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했더니 검신이었다 3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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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58회 작성일소설 읽기 : 회귀했더니 검신이었다 33화
출사표
잘게 부서진 바위.
그것을 바라보는 하성운의 눈에 한동안 초점이 풀려 있었다. 세상을 다 가진 양 환희에 젖었던 얼굴이야 진즉에 사라져 있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그는 약지에 묻은 바위의 부스러기를 슥슥 털어내는 무신을 보며 난데없이 허리를 숙였다.
고개가 아니라 정말 허리를.
“무례했던 날 용서하시오, 최 소협.”
가만 놔두면 아예 엎드려 머리를 박을 것 같은 하성운을 무신이 일으켜 세웠다.
그러나 하성운은 차마 고개까지 들지는 못했다.
“내 뭐 잘난 게 있다고 우쭐했는지 모르겠소.”
잘나기도 잘났고 그래서 충분히 우쭐할 만한 실력이었다.
다만, 상대를 잘못 만났을 뿐.
하성운이 낙심한 얼굴로 힘없이 말을 이어갔다.
“최 소협에게 내공이 달리니 외공으로라도 이겨야겠단 조바심 같은 게 들었소. 헌데 이 정도일 줄은… 쥐구멍이라도 좋으니 어디 숨고 싶구려.”
“뭘 그리 신경 쓰시오?”
무신이 그새 축 쳐진 하성운의 어깨를 두드렸다.
“사나이라면 다 제 힘자랑 한 번쯤 해보고 싶은 것을. 괜히 마음 쓰지 마시오.”
위로랍시고 던진 말이 외려 하성운을 더 나락으로 빠뜨린 모양이었다.
그의 얼굴이 낙심을 넘어 거의 절망에 젖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최 소협 같은 고수에게 덤벼들다니. 어떤 의미에선 수치요, 수치.”
“…….”
“심정 같아선 당장 깊은 산골짜기에 올라가 한 백 일 정도 반성하고 싶소.”
“…….”
“아니지. 아니야. 이건 반성으로도 모자라오.”
“…….”
“차라리 날 한 대 후려쳐 주시오. 그래야 조금이라도 속죄하는 마음이 들 것 같구려.”
내공 좀 몇 번 운용하고 바위 좀 부순 것에 이 정도 반응을 보이는데, 만약 검강을 펼쳤다면 어땠을까.
생각만으로도 끔찍했다.
그러나 하성운의 태도를 나쁘게 볼 것만은 또 아니었다.
그만큼 상대를 인정한다는 것.
그것은 높이 살 만했다.
‘상대가 자신보다 낫다는 걸 인정하지 못하면 절대 강해질 수 없지.’
강호의 법칙.
그리고 곧 불변의 법칙이었다.
허세에만 가득 차 보이는 하성운도 실상은 여느 무인처럼 무도를 걷고 있는 것이다.
급기야…….
“나는 이제부터 최 소협을 스승처럼 생각하겠소.”
장차 화열권이라 불리게 될 사나이의 입에서 그러한 말까지 튀어 나왔으니 더 말해봐야 입만 아팠다.
그렇게 나흘.
높다란 기슭 몇 개와 기나긴 초원을 넘어 비로소 도착했다.
강호(江湖).
그러나 강호라 하여 무슨 공간 이동을 하는 등 거창한 입장을 하는 게 아니었다.
그저 중원의 일부.
굳이 구분 짓자면 파천이나 구동, 혹은 새외무림을 제외한 ‘무인들의 세계’였다.
강호에 들어선다 함은 거기에 출사표를 던지는 것이고.
물론, 무신의 시선에서만 그러했다.
신출내기 하성운의 시선에서는 그 몇 발자국이 얼떨떨하고 신기한 일이었다.
“이제부터 진짜 무도가 시작되는구려.”
진짜 무도.
과한 반응이라고도 볼 수 있겠으나 무신은 외려 동감했다. 그 역시 회귀 전에는 저처럼 사방팔방으로 고개를 두리번거렸기 때문이었다.
하성운이 ‘하북’이라 적힌 팻말을 보며 말했다.
“나는 저곳으로 갈 것이오.”
당연한 수순이었다.
검을 쫓는 자가 안휘성으로 가듯 권을 쫓는 자는 하북으로 가는 게 강호무도의 정석.
물론 정석일 뿐이지 쉬운 일은 아니었다. 채 석 달도 못 버티고 도망치는 자들이 부지기수였다.
권법이란 게 워낙 거칠고 또…….
“자칫 신체가 망가질 수도 있다 하오”
“그것 참 고행이군.”
“허나 남자라면 고행을 겪어야 강해지는 법 아니겠소?”
남자라면.
하성운이 드디어 그 지긋지긋한 좌절과 우울에서 벗어난 모양이었다.
그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하북을 제패하고 나아가 강호도 그리 해 보이겠소.”
참으로 당찬 포부였다.
그러나.
“내 하북까지만 양보하리다.”
천하제일인은 무신의 자리였다.
