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믿는 것은 검 17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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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66회 작성일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176화
176화. 결말
"크흡! 커커컥!"
입에 가득한 모래를 뱉어내며 안톤은 눈을 떴다. 앞은 어둡고 캄캄해 아무것도 보이질 않았다. 어찌된 일인가 싶어 마지막 기억을 떠올리니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부서져내리기 시작하던 황궁이 떠올랐다.
'잔해 속에 갇힌 건가...'
왠지 우스웠다.
떨어져 내리는 낙석을 보며 살아남으리란 기대는 추호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누운 채로 죽음을 받아들이곤 눈을 감았다. 근데 이렇게 살아남다니.
'이걸 운이 좋다고 해야 하는 건지...'
문득 미궁 속에서 파서스와 키리옌 일당과 대적했을 때가 떠오른다. 그때도 안톤은 지금처럼 땅 속에 파묻힌 채로 눈을 떴었다.
다만 그때와는 좀 상황이 다르다. 현재 안톤에겐 이곳에서 자력으로 탈출할 만한 기력이 남아있지 않다.
솔직히 말해서 눈꺼풀을 들어올리는 것도 힘 겨울 정도로 그의 몸은 한계에 이르러 있었다.
안톤은 몸을 더듬거리며 위스퍼 스톤을 찾았다. 카린과 연락만 할 수 있다면 어떻게든 방법이 생길지도 모른단 생각이었다.
하지만 일은 그렇게 쉽게 풀리지 않았다.
'부서졌나.'
더듬거리던 손이 날카로운 파편에 베이고서야 안톤은 위스퍼 스톤이 산산조각 났음을 깨달았다.
"산을 덮는 파도."
혹시 모른다는 생각으로 주문을 외워 봤지만, 역시나 제기능은 하지 않았다. 결국 이대로 누군가 구조를 해주길 기다리는 수 밖에 없는 건가. 그렇게 낙담하고 있던 때였다.
낙석들 사이로 생긴 작은 틈을 통해 누군가의 음성이 전해졌다.
"...당신입니까?"
귀에 익숙한 목소리와 말투였다.
"아르토르?"
"크큭. 당신도 나 만큼이나 질긴 목숨이군요."
근데 조금 이상한 점이 있었다. 아르토르의 목소리가 위가 아닌 아래서 들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아르토르는 방금 이렇게 말했다. 나 만큼이나 질긴 목숨이라고.
"설마 너도 파묻힌 건가?"
"마법진이 부서지며 저도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덕분에 자리를 제때 뜨지 못하고 이런 신세지요."
기대도 않던 수확이었다.
비록 이제 아르토르에겐 마스터 피스를 만들 기회가 사라졌다곤 해도, 그의 사상과 능력은 세상에 풀어놓기엔 위험했다. 그래서 죽으면서도 못내 그를 죽이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근데 같은 신세라니 마음이 확 놓인다.
이미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였는지, 아르토르가 체념 어린 말을 내뱉었다.
"아무튼 죽기 전에 말동무나 해주시지요."
"웃기는군. 나는 나갈 거다."
"부질없는 짓을 하는군요. 정말 혼자서 이 바윗덩어리들을 들어올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그 몸으로?"
"..."
평소였다면 그의 비아냥에 코웃음으로 일관했겠지만, 애석하게 이번 만큼은 안톤도 그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이렇게 틈이 만들어져 살아남은 것만 해도 천운입니다. 어리석게 괜히 나가겠다고 발버둥을 치다가 명줄을 재촉하진 마십시오."
"그게 명줄을 줄이는 일인지 늘이는 일인지는 해봐야 아는 일이지."
"킥. 역시 당신 다운 말이군요. 하지만 아무리 당신이라도 쉬면서 기력은 회복해야할 시간은 필요할 것 아닙니까? 그 동안만이라도 좋습니다. 저와 얘기를 나누지 않겠습니까?"
"..."
안톤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아르토르와 달리 이대로 아무것도 안하고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삶이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살아있다면 힘껏 발버둥을 쳐봐야 하는 것이다.
대답을 하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였다. 숨 쉬는 것이 자유롭지 못한 밀폐된 공간, 괜히 말을 나누며 기력을 소모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아르토르는 끈질겼다.
"부탁하겠습니다. 전 이제 곧 죽습니다. 당신은 어떤지 몰라도, 저는 낙석이 몸을 짓뭉겠습니다. 아마 길어야 5분도 걸리지 않을 겁니다."
간절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 그제서야 안톤은 아르토르의 숨 소리가 유독 거칠다는 걸 깨달았다.
"...죽을 때가 되니 외로워지기라도 했나 보군."
"네. 그렇습니다."
