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레나, 이계사냥기 170화
무료소설 아레나, 이계사냥기: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791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아레나, 이계사냥기 170화
복잡한 기분을 안은 채 시험은 시작되었다.
시험의 문을 통과해 보니 지난 시험에서 끝마쳤던 울펜부르크 백작가의 객실이었다.
침대 위에 앉아 있던 나는 창가 쪽 테이블에 앉아 있는 차지혜를 발견했다.
“시험은 확인하셨습니까?”
“아직요.”
“확인해 보십시오. 속단할 수는 없지만 크게 어려운 시험은 아닙니다.”
그녀의 말에 나는 석판을 소환해 보았다.
-성명(Name): 김현호
-클래스(Class): 43
-카르마(Karma): +50
-시험(Mission): 제한 시간 동안 아만 제국의 침공에 대비하라.
-제한 시간(Time limit): 729일 23시간
‘침공에 대비하라니.’
범위가 굉장히 넓은 말이었다.
일단은 아렌드 왕국의 국왕 알세르폰 3세로부터 하사받은 영지를 잘 다스려서 군사력을 키워 전쟁을 준비하라는 뜻인 것 같았다.
하지만 영지를 다스리는 차원의 준비도 될 수 있고, 그냥 개인적으로 전쟁에 대비해도 달성하지 못했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저 대비하라는 말은 해석하기 나름이라 어떻게 해도 클리어할 수 있다고 생각되었다.
“달성 미달성이 없는 종류의 시험입니다.”
차지혜가 말했다.
“뭔가 아시는 게 있나요?”
“현호 씨도 전에 겪어보셨지요. 갈색산맥의 엘프들을 도우라는 시험과 함께 제한 시간만 주어졌던 시험 말입니다.”
“네.”
“이번에도 마찬가집니다. 제한 시간으로 주어진 2년간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대비하면 되고, 시험이 종료되면 그게 채점되어서 카르마 보상으로 나타날 겁니다.”
“아, 그게 달성 미달성이 없는 종류의 시험이네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미달성에 가까운 가혹한 채점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고 태만했던 만큼 마이너스 카르마가 주어지는 경우를 들은 적 있습니다.”
“우리야 당연히 최선을 다할 테니 그건 상관없겠네요.”
“물론입니다.”
사실 이번 시험 자체는 문제가 아니었다.
죽기 살기로 싸워야 하는 일도 아니니 무난하게 해낼 수 있겠지.
다만 아까 아기 천사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내가 시험을 전부 클리어하지 못한다면,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걸까?
‘원하는 대로 해줄 거예요. 아레나와 단절되지 않게, 계속 마정을 손에 넣을 수 있게 말이죠.’
대체 저 말의 본뜻이 뭐냔 말이야!
단순히 지금처럼 계속 시험자들이 아레나를 오갈 수 있게 한다는 걸까?
하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율법은 이제 이 시험이라는 것 자체를 끝내려 하고 있어요. 그럼 언제 끝내야 할까요? 그게 바로 당신이에요, 시험자 김현호.’
저 말을 곱씹어보면 내가 시험에 실패하면 이 시험이라는 시스템을 더 이상 유지하지 않겠다고 했으니까.
그럼 시험이 없어졌는데 어떻게 아레나를 계속 오가며 마정을 손에 넣을 수 있게 한다는 거란 말인가.
바로 그 점이 이해되지 않는 것이다.
내가 정말 걱정되는 건 자칫 나 같은 시험자뿐만 아니라 현실세계 전체가 위험에 처하는 건 아닐까 우려된다.
내 가족들까지 위험에 처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꼬옥.
문득 손에서 따스한 온기가 느껴졌다.
차지혜가 내 손을 잡은 것이었다.
“천사의 말이 걱정됩니까?”
“……네.”
나는 솔직하게 시인했다.
“염려 마십시오.”
“네?”
“어쨌거나 시험을 전부 클리어하면 됩니다. 실패했을 때의 일 따윈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렇겠죠?”
“기필코 시험을 클리어할 수 있도록 할 겁니다. 제가 그렇게 만들 겁니다.”
그녀는 특유의 무표정으로 분명하게 말했다.
“시험을 전부 클리어할 겁니다. 이 시험의 굴레에서 함께 해방되고서, 현호 씨의 아내가 되어 살고 싶습니다. 현호 씨와 현호 씨의 가족들과 한가족이 되고 싶습니다. 그게 지금까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던 제 소원입니다.”
