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레나, 이계사냥기 181화
무료소설 아레나, 이계사냥기: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29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아레나, 이계사냥기 181화
“정말 죄송합니다.”
데이나가 우리를 불러놓고 사과를 했다.
대충 사정을 들을 수 있었다.
데이나는 지하궁전을 탈출하기 전에 심연의 구슬을 남겨두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줄곧 감시를 해오다가 카자드 푼 아만의 부활을 감지했다.
“거기서 멈췄어야 했습니다. 부활했다는 사실만 확인한 뒤에 심연의 구슬 교신을 끊었어야 했습니다.”
어쩔 수 없는 호기심이었으리라.
데이나 리트린은 시험의 최종목적인 카자드 푼 아만에게 궁금증이 들었던 것이다.
재래 결사대에 잠입하여 5년간 대사제 노릇까지 할 정도로 배짱 두둑한 남자이니 말이다.
그런데 그만 카자드 푼 아만도 그 구슬을 통해 데이나를 보고 말았다.
“말도 안 되는 괴물이었습니다. 심연의 구슬을 본 순간, 술식을 순식간에 역산해서 제 위치를 알아냈습니다. 그게 얼마나 터무니없는 일인지 상상이 가십니까?”
“잘 모르겠지만 엄청난 수학 문제를 암산으로 풀어버리는 것 같은 건가요?”
“비슷합니다. 아무튼 갈색산맥이라는 말이 언급된 후에, 카자드의 생각이 엘프로 미쳤습니다. 생명의 나무를 몹시 탐내는 눈치였던 걸 보면, 머지않아 이곳을 노릴 테지요.”
“니체의 명언 같네요.”
괴물의 심연을 들여다보면 심연도 너를 본다, 뭐 그런 말. 하필이면 마법 이름도 심연의 구슬 아닌가.
내 가벼운 농담에 데이나는 한숨을 쉬었다. 늘 싱그럽게 웃고 있던 그에게서 처음 보는 우울한 표정이었다.
“니체의 ‘선악의 저편’에 나오는 말이로군요. 정말로 제가 괴물의 심연을 봐 버렸습니다. 아무튼 폐를 끼쳐서 죄송하게 됐습니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딱히 운명론자가 아니지만, 시험을 하도 겪다 보니 이제 이런 상황조차도 율법의 안배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딱히 데이나 리트린에게 원망이 들지는 않았다. 어차피 이렇게 될 일이었으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어차피 카자드가 생명의 나무를 탐내고 있었다면 리트린 씨가 아니더라도 결국 이쪽을 타깃으로 정할 수밖에 없었어요.”
갈색산맥은 이 아레나 세계에서 가장 엘프들이 번성한 곳이었다.
뭐, 내 덕분이라고 할 수 있지. 왜냐면 내가 생명의 나무를 세 그루나 잘 자라게 만들어줬으니까.
그때, 잠자코 있던 차지혜가 입을 열었다.
“누구의 실책인지는 중요치 않습니다. 그보다는 왜 카자드 푼 아만이 생명의 나무를 탐내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야 영혼의 파편을 얻고 싶어 하니까 가장 풍부한 생명력을 품은 생명의 나무를…….”
말하다 말고 나는 말끝을 흐렸다.
“영혼의 파편을 모으던 목적이었던 카자드 푼 아만의 부활은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왜 그가 영혼의 파편을 탐내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듣고 보니 그러네요. 리트린 씨는 뭔가 짐작 가는 게 없으세요?”
내가 물었다.
데이나는 곰곰이 생각해 보다가 말했다.
“확실히 말씀드릴 수는 없었지만, 심연의 구슬을 통해 마주했던 카자드 푼 아만은 어쩐지 정신적으로 멀쩡한 상태 같지가 않았습니다.”
그 말에 나는 가짜 영혼을 주입받아 부활했던 헤이싱 등이 떠올랐다.
“혹시 가짜 영혼으로 부활한 언데드들처럼?”
“아닙니다. 이성과 판단력은 확고했습니다. 하지만 재래 결사대에서 전해졌던 완전한 통치자의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완전한 통치자요?”
“늙지도 죽지도 않고 인간의 모든 욕망으로부터도 자유로워져 오직 이성으로서 세상을 다스리는 군주입니다. 유지에 따르면 카자드는 부활하여 그런 군주가 되고자 했습니다.”
소름 끼치는군. 생각하는 스케일이 엄청나다.
