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레나, 이계사냥기 140화
무료소설 아레나, 이계사냥기: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16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아레나, 이계사냥기 140화
오랜만에 타 보는 포르쉐 카이엔이었다.
보조석에 차지혜를 태우고 출발하면서 나는 물었다.
“귀찮지 않으세요?”
“안 귀찮습니다.”
마리가 들러붙어서 한국까지 쫓아왔을 때도 그렇고, 은근히 이런 부분에서 차지혜는 관대했다.
“의외로 사람을 귀찮아하지 않으시네요.”
“일부러 고독해지려는 타입은 아닙니다. 그리고 귀엽잖습니까.”
“예?”
순간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현호 씨 여동생, 귀엽습니다.”
현지 그것이 귀엽다니, 차지혜의 정신세계가 범상치 않게 느껴진다.
차는 금방 현지의 집 앞에 도착했다. 나오라고 문자를 보내자 금세 현지가 뛰쳐나왔다.
“오라버니!”
“하지 마, 그 말투.”
“아이잉.”
뒷자리에 앉은 현지는 넉살 좋게 차지혜에게도 친근감 있게 알은체를 했다.
“언니도 안녕하셨어요!”
“예, 오랜만입니다, 아가씨.”
“히히, 그냥 현지라고 부르세요.”
“예, 현지 아가씨.”
“에이, 그냥 현지야 하고 부르세요. 아가씨는 오글거려요.”
“알겠다.”
순간 나는 웃을 뻔했다.
말투가 대번에 병사를 대하는 군대 장교처럼 변했기 때문이다.
친한 언니동생 사이를 원했던 현지는 떨떠름한 표정이 되었다. 순식간에 장교와 졸병으로 서열이 역전된 셈이었다.
“뭐 먹고 싶은 게 있나?”
“어, 그, 부천역 부근에 늦게까지 하는 파스타 전문점 있어요.”
나는 부천역 쪽으로 차를 몰았다.
파스타 전문점에 도착한 우리는 자리에 앉아 주문을 했다.
“또 무슨 부탁이 있어서 보잔 거야?”
“아이, 귀염둥이 여동생이 오빠 보고 싶어 하는데 이유가 필요한가?”
“맞을래?”
“히히, 부끄러워하긴. 귀여운 여동생 때문에 내심 오빠로서 뿌듯하고 좋지?”
나는 혈관이 튀어나도록 주먹을 불끈 쥐었다.
분노를 참기 위해 애써야 했다.
현지는 헤실헤실 웃으며 차지혜에게 말했다.
“오빠가 이래요. 부끄럼쟁이라 솔직하지 못하고. 이런 오빠랑 사귀시느라 고생 많으시겠어요, 언니.”
“별로.”
“호호, 언니도 오빠랑 비슷한 과구나.”
“그런가? 잘 모르겠다.”
식사를 하는 동안 현지는 우리 사이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았는데, 그때마다 나는 곤혹스러움을 느꼈다.
차지혜는 특유의 뻔뻔함으로 거짓말을 척척 대답해서 나를 감탄시켰다.
그러고 보면 현재 차지혜와 나의 관계가 참 애매했다.
여러 일이 있었지만 그녀와 연애를 한다는 느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잠깐 타올랐다가 다시 원상태로 돌아온 듯한 분위기였다.
“오빠, 실은 말이지…….”
마침내 현지가 본론을 꺼냈다.
“말해봐.”
“히히, 실은 요번에 내가 내 앞으로의 진로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보았거든.”
“전반기 공채에서 전부 떨어지고 나면 생각이 많아질 법도 하지.”
“이씨! 비꼬지 말고 좀 진지하게 들어봐.”
“그래그래, 계속 말해.”
“응응.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사람이 자기 적성에 맞는 일을 해야 하잖아. 그래서 나도 내 적성이 무엇일까, 내가 어떤 분야를 좋아할까 생각해 봤거든.”
“그런데?”
“근데 마침 내 친구 지현이가 얘기해 준 게 있었어.”
“뭔 얘기?”
“걔 아는 언니가 쇼핑몰 창업해서 돈 엄청 번다는 거야.”
“…….”
“그래서 나도 지현이랑 같이 패션몰 하나 창업해 볼까 하고 생각 중이야.”
“그게 네 적성이라고?”
“응! 내가 패션 센스는 또 끝내주잖아.”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얘가 취업을 못하더니 드디어 맛이 갔구나 싶었다.
인터넷 쇼핑몰은 아무나 하냐?
아이템이라고는 자기 패션 센스 하나라고?
“근데 그런 것도 하려면 사업 자본금이 필요하잖아, 자본금. 그래서 말인데…… 히히, 오빠가 좀 지원을…….”