“그게…… 소원이라고요?”
“예.”
“정말이죠?”
“정말입니다.”
나는 맞잡고 있던 차지혜의 손을 끌어당겨 그녀를 품에 안았다.
가슴 속에 응어리졌던 불안함이 사라지고 행복한 기분이 샘솟았다.
역설적이지만, 죽어서 시험자가 된 것이 나에게는 행운이었다고 생각된다. 적어도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말이다.
***
유지수와 차진혁이 건네준 손수건을 가공간에서 꺼냈다.
그리고 첫째와 둘째에게 냄새를 맡게 했다.
“누구의 냄새인지 기억했지?”
“삐익!”
“삑!”
“찾아갈 수 있겠니?”
“삐이익!”
첫째와 둘째 부부는 고개를 끄덕였다.
휴우, 동물추적 스킬은 처음 써봤는데 이렇게 하는 게 맞는 거였군. 생각보다 간단해서 다행이다.
“좋아, 그럼 두 사람을 태워서 이리로 데려와. 되도록 높게 날아서 이동 중에 사람들 눈에 띄지 말고.”
“삐이익!”
“삐이익!”
첫째와 둘째는 힘찬 대답과 함께 대지를 박찼다. 거침없이 날갯짓하며 거대한 덩치에 믿겨지지 않게 빠르게 하늘로 비상했다.
이제 조만간 두 사람을 볼 수 있겠지.
며칠 내내 갈큇발 독수리를 타고 날아오려면 고생들 좀 하겠어.
그동안 나는 차지혜, 오딘과 함께 울펜부르크 백작가에서 머물기로 했다.
마리는 또 다른 시험이 있어서 아쉽지만 금방 작별해야 했다.
“나도 전쟁에 대비하라는 시험을 받았소. 아마도 출세해서 영주의 지위를 갖고 있는 시험자는 모두 이 같은 시험이 나왔을 것이라 생각되오.”
“확실하게 아만 제국과의 전쟁이 발발한다는 뜻이네요.”
“그렇소. 두 분은 이곳에 머무는 동안 영지 업무가 어떤지 날 보고 배우도록 하시오. 내가 썩 훌륭한 영주는 아니어도 그럭저럭 어디 가서 욕먹지는 않소, 하하.”
그래서 나와 차지혜는 마치 수행원이 된 것처럼 오딘을 쫓아다녔는데, 정말로 오딘은 간혹 가다 우리에게 심부름을 시켰다. 간단한 일은 직접 해보면서 익히라는 배려였다.
그렇게 곁에서 지켜보면서 나는 오딘의 카리스마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사람을 잘 다루는 걸 보면 나와는 다른 리더형 인간이구나 싶었다.
내가 오딘처럼 아랫사람을 능숙하게 다룰 수 있을까?
……무리일 것 같은데.
이 나이까지 공무원 시험 준비 하며 지낸 나에게 리더의 자질이 숨겨져 있었다고는 전혀 생각되지 않거든!
그 부분에 있어서는 차지혜를 믿기로 했다. 군인 출신인 그녀는 그런 면에 매우 특화되어 있으니까.
그렇게 나흘쯤 지났을 때, 마침내 기다리던 사람들이 도착했다.
유지수와 차진혁이었다.
“으아아!”
첫째 위에서 뛰어내린 유지수는 비명을 지르며 기지개를 켰다.
“아오, 머리에서 냄새 완전 대박! 오는 내내 씻지도 못하고!”
“휴우, 죽는 줄 알았군. 대체 뭐라고 명령을 했기에 독수리들이 오는 내내 조금도 쉬지 않아?”
차진혁의 불평에 나는 에헤헤 웃으며 넉살 좋게 답했다.
“깜빡했어요. 잠시 쉬었다 오라고 일일이 명령을 내리지는 않았거든요.”
두 사람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날 노려보았다.
“어쨌든 일찍 왔으니 잘됐습니다.”
차지혜가 한마디로 간단히 정리해 버리자 울컥한 두 사람이었다. 하지만 도움받는 입장이라 더는 뭐라 투덜거리지 못하는 눈치였다.
나는 두 사람에게 인공근육슈트와 교신기를 건네주었다.
다음 날, 우리 넷은 울펜부르크 백작가를 떠났다.
마침내 내 영지로 향하는 것이었다.
“또 독수리를 타고 가야 하는 거야?”
유지수가 울상이 되었다.
