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제국의 폐급장교 191화
무료소설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98회 작성일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191화
191화 발악 (1)
만슈타인의 항복은 서부전선의 붕괴를 불러왔다.
그가 이끄는 제5기갑군이 통째로 증발하자, 전선에는 도무지 메울 수 없는 거대한 구멍이 뚫렸다.
구멍 안으로 미군이 침투하자, 전선을 유지하는 것조차 벅찼던 독일군은 버틸 수 없었다.
후방에 미군이 나타나자, 자신들이 포위되었다고 생각한 독일군 부대들이 줄줄이 투항했고, 미군은 같은 방식으로 진격을 거듭, 불과 나흘 만에 전선을 독일군의 공세 전으로 되돌리는 데 성공했다.
투항병과 포위된 병력이 너무 많아 독일군은 아예 집계를 포기할 정도였다. 미군뿐만 아니라 영국군과 캐나다군, 그리고 소수의 프랑스군과 벨기에군 등 다른 연합군 병력들도 미군이 만들어놓은 길을 따라 진군을 개시했다.
연합군의 첫 번째 목표는 아헨이었다. 벨기에 국경에 맞닿아 있는 독일의 도시.
몇 달 전부터 전선이 서서히 좁혀지면서, 도시에 살던 주민들의 피난이 시작되었지만 여전히 아헨에는 수많은 시민들이 남아있었다. 늑대 작전의 성공만을 믿으며 고향에 남기를 택했던 이들에게, 연합군의 공격은 청천벽력이나 다름없었다.
"아, 아. 아헨 시민들에게 고합니다. 30분 뒤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될 예정이오니 도시에 거주 중인 시민들은 지금 즉시 대피하시길 바랍니다.
다시 한번 알려드립니다. 30분 뒤 우리는 여러분들이 사는 도시를 점령하기 위해 공격을 시작할 겁니다. 저희는 여러분들 같은 무고한 시민들이 전투에 휘말려 죽고 다치는 일을 바라지 않습니다. 그러니 주민 여러분들은 서둘러 도시를 떠나시길 바랍니다."
"아헨의 독일 병사들에게 고합니다. 그대들은 어째서 무의미한 싸움을 계속하려 드는 것입니까? 그대들의 총통은 이미 죽었으며, 지금 권좌를 차지한 자들도 전임자와 별반 다를 바 없는, 그대들의 희생으로 권력을 유지하고자 하는 악인들에 불과합니다.
여러분들을 수족처럼 부리고, 자신들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자들을 위해 하나뿐인 목숨을 기어이 바치시렵니까? 아니면 얌전히 무기를 내려놓고 사람다운 대우를 받으시렵니까? 선택은 오로지 여러분들의 몫입니다."
아헨 공략에 앞서, 연합군은 도시에 삐라를 뿌리고 초대형 확성기로 투항을 종용하는 방송을 내보냈다.
아직 남아있는 일본과의 전쟁까지 고려하면, 독일에서 피를 많이 흘려봐야 좋을 게 없었다. 동시에 수만에 달하는 독일군이 집단으로 투항한 것을 보고, 잘만 구슬리면 같은 결과를 보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다.
"꼭 우리가 해야겠소?"
"다 독일을 위해서입니다. 장군도 독일인들이 무의미하게 죽어 나가는 일은 피하고 싶지 않습니까?"
"으음......."
"전쟁이 끝나지 않은 지금은 변절자로 욕할지 몰라도, 나중에는 독일을 구한 애국자라고 사람들이 평가할 것입니다."
"허 참. 어쩔 수 없구려."
투항 권고를 듣고도 망설이는 독일인들을 위해, 연합군은 비장의 카드까지 투입했다.
앞서 투항한 독일군 장성들의 서신을 삐라에 넣는 것이었다.
"어이, 이것 좀 봐라!"
"하우서......? 디트리히? SS에 있던 장군이잖아?"
-독일 국민과 독일 병사들에게 고함.
그대들은 지금 아무런 의미 없는 전쟁을 계속하고 있다.
지금 그대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자들은 총통을 시해하고, 그대들을 속여 권력을 잡은 무뢰한들이다!
놈들은 독일의 아들들의 피로 얻어낸 영토를 러시아 공산주의자들에게 고스란히 바치고, 이제는 그대들을 사지로 내몰고 있다.
어째서? 바로 자신들의 알량한 목숨과 권력을 위해서다.
진정한 독일은 총통과 함께 죽었다. 그대들은 죽은 조국을 위해 싸우고 있다.
우리에게 남은 과제는, 의미 없는 전쟁을 끝내고 서둘러 새로운 조국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SS 상급대장 파울 하우서.
"뭐야? 총통을 죽은 건 친위대가 아니었어?"
"우리가 속은 거란 말이야?"
여태껏 SS와 나치당이 손잡고 총통을 암살한 것으로만 알고 있던 병사들과 시민들에게 삐라에 적힌 내용은 충격 그 이상이었다.