“하지만 심연의 구슬을 통해 본 그는 무엇보다 큰 욕망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말투며 눈빛이며, 재래 결사대가 생각한 그런 사람이 전혀 아니었지요.”
“뭔가 문제가 생긴 걸까요?”
“그렇겠지요. 육각형 방에서 나온 사람은 술탄 사록과 카자드 두 명뿐. 대사제들은 뭔가 잘못된 모양이었습니다. 카자드의 두 손은 피투성이였고요. 그 점만 봐도 큰 문제가 생겼다고 봐야겠지요.”
부활하자마자 대사제들을 살해한 건가. 마치 악마가 봉인에서 깨어난 것처럼 말이다.
“짐작 가는 구석은 있습니다. 부활의 의식은 카자드가 생전에 남긴 유지대로 치러지지 않았을 겁니다. 보다 적은 양의 영혼력으로 치러지는 바람에 그 부작용으로 생명력을 탐하는 게 아닐까 추측됩니다.”
“생명력을 탐한다면…….”
나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데이나가 말했다.
“살아 있는 생명체를 전부 탐하겠지요. 굶주린 짐승이 다른 짐승을 잡아먹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 말에 분위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그건 말 그대로 악마잖아요.”
“그래서 이 시험이 생긴 것인지도 모르지요. 어쨌든 이 사실을 최대한 빨리 모든 시험자에게 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겠네요. 일단 오딘 씨에게 먼저 연락해 볼게요.”
나는 가공간에서 교신기를 꺼냈다.
교신기를 처음 본 데이나는 놀란 얼굴이 되었다.
“그게 뭡니까?”
“교신기요.”
“그건 전자기기가 아닙니까?”
“맞아요. 제 가공간 스킬의 또 다른 기능이죠. 대륙 곳곳에 전파송수신기를 설치해 놔서 어디서든 서로 연락할 수 있죠.”
이제 시험도 거의 끝에 다다랐다.
끝판왕 격인 카자드 푼 아만이 부활한 마당에 더 이상 숨길 필요가 없었다.
“그런 스킬을 숨기고 계셨군요. 그럼 다른 전자기기도 가져오셨습니까?”
“노트북이나 스마트폰도 가져왔죠. 아, MSM-2도 가져왔죠. 그거 맥런 연구소에서 개발한 자동차죠?”
“하하, 정말 놀랍군요. 미국에서는 수많은 시도를 했는데도 실패했는데 말입니다.”
놀란 얼굴의 데이나를 뒤로 하고 나는 오딘에게 교신을 걸었다.
-그렇지 않아도 연락하려 했소.
오딘은 받자마자 그렇게 말했다. 그도 어느 정도 입수한 정보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내가 먼저 선수를 쳤다.
“카자드 푼 아만이 부활했어요.”
-뭐라고?! 그게 정말이오?
“어라? 모르셨나 봐요?”
-내가 말하려 했던 건 아만 제국군의 동향이었소. 세이란 왕국을 점령한 아만 제국군이 일제히 서쪽으로 진군을 시작해 모두가 긴장하고 있소.
“서쪽이면 우리를 향하는 것 맞죠?”
-그렇소. 지금 전쟁이 벌어지기 일촉즉발이오. 그런데 카자드 푼 아만이 부활했다니 그게 무슨 말이오?
나는 데이나의 이야기를 요약해서 들려주었다.
-일이 심각하군. 그럼 시험의 끝이 머지않았다는 뜻이구려.
“그러게요.”
-어째서 아만 제국군이 이상 행동을 하는지 이제야 설명이 되는군. 아무래도 카자드는 생명의 나무를 얻기 위해 무리한 전쟁을 다시 벌일 것 같소.
“어쩌면 다음 시험이 마지막일 수도 있겠어요. 카자드가 직접 이곳에 들이닥친다면 말이죠.”
최종보스인 카자드 푼 아만을 처치한다면 모든 시험이 끝나지 않을까 추측이 들었다.
-그럴 수도 있겠소. 아무튼 그건 나중에 생각해 봅시다. 일단 이번 시험은 곧 종료되니 말이오.
“예.”
-아무튼 좋은 정보 고맙소. 노르딕 시험단의 모두에게 알려야겠소.
그렇게 교신이 종료되었다.
나는 또한 갈색산맥의 엘프들에게도 연락을 취해 위험을 알렸다.
시험의 제한 시간이 20일 남았을 때 벌어진 일이었다.
