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제국의 폐급장교 190화
무료소설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90회 작성일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190화
190화 붕괴의 시작 (3)
"이런 빌어먹을......."
만슈타인은 스스로의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손을 떨려 시가에 불을 붙이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시가를 몇 모금 음미한 후에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 지도에 집중할 수 있었다.
며칠 전 그는 베크에게 늑대 작전을 중지하고 병력의 철수를 주장했었다. 미군이 방어에 급급할 때 철수해야 적의 추격을 뿌리치고 병력을 온전하게 보전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베크는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늑대 작전은 계속되었고, 그 결과는 처참했다. 악천후가 풀리면서 공군을 등에 업은 미군이 다방면에서 반격을 가해오자 힘을 다한 독일군은 곳곳에서 패퇴하고 말았다.
만슈타인은 자신의 재량을 총동원하여 휘하 부대들을 퇴각시키고자 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그만큼 미군의 추격은 집요했고, 아군의 퇴각을 엄호해야 할 공군은 지리멸렬했다.
"각하, 132보병사단과 연결이 끊겼습니다."
"......계속 시도해보게. 11기갑여단은? 어디에 있나?"
"11기갑여단도 통신이 두절되었습니다."
"......."
젠장할.
만슈타인은 이를 악물었다. 통신이 끊겼다는 말은 곧 통신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대전투에 휘말렸거나, 본부가 괴멸되었다는 의미이리라.
미군뿐만 아니라 영국군과 캐나다군도 신경 써야 했다. 이틀 전까지 이 둘은 단순히 미군을 보조하는 역할에 지나지 않았지만, 지금은 미군과 함께 전선에서 독일군을 맹렬하게 몰아붙이고 있었다.
그뿐인가. 일선 부대들에 할당된 연료와 탄약도 거의 바닥을 드러냈다.
최전선의 장병들이 더 많은 기름과 탄약을 요구하고 있지만, 정작 이를 전달할 수가 없었다.
왜냐? 후방의 물자도 부족한데다 그나마도 제공권을 빼앗긴 탓에 이송 중에 홀랑 태워 먹기 일쑤였다.
"아니, 기름이 없는데 어떻게 전차를 굴리냐고?"
"철갑탄이 없어서 유탄만으로 싸우고 있습니다!"
"빨리 대책을!"
사령부로 보내지는 무전과 전문은 눈물 어린 호소와 절규로 가득했다. 퇴각을 하려고 해도, 기름이 모자라 차량을 굴릴 수조차 없고, 추격해오는 적을 뿌리치기가 쉽지 않다.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
'이런 꼴을 볼 줄 알았다면 차라리 퇴역하는 것이었는데.......'
만슈타인은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한숨을 토해냈다. 작전에 사사건건 개입하고 고집불통이던 히틀러가 죽고 신정부가 권력을 잡았을 땐 그도 은근히 기뻐했다. 이제 그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마음대로 작전을 세우고 실행할 수 있으니.
그러나 그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히틀러처럼 세부적인 간섭만 없었을 뿐 고집불통인 점은 신정부도 똑같았다. 무리수나 다름없는 도박을 멋대로 벌이는 것도 그렇고.
되려 신정부로 인해 전투력이 뛰어난 SS가 해체되어 작전에 큰 지장이 생기기까지 했다. 전통적인 프로이센 귀족 장교였던 만슈타인은 다른 국방군 장성들처럼 SS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그들의 전투력이 국방군과 최소 대등하거나 그 이상이라는 점은 부정하지 않았다.
특히 SS 정예사단들의 경우, 그 뛰어난 전투력 때문에 수많은 전공을 세우며 전장에서 활약했다. 그런 우수한 부대들을 해체하려다가 그만 SS 사단들이 통째로 연합군에 투항하는 참사까지 벌어지지 않았던가.
이래놓고 신정부의 얼치기들은 어차피 SS가 없어도 국방군이 그 빈자리를 메우면 된다고 정신승리나 했다. 무능한 쓰레기들 같으니라고.
"GD 사단을 소방수로 투입해야겠군. 그치들은 아직 연료와 탄약이 남아있으니까. 2, 9 기갑사단들도 차례로 퇴각시키게. 이 친구들은 의무를 다했어."
"알겠습니다, 각하."
"너무 머리를 썼더니 진이 다 빠지는군. 부관, 커피 좀 내오게."
"즉시 대령하겠습니다."
