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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믿는 것은 검 162화

무료소설 내가 믿는 것은 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921회 작성일

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162화

162. 징집

 

 

[모든 걸 너에게 주고 가마. 집행자여. 너는 이제 유일한 세계의 사도. 너가 가는 길이 세계의 뜻이니. 부디 오늘의 마음을 잊지 말고 간직하길 바라겠다.]

 

뇌리를 울리는 중후한 음성을 마지막으로, 빛은 모든 초월체들을 뒤삼킨 후 사라졌다.

 

따라서 불멸자의 위에서 오만하게 지상을 깔아보던 아르토르도 지상으로 추락했다.

 

콰당!

 

흙먼지가 피어오를 정도의 충격.

 

허나 현재 아르토르를 괴롭히는 것은 그런 물리적인 것이 아닌, 정신적인 충격이었다.

 

그는 혼이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왜 당신에게... 왜, 간절히 원하던 내가 아닌 당신에게...!"

 

안톤이 검을 뽑아들었다.

 

그리고 아르토르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잘은 모르겠지만, 이제 모든 걸 끝낼 시간인 것 같군."

 

안톤은 긴 말을 하지 않았다.

 

좌절감으로 물든 이 녀석이 대체 뭔 짓을 또 벌이려 할 지 모른다. 그러니 기회가 있을 때 바로 베어야 한다.

 

모든 것의 종지부.

 

그것이 다가왔음을 느낀 안톤의 몸이 뜨거워졌다.

 

열띤 숨을 폐부로 밀어 넣으며, 안톤이 검을 쥔 손을 움직였다.

 

그러던 때였다.

 

넋을 잃고 주저앉아 있던 아르토르의 눈에 초점이 어렸다.

 

"이대로 끝낼 순 없어..."

 

푸와아아앗!

 

아르토르의 몸체가 검은 연기로 화해 공중으로 치솟았다.

 

그런 괴괴한 광경에 주춤하는 것도 일순간.

 

안톤은 황급히 검을 휘둘렀다. 검이 연기를 베고 지나갈 때마다 소름끼치는 비명소리가 퍼졌다.

 

"끄아아아아!"

 

허나 검은 연기는 작달만한 조각이 되어서라도 기어코 공중으로 뻗어갔고, 이내 아스라히 사라졌다.

 

"또 도망친 건가."

 

허무함이 몰려왔다.

 

아르토르가 죽기 전까진 모든 것은 끝나지 않는다.

 

대체 이 질긴 싸움은 어디까지 이어지려는 것일까.

 

한숨을 내쉰 안톤이 검을 거두고 주저앉았다.

 

지금만큼은 조금 쉬고 싶었다.

 

 

* * *

 

황궁 침입 당시.

 

펠샤인은 함께 가지 않는다 했고, 안톤은 그러라고 했다.

 

그땐 그저 그녀가 자신의 안전을 걱정하기 때문이라고만 여겼다.

 

'하지만 날 배신한 이유는 아직도 모르겠군. 그리고 아르토르는 뭘 약속했길래 그녀가 그를 돕는 거지?'

 

이상한 점이 또 있었다.

 

칸타타가 만든 정신 오염 측정 장치로 각국의 인사들을 검사해봤더니, 모두 정상 수치가 뜬 것이다.

 

그것은 즉, 펠샤인이 안톤과 함께 여러 국가를 돌아다닐 당시 제대로 그들의 세뇌를 풀었다는 뜻이다.

 

'도대체 왜 그랬지?'

 

예나 지금이나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여인.

 

안톤은 그녀를 생각할 수록 머리가 아파왔기에, 그녀를 이해해보겠단 생각을 집어치웠다.

 

아무튼 펠샤인은 사라졌다.

 

묘연해진 종적은 카린의 정보망으로도 찾아낼 수 없었다.

 

하기사.

 

모습을 자유자재로 감출 수 있는 여인이니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이만 각설하고 여기서 중요한 점은.

