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믿는 것은 검 175화
무료소설 내가 믿는 것은 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89회 작성일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175화
175화, 승리
설령 나중에 후회하게 된다 한들, 한 번 결정을 내린 이상 망설임은 필요치 않다. 안톤은 괜히 고민을 한답시고 갈팡질팡 하는 사이에 일이 잘못 되어 후회하는 자들을 수도 없이 봐왔다.
그리고 이를 반면교사 삼은 안톤은, 살아오며 암만 어려운 선택을 마주해도 한 번 결정을 내렸다면 주저하지 않았다. 그것은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안톤은 꿋꿋히 악마병들을 베어가며 대전을 향해 나아갔다. 그의 눈빛은 흔들림 없이 굳건했으며 걸음걸이에서는 결코 변치 않을 의지가 엇비쳤다.
허나 그것과는 별개로, 그의 마음이 거대한 바위를 얹은 듯 무거운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기사 당연한 일이었다.
수 십 만이나 되는 영혼의 소멸. 그 중엔 누군가의 아버지도, 친구도, 연인도 있을진데 어찌 안톤이라 한들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까.
하지만 해야만 하는 일이었고, 동시에 다른 누군가가 대신해 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안톤은 계속해서 목표를 향해 차근차근 나아갔다. 그 모습은 흡사 이야기 속에서 나오는 영웅의 모습 같았다.
아르토르가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않으며 외쳤다.
"대의를 위해선 희생이 따르는 건, 아주 당연한 일입니다. 대가없이 얻을 수 있는 건 적어도 이 세상에는 존재치 않으니까!"
분명 마법진이야말로 그의 약점일 터인데, 그는 몹시 기뻐보였다. 마치 안톤의 선택이 자신은 잘못되지 않았단 걸 증명이라도 해주듯 말이다.
뭐, 그렇다고 아르토르가 안톤을 방해하는 걸 멈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아르토르는 적극적으로 전투에 참가하며 안톤을 막아섰다.
허나 그것으로 안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할 순 없었다. 수 천 마리의 악마병을 도륙하며 느릿하게 길을 뚫던 안톤은 마침내 마법진 앞에 도달했다.
그리고 잠시도 머뭇거리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콰콰쾅!
안톤의 검과 마법진이 뿜어낸 빛줄기가 맞닿으며 섬광이 피어났다. 먼저번에 그랬듯 엄청난 반발력이 검을 타고 전해들었다. 내장이 뒤틀릴 것만 같은 굉장한 충격이었다.
"크흣!"
왈칵하며 피가 솟구쳐 올라 입 밖으로 터져나왔다.
아까처럼 힘의 흐름에 맡겨 흘려보내면 나가떨어졌다면 좀 나았을 테지만, 곧게 선 자세로 한 걸음조차 물러나지 않고 충격을 몸으로 버텨낸 탓에 속이 완전히 뒤틀려 있었다.
하지만 쉬고 있을 시간은 없다. 희생을 마다치 않겠다고 마음 먹었으나, 한 시라도 빨리 이 마법진을 부술 수록 희생은 줄어든다. 안톤은 이를 악 물고서 다시금 검을 휘둘렀다.
콰아앙! 쾅!
한 번, 두 번, 세번. 안톤은 피를 토해내면서도 연이어 검을 휘둘렀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주변에 득실하던 악마병들의 숫자는 점점 줄어갔다. 이 마법진을 이용해 능력을 강화했으리라는 안톤의 어림 짐작이 들어맞는 순간이었다.
육안으로 보기에도 완전히 망신창이가 된 안톤. 그를 보며 아르토르가 몸을 부르르 떨며 소리쳤다.
"제정신인가요? 그 몸으로 어떻게 날 상대할 생각이죠?"
"그런 것 치고는 여유가 없어 보이는군."
안톤은 대답하면서도 멈추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그럴 수록 아르토르의 표정에선 조급함이 피어났다. 안톤은 고통 속에서도 미소지었다.
그의 반응으로 인해 이 마법진의 정체에 대해 확신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콰쾅!
"모, 모두 달려들어 막아라!"
아르토르의 목적을 알게 된 후 안톤은 계속해서 생각했고 의문을 가졌다. 도대체 아르토르는 어떻게 이 세상을 파멸 시키려는 것일까 하고 말이다.
고민이 무색하게 답은 금방 나왔다.
안톤이 유일한 사도가 된 이상 그는 결코 신이 될 수 없었고, 그렇다면 이제 남은 방법은 하나 뿐이었다.