나는 스마트폰을 꺼냈다.
“오, 오빠?”
나는 다이얼을 꾹꾹 누르고 통화 버튼을 터치했다.
발신음이 들린다.
“오빠, 누, 누구한테 연락하는 거야, 지금?”
겁먹은 현지의 질문을 가볍게 씹으며 나는 스마트폰을 귀에 가져다댔다.
-여보세요?
차지혜 못잖은 차가운 말투.
“누나, 난데.”
-한국 왔어?
“응. 오늘 귀국했어. 근데 내가 지금 현지랑 얘기를 하고 있는데…….”
“꺄아악! 오빠!”
사색이 된 현지가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계속 말했다.
“얘가 글쎄 인터넷 쇼핑몰을 창업하고 싶다고 자본금을 빌려달라네.”
-……거기 어디야?
서늘한 누나의 목소리.
“부천역 근처에 있는 파스타집인데.”
-주소 문자로 보내. 지금 갈게.
“오케이.”
통화를 끊고서 누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현지의 얼굴이 공포로 물들었다. 이윽고 원망 가득한 목소리로 내게 따져들었다.
“오빠, 너무해! 어쩜 그럴 수 있어!”
“잘 생각해봐. 네가 정말 진지하게 고민한 거라면 누나부터 설득해봐. 누나가 허락하면 내가 자본금 대준다.”
돈이 스위스 계좌에 썩어나는데 그게 아깝겠냐. 걱정되는 건 네 정신 상태란다, 얘야.
“언니가 내 말을 들어나 주겠어? 엄마랑 같이 닭강정이나 볶으라고 나를 들들 볶을 텐데!”
“다 너 잘되라는 거지 네 의사 같은 거 무시하고 강요만 하겠어? 누나를 설득해서 허락을 받을 정도로 네 뚜렷한 결심과 의지를 보여주란 말이야.”
“히잉, 언니 무섭단 말이야! 무조건 날 혼내려고만 하고!”
“솔직히 지금 네 상황을 보면 취업은 안 되고 엄마 가게 잇는 것도 싫고, 도피처 삼아서 쇼핑몰 같은 소릴 하는 걸로밖에 안 보여.”
“…….”
현지가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난 한숨을 쉬며 현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니까 증명해 보이란 말이야. 네 뜻이 정말 확고하고 진지하게 결심한 거면 오빠가 도와준다니까.”
“몰라!”
빼액 소리 지르고는 훌쩍훌쩍 우는 현지였다.
가게에서 나와 근처의 24시간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누나가 도착했다.
“현지.”
누나는 도착하자마자 서늘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현지는 잔뜩 긴장한 이등병처럼 호명되자마자 벌떡 일어섰다.
“가자. 엄마랑 같이 진지하게 얘기 좀 해봐야겠어.”
“아, 알았어.”
현지는 가까스로 용기를 내며 누나를 따라나섰다.
누나는 그렇게 우리 집안 말썽쟁이를 데리고 바람처럼 사라졌다.
카페에는 나와 차지혜 단둘만이 남았다.
나는 한숨을 쉬며 차지혜에게 말했다.
“저도 쟤처럼 저런 사소한 문제로 끙끙 앓으며 고민했으면 좋겠네요. 쟤 나름대로는 굉장히 심각할 테지만, 저게 다 평화로운 삶이라는 증거잖아요.”
적어도 죽느냐 사느냐, 누굴 죽이냐 마냐 하는 문제는 아니지 않은가.
그러자 차지혜가 말했다.
“부럽습니다.”
“그죠? 저도 저 바보가 차라리 부러워요.”
“김현호 씨가 부럽습니다.”
“……제가요?”
“같이 고민하고 울고 웃고 하는 게 부럽습니다. 가족이 있다는 건 그런 느낌일 테지요. 전 그런 느낌을 잊어버린 지 너무 오래됐습니다.”
“아.”
그제야 나는 그녀가 어릴 때 부모님을 여의고 혼자가 되었다는 점을 떠올렸다.
마리나 현지가 귀엽다며 좋아하는 것도 그런 심정이었을 것이다.
“지혜 씨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조금은 뜬금없었을까.
하지만 나는 사랑 고백을 하듯이 솔직하게 말했다.
차지혜는 그런 나를 물끄러미 보더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
나는 놀라고 말았다.
차지혜가 드러내놓고 미소를 지어 보이는 얼굴은 거의 처음이 아닐까 싶었다.
“다행스럽게도 저도 인생을 살면서 즐길 거리를 두 가지는 찾았습니다.”
“뭔데요?”
“하나는 내일이나 모레쯤에 알게 되실 겁니다.”