 

펠샤인이 없어진 탓에 이제 더 이상 아르토르의 세뇌를 풀 수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칸타타가 그것이 가능한 아티팩트를 제작해내겠다고 장담은 했지만, 그것이 언제 실현될지는 미지수인 노릇이었다.

 

"더 이상은 기다릴 수 없습니다. 이런 태도로는 상황만 악화될 뿐입니다. 이제라도 전력으로 맞서야만 합니다."

 

그레일시아의 국왕이 회의에서 정식으로 그 문제를 언급했다.

 

현재 제국을 주축으로 만들어진 연합군은, 위그드라실에 속한 다섯 국가를 상대로 맹렬히 공격해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동안에 위그드라실은 일단 수비에 전념하며 그들의 공세를 막아내는 것에 주력했다.

 

세뇌를 풀어낼 아티팩트만 만들어진다면, 무의미한 피를 흩뿌리지 않고도 평화적으로 전쟁을 풀어낼 수도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더 늦었다간 돌이킬 수 없을 겁니다. 결단을 내립시다."

 

그레일시아 국왕의 말에, 다른 네 국가의 지도자들의 시선이 카린에게로 모아졌다.

 

그리고 마치 꼬리의 꼬리를 물듯이 카린의 눈은 안톤을 향했다.

 

여지껏 늘 그래왔든 결국 선택의 결정 권한은 안톤에게로 넘어왔다.

 

"..."

 

안톤은 결정을 내리길 머뭇거렸다.

 

불필요한 희생을 최소화 시키고 싶다는 신념 외에도, 사실 그가 위그드라실에 소속된 국가들에게 막는 것에만 힘을 쓰라한 것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전쟁엔 전쟁으로, 맞불을 놓겠다는 것이 결국 아르토르가 원하는 바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마냥 방어적인 태세를 취하는 것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걸 안톤도 알았다.

 

마지못해 안톤이 고개를 끄덕였고, 이를 본 카린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레일시아 국왕의 의견에 찬성하시는 분은 거수해 주십시오."

 

핫산을 제외한 모두가 손을 들었다.

 

역사에 오래토록 적혀질 거대한 전쟁의 서막이었다.

 

 

* * *

 

위그드라실의 새로운 방침이 결정된 후.

 

안톤은 곧장 세로게트를 찾아갔다.

 

그리고 한참이나 대화를 나누었다.

 

대화의 주제는 근래에 항상 그랬듯이, 앞으로의 미래에 관한 것들이었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선, 지난 날 기록자가 안톤에게 했었던 말의 진의를 이해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기록자는 말했다.

 

이제 안톤만이 유일한 세계의 사도라고, 그러니 가고자 하는 길이 바로 세계의 뜻일 거라고.

 

얼핏 듣기로는 그냥 응원의 말로도 들릴 수 있으나, 왠지 안톤은 그런 게 아닐 것만 같단 생각이 들었다.

 

"분명 그 말씀은 그냥 한 말이 아닐 걸세. 그러니 자네가 원하는대로 해보지 않겠나? 지금 자네가 봤을 때,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선 어떤 방법이 최선일 것 같은가?"

 

세로게트의 말에 한숨부터 나왔다.

 

"그걸 안다면 이러고 있을 리가 없지 않소. 혹여 펠샤인 그녀를 찾아낼 수 있다면 모를까."

 

"그럼 답이 나온 것 아닌가. 그녀를 찾아보게."

 

"이미 해봤단 걸 알고 있지 않소. 그게 그리 쉽다면 이리 고민할 필요도 없었겠지."

 

"그래. 쉬운 일은 아니겠지. 하지만 될 때까지 해본 건 아니지 않은가. 아니면 벌써부터 완전히 불가능하다고 지레 생각하는 겐가?"

 

세로게트의 흔들림 없는 눈이 안톤을 향한다.

 

그 시선에는 믿음이 가득했고, 어째선지 이를 마냥 저버리기 어려웠다.

