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레나, 이계사냥기 172화
무료소설 아레나, 이계사냥기: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48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아레나, 이계사냥기 172화
5인의 대사제는 육면의 벽에 각각 서서 위를 바라보았다.
무려 200미터 높이에 위치한 권좌.
그곳에 오만하게 앉아 그들을 굽어 내려다보는 이가 있었다.
아만 제국의 술탄이자 이 불길하고 은밀한 조직의 최고 사제, 사록 푼 아만이었다.
5인의 대사제는 고개를 들어도 보이지 않는 이를 향해 무릎을 꿇고 예를 갖췄다.
예를 갖추고 있으면서도, 데이나는 위에 있는 술탄 사록보다는 눈앞에 보이는 마법진과 석관(石棺)을 주시하고 있었다.
‘언제나 바로 코앞에 있는데 말이지.’
쓴웃음이 나왔다.
대사제들 간에는 ‘재래 결사대’라는 명칭으로 부르는 이 조직의 궁극적인 목적이 바로 코앞에 보이는 석관이었다.
저 석관에 잠든 고인(故人)이 바로 이곳에 모인 모두의 원념을 담고 있는 대상이었다.
저 안에 담긴 고인의 유체(遺體)를 훼손하기만 하면 시험의 최종 목적을 달성한 것이나 다름없으리라.
하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아니, 정확히는 불가능하다고 짐작될 뿐이었다.
석관에서 풍겨지는 불길한 기운은 대담한 데이나로서도 건드릴 엄두를 내지 못하게 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저 석관도 마법진도 모두 안에 잠든 고인이 직접 제작한 것이었다.
사상 최고의 흑마법사이자 네크로맨서.
그러면서도 세상 그 누구에게도 그 사실을 들킨 적 없었던, 진정 유사 최고의 흑마도사.
그게 바로 석관 안의 고인이었다.
“때가 임박하였다.”
높은 옥좌에 있는 술탄 사록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가 육각형의 벽을 타고 묘한 울림으로 퍼졌다.
“이제야 그분을 깨우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이에 데이나를 포함한 5인의 대사제가 옥좌를 향해 고개를 올려다보았다.
5인의 대사제 중 데이나의 스승인 아프리트가 말했다.
“최고 사제시여. 하지만 아직 저희가 모은 영혼력의 수치가 충족점에 도달하지 않았습니다.”
“안다.”
술탄 사록이 말했다.
“하지만 최소점은 넘어섰다. 최소한의 조건은 달성된 셈이다.”
“하지만 최소점은 후대의 연구에 의해 밝혀낸 것이지, 그분께서 남기신 유지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지금까지 참고 기다린 것이었다. 하지만 보아라. 하늘의 명을 받고서 우리의 대업을 방해하려는 이가 얼마나 많단 말이냐? 그들은 마침내 대사제 알란까지 해치고 말았다.”
“…….”
“무엄한 무리들의 칼날이 우리의 턱밑까지 짓쳐 들었거늘,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한단 말이냐.”
아무래도 술탄은 대사제 알란의 죽음이 충격이었던 모양이었다.
지난 수백 년간 대사제가 누군가에 의해 죽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야. 아니, 아주 소름 끼치게 정확한 말을 하긴 했군.’
데이나는 옥좌를 올려다보며 속으로 웃었다.
‘난 당신의 턱밑에 있지.’
그런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에도 논쟁은 계속됐다.
“최고 사제시여. 하오나 저희가 후대에 알아내었던 사실을 그분께서 모르셨겠습니까? 그분께서 살아생전에 유지로 남긴 충족점은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아니하겠습니까? 혹여나 어떤 부작용이 발생할까 두렵기만 합니다.”
“그럼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한단 말이냐?”
술탄 사록이 역정을 냈다.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육각형 방을 쩌렁쩌렁하게 채웠다.
“우리의 상대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다른 세계에서 온 무리들? 천만에! 하늘이다. 신이 우리를 몰락시키기 위한 안배를 하고 있다. 시시각각으로 짐의 숨통을 조여오고 있다. 그들이 끝내 짐을 시해해 목적을 달성하도록 충분한 시간을 주자는 말이더냐?”
“그런 것은 아니옵니다.”
아프리트의 반대가 한층 수그러졌다.
술탄 사록이 말했다.