한 번 더 치고 나올 거란 예상과는 달리 하성운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최 소협이라면 내 인정할 수 있소.”
정말, 스승처럼 생각하는 것일까.
무신은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났다. 회귀 전에는 쳐다보지도 못했던 자가 자신을 우러러보는 건 아무리 봐도 참 별일이었다.
하성운이 문득 말했다.
“헌데 최 소협.”
“예.”
“약지 하나로 바위를 그리 조각낼 정도이면 권법으로 전향해도 되지 않소? 내 보기엔 당장 지법이나 장법만 배워도 무위가 곱절은 상승할 듯한데.”
하북팽가도 뛰어넘는 무골.
틀린 말은 아니었다. 권법이 아니라 지법이나 장법만 배워도 무위가 곱절은 상승할 것이다.
그러나…….
“약지로 바위도 조각낼 수 있는 자가 주먹을 쓰지 않고 검을 쓰는 이유가 뭐겠소?”
나지막한 무신의 말 한 마디에 하성운이 소리 없는 탄성을 토했다.
참 바보 같은 의문을 던졌다는 듯.
“내가 최 소협에게 얼마나 무모한 짓을 했는지 새삼 또 깨닫게 되오.”
“무인이 무를 내세우려 한 것에 무모하고 무모하지 않고가 어디 있겠소? 그 역시 하나의 무도이리다.”
“그리 말해주니 고맙구려.”
하성운의 눈이 이상하리만치 뻘겋게 달아올랐다. 뜨거운 눈물이라도 한 움큼 쏟을 기세였다.
사나이가 태어나 세 번 울 듯 무인에게도 태어나 세 번 우는 순간이 있었다.
그에겐 그 순간이 바로 지금이었다.
그가 포권을 취했다.
“짧은 만남이었으나 많은 걸 배우고 느끼고 깨달았소. 정말 고맙소, 최 소협.”
이번에는 말릴 새도 없었다. 하성운이 그 자리에서 넙죽 엎드려 절을 한 번 올렸다.
아무렴 무신보다 나이가 더 적다고는 해도 쉬이 할 수 없는 일.
그만큼 무인으로서 무인에게 감복한 것이다.
그렇게 먼저 떠난 하성운을 뒤로하며 무신은 저 멀리 높은 산봉우리 하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우선의 목적지였다.
산동((山東).
북으로는 하북을 끼고 남으로는 안휘성을 끼며 서로는 하남을 끼니 구동과 비슷한 교통의 요충지였다.
비록 오대세가에는 들지 못해도 강호에서 알아주는 가문도 하나 속해 있었다.
산동악가(山東岳家).
창으로서 일가를 이룬 그곳은 악가창법(岳家槍法)이란 특유의 간결하고 빠른 창술로 일대를 제패했다.
팔단금(八段錦)이라 일컬어지는 신법은 웬만한 문파의 비기에도 꿇리지 않을 정도였다.
물론, 무신에겐 거쳐 가는 곳에 불과할 뿐이었다.
‘산동에서 뽑아먹을 것만 뽑아먹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게 상책이야.’
무의미.
검술 쪽으로는 전혀 연관이 없는 곳이다 보니 아무리 발붙여 봤자 더 얻을 게 없었다.
무신은 다시 힘껏 고삐를 당겼다. 육포와 건량이 이미 바닥이었다. 조금 서둘러야 할 것 같았다.
다그닥다그닥!
22만 년 만의 출사표였다.
***
섬서성 연화봉.
화산파가 발칵 뒤집어졌다.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게냐? 소군형이 당했다니!”
***
산동으로 가는 길은 산행의 연속이었다. 말도 더 이상은 안 되겠는지 목이 축 늘어져 있었다. 무신은 그간 고생한 놈의 갈기를 쓰다듬으며 도보를 이용했다.
반나절쯤 갔을까.
그가 대뜸 서서는 파천검을 안장 밑에 집어넣고 옷도 파천의 대신 일반 무복을 입었다. 누가 봐도 노련한 검객이었던 모습이 순식간에 평범한 검객으로 바뀌었다.
그러고는 다시 산행을 이어가는데, 저만치에 웬 여인이 한 명 서 있었다.
“히이잉!”
낯선 이를 보고 놀란 말의 울부짖음에 고개를 두리번거리고 있던 여인이 곧장 반응했다.
이제야 살았다는 듯 반색하며.
“저기……!”
반쯤 손을 들어 조심스레 자신을 알리는 여인에게, 무신이 뜻 모를 미소와 함께 다가갔다.
“무슨 일이십니까?”
“호위 무사들과 산행을 한다는 게 그만 혼자 길을 잃었지 뭐예요.”
“어이구, 저런.”
딱하다는 듯 혀까지 차는 무신을 보며 여인이 살짝 뺨을 붉혔다. 이제 보니 코가 오뚝하고 눈은 고양이처럼 앙칼진 것이 상당한 미인이었다.
그녀가 검지로 그의 팔뚝을 스리슬쩍 스치며 물었다.