그냥 한 말에 이런 태도로 나올 줄이야. 망설임 없는 진솔한 대답에 안톤은 살짝 당황했다. 그리고 그러는 사이 아르토르는 제멋대로 독백을 시작했다.
"당신이 깨기 전까지 이 캄캄한 곳에 나 혼자였습니다.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 할 수 있는 건 없었죠. 고작해야 기억을 되짚어보는 것 밖에는 말입니다. 근데 웃긴게 뭔지 압니까? 암만 기억을 되돌려도 나 뿐이던 건 마찬가지더군요. 그때 깨달았습니다. 이게 외롭다는 느낌이란 걸."
"깨닫는 게 늦어도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지 않나?"
비난조인 안톤의 말에도 아르토르는 순순하게 긍정할 뿐이었다.
"맞는 말입니다. 늦었죠. 혹시 일찍 알았다면 조금 달랐을까요?"
"글쎄. 그거야 모르는 일이지."
"..."
안톤의 말을 끝으로 아르토르는 한참이나 말을 하지 않았다. 설마 죽은 건가 싶을 정도로 긴 침묵이었다.
"킥킥. 그래도 당신의 마지막이 나와 다를 게 없다는 것이 조금은 위안이 되는군요. 어쩌면 악당이낭 영웅이나 사실 종이 한 장 차이인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은 쉽게 변하는 것이 아니랬던가. 안톤은 한순간이나마 동점심이 생길 뻔했던 자신을 반성했다. 안톤이 뭐라 한 마디 쏘아 붙이려던 때.
트드드드듯. 콰앙! 쾅!
아직 붕괴가 끝이 나지 않았는지, 위에서 충격이 전해지며 모래 부스러기들이 쏟아져 내렸다. 안톤은 손을 뻗어 천장을 받쳤다. 사실 별 소용없는 짓이었다. 어차피 무너져 내린다면 그의 힘으론 결코 무게를 버텨내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온 사방이 흔들리고서 부터 얼마나 지났을까.
이윽고 찾아온 정적 속에서 아르토르가 고통 어린 신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커헉! 젠장... 당신은 괜찮습니까?"
"아직까지는."
"크흐흐. 그렇군요... 저는 완전히 글렀습니다. 이게 인과응보라는 걸까요? 아무래도 제겐 최후의 시간조차 길게 허락되지 않은 모양입니다."
죽음이 한껏 느껴지는 목소리랄까. 아르토르늬 말에는 떨림이 가득했고 힘이 없었다. 아무래도 방금 진동이 그의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 모양이었다.
"...전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요?"
아르토르가 혼잣말을 되뇌이듯 물었다. 딱히 누군가의 대답을 바라고 물은 것 같진 않았다. 안톤은 피식하고 웃을 수 밖에 없었다.
"누구보다 잘 아는 녀석이 쓸데 없는 질문을 하는군? 운이 좋다면 사람으로 태어날 수도 있을 테니, 그땐 제발 평범하게 살아라."
안톤의 진심이 듬뿍 담긴 대답에 아르토르가 실소를 내뱉었다.
"크큭. 그거 아십니까? 전 부디 운이 나빴으면 좋겠습니다. 잡초나 모래, 아니 할 수만 있다면... 그저 아무것도 되지 못한 채 아예 사라지고 싶습니다."
잔뜩 한 맺힌 목소리를 듣자 기분이 참 이상했다. 그의 최후를 곁에서 본다면 통쾌할 줄 알았는데 실제론 전혀 그렇지 않았다. 안톤은 위로하듯 그에게 말했다.
"이번 생이 아무리 힘들었다고 해도 다음 생까지 이어지는 것은 아니란 걸 알고 있지 않나. 그냥 어렵게 생각치 말고 마음 편하게..."
"안톤. 이 세계엔 영혼이란 건 없습니다. 과연 다시 태어난 제가, 정말로 저일까요?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전 저로서 죽고 싶습니다. 뭐,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소망일 테지만..."
"..."
안톤은 뭐라 말을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자 다시금 침묵이 이어졌다. 아까처럼 고요하고 정적이진 않았다.
어두컴컴한한 이 공간엔 헐떡 거리는 아르토르의 숨 소리가 가득했다. 그것은 아주 불규칙적이고 거칠어서, 안톤은 이제 그에게 남은 시간이 정말로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오랜 침묵을 깨고 아르토르가 입을 열었다.
"안톤.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뭐지?"
안톤은 귀를 기울였다. 그가 마지막으로 묻고 싶어한 것이 무엇일지가 궁금했다. 어지간한 질문이라면 모두 솔직하게 대답해 줄 생각이었다.
이젠 말을 하는 것조차 힘에 겨운지, 아르토르가 어렵사리 질문했다.
"당신은... 당신의 삶이 당신만의 것이었다고 확신합니까?"