“더는 시간을 끌 수가 없다. 인고의 기다림은 더 이상 없다. 오늘 당장 대업을 완수하겠다.”
그 선언이 내려지자 대사제들은 일제히 부복했다.
“명을 받드나이다.”
“명을 받드나이다.”
하지만 표정이 그다지 좋지 않은 사람이 두 명 있었다.
바로 반대했던 아프리트와 그의 제자이자 시험자인 데이나 리트린이었다.
수백 년 전, 인세에 다시없을 위업을 달성한 절대군주가 있었다.
3대 술탄, 카자드 푼 아만.
대륙을 재패하고 전 인류의 정점에 선 군주 중의 군주였다.
위대한 흑마도사이자, 그 사실을 어떤 마법사에게도 들키지 않고 숨길 수 있을 정도로 경지가 높았던 그는 전 대륙이 통일된 아만 제국을 통치하며 평생을 군림했다.
하지만 살아생전, 그는 앞날을 내다보고 있었다.
전 대륙, 전 인류의 지배자란 그만한 그릇이 있는 술탄이 아니면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적통과 방계, 아들과 딸을 가리지 않고 지배자 교육을 시켜보았으나 그 누구도 충분한 그릇이 없었다.
술탄 카자드만 한 인물이 그의 슬하에는 없었다.
“내가 죽으면 세상은 또 갈라져 서로 다투겠구나.”
안타까워한 술탄 카자드는 자신의 뛰어난 네크로맨시를 이용하여 한 가지 계획을 준비했다.
바로 자기 자신의 부활이었다.
그냥 언데드로서의 부활이 아니었다.
진실로 살아 있는 육체와 정신!
그리고 영원히 노쇠하지 않는 생명!
영혼의 파편을 모아 가짜 영혼을 제작하는 비술도 술탄 카자드에 의해 정립되었고, 이 계획을 실행에 옳길 조직을 결성했다.
기나긴 세월이 지나도 변질되지 않고 목적을 달성할 수 있도록 은밀화되고 금욕적이고 종교화된 조직을 만들었다.
그것이 재래 결사대였다.
술탄 카자드의 생각대로 그의 사후에 아만 제국의 통일체제는 무너져 내렸다.
그 같은 카리스마를 가진 술탄이 다시는 나오지 않았고, 나라는 분열에 분열을 거듭한 끝에 오늘날에 이르렀다.
아만 제국의 역대 술탄들은 나라와 더불어 재래 결사대를 이어받으면서, 정세가 어려워질 때마다 술탄 카자드의 대업을 떠올렸다.
술탄 카자드가 돌아온다면 이 모든 어려움이 극복된다는 신앙이 역대 술탄들의 뇌리에 깊이 박혀 있었다.
그것은 술탄 카자드의 안배대로 종교화된 재래 결사대의 믿음이 각인된 결과였다.
역대 술탄들은 대업을 보다 빨리 이룰 방법이 없는지를 연구했다.
대대로 연구를 하였고, 그 결과 모아야 하는 영혼력의 최소치를 발견하였다.
술탄 카자드가 직접 장치한 석관과 마법진의 술식을 분석한 결과, 유언보다 더 적은 양의 영혼력으로도 그를 부활시킬 수 있다는 걸 알아낸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술탄 카자드의 뜻이 아니었고, 그 때문에 논란이 되어서 결국 오늘날까지 대업이 미루어졌다.
그리고 바로 지금, 술탄 사록 푼 아만이 마침내 오랫동안 닫혀 있었던 뚜껑을 열려고 하는 것이었다.
현 술탄 사록이 성급했던 것일까?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시험자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바로 현 술탄 사록이 집권하고부터였다.
하늘이, 신이 아만 제국의 몰락을 위해 안배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은 술탄 사록은 마음이 급해졌다.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것.
다시는 멸하지 않는 절대자를 탄생시키는 것.
그 모든 것은 자연의 섭리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어쩌면 이를 저지하려는 시험자의 존재 자체가 자연의 정화작용인 것인지도 몰랐다.
때문에 술탄 사록은 그 시험자 무리와 하늘의 안배가 자신이 감당하기 버겁다고 판단하였다.
다소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무리하게 일을 진행하였고, 결국은 오늘날에 이르렀다.
백여 년 가까이 재래 결사대의 대사제로 있었던 알란의 죽음은 술탄 사록의 인내심을 바닥나게 했다.
