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했더니 검신이었다 4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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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18회 작성일소설 읽기 : 회귀했더니 검신이었다 44화
유명세
“맨입이라고 하시는 게…….”
제 목숨이 걸려 있기 때문인지 염라의 어투는 상당히 조심스러웠다. 그 시뻘건 안광에 어울리지 않게 양쪽 관자놀이에서 삐질삐질 식은땀까지 흘리고 있었다.
유림은 그저 팔짱을 낀 채 잠자코 지켜보고 있었다. 관여치 않을 모양이었다.
염라가 그 큰 체구를 반쯤 굽히고서 다시 물었다.
“어떤 요구 조건이 있으십니까?”
“예.”
“그… 이런 말씀드리기 죄송하오나 위대한 존재와 저희의 사이에는 이승과 저승의 관계가 있어 대부분은 들어드리기 힘들 겁니다.”
불로불사의 능력을 얻게 해달라.
누굴 살려달라.
목숨을 한 개 더 내달라.
무신도 그러한 터무니없는 말을 꺼내려는 게 아니었다.
그의 조건은 사실 매우 간단했다.
“저들의 영구 소멸이 풀리는 즉시.”
그는 입꼬리를 길게 말아 올렸다.
“지옥으로 보내십시오.”
“예?!”
“내 그래야 속이 시원하겠어.”
산동 평야에서의 일 하나 때문에 어찌 지옥으로까지 보내겠느냐마는, 저들에 대한 원한이야 회귀 전부터 수십 개는 가뿐이 넘는다.
혈교.
거기에 속한 이상 죽음도 편히 주어선 아니될 것이다.
무신은 염라가 무어라 답을 하기 전에 먼저 치고 들어갔다.
“충분히 가능하죠? 지옥으로 보내는 것이야 오로지 저승 안에서만 벌어지는 일이니.”
“그야 그렇습니다만…….”
염라가 우선은 긍정하면서도 어렵다는 기색을 내비쳤다.
“위대한 존재께서 그리 말씀하신다 함은 저들이 그만큼 사악한 놈들이란 뜻이겠으나 망령의 안위는 모두 심판이 결정합니다. 누구 한 명의 잣대로 정하는 건 저승의 법도에 어긋납니다.”
법도.
그게 걸려 있다면야 무신도 억지를 부리긴 싫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예?”
무신이 의외로 쉽게 물러서자 외려 염라가 더 당황한 눈치를 보였다.
무신은 돌아서며 말했다.
“그럼 영구 소멸을 해제하는 권한은 양도하지 않겠습니다.”
“양도하지 않으시겠다니요?”
법도를 지키면서 무언갈 주면 무언갈 받겠단 철칙도 지키겠다는 것.
지금 무신이 하려는 말의 요점이었다.
“아, 아니, 영구 소멸을 풀어주시지 않으면 제가 죽습니다!”
“예.”
“예?”
“명복 빌어드리겠습니다, 염라여.”
무신은 굳이 염라를 죽이고 싶지는 않았다. 저승에 괜한 혼란이 야기되어 종국에는 자신에게도 피해가 올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이렇게 하는 이유는…….
“싹 다 저승으로 보내면 됩니까?”
염라가 알아서 저승의 법도를 내려놓았다. 죽음의 문턱 앞에선 그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무신은 ‘저와 같은 생각을 하셨던 모양이군요. 진즉에 말씀하시지 않고’ 하며 흡족하다는 듯 웃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유림에게 영구 소멸에 대한 권한을 양도했다.
“지, 지옥이라니요!”
칠십혈천대와 무기창이 심판을 듣고 울부짖었으나 아무 소용없었다. 그들을 보내지 않으면 자신이 죽는단 두려움 앞에서 염라는 외려 무신보다 더 단호했다. 가차 없이 지옥의 문을 열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화염이라 해야 할까.
아니면 뜨거운 안개라고 해야 할까.
난생처음 보는 광경에 무신의 입이 저도 모르게 벌어졌다. 어떤 의미에선 장관이었다.
호기심이 강한 성격이었다면 한번 들어가 보고 싶을 만큼.
