑탄인 만큼 신중하게 표적을 골라야 했다. 마침 적절하게도 판터 한 대가 측면을 드러낸 채 공축 기관총을 쏘아대고 있었다.
저놈을 마지막 제물로 삼기로 결정하고 지시를 내리려는데, 별안간 좌측에서 포탄이 날아와 주포에 구멍을 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어떻게 대응할 틈조차 없었다.
"주포 파손!"
주포가 망가졌으니, 이젠 포탄을 쏠 수 없었다. 포탄을 쏜 놈은 4호 전차로, 곧장 이곳으로 달려오다가 무어 소령의 포탄을 맞고 격파되었다.
"어떡합니까, 대위님?"
"......탈출합시다. 더 이상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공축 기관총이 남아있긴 하지만, 주포도 쏠 수 없고 움직일 수도 없는 상태에서 계속 전차에 남아있는 것은 자살행위였다. 우리가 전차에서 탈출하는 동안, 중대의 다른 전차들이 총탄을 퍼부으며 탈출을 엄호했다.
무기를 챙겨 전차 밖으로 빠져나오는데, 저 멀리서 전조등 불빛들이 보였다.
"우리 전차들이다!"
전선이 돌파당하기 직전이 되어서야 후방의 아군 전차들이 나타났다.
***
"아직도 못 뚫었다고? 지금 나하고 말장난하자는 건가?"
쿵. 회프너가 분에 못 이겨 탁자를 주먹으로 내리치자, 참모들이 움찔거렸다. 수화기를 움켜잡은 회프너는 고함을 치듯이 말했다.
"고작 토미들 1개 대대를 못 뚫어서 고전하다니! 그러고도 국방군이란 말인가? 30분 안으로 전선을 돌파하게. 긴말 않겠네."
회프너는 온몸의 피가 거꾸로 흐르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 막강한 티거와 판터들을 대거 동원했음에도, 영국군 전차 1개 대대를 뚫지 못해 작전이 어그러지다니. 망신도 이런 개망신이 없었다.
다만, 영국군이 신형 전차를 투입했다는 보고는 특기할 만했다. 보고에 따르면 88조차 정면에서 튕겨내는 데다 1km 거리에서 티거를 단 한 방에 격파하는 주포를 가졌다고 하니, 상당히 강력한 전차임이 틀림없었다.
그래도 그렇지, 겨우 1개 대대가 지키는 골목을 못 뚫어서 시간을 지체하다니. 회프너는 어이가 없었다.
그나마 유고슬라비아군 연대의 경우 독일군이 공격이 시작되자마자 도미노처럼 무너져내렸다. 애시당초 그런 3류 군대를 상대로 시간을 소모한다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화를 가라앉힌 회프너는 다시 작전 수립에 몰두했다. 영국군 2개 사단을 포위하려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지만, 상황이 그렇게까지 절망적인 것은 아니었다. 지금이라도 전선 돌파에 성공한다면 적의 후방에 침입해 보급소를 파괴하고 몇 개 연대에 심각한 타격을 입히는 것까지는 가능하리라.
그런 다음 방어선을 형성해 본국의 증원군을 배치하면.......
"각하, 공습입니다!"
"공습?!"
공습이란 말에 회프너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호커 타이푼 편대가 나타나자, 독일군의 대공포들이 즉시 불을 뿜어 타이푼 한 대를 격추했다. 그러나 타이푼 편대는 예정대로 공격을 개시했다.
타이푼에서 발사된 로켓탄이 트럭들을 박살 내고, 기관총 탄환이 도주하는 병사들을 도륙했다. 다음 작전 준비로 바삐 움직이던 회프너의 사령부는 삽시간에 지옥으로 돌변했다. 곳곳에서 총성과 폭음, 비명소리가 들렸다.
사령부를 엉망으로 만든 타이푼 편대는 임무를 완수하곤 즉시 도주했다. 한발 늦게 나타난 Bf109들은 이미 엉망진창이 된 사령부 위를 맴돌다가 다시 기지로 돌아가야 했다.
"씨발, 괴링은 뒈졌는데 우리 공군은 여전히 병신이군."
공습에서 겨우 목숨을 건진 회프너는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고 사령부를 둘러봤다. 전복된 트럭들에서 흘러나온 연료에 불이 붙는 바람에 화재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살아남은 병사들이 불을 끄기 위해 양동이에 눈과 물을 담아 불에 뿌려댔지만 불은 사그라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회프너에겐 또 하나의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전선 돌파를 감행하던 21기갑사단의 선두가 영국군의 역공으로 패퇴하여 퇴각했다는 소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