콰쾅!
마스터 피스.
거짓된 세계를 벗어나는 열쇠이자, 당초의 블라디미르가 갖고 있던 오랜 숙원. 바로 그것만이 이 세계를 무너뜨릴 유일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이 또한 모순을 품고 있었다.
안톤이 심판의 힘과 율법의 힘을 갖고 있는 이상, 그는 안톤을 죽이고 힘을 빼았기 전엔 마스터 피스를 만들어낼 수 없다는 모순이었다.
"처음엔 그래서 나도 네가 날 죽이려는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란 걸 깨달았지. 그러니까 영혼의 소멸이니 뭐니 하며, 내가 마법진을 부술 생각을 못하게 만든 것일 테고 말이야."
예전에 블라디미르에서 도망쳐 온 카트락시아는 말했다. 전쟁을 통해 모은 영혼이라면, 데이터들로 빈 자리를 대체할 수 있다고.
물론 당시 아르토르의 목적은 신이 되는 것이었기에, 안톤은 그저 자신을 꾀어내기 위해 그럴싸한 말을 지어낸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상황이 바뀌었지 않은가?
콰쾅!
"크읏!"
안톤이 반발력을 이기지 못하고 뒤로 나가떨어졌다. 불에 탄 것처럼 전신이 뜨거웠다. 전신의 구멍이란 구멍에선 피가 줄줄 새어나오는 것 같았다.
눈 앞이 흐릿했지만 안톤의 시선은 그 와중에도 마법진을 향해서만 고정되어 있었다.
마법진은 그의 외형 만큼이나 처참하게 변해 있었고, 하늘로 쏘아내는 빛줄기의 기세도 예전 같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무한대에 이른 것처럼 바글바글하던 아르토르의 악마병들이 이제 수 십 마리도 채 남아있지가 않았다.
안톤은 직감했다. 이제 앞으로 한 번만 더 검을 휘두르면 된다고.
비틀비틀 거리면서 한 걸음 씩 나아가는 안톤의 앞을 악마병들이 가로막았다. 안톤의 몸상태는 거의 한계에 가까웠으나, 악마병들 또한 이제 얼마 남지 않아 있었다.
휘익. 휘익. 푸슉!
육체의 힘만 실린, 정말로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평범한 검격. 안톤은 한 마리 씩 차근차근 베어내며 악마병들을 뚫고 나갔다. 아주 간만에 옛날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안톤은 눈을 감았다. 어차피 앞은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기에 오히려 집중력을 흐트릴 뿐이었다. 오로지 감각만을 일깨운 채 안톤은 악마병들을 무참히 베어넘겼다.
그렇게 몇 걸음을 더 나아갔을 때일까.
솨아아아!
거대한 돌풍이 소용돌이치며 안톤의 몸에 틀어박혔다. 뒤로 나동그라진 안톤은 눈을 떠 앞을 바라보았다. 형체만을 겨우 확인할 수 있는 정도였으나, 안톤은 정면에 선 사내가 누구인지 곧장 알 수 있었다.
내내 멀리서 원거리 공격만을 고집하던 아르토르였다. 아무래도 멀리서 쏘아낸 공격은 모두 피해내니, 어쩔 수 없이 근접까지 행차한 듯 보였다.
아무튼 악마병들은 이제 모두 쓰러트렸는지, 그 외에 다른 형체들은 주변에 보이지 않았다. 어째선지 웃음이 나왔다.
"큭큭... 이 지경이 되어서야 나타나다니, 너도 마지막까지 한결 같군."
"그러니까 대의를 쫓아도 영웅이 아니라 악당인 거겠지요."
"이 세상에 대의란 없다. 그저 어느 누군가의 사욕만이 있을 뿐."
"...가치관이 다르다고 해두지요. 이만 포기하십시오. 이런 상황도 어느 정도 예측은 했습니다."
안톤이 피식 웃었다.
"너라면 어련히 그랬겠지."
"비웃으려면 비웃으십시오. 솔직히 이렇게까지 아슬아슬한 상황까지 올 줄은 몰랐지만, 아직 마법진은 건재합니다. 당신을 쓰려트려 성물의 힘만 취한다면, 예정대로 마스터 피스는 완성시킬 수 있습니다."
"그래, 나만 쓰러뜨린다면 말이지. 와라."