그는 유림에게 물었다.
“지옥은 어떤 곳입니까?”
“어떤 곳이라… 차라리 영구 소멸되는 게 나았다고 느낄 것이다.”
그는 흠칫 놀라며 그 이상 묻지 않았다. 더 깊이 알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이번에는 유림이 물었다.
“저들은 그대에게 어떤 존재였지?”
“회귀 전에 갖가지 치욕을 주었습니다.”
“그 치욕이 저들에게 지옥이란 최악의 결말을 선사했구나.”
그런대로 수긍하는 듯한 유림에게 무신은 한 가지 이유를 더 덧붙였다.
실상 그게 진짜 이유였다.
칠십혈천대와 무기창을 지옥으로 보낸.
“저들은 시체를 잡아다 강시로 만듭니다.”
“강시?”
“살아 있는 인형이랄까요. 주술을 걸어 시체가 움직이도록 합니다.”
유림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죽은 자를 살린단 말이냐?”
“그와는 조금 다릅니다. 감정을 못 느끼며 감각도 없습니다. 생명체의 개념은 아니지요.”
“육신의 주인에겐 죽어서도 눈을 못 감는 심정이겠구나.”
“예.”
“그런 극악무도한 일을 저질렀다면 아마 그대의 부탁이 아니었더라도 지옥행 판결을 받았을 것이다.”
유림이 ‘하지만’ 하고 말을 이어갔다.
“죄를 뉘우쳤단 명목으로 나중에 회생의 기회를 받을 수도 있겠지. 그런고로 그대의 선택이 무의미하게 돌아간 건 아니다. 권한을 포기하며 건 조건이니 어떤 경우에서도 회생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는다.”
회생의 기회마저 사라진다는 것.
새삼 또 ‘권한’이란 게 저승에서 얼마나 중요시 되는지 깨닫는 순간이었다. 무신은 이걸 잘만 이용하면 짭짤한 이득을 취할 수 있을 것 같단 느낌이 들었다. 언제고 다시 유림의 검이 가동됐을 때 영구 소멸 해제를 빌미로 염라를 협박해… 어쩌면 명부를 고치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한 수천 명을 떼로 죽여 버린다면 말이다.
행복한 상상에 젖어 있는 그에게 유림이 물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하지?”
“아닙니다.”
“싱거운 녀석.”
녀석.
혓바닥 안에서 굴려지는 발음이 다른 단어와 별 차이가 없음에도 묘하게 자극되는 게 있었다. 만약 ‘낭군님’이란 말을 들으면 어떨까. 무신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망상 정도가 아니라 그냥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유림이 ‘너희들은 그만 자리로 돌아가거라’ 하고 염라와 저승 관계자들을 보내며 무신을 쳐다보았다.
“저승에 온 소감이 어떻느냐?”
“솔직히 말씀드리면 놀랍거나 특별하지는 않습니다.”
무신의 대답에 의아해하던 유림이 이내 알겠다는 듯 반응했다.
“그럴 수밖에 없겠구나. 이미 한번 경험했으니.”
“예.”
“자, 그럼…….”
유림이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죽림에서 보았던 그 시꺼먼 구멍이 생겨났다.
가야 할 때가 온 것이다.
“그대와 더 얘기를 나누고 싶지만 이승에서 저승을 오가는 건 섭리에 어긋나는 일이다. 얼른 돌아가는 편이 좋아.”
“알겠습니다.”
유림에 대한 아쉬움 정도라면 모를까 저승에 대한 미련은 없었다. 애초에 운운하는 것도 우스웠다. 멀쩡히 산 자가 뭐 하러 죽은 자의 온기를 느끼겠는가. 무신은 ‘어차피 오고자 하면 언젠가 또 올 수도 있을 테지’ 하고 남몰래 웃었다.
그녀가 그와 눈을 마주했다.
“또 보자꾸나.”
미처 작별의 인사를 하기도 전에, 그는 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녀에게서 그날의 그 의미심장한 말을 들으며.
***
죽림.