부관이 커피를 가지러 간 사이, 만슈타인은 의자에 앉아 고민했다. 어차피 이 전쟁은 가망이 없다. 신정부는 늑대 작전이 성공하면 이를 기반으로 연합국과 협상을 진행할 것이라고 선전했지만, 늑대 작전은 실패했고, 연합국이 협상에 응해올 것 같지도 않았다.
즉, 여기서 아무리 발버둥 쳐봤자 다가올 재앙은 피할 수 없을 터.
이대로 전쟁이 끝나면 자신은 전범으로 처벌받을 것이다. 사형당하진 않더라도 꽤 오랫동안 감옥에서 햇빛을 보지 못할 수도 있다.
"가장 가까운 미군과의 거리가 어떻게 되나?"
만슈타인은 참모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참모들은 이게 무슨 질문인지 의아해하며 물었다.
"각하, 그건 갑자기 왜 물으시는지......."
"솔직하게 말하지. 자네들은 우리가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나, 아직도?"
상관의 폭탄 발언에 참모들은 그만 넋이 나간 채 멍하니 서 있었다.
"애초에 우리가 이길 수 있었다면 진작에 전쟁이 끝났겠지. 이길 수 있는 기회가 몇 번인가 있었지만, 이제는 아닐세."
만슈타인은 역사에 패자로 기록될 생각도, 전범재판에 회부되어 피고인석에 앉을 생각도 없었다. 프로이센 원수가 그런 수모를 당해서야 되겠는가?
독일을 위해 피땀 흘리며 노력한 자신이 단순히 패배자로 역사에 남아서야 되겠는가?
그에겐 따로 생각이 있었다.
***
"독일 놈들이 사절을 보내왔다고?"
밤늦게까지 참모들과 머리를 맞대고 작전을 세우고, 현장에 나가 물자불출까지 직접 감독하다 새벽이 되어서야 겨우 잠든 패튼은 이제 막 일어나 당번병이 내온 아침을 먹으려고 냅킨을 목에 거는 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사절이라니. 이 뭔 뚱딴지같은 소리란 말인가.
"그렇습니다, 각하. 장교 세 명이 퀴벨바겐을 타고 와서 각하와 만나게 해달랍니다."
독일 놈들이 갑자기 사절을 보내다니, 대체 무슨 꿍꿍이지? 설마 이제 와서 협상이니 뭐니 같은 시답잖은 말장난을 할 생각인가.
"협상 논의 같은 애새끼들 장난질을 들먹이며 시간을 끌고자 하는 거라면 사람을 잘못 봤다고 전하게."
"저어, 그래도 사절을 이대로 돌려보내는 것도 딱히 이롭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일단은 한 번 만나보시는 게 어떠시련지."
흠, 그것도 그런가. 그러고 보니 예로부터 사절을 만나보지도 않고 그냥 돌려보내면 못 배운 놈 취급 받았지? 미합중국 최고의 명장인 자신이 그런 소릴 들어선 안 되지!
"좋네. 어디 얼굴이라도 한번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2분 후 패튼의 지휘소에 도착한 독일군 장교들은 눈을 가린 안대를 풀고 패튼과 마주했다. 패튼은 그들을 매섭게 노려봤지만, 독일군 장교들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래, 프로이센 장교 나리들? 무슨 말을 하러 여기까지 왔는지 알고 싶구만."
"우선, 만남을 허락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패튼 장군. 저희는 만슈타인 원수 각하의 밀명을 받고 장군을 만나러 왔습니다."
"만슈타인이 보냈다고? 무슨 이유로?"
"원수께선 더 이상의 싸움은 무의미할 뿐이며, 미국과 독일의 향후 관계에 있어서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전후 관계고 나발이고, 그딴 헛소리나 하러 왔으면 당장 꺼지게. 본론을 말하라고, 본론을."
짜증이 난 패튼이 매섭게 말하자, 독일군 장교단은 헛기침을 했다.
"크흠. 그럼 원수 각하의 전언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원수께선 장군께 항복하고자 하십니다."
항복. 패튼은 그 말을 듣고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충격으로 포크와 나이프가 식탁에서 떨어졌지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항복이라고? 지금 항복하러 왔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이런, 이런. 귀하신 분을 내 몰라봤군. 부관, 커피 좀 내오게."