안톤은 잠시 멍해졌다. 최후의 질문이 이런 것일 줄은 예상치 못한 탓이었다. 허나 왜 그가 이런 질문을 하였는지를 금세 눈치챈 안톤은 솔직한 대답을 위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다.
'내 삶은 내 것이었나?'
안톤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았다. 그의 삶은 노력과 투쟁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안톤은 왜 그래야했는지 그 이유에 집중했다. 그리고 고민 끝에 그 해답을 찾아냈다.
노예로 살아간 오랜 나날. 하늘이 정한 집행자의 운명. 그것들은 상관이 없었다. 안톤이 매일 땀을 흘리고 때론 피를 흘렸던 것은, 모두 그가 삶의 노예가 아닌, 주인이 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안톤은 자신있게 대답했다.
"그래. 확신한다."
대답을 들은 건지, 듣지 못한 건지. 그도 아니면 그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아르토르는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서서히 시간이 지나며 그의 숨 소리는 점점 미약해져 갔다.
그렇게 이젠 그의 대답을 듣긴 힘들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던 때, 아르토르가 마지막으로 속삭이듯 작게 읊조렸다.
"그거 참 부럽군요. 내 삶은... 내 것이 아니었어..."
이를 끝으로 아르토르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일은 더 이상 없었다.
그가 남긴 최후의 한 마디에서 안톤은 그가 어떤 생각을 갖고 이 세계를 증오해 왔을지를 어럼풋이 느꼈다.
'부디 원하는대로 되기를...'
헐떡이는 그의 숨 소리조차 사라진 완벽한 정적. 아까 전의 질문으로 인해 삶을 돌아본 안톤은 다시금 각오를 다잡고 목표 의식을 불태웠다.
반드시 살아남아 이곳을 나가리라.
그래서 단 일 분 일 초라도 소중한 사람들의 얼굴을 마주 보리라.
그렇다고 안톤이 즉각 행동으로 나선 건 아니었다. 그는 누운 채로 눈을 감고 기력을 회복하는데 치중했다. 안톤은 알고 있었다. 기회가 있다면 그것은 단 한 번 뿐이라는 것을.
슬슬 숨을 쉬는 것조차 버겁다 여겨질 때가 되어서야 안톤은 눈을 떴다. 그리고 모든 정신력을 한곳에 끌어모았다.
하나, 둘, 셋.
속으로 숫자를 센 안톤이 전력을 다해 천장을 들어올렸다. 자세가 불편한 탓에 힘이 제대로 실리지 않았지만, 그의 사력을 다한 발버둥에 서서히 바위가 들어올려지기 시작했다.
"크읏!"
머리가 통째로 터질 듯한 두통. 귀에선 이명 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어둠 뿐인 곳일진데, 눈 앞으로 새하얀 빛이 물들 듯이 퍼져갔다.
어느 누가 보아도 완연한 한계.
'여기까진가...'
이내 안톤의 팔이 스르르 떨어졌다. 그리고 그로 인해살짝 들어올려졌던 천장이 중력에 의해 풀썩 내려앉았다. 다행히 머리 맡에 있는 바위가 디딤대 역할을 해주었기에 안톤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천장을 들어올리며 떨어져내린 모래들 때문에 안톤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뇌로 향하는 산소가 끊기자 안 그래도 당겨진 실처럼 팽팽하던 안톤의 의식이 흐릿해졌다.
완전히 새하얗게 변한 배경 속으로 한 소년이 보였다. 소년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아주 해맑은 얼굴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저건...'
오늘, 내일을 살아남는 것보다도 마냥 검이 좋아서 하루 종일 검을 휘두르던 소년. 그 소년의 정체는 바로 열 네 살, 벨토스 검투사 양성소에서 지내던 시절의 안톤이었다.
휘잇! 휘잇!
분명 실린 힘도 기교도 형편없는 검인데, 어째선지 눈을 뗄 수가 없다. 계속해서 보다보니 문득 이런 생각 마저 들었다. 난 어쩌다가 여기까지 온 걸까. 난 단지 검이 좋았을 뿐인데. 그냥 그거면 충분했는데.
그런데 그러한 속마음이 들리기라도 한 걸까.
검을 휘두르던 회색 눈의 소년이 움직임을 멈추고 안톤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언제까지 여기 있을 셈이야? 어서 가 봐. 너는 이제 검 보다도 소중한 게 잔뜩 생겼잖아?
그렇게 말하며 웃던 소년의 모습이 점점 멀어지고, 어느덧 세상은 다시 검게 물들었다.
투드드드듯!
쏟아지는 모래들 사이로 한 줄기의 광명이 찾아든다. 안톤은 그 찬란함을 느끼며 찡그리며 눈을 떴다.
빛을 등진 어느 누군가가 뭐라 외치며 그에게 손을 뻗어오고 있었다.
"안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