“혹, 절 집까지 데려다주실 수 있나요? 산행이다 보니 야밤까지 헤매거나 굶주린 산짐승을 만날 우려가 있어서… 부탁드립니다.”
지나가다 보면 한번 돌아볼 정도의 미녀가 애처로운 얼굴을 하고서 말하는데 어찌 거절할 수 있겠는가.
무신의 대답은 ‘당연히 데려다드리겠습니다’였다.
“집은 어디십니까?”
“저 아래 산동 유씨 집안이라고… 들어보셨나요?”
“아, 예. 들어봤습니다.”
“아버님께서 후한 사례를 해주실 거예요. 후하지 않으면 제가 졸라서라도 받아 드릴게요. 참, 제 이름은 유이주랍니다.”
“최무신입니다.”
“멋진 이름을 가지셨네요.”
유이주가 그러면서 꾸벅 허리를 숙였다. 이렇게 선뜻 도와주셔서 너무 감사하다며.
무신이 별것 아니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무인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입니다. 사례도 괜찮으니 거둬주십시오.”
“무사셨구나. 근데 괜찮다니요! 제가 불편해서라도 꼭 사례는 받으셔야 해요!”
유이주가 절대 안 된다는 듯 힘주어 말하며 바위 하나를 가리켰다. 제법 거리가 있음에도 눈에 띌 만큼 크기가 컸다.
“우선 저리로 가면 될 것 같아요, 무사님.”
“알겠습니다.”
무신은 왼편에 말을 두고 유이주와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그녀가 은근슬쩍 그의 손등을 어루만지며 물었다.
“무사님은 어떤 무구를 쓰시나요?”
“검을 쓰고 있습니다.”
“검이요?”
무신이 안장 밑에서 검병만 살짝 삐져나온 파천검을 가리켰다.
그렇게만 보니 얼핏 평범한 검으로 보였다.
“근데 검을 왜 안장 밑에 넣어두세요?”
“산행이 길어지니 검 하나 드는 것도 일이더군요.”
“아아.”
검객이 목숨만큼 귀하게 여기는 게 검이란 것이다.
조금만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소리임을 알 수 있으나 유이주는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눈치였다.
그녀가 이번에는 무신의 허리춤을 살살 매만지며 물었다.
“그럼 다른 무구는 전혀 없으신 거예요?”
“예.”
“보호대 같은 것두요?”
“없습니다.”
“막 단검 같은 거 찔리시면 어떡해요? 막을 수단이 전혀 없는데.”
“별수 없이 당해야지요, 뭐.”
별의 별 질문을 꼬치꼬치 캐묻는 유이주에게, 무신은 귀찮은 내색 없이 하나하나 다 답했다.
그녀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어쨌든 무사님 덕에 안심이 되네요. 집까지 무사히 갈 수 있겠어요.”
“이리 아름다운 분에게 흠집이 나면 안 되지요. 털끝 하나 안 다치게 해드리겠습니다.”
무신이 아주 간이고 쓸개고 다 내줄 듯한 반응을 보이는 사이 어느덧 바위가 가까워져 있었다. 윗부분이 넓적해서 옷감이든 뭐든 패대기치기 좋을 것 같았다.
바로 그때.
양쪽에서 검과 도끼 따위를 든 도적들이 튀어나왔다.
“말에 큼지막한 배낭까지! 오늘 하루 죽쳤는데 드디어 한 건 올리는구나!”
수염을 덕지덕지 기른 도적 하나가 그렇게 소리쳤다. 무리의 우두머리인 듯싶었다.
무신은 아무렇지 않게 그와 그 무리를 바라보았다.
갑작스러운 적.
그러나 우선의 적은 저 도적들이 아니었다.
“어, 어떡해요, 무사님! 도적들이 나타났…….”
무신은 유이주의 머리채를 잡아다 그대로 바위에 처박았다. 바위도 부술 힘을 바위에 처박았으니 결과야 뻔했다. 수박 쪼개지듯 안면이 뚝 갈라졌다.
그녀가 흉측하게 터진 얼굴을 만지지도 못하고 껙껙 괴성을 질러댔다. 오른손에 쥐고 있던 단검이야 이미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회귀 전, 그의 복부를 찔렀던 바로 그 단검이었다.
그는 비로소 연극을 끝냈다.
처음부터 유이주란 이름은 사칭이었고 그저 저 도적들과 한통속이었던 것을 다시 한번 되새기며.
“기척만 잡아도 니들 잡는 건 일도 아니지만, 내가 굳이 그 수고를 할 필요는 없잖아?”
파천검과 파천의를 착용하고 있었다면 아마 도적들은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도적들도 보는 눈이 있으니까.
물론 기운도 한껏 눌렀다.
사실은 행색보다도 그게 더 중요했다. 바보가 아니고서야 내공을 가진 무인에게 달려들 위인은 없기 때문이었다.
당최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얼이 빠져 있는 도적들에게, 무신이 성큼성큼 다가갔다.
구보전답.
그리고 암향표.
그들이 도망칠 구석이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