항복하러 왔다는 말에 패튼의 태도는 180도 바뀌었다. 무슨 시답잖은 말장난을 하러 왔나 했는데, 항복이라니. 그렇다면 얘기가 다르지.
"무슨 바람이 불어서 항복하러 왔는지 모르겠군. 아, 물론 싫다는 건 아닐세. 순전히 궁금해서 그러는 것일세."
"예, 원수께선 이전부터 더 이상의 전쟁은 독일 민족과 나아가 세계에 해만 될 뿐이라고 늘 말씀해오셨습니다. 동시에 병사들이 무의미하게 죽어 나가는 것을 매우 안타까워하셨습니다.
병사들의 안전과 합리적인 대우가 약속된다면, 즉시 항복하겠다는 것이 원수 각하의 말씀이십니다."
사절단은 패튼에게 정부가 만슈타인에게 최후까지 싸우라고 명령하셨지만, 더 이상의 비극을 막기 위해 항복을 택한 것이라는 등의 말들을 늘어놨지만 패튼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딱 봐도 전세가 불리하게 돌아가고, 어차피 전쟁 질 것 같으니까 항복한 것이구만. 무슨 놈의 평화니 인권이란 말인가.
아무튼 패튼은 내색하지 않았다. 일단 중요한 것은 적장이, 그것도 원수씩이나 되는 자가 자신에게 항복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니까.
"포로 대우는 걱정하지 말게. 이 패튼의 명예를 걸고 귀관들의 안전을 보장하지. 필요하면 각서까지 써주겠네."
"감사합니다, 장군."
***
"만슈타인과 연락이 되지 않는다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3시간 전부터 교신을 시도했지만, 계속 불통입니다."
자세한 사정을 알 리 없는 정부에선 난리가 아닐 수 없었다.
만슈타인이 누군가. 프랑스를 정복하고 세바스토폴을 함락시키며 원수봉을 손에 쥔 독일 최고의 전략가.
늑대 작전에 반대했지만, 작전이 시작되자 그 누구보다 화려한 전과를 올리며 뫼즈강에 근접했고, 연합군의 반격이 시작된 지금은 최전선에서 적들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그런 그가 갑자기 연락이 되지 않는다니.
"공습에 당한 건가?"
베크의 질문에 할더는 그저 고개만 저었다.
"확인된 바 없습니다. 만슈타인의 지휘본부가 위치한 곳이 폭격을 당했다는 보고는 아직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가 적의 특공대가 현지 게릴라의 기습을 받았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할더는 만슈타인과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지금 상황에서 만슈타인과 연락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일인지는 알았다.
당장 만슈타인 그 개인이 지니는 가치뿐만 아니라, 그가 지휘하는 제5기갑군은 늑대 작전에 동원된 병력 중에서 가장 최정예로 손꼽히는 집단이었다.
일개 하사관조차 향후의 방어계획에 제5기갑군의 존재가 크게 작용하리란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단순히 통신 불량일 수도 있어. 계속 시도해보게. 연결에 성공하는 즉시 내게 보고하도록."
"알겠습니다, 각하."
"헝가리로의 병력 증파는 어떻게 됐나?"
"일단 21기갑사단이 헝가리로 이동 중입니다. 내일 오후에는 헝가리 국경을 넘을 것으로 보입니다."
"잊지 말게. 헝가리의 유전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켜내야-"
"각하!"
오스터가 문을 발칵 열자, 사람들의 시선이 그리로 쏠렸다. 베크와 할더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오스터가 흥분에 찬 목소리로 말을 쏟아냈다.
"만슈타인의 소재에 대해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그래? 살아있나? 그는 지금 어디에 있나?"
오스터의 이어진 발언은 회의실에 있는 모두를 충격에 빠뜨렸다.
"만슈타인의 제5기갑군이 미군에 항복했다고 합니다!"
".....뭐라고?"
너무나도 충격적인 소식에, 베크는 말하는 방법조차 잊어버린 듯 연신 눈만 끔뻑거렸다. 마찬가지로 경악한 할더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제5기갑군이 항복......? 그, 그렇다면 만슈타인은? 설마......."
"만슈타인이 직접 병력을 이끌고 투항했습니다. 이미 미국의 선전방송에도 만슈타인의 항복 소식이 나오고 있습니다."
12월 16일, 만슈타인의 제5기갑군은 미군에게 투항했다.
독일 최고의 전략가 만슈타인의 항복은 독일에게 내리는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