“다른 하나는요?”
“그건.”
차지혜는 나에게 손을 뻗었다.
내 뺨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말을 잇는다.
“지금, 집에 돌아가면 알게 되실 겁니다.”
가슴이 떨렸다.
그녀도 이렇게 남자를 가슴 떨리게 만들 수 있구나 싶었다.
그날 이후로 우리의 관계는 확실히 변했다.
우선 그녀는 손님용 방에 있던 짐을 내 침실로 옮겨왔다. 우리는 함께 잠들고 아침을 맞이하게 되었다.
나를 대하는 그녀의 행동과 말투는 변한 게 없었지만, 적어도 내가 수시로 품에 안거나 입맞춤을 해도 곧잘 받아주었다.
그리고 무표정에 감춰진 그녀의 감정을 좀 더 잘 알아차릴 수 있게 되었다.
민정이처럼 애교 많고 감정표현도 풍부한 여자는 아니었지만 그걸로 족했다. 함께 있으면서 나는 행복하다는 기분을 느꼈으니까.
참고로 그녀가 찾았다는 인생의 즐길 거리 중 하나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어느 날 차지혜가 볼일이 있다며 외출을 하더니, 하얀색 람보르기니를 타고 나타난 것이다.
“몇 주 전에 주문해 놨는데 생각보다 오래 걸렸습니다.”
람보르기니의 화려한 위용에 나는 입을 쩌억 벌릴 수밖에 없었다.
저번에 내가 선물한 와이번의 마정을 팔아서 생긴 돈으로 뽑은 것이리라.
***
크고 화려한 저택이었다.
철창으로 된 저택 입구부터 넓은 마당까지 검은 양복의 경호원들이 득시글거렸다.
저택 입구 앞.
차에서 내린 리창위는 삼엄한 저택 풍경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허수아비들을 잔뜩 세워놓았군.’
쓸모도 없는 경호원들을 잔뜩 깔아놓은 것으로 위엄을 드러내려 한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며 리창위는 표독한 냉소를 머금었다.
“열어라.”
리창위가 차갑게 내뱉었다.
그의 얼굴을 알아본 경호원들이 현관문을 열어주었다.
안으로 당당히 들어간 리창위는 저택 현관 앞에서 다시 경호원들의 제지를 받았다.
“검문 좀 하겠습니다.”
“귀찮다.”
“죄송합니다. 검문은 반드시…….”
“꺼져.”
“예?”
퍼억! 퍽!
리창위는 파리 쫓듯 손을 두 번 휘저었다. 경호원 둘이 한 순간에 양옆으로 나가 떨어졌다.
“……!”
“무, 무슨?!”
놀란 경호원들이 본능적으로 품속으로 손을 넣어 권총을 꺼냈다.
“큭큭.”
리창위는 킬킬거렸다.
파아앗!
푸른 오러가 피어올라 그의 몸을 감쌌다.
경호원들은 방아쇠를 차마 당기지를 못하고 망설였다.
상대는 리창위였다. 그동안 이 저택을 수시로 드나들던 주요 인물이었다.
“비켜. 거슬리면 다 죽여 버릴 테니까.”
그러면서 리창위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방문 앞에 이르자 문 앞을 지키는 경호원을 옆으로 밀쳐내고 노크도 없이 문을 열었다.
“리창위? 이게 무슨 소란이냐?”
하얀 수염을 기른 뚱뚱한 노인이 흔들의자에 앉은 채 인상을 찌푸렸다.
일전에 리창위에게 술병을 집어던졌던 그 노인이었다.
“뵙는 게 한두 번도 아닌데 절차가 너무 귀찮더군요.”
“…….”
리창위의 건방진 태도에 노인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꼈다. 때문에 화를 내지 않고 침착하게 대응했다.
“그렇군. 그럴 수도 있지.”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헤이싱이 맡은 일은 어떻게 된 게냐? 왜 헤이싱에게서 아무런 연락도 없는 게야?”
“헤이싱은 죽었습니다.”
“뭐, 뭣?”
노인은 흔들의자에서 벌떡 거구를 일으켰다.
“작전은 실패했고 헤이싱은 작전 중에 사망했습니다.”
“그, 그럼 해적 파트 쪽의 피해는 얼마나……?”
“해적군도로 귀환하던 해적 파트 쪽 대원들도 모두 죽었습니다.”
“……?!”
안색이 창백하게 질리며 노인은 비틀거렸다.
리창위의 말이 이어졌다.
“귀환 중에 정체불명의 괴한이라도 만난 모양입니다. 안타깝게도.”
리창위는 악마처럼 웃고 있었다.
“으으……!”
노인의 얼굴이 공포로 질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