비록 어느 정도 옅어지긴 했지만, 여전히 죽은 총통에 대한 향수와 충성심이 남아있던 사람들은 동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야이 똘추들아. 이게 거짓말이라는 생각은 안 해봤냐?"
"적들의 얄팍한 수에 놀아나지 마라!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자는 즉결처분하겠다!"
물론 모든 이들이 이를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지만, 적어도 독일군의 사기에 큰 균열을 낸 것만은 분명했다.
심지어,
-아~ 아~ 아헨의 전우들이여, 내 말이 들리는가? 내 목소리를 처음 듣는 친구들을 위해 말하자면 내 이름은 만슈타인일세. 에리히 폰 만슈타인.
"이 목소리는......."
"만슈타인 장군?"
"그 소문이 사실이었어?"
병사들은 물론이고, 일반 주민들조차 만슈타인이라는 이름은 알고 있었다. 프랑스를 정복하고, 독소전에서 활약한 영웅.
그런 영웅이 적의 선전방송에 나오다니.
-제군들도 어렴풋이 눈치챘겠지만, 우린 이미 전쟁에서 졌네.
제군들이 아무리 노력하고, 투혼을 발휘한다고 해도 전세가 뒤바뀔 일은 없어. 오랫동안 군에 몸을 담아왔던 내가 냉정하게 상황을 바라보고 하는 말일세.
이미 패전이 확실시된 전쟁에서, 어째서 계속 싸우려고 하는 건가? 전쟁은 끝나도, 자네들의 인생은 끝나지 않는다네. 삶은 계속 이어질 것이고, 제군들도 지금 들고 있는 무기를 내려놓고 전쟁 전의 생활로 되돌아가야 하네.
연합국은 우리 독일의 완전한 멸망을 바라지 않아. 지금이라도 우리가 무기를 내려놓고, 전쟁을 끝낸다면 독일에 관대한 처분을 내리겠다고 약속했네. 믿지 못하겠다고? 나 만슈타인이 직접 보장한다면 믿겠나?
그러니 서둘러 무기를 내려놓고, 전쟁이라는 지옥에서 탈출하게. 독일 육군 원수인 만슈타인이 제군들에게 직접 내리는 명령일세.
전 독일군 원수가 자국민들에게 투항을 종용하는 방송을 하는 광경을 지켜보던 미군들은 아이러니함을 느꼈다. 제리들의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 제리들의 도움을 받다니.
"이게 정말 효과가 있을까?"
"글쎄다......."
만슈타인의 방송이 끝난 뒤, 아헨은 잠잠했다. 공격 시간이 다가오자, 병사들은 참호에서 나와 전차와 하프트랙 뒤에 섰다.
공격이 시작되기 바로 직전, 전투가 벌어질 도시를 바라보던 병사들의 눈에 '그것'이 들어왔다.
"어, 저기!"
"저것 좀 봐!"
병사들이 발견한 그것의 정체는 백기였다. 뒤이어 확성기에서 아헨 방어군 총사령관의 메시지가 흘러나왔다.
"친애하는 독일 국방군 여러분! 그리고 독일 국민 여러분!
지금까지 독일을 위해 모두가 혼신을 다해 싸웠다. 본인은 여러분들의 거룩한 투쟁에 진심으로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하지만 대세는 기울었다. 우리는 전쟁에서 졌고, 모든 이들이 필사의 노력을 기울인다고 해도 이는 바뀌지 않는다.
승리가 아닌, 패배를 위해 목숨을 바칠 필요는 없다. 이제라도 우리는 전쟁이 아닌, 보다 더 먼 미래를 바라봐야 할 때다.
현 시간부로 모두 무기를 내려놓아라. 귀관들은 최선을 다했다. 모든 책임은 내가 지겠다."
이어 영어로 아헨시 전체가 항복을 선언하였음을 알리는 방송이 확성기에서 나오자, 미군 진영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총 한 번 쏘지 않고 도시를 통째로 점령하는 데 성공한 것이었다.
***
"모두 다 끝났군."
방송을 마친 핫소 폰 만토이펠 중장은 후련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군모를 벗어 훤히 드러난 이마를 긁적거렸다.
항복을 선언했으니, 곧 미군이 오리라. 그때까지 남은 몇 분의 시간 동안, 사령부 인원들은 부지런히 서류를 태우고, 휘하 부대에 지시사항을 전달했다.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만토이펠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참모들과 병사들을 향해 경례했다.
"모두들 수고했네. 자네들은 이 나라 최고의 군인들이었네."
"각하와 함께 싸울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만토이펠이 경례하자, 사령부 인원들도 경례를 올렸다. 만토이펠의 얼굴에 쓴웃음이 번졌다.
각하라. 이제 그 말을 듣는 것도 끝이구만.
***
만슈타인의 항복과 서부전선 돌파, 거기에 이은 아헨 무혈입성 소식까지.
정말로 전쟁의 종결이 다가오고 있다는 게 느껴지는 소식들이다.
그러나, 적어도 이곳 헝가리는 종전과 거리가 먼 분위기였다.
"에휴. 어떤 놈들은 총 한 번 쏴보지도 않고 무혈입성하는데, 우리는 여기서 뭐 하는 꼴이람."