“의식을 거행한다.”
“옛!”
술탄 사록의 말에 대사제들이 단단히 각오한 엄숙한 얼굴로 대답했다.
‘이젠 어쩌지?’
데이나는 숨 막히는 긴장감을 느꼈다.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알고 있지만, 이 자리에서 일을 벌였다가는 살아남을 수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술탄 사록은 별것 아니라는 판단이 들었지만, 문제는 네 사람의 대사제들.
그중에서도 스승 아프리트가 문제였다.
‘종속의 인을 발동하면 내 흑마력 서클은 송두리째 흩어지겠지. 날개 한 쪽을 뜯기고 시작하는 셈이군.’
다른 날개 한 쪽이 더 있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부족할 지도 몰랐다.
무언가 다른 게 더 필요하다.
이 자리에 모인 이들에게 대항하고 탈출할 수 있는 무기가.
모든 경우의 수를 놓고 아무리 계산해 보아도 견적이 나오지 않는다.
초조해져 가는 데이나의 마음과 상관없이, 의식은 시작되었다.
오온―
오온―
오온―
오온―
대사제들이 입을 모아 묘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들의 목소리가 공명을 이루었다.
아프리트가 데이나에게 눈치를 주었다. 그제야 데이나도 이들을 따라했다.
오온―
다섯 목소리의 공명.
그와 함께 그들의 심장에 서클로 매듭되어 있는 흑마력이 흘러나왔다.
파아아아앗!
다섯 가닥의 흑마력이 꼬여들었다.
마치 심장에 서클로 자리 잡히는 것처럼, 그들의 흑마력이 한 데 모여 매듭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지금이 가장 좋은 기회인데!’
모두의 흑마력이 꼬여들고 있을 때 일을 벌이면 대사제 4인에게 모두 충격을 줄 수 있다.
아주 잠시 동안 그들은 꼬여든 흑마력을 수습하느라 그를 응징하지 못할 것이다.
그 ‘잠시’를 틈타 한 명을 죽인다.
그리고 탈출한다.
방 밖은 리창위를 비롯한 타락한 것들이 진을 치고 있으므로 불가.
탈출구는 딱 한 군데, 하늘밖에 없었다.
200미터 위에 있는 옥좌를 너머, 보다 위로 솟아오르면 궁전의 꼭대기 돔에 다다른다.
거길 뚫고 빠져나갈 수 있다.
하지만 솟아오르는 동안 술탄 사록의 저항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흑마력을 수습한 대사제들의 응징을 받을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날개 한 쪽만 가지고는 안 되는데.’
승률이 조금도 나오지 않는다.
이래서는 무리다.
가닥가닥 꼬여든 흑마력에 반응하여 붉게 칠해진 마법진에서 시뻘건 빛을 내기 시작했다.
마법진 위에 놓여진 가짜영혼의 구슬들이 덩달아 빛나기 시작했다.
그때, 데이나는 멍하니 그 구슬들을 바라보았다.
또 다른 날개……!
‘저거라면 혹시?’
승률 0%로 귀결되는 계산에 변수가 생겼다. 그 값이 뭐가 될지 예측불허였다.
하지만 해볼 만하다고 여겼다.
데이나는 결심을 굳혔다.
그리고 차분하게 스승 아프리트에게 텔레파시를 보냈다.
-스승님.
-미친 게냐? 내게 텔레파시를 보내지 말라고 하였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지금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의식을 거행하는 중이다.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
-지금 해야 합니다. 이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뭐냐?
-스승님께서는 자신을 들키지 않을수록 위대한 마법사라고 하셨었지요?
-그렇다. 상대로 하여금 나를 모르게 만드는 것은 우위에 있다는 증거지. 위대하신 3대 술탄 카자드 푼 아만 폐하께서는 살아생전은 물론 후대에까지도 흑마력을 어떤 마법사에게도 들킨 바 없으셨다. 그런데 그건 왜 묻는 거냐?
긴 말이었지만 텔레파시였기에 1초도 안 돼서 전달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오래 전부터 드리고 싶었던 말씀을 드려야겠습니다.
-……?!
-당신을 처음 만난 그날, 난 이미 당신보다 뛰어난 마법사였다, 아프리트.
하얀 가면 속의 데이나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