***
유지수와 차진혁도 시험을 클리어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오딘의 소식통에 의하면, 아렌드 왕국 중앙 정계는 북부 국경을 지키던 변경백 센델스 백작이 아만 제국과 내통한 사실이 드러나 난리도 아니라고 했다.
대대적인 조사에 착수되면서 센델스 백작은 물론이고 국왕 알세르폰 3세의 이복동생 콘월 공작까지 반역 모의를 한 사실이 드러나 숙청을 당했다.
유지수 팀이 시험을 클리어하면서 이어진 결과였다.
그러한 일들이 벌어지면서 아만 제국의 침공에 대한 경계가 고조되었다.
그렇게 남은 제한 시간 2년이 모두 흐르고, 우리는 시험의 문을 통과했다.
“어서 오세요!”
아기 천사가 우리를 반겼다.
“좀 귀엽게 생긴 놈이 반겨주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그렇게 투덜거리자 아기 천사가 낄낄거렸다.
“에이, 그런 말씀 마세요. 이제 이렇게 만나는 날도 얼마 안 남았는데.”
“뭐?”
역시나 아기 천사는 시험이 끝에 거의 다다랐음을 시사하고 있었다.
‘남은 시험은 어림잡아도 두세 차례밖에 안 남았구나.’
“두세 차례가 아닌데요?”
아기 천사가 내 생각을 읽고서 불쑥 말했다.
“무슨 뜻이야?”
“그렇게 많이 남았다고 생각하세요?”
그러면서 빙글빙글 웃는 아기 천사.
두세 차례가 ‘그렇게 많이’라니. 그렇다면……!
“현호 씨, 석판을 확인해 보십시오.”
“예, 석판 소환!”
석판이 눈앞에 나타났다.
-성명(Name): 김현호
-클래스(Class): 46
-카르마(Karma): +15,750
-시험(Mission): 마지막 휴식을 취하라.
-제한 시간(Time limit): 90일
짧고 강렬한 글귀.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하지만 분명히 ‘마지막 휴식’이라고 쓰여 있었다.
“마, 마지막?”
“예, 마지막이에요.”
“다음 시험에서 모든 게 끝난다고?”
“네.”
“만약 내가 클리어 못하고 돌아온다면?”
“제가 전에도 말씀드렸을 텐데요. 원하는 대로 해주겠다고요.”
그러자 아기 천사가 전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
‘시험자로 선택받은 인간은 시험을 끝까지 완수할 의지가 없는 것으로 간주할 거예요. 마정을 계속 얻을 수 있기를 원하고, 아레나와 단절되지 않기를 원하는 것으로 판단할 거예요.’
“계속 마정을 얻을 수 있고, 아레나와 단절되지 않게 해준다고?”
“그래요.”
“그 말만 갖고는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잖아!”
내가 버럭 화를 냈다.
내게는 아주 절실한 문제인데 속 시원하게 설명해 주지 않는 태도가 열 받는다.
“말 그대로인데.”
아기 천사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레나에서 지내면서 궁금한 게 많지 않던가요?”
“뭐가?”
“어째서 여러분이 살던 세계와 천체(天體)의 위치가 똑같을까요? 어째서 중력도 지구와 똑같을까요?”
“…….”
“여러분의 세계와 아레나, 두 개를 한 데 포개면 데칼코마니처럼 딱 맞아 떨어질 것 같지 않나요?”
“뭐, 뭐라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두 세계를 하나로 포개?
“물론 사소한 차이점도 있긴 하겠죠. 예를 들면 지구에는 없는 종족이라든지, 난폭한 괴물이라든지, 사회체제와 문명이 전혀 다른 사람들이라든지, 마법과 흑마법이라든지…….”
심장이 쿵쾅거리며 요동쳤다.
“좀 혼란이 일긴 하겠네요. 하지만 괜찮을 거예요. 그게 여러분이 원한 거잖아요? 그걸 선택했으니 선택대로 이루어질 뿐이죠.”
“그 선택의 기준은…….”
“예, 시험자 김현호, 당신이에요.”
나는 그만 멍해져서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아레나에 서식하는 괴물들이 내 가족들이 사는 지구에 나타난다고 생각하니 아찔할 따름이었다.
심지어는 카자드 푼 아만 같은 놈도 현실세계에 나타나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모든 시험자에게 통보될 거예요.”
그리고 시험의 문이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