미군이 아헨에 무혈입성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느낀 감정은 환희나 기쁨이 아니라 짜증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여기 독일군은 아헨에 있던 놈들과 달리 죽어도 항복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으니까.
상층부는 서부 공세에 동원되었던 독일군이 헝가리로 오려면 시간이 다소 걸릴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우리의 예상과 달리 독일군은 훨씬 빨리 헝가리에 도착했고, 이전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격렬하게 저항했다.
거기에 헝가리군의 저항과 보급 문제까지 더해지자 아군의 진격 속도는 급격하게 느려졌다.
오늘도 우리는 제리들과 한바탕 뜨거운 시간을 보냈다. 놈들은 비겁하게도, 수풀에 숨어 우리가 다가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대전차포로 공격을 가해왔다.
센추리온의 장갑은 날아오는 포탄을 모두 튕겨냈지만, 지뢰는 그렇지 못했다. 독일군이 땅에 매설한 대전차지뢰에 의해, 우리는 귀중한 센추리온 1대를 잃었다.
"그 88도 튕겨내는 놈이, 다른 것도 아니고 대전차지뢰에 당하다니. 허 참."
센추리온의 전면장갑과 달리, 하부장갑은 고작 17mm에 지나지 않았다. 원래 하부장갑은 전투 시엔 적에게 드러날 부분이 아니라 얇아도 상관이 없지만, 문제는 얇아도 너무 얇다는 게 문제였다. 그 결과 대전차지뢰에 의해 그대로 장갑이 뚫려 전차가 격파당하고 만 것이다.
독일군을 격퇴하는 데 성공했지만, 격파된 아군 전차는 그대로 버려졌다. 수리가 아주 불가능한 수준은 아닌데, 가뜩이나 수리해야 할 전차들이 산적해 있는 데다 손상된 정도가 너무 심해서 그냥 버리는 게 낫다고 판단했단다.
한국전쟁 때 투입된 센추리온 중 대인지뢰에 당해 조종수가 부상당했다는 말이 있던데, 아무래도 사실 같다.
"기왕이면 넉넉하게 20mm로 해주지. 애매하게 17mm가 뭐냐 진짜."
"하부장갑만 문제가 아닙니다. 하부보다 더 큰 문제는 기름을 존나게 퍼먹는다는 거예요."
게이츠 원사가 혀를 차며 말했다.
"거기다 탄약도 적재할 공간이 부족하고. 무슨 생각으로 부조종수석을 만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차라리 탄약고로 만들지."
느린 속도, 부족한 탄약, 얇은 하부장갑, 거기에 기름 처먹는 엔진까지. 어디서부터 뜯어고쳐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는다. 그래도 화력과 장갑은 여태껏 나온 전차들 중 최고라, 마냥 욕하기에도 애매했다(그래서 더 짜증난다).
"자, 모두 주목. 방금 상부로부터 명령이 내려왔다."
연료와 탄약 보급을 끝내고 차나 마시며 쉬려고 하는데, 브랜슨 대령이 돌아왔다.
"총 두 가지 소식이 있네. 하나는 좋은 소식인데, 다른 하나는 나쁜 소식이네. 어떤 것부터 듣겠나?"
"좋은 소식 먼저 듣겠습니다."
"이제 더 이상 움직일 필요가 없다. 오늘 하루는 끝. 여기서 주둔한다."
그거 참 반가운 소식이군. 이번엔 또 얼마나 가야 하냐고 보리스가 징징거리던데, 이 소식을 들으면 틀림없이 기뻐하리다.
"나쁜 소식은 뭡니까?"
"지금 당장 참호를 파야 한다는 걸세. 제리들이 이동 중이라고 하는데, 이곳으로 올 확률이 높다는군. 어쩌면 오늘 밤이나 새벽에 전투가 벌어질지도 모르네."
상부에서 추측하길, 독일군은 우리가 보급 문제로 진격이 정체되자 전력이 약해진 상태라고 판단하여, 공격을 가해 아군을 뒤로 크게 밀어내고 전선을 재정비할 생각으로 보인다고 한다.
"제리들 수가 생각보다 많아. 1개 사단은 넘는 규모라고 하더군. 심지어 타이거와 판터를 대량으로 운용하는 게 목격되었네. 아주 제대로 작정을 한 것 같아.
그걸 우리가 막아야 하는데, 문제는 사단의 전력이 정원의 70%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걸세. 어제 연대 하나가 보급 문제로 후방으로 빠졌거든. 다른 연대는 태반이 신병들이라 전투력을 크게 기대할 형편이 못 되고."
우리의 표정이 썩어들어가자 브랜슨 대령은 황급히 인근에 있는 유고슬라비아군을 언급했지만, 그조차 우리의 마음을 돌리지 못했다.
유고군이 쪽수는 많아도, 장비도 부실한데다 군기도 개판이라 크게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낫다만.
또 불길한 기운이 느껴진다. 존나게 불길한 기운이.
"꽤 힘든 하루가 될 거야. 모두 신께 기도해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