마치 긴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주위를 살피던 무신은 한참이 지나서야 그곳임을 알아챘다. 이상하리만치 몸이 무거웠다. 어깨에 커다란 철근이 얹어진 것 같았다. 그러나 아무리 무거워봐야 이승과 저승을 오가는 무게만 하겠는가.
그는 이내 홀가분해져서 나무 밑동에 세워둔 배낭을 열었다. 육포가 아직 열흘 치도 더 남아 있었다. 개중 하날 꺼내 씹었다. 어금니에 부딪쳐 조각조각 난 것이 입안에서 짭조름한 맛을 냈다. 벌써 며칠을 먹었는데도 질리지가 않았다.
내려가면 한두 통은 주문하리라 생각하며 그는 흑라신검을 꺼내 들었다. 저승에 갔다 와서인지 유독 더 날이 서슬 퍼렇게 빛났다. 내공을 주입하자 그 널따란 죽림을 모두 잠식할 듯 거칠게 타올랐다.
청명을 맞아 한껏 푸르른 하늘 아래서 다시금 그의 수련이 시작되었다. 망령의 숲에서였다면 몇 년은 우습게 지나갔을 것이 불과 아흐레 만에 끝이 났다. 저승에 가기 전까지 했던 날을 더하면 그래도 거의 보름이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그간 다듬은 검술을 시연했다. 무용도 아니고 어찌 시연이겠느냐마는, 검술도 하나의 예술이다. 고도의 감각이 동반되어야만 강력한 파괴력이 나오는 것이다.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삐걱거렸던 부분이 많이 고쳐졌고 철교 교주의 철룡광랑검법도 기초 검술처럼 편해졌다. 물론 무엇보다 적응이 된 것은 따로 있었다.
흑라신검.
파천검만큼 손에 익어 베고 찌르는 기본 동작에서부터 여럿 검술에 이르기까지 위화감이 전혀 없었다. 세 번째 손을 얻은 기분이었다. 그는 그대로 배낭을 들쳐 멨다. 그리고 남은 육포를 죄 털어 넣으며 ‘이 시기쯤 그놈들이 들이닥쳤지’ 하고 중얼거렸다.
그는 저승에서 돌아왔던 순간보다 더 홀가분한 마음으로 죽림을 나섰다. 저 멀리 산동이 보이는 곳으로 분홍빛 바람이 휘날리고 있었다. 아직 벚꽃이 다 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왠지 옆구리가 시려웠다.
몇 시진을 달려 산동에 도착하자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악철도와의 일 때문이 아니었다. 그 일은 지워져도 벌써 지워졌다.
굵직한 목소리를 가진 어느 중년인에게서 그 이유가 드러났다.
“흑장포에 흑검. 틀림없어. 그 검객이야.”
정확히는 파천의에 흑라신검이었으나 대장간 주인들도 못 알아보는 것을 평범한 행인이 알아볼 리 없었다.
중년인이 아예 가던 걸음까지 멈추고는 무신을 주시했다.
“산동을 떠난 줄 알았는데 아니었구만. 무슨 일이지? 더 잡을 사람이 있나.”
“아니, 그보다 그거 정말이야? 저 검객이 혈교의 칠십혈천대를 잡았다는 게.”
“칠십혈천대뿐이야? 무기창도 함께야.”
“무, 무기창까지?”
“어.”
“허, 대체 얼마나 강한 거야.”
“우리 같은 사람들은 손가락만 튕겨도 죽을걸?”
칠십혈천대와 무기창을 잡은 다음 날.
객잔 앞에서 악성권을 마주했던 게 저런 식으로 퍼진 듯했다. 정말이냐고 묻는 이가 있는 것으로 보아 ‘사실’보다는 ‘소문’ 정도겠으나…….
“와! 혈교한테 덤빈 검객이다!”
코흘리개 아이까지 언급하고 있으니 설령 소문이어도 대부분은 사실로 믿을 것이다.
유명세.
무신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힘을 숨길 생각이 없으며 애초에 유명세라는 게 결코 나쁜 것도 아니다.
이름값이 생겨 이득 볼 거리가 많다고나 할까.