안톤은 다시 눈을 감고 감각을 최고조로 끌어올렸다.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눈으로 본 것보다도 확실하게 아르토르의 움직임이 그의 머릿속으로 그려졌다.
솨아아아!
아르토르가 부채를 휘두르자, 창처럼 날카롭게 변한 돌풍이 안톤을 향해 쏘아졌다. 그리고 안톤은 이를 막기보단 아슬아슬 할지라도 몸을 움직여 피해냈다.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선 힘을 아껴두어야 했다. 하지만 한계에 이른 육체의 움직임은 완벽치 않았다.
비록 치명상은 없었다곤 하나, 돌풍은 안톤의 살갗을 스치며 그의 몸을 누더기나 다름없게 만들었다. 앞으로 한 발자국씩 나아갈 수록, 그와의 거리가 줄어들며 피해내기가 점점 어려워졌던 것이다.
"한계처럼 보이는데 이제 그만 쓰러지십시오."
안톤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기력조차 아끼기 위함이었다.
솨아아아!
안톤의 움직인은 멀리서 보면 마치 이지가 없는 자처럼 보일 정도로 단순했다.
바람의 창이 날아들면 몸을 움직여 피했고, 틈이 생기면 한 걸음을 나아갔다.
그럴 수록 아르토르의 목소리에서도 여유가 사라졌다.
"어떻게 그 몸으로 그렇게까지...!"
안톤은 그가 뭐라 중얼거리는지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그저 들려온 소리에 의해 그와의 거리를 잴 뿐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한껏 예민해진 귀로 헉헉 대는 숨소리가 들렸다.
안톤은 눈을 떴다.
어느새 그는 아르토르의 지근거리까지 도달해 있었다. 여전히 눈앞이 뽀얗긴 했지만 이제 검을 휘두르면 닿을 만큼 가까이에 있어서인지, 아르토르의 표정 정도는 분간이 가능했다.
마법진을 지켜야 하는 아르토르에겐 물러날 곳이 없다. 그래서일까. 코앞에서 안톤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마치 사신을 보는 듯 했다.
공격을 피해내기만 하던 안톤이 드디어 검을 휘두르기 위해 손아귀에 힘을 꽉 주었다.
그리고 마침내 검이 위에서 아래로 그어지던 때. 아르토르가 최후의 공격을 쏘아냈다. 안톤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이건 무슨 수를 쓰건 절대 피할 수 없다는 것을.
'뭐, 피할 생각은 애초에 없었지만 말이지.'
푸슉!
날카롭게 벼려진 바람의 창이 안톤의 복부를 꿰뚫는 순간, 아르토르의 얼굴에 미소가 감돌았다. 아주 찰나 동안 이어질 미소였다.
위에서 수직으로 내리꽂히는 안톤의 검은 멈추지 않았다. 이를 본 바르토르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이것저것 생각할 겨를도 없이, 아르토르의 몸은 검을 피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휘잇!
'피했나.'
검이 허공을 갈랐음을 깨달은 안톤이 고개를 움직였다. 그러자 그의 우측 바닥에 나동그라진 아르토르가 보였다. 안톤은 머릿속으로 재빨리 계산을 끝마쳤다.
이제 몸은 한계에 이르렀다. 이 몸뚱이엔 아르토르를 상대하긴 커녕, 그에게 걸어갈 만큼의 기력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 안톤은 웃었다.
아직 쓰러지지 않은 그의 몸은 마법진 앞에 우뚝 서 있었다.
'한 번 정도 휘두를 힘은 충분한가.'
최후의 기력까지 모두 끌어모은 안톤이 검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이를 보며 뒤늦게 상황을 인지한 아르토르가 서둘러 몸을 일으켰지만 막기에는 이미 늦었다.
그렇게 서로의 신념을 걸고 겨루던 대결의 행방이 가려졌다.
승자는 안톤이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스스로의 목숨조차 걸지 못하는 신념으론 결코 검처럼 단단한 안톤의 신념을 부러트릴 수 없었다.
"네가 진 이유는 하나다 아르토르."
"멈춰! 그만 둬!"
결과를 납득지 못한 자의 추한 소망.
그것에 안톤의 검이 멈추는 일은 없었다.
휘이익!
안톤의 모든 것이 담긴 검이 마법진의 핵을 관통했다.
끝임을 알리기라도 하듯 마법진의 핵으로 부터 튀어나온 눈부신 섬광.
"넌 너무 말이 많아."
길고 길었던 이야기의 끝이 찾아오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