체력보정을 습득하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마법사라 체력이 약한 그녀는 독수리를 타고 하루 종일 이동하는 것을 부담스러워했다.
나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마세요. 곧 좋은 걸 태워 드릴게요.”
우리는 함께 독수리를 타고 가다가 사람이 없는 지역으로 이르자 가공간에서 자동차를 꺼냈다.
마정으로 움직이는 슈퍼카 MSM-2였다.
“으, 으와아! 그게 뭐야?!”
“자동차?! 한 번도 본 적 없는 종륜데? 아니, 그보다 아레나에서 자동차?!”
유지수와 차진혁은 그야말로 기절초풍하며 내 애마를 바라보았다.
특히 차진혁은 보닛을 열어보기도 하며 감탄을 거듭했다. 그러고 보니 차진혁은 시험자가 되기 전에는 자동차 정비사였다고 했지.
차는 2인승이었으므로 넷 중 둘은 독수리를 타거나 천장 위에 타고 가야 했다.
차진혁은 자기가 운전을 해보고 싶다고 나섰고, 유지수도 절대로 시트에 앉아 편히 가고 싶다고 뻗댔다.
그런데 옆에서 차지혜가 슬쩍 내 옆구리를 찌르며 말했다.
“두 사람을 가공간에 넣어버리십시오. 영지에 도착하면 꺼내면 됩니다.”
“아, 그런 방법이 있었네요.”
마스터한 가공간은 생명체를 수납할 수 있으니 당연히 사람도 본인의 동의하에 가능했다. 이미 차지혜와 실험을 해본 결과였다.
“그런 아이디어를 생각하시다니, 어지간히도 운전을 하고 싶으셨나 보네요.”
“아레나가 아니면 탈 기회가 많지 않으니까요.”
차지혜는 순순히 인정했다.
나는 두 사람에게 가공간의 특별한 능력에 대해 설명했다.
“우릴 가공간에 넣겠다고? 그게 가능해?”
유지수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동의를 하시면 넣을 수 있어요. 도착하면 다시 꺼내면 되고요.”
“그거 건강이나 뭐나 문제없는 거야? 그 안에서 나 아무것도 못하고 갇혀 있는 건 아니고?”
“가공간 안에서는 시간이 흐르지 않아요. 눈 깜짝할 사이에 도착해 있을 거예요.”
“진짜? 그럼 동의할게. 날 가공간에 집어넣어줘.”
“네.”
난 유지수의 손을 잡고 ‘넣어’라고 명령을 내렸다.
파앗!
유지수의 신형이 사라져 버렸다.
나는 이어서 차진혁에게 손짓했다. 차진혁은 못내 불안한 기색이었다.
“괜찮은 거 맞나 모르겠군.”
“걱정 말고 빨리 와요.”
나는 결국 차진혁까지 가공간에 수납해버렸다.
차지혜는 운전석을 차지했다.
내가 보조석에 타자 곧장 시동을 걸고 엑셀을 밟았다.
마치 이 날을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는 신나게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
헤인스 영지.
갈색 산맥과 울펜부르크 영지, 그리고 옛 바스티앙 영지 사이에 낀 지역이었다.
오랫동안 헤인스 자작가가 지배했던 곳이기에 이미 헤인스 영지라고 불린 지가 백여 년이 넘었다고 한다.
이젠 킴 백작, 즉 나의 영지가 되었지만 지명은 그냥 헤인스 영지로 놔두기로 했다. 킴 영지라고 하면 좀 이상하잖아?
아무튼 우리는 헤인스 영지에 도착했다.
들판에서는 MSM-2를 타고 달리고, 험한 산지에서는 갈큇발 독수리를 타며 거침없이 달려서 불과 사흘 만에 도착한 것이었다.
더 일찍 도착할 수도 있었지만 차지혜와 단둘이 오붓하게 있고 싶어서 여유롭게 이동했다.
청혼과도 같은 차지혜의 말 이후로 우리 사이는 더 각별해졌다.
옆에 그녀가 있는 것만 봐도 안심이 되고 마냥 좋으니, 이거 정말 내가 미쳤구나 싶을 정도였다.
헤인스 영지에 도착해서 사람 사는 지역에 이르자 우리는 MSM-2를 가공간에 집어넣고 독수리를 타고 이동했다.
태블릿PC를 꺼내 내장된 아레나 지도를 확인하며 비행하자 금방 헤인스 자작가의 성채를 찾을 수 있었다.
이젠 킴 백작가라 불리게 될 성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