그는 ‘그래봤자 아직은 이 산동 바닥 안에서만 그렇겠지’ 하고 어깨를 으쓱했다.
노골적으로 꽂히는 시선을 뒤로하고 그가 향한 곳은 어느 객잔이었다. 산동에 그 많고 많은 객잔 중에서 유일하게 수차례 방문한 곳이었다.
“……!”
해가 저물어가는 무렵이라 바삐 돌아가는 객잔.
그러나 무신이 들어서기 무섭게 손님들이 입을 꾹 다문 것으로도 모자라 가장 앉기 좋은 자리를 터주었다. 배려라기보다는 강자를 향한 일종의 아첨이었다.
그는 유유자적 그곳에 가 앉았다. 시녀들이 양쪽에서 부채질만 안 해줬지 황좌가 따로 없었다.
마침, 그녀가 튀어나왔다.
그 점소이였다.
“무사님!”
무신을 부르는 점소이의 목소리는 손님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칠십혈천대와 무기창을 잡았다는 ‘괴물’을 스스럼없이 대하고 있지 않은가.
주문을 받아야 해서?
“수련은 잘 끝내셨나요?”
세상에 주문 때문에 무인의 개인적인 용무를 묻는 점소이는 없을 것이다. 게다가 ‘아참, 육포는 어땠어요? 먹을 만하셨어요?’ 하며 먹거리까지 챙기고 있으니 필히 둘 사이에 어떠한 관계가 있음이 분명했다.
…라는 게 지금 대부분 손님들의 관점이었다.
그러나 우습게도 둘은 서로의 이름도 몰랐다. 관계의 기본이라는 통성명조차 하지 않은 것이다.
무신은 배낭을 내려놓고 땡전 몇 개를 꺼냈다. 오늘 늦은 밤에나 시작될 ‘그 일’에 나서기 전에 출출한 배나 좀 달랠 요량이었다.
그가 땡전을 건네주자 점소이가 손을 내저었다.
“계산은 나갈 때 하시면 되는데… 애초에 우리 객잔은 무사님한테 돈 받을 생각이 없어요. 뭘 드시든 그냥 내드릴 거예요. 다시 넣어두세요.”
“음식 값이 아니다.”
“네? 그럼?”
“더 맛있게 해달라고 주는 거야.”
그는 그녀의 앞치마에 땡전을 쑤시듯 집어넣으며 ‘목마르니까 죽엽청부터 좀 내와’ 하고 재촉했다. 일단 주문을 받으면 곧장 움직이는 게 점소이의 역할인지라 그녀가 ‘계속 받기만 하네요’ 하고 술을 꺼내러 갔다.
계속 받기만 한다는 것.
그는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악철도와의 일을 제외하면 줄곧 받기만 한 것은 외려 자신이었다.
물론, 그녀도 제 목숨 값을 갚는 것이겠지만 말이다.
죽엽청이 먼저 나오고 동파육을 비롯한 음식이 슬슬 조리가 되어갈 즈음.
그의 앞에 세 명의 청년이 섰다.
“당신이 그 최 대협이오?”
대협.
악성권 때문인지 그 지칭이 아주 낯설지는 않았다. 무신은 외려 ‘그 최 대협이오?’ 하는 말 자체에 의미를 두었다. 무언가를 듣고 확인하러 온 듯한 어조였다.
칠십혈천대와 무기창에 관한 것일까.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만.”
그의 대답이 떨어지기 무섭게 세 청년이 당연하다는 듯 맞은편에 줄지어 앉았다. 한편에 따로 마련된 자리라 공간이 넓기는 했으나 애초에 넓고 좁고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합석하려거든 ‘앉아도 되겠소?’ 하는 최소한의 양해를 구하는 게 기본이었다. 허리춤에 검을 찬 것으로 보아 무도의 길을 걷는 자들임에 분명했는데, 정작 행동은 길바닥 비렁뱅이만도 못 한 것이다.
그때.
가운데에 자리한 청년이 패 하나를 꺼내며 말했다.
“남궁가에서 나왔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