 

잠시 말문이 막힌 안톤을 보며 세로게트가 말을 이었다.

 

"한 번 해보게. 이리 가든 저리 가든, 또 어딜 헤메든. 나는 결국 자네가 해낼 거란 걸 알고 있네."

 

"하지만 위그드라실에서 내가 빠지면 전력에 큰 공백이 생길 것이오."

 

"자네는 너무 주변에 야박하군. 내가 봤을 때 자네의 동료들은 모두 제 앞가림은 스스로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보였네만."

 

성국 엔티아네아의 유일한 성자였던 케이혼 아델로만.

 

제국의 마스터 중 하나였던 클린턴 제오르.

 

이제는 대륙 제일을 겨누는 상단이 된 블루머챈트의 주인 카린 세이건 레이왈츠.

 

해린의 국왕 핫산 헤이젤 에르단과 그의 검인 레버르트 남작.

 

그리고 이번 생에서 다시 만난 오르메넨 프로젠마임.

 

세로게트의 말대로, 그 외에도 위그드라실에는 많은 인재들이 가득했다.

 

"그들은 분명 자네만큼의 신위를 떨치진 못하네. 그렇지만 그들이 약한가? 자네는 그들의 도움을 전혀 받지 않았나?"

 

"의지할 수 있는 동료들이오."

 

"그럼 됐지 않은가. 그들은 그들의 일을 할 것이네. 그러니 자네는 자네의 일을 하게."

 

"어디선가 자주 듣던 소리오."

 

"그런가?"

 

"그렇지만 늘 설득되는 소리이기도 하지. 좋소. 한 번 당신의 말대로 해보겠소."

 

안톤의 말에 세로게트가 껄껄 웃었다.

 

"역시 자네는 그런 눈빛을 하고 있을 때가 가장 보기 좋단 말이지. 길을 정한 사람을 붙잡아서 뭣할까. 어서 가보게!"

 

세로게트에게 등을 떠밀리듯 별장에서 나온 안톤은 잠시 생각했다.

 

펠샤인 데 에르단.

 

이제 이 대륙의 운명을 손에 쥔 그녀의 행방을 찾기 위해선 어디로 가야 할까?

 

안톤은 문득 지난 날 레노테이르에서 만났던 그 해린의 무사를 떠올렸다.

 

'아니 기사라고 해야 되나?'

 

페르트 키아트레스.

 

몇 번을 다시 생각해도 사고 방식이 이해가 가지 않던 특이한 사내.

 

어쩌면 그런 그가 펠샤인과 질긴 인연으로 맺어진 것은, 둘 모두 비슷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아무튼 그의 목적은 사라져버린 펠샤인을 찾아내어, 다시 인생을 바치는 것이었다.

 

안톤은 그의 절박한 눈을 아직도 기억했다.

 

그런 눈을 가진 자들은 목적을 이룰 때까지 쉬질 않는 법이었고, 안톤은 그가 언젠가 펠샤인을 찾아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라면 펠샤인의 행방을 알지도 모르겠군.'

 

그럼 페르트 그 사내는 어디있을까.

 

안톤은 아마 그가 볼-메이르에 있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뭐, 굳이 그가 아니더라도 그녀를 찾기 위해선 결국 볼-메이르에는 들려야했을 테니.'

 

안톤이 품에서 트릭 씰을 꺼냈다.

 

그리고 이를 사용하기 전에 목걸이를 하나 꺼내 목에 걸었다.

 

'또다시 위장 신분으로 지내야 하는 신세인가.'

 

 

* * *

 

트릭 씰은 만능이 아니다.

 

오직 정해진 장소로만 이동이 가능하다.

 

그리고 볼-메이르와 가장 가까운 이동 가능 구역은 성국 엔티아네아였다.

 

수웅.

 

허공에서 떨어져 내린 안톤이 이젠 익숙하게까지 느껴지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기만 벌써 몇 번째인건지.'

 

미궁 도시를 향할 때 한 번. 그리고 대미궁에서 탈출할 때 한 번. 또 칸타타의 도움을 받을 때와 오늘까지 합쳐 총 네 번이나 이곳에 왔었다.

 

덕분에 어느 쪽으로 방향을 잡아야 할지 갈팡질팡할 필요도 없었다.

 

볼-메이르가 있는 방향은 서쪽.

 

목걸이를 사용해 모습을 바꾼 안톤은 천천히 걸었다.

 

만약 전력으로 질주한다면 이틀 내지로 목적지에 도달하겠지만, 현재 안톤의 목표는 볼-메이르에 도착하는 것 그 자체가 아니었다.

 

안톤은 중간중간 도시에서 묵고 마을에서 숙박하며 이주일 가량을 평범하게 도보로 여행했다. 이런 저런 정보들을 수집하기 위함이었다.

 

한창 전쟁이 벌어지는 것은 대륙 동부이기 때문일까.

 

서부 끝자락인 볼-메이르는 전쟁에 참전조차하지 않은 국가이기에 평화로웠다.

 

다만 이 도시만 그런 건진 모르겠지만, 뭔가 음침한 분위기가 흘렀다.

 

분명히 시끌벅적한 어느 거리나 마찬가지인데 왜일까.

 

곰곰히 생각하던 중에 깨달았다.

 

젊은 남자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이봐. 너."

 

막 그 사실을 깨달았던 찰나에 누군가 안톤을 불러세웠다. 갑옷과 창으로 중무장한 병사였다.

 

"무슨 일이십니까?"

 

"...그 반응은 설마 여행객이냐?"

 

"그렇습니다. 헌데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니다. 여행객이라면 상관없는 이야기니까."

 

병사는 안톤에게 물을 것만을 묻고는 이제 용건 없다는 듯 등을 돌렸다.

 

문득 이 도시의 기괴한 광경에 궁금증이 든 안톤은 주변에 지나가던 행인을 잡아 세웠다.

 

"저 말씀 좀 여쭙겠습니다.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거리에 남자가 너무 드문 것 같습니다. 혹시 제가 알지 못하는 무슨 연유라도 있습니까?"

 

안톤을 미묘한 눈빛으로 흘기던 초로의 노인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모두 군대에 끌려갔으니까 당연히 없지."

 

노인의 목소리는 어딘가 날이 서 있었다.

 

"사지 멀쩡한데도 여기 있는 걸 보면... 그쪽은 외국인인가?"

 

"네. 근데 군대라니, 제가 알기로 볼-메이르 왕국은 전쟁에 참가하지 않지 않았습니까?"

 

"국왕님께서는 언제까지 평화로울 순 없기에 미리 준비해야 된다고 하셨지. 때문에 젊은이들은 모조리 수도로 끌려가 싸우는 법을 배우고 있네."

 

"그렇군요. 친절히 대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고갤 숙인 안톤에게로 노인이 목소리를 확 줄이며 속삭였다.

 

"근래 들어 어딜 가든 분위기가 좋지 않으니 중요한 볼일이 아니라면 서둘러 고국으로 돌아가게나. 오래 있어서 하나 좋을 게 없어. 쯧쯧. 대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려는 건지."

 

그리고 혹여나 병사들이 이상하게 볼까 싶었는지, 노인은 다시 가던 길을 가기 시작했다.

 

안톤도 들을 정보는 다 들었기에 노인을 더는 붙잡지 않았다.

 

'수도라... 일단 그곳으로 가봐야겠군.'

 

볼-메이르에서 영주에게 맡기지 않고 징집한 병사를 수도로 불러모은 이유는 짐작할 수 있었다.

 

용암 전사단.

 

필시 그 정신나간 집단을 다시금 역사에 재현하려는 것이리라.

 

'어쩌면 페르트가 거기 수장일지도 모르지.'

 

그러한 추측이 사실인지 알아보기 위해 안톤은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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