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했더니 검신이었다 11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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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70회 작성일소설 읽기 : 회귀했더니 검신이었다 118화
꿈
“자네… 정체가 무엇인가?”
해영월이 물어왔다.
그의 얼굴에는 예닐곱 아이의 그것 같은 호기심이 잔뜩 묻어 있었다.
“예?”
“도무지 믿기지가 않아서 그러네.”
무신이 빙룡정에서 나온 지 일각.
여태껏 무신의 생환을 반기며 웃음 짓던 해영월이 돌연 진중한 얼굴로 변모했다.
“수백 년 전 선대 궁주께서도 수십, 수백의 무사들을 대동해서야 겨우 잡았네.”
“하하…….”
무신은 멋쩍은 미소로 대답을 대신하려 했지만, 먹힐 턱이 없었다.
적어도 빙룡정에 한해서는 그보다 해영월이 더 빠삭했다.
직접 들어가 보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헌데 자네는 혈혈단신으로 해냈어.”
“운이 좋았…….”
“다고 말하려거든 거두게.”
해영월이 모포를 덮어주며 말을 이었다.
“나를 이긴 것도 운이 아니었지 않나?”
“그렇긴 합니다만…….”
“더 놀라운 게 뭔 줄 아나?”
빙룡을 홀로 잡아낸 것.
그보다 놀라운 것이라면… 해영월의 눈이 무신을 위아래로 훑었다.
“자네가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단 점이야.”
그 말 그대로였다.
눈발에 옷깃이 얼어붙은 것을 빼면 무신의 몸은 들어갈 때와 크게 다를 게 없었다.
군데군데 허연 고름 같은 게 굳어 있었지만, 그것은 빙룡의 피였다.
그의 피는 단 한 번도 살갗을 뚫고 나온 적이 없었다.
“이 말은 결국 무엇이냐?”
해영월이 진심으로 감탄을 토했다.
“자네의 강기가 내내 깨지지 않고 유지됐단 뜻이지.”
“그렇게 해석될 수 있겠군요.”
“위대한 일을 해내고서 그리 덤덤할 수 있는 자네가 부럽네. 아주 대단해.”
“그런 것이 아니오라…….”
“아아, 비꼬는 것처럼 들렸나? 정말일세. 자넨 역사에 남을 위대한 일을 해냈어.”
얼른 덧붙여 말하는 해영월을 보며 무신은 순간 왈칵 눈물을 쏟을 뻔했다.
위대한 일.
부럽네.
아주 대단해.
그리고 역사에 남는단 말까지.
한 자, 한 자가 그의 감성을 건드렸다.
22만 년 동안 억눌려 있었던 것들이 오늘날에야 비로소 터지는 느낌이었다.
물론 22만 년 전보다 더 과거, 그러니까 회귀 전 15년의 기억 탓도 있었다.
매일매일 모멸과 멸시에 치여 살았던…….
생각만으로도 치가 떨렸다.
무신은 자신을 안아주는 해영월의 품에서 남몰래 눈물을 삼켰다.
사실, 눈 밑으로 닭똥 같은 것이 뚝뚝 떨어졌지만 애써 외면했다.
무인으로서 눈물은 사치였다.
차라리 피를 흘리는 편이 나았다.
‘내가 이만큼이나 무도를 걸었었나.’
무신은 잠깐 스스로가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회귀 전의 그도 그랬다.
힘이 없어 걷지 못한 것일 뿐.
그가 궁주의 널따란 품에서 벗어난 것은 유리처럼 와장창 눈사태가 일어날 즈음이었다.
해영월이 다급하게 외쳤다.
“빙룡을 잡으면 빙룡정은 무너지게 돼 있네!”
“그, 그것을 왜 지금!”
“깜빡했네!”
뭐든 칼 같이 지키는 해영월에게도 인간다운 면모가 있었다.
무신은 피식 웃으며 멀리 달아났다.
사실 눈사태 정도야 백 번이고 맞아도 무방했다.
빙룡의 영기도 견딘 그에게는.
‘응?’
그러나 멀쩡하다고 느꼈던 것은 그의 몸이 아니라 그의 정신이었다.
그는 어느 순간 정신을 잃었다.
***
“이렇게 얼굴 맞대고 있는 것은 처음이지?”
미남형의 청년이 그렇게 물어왔다.
진해천은 바짝 긴장해서 답했다.
“예……!”
나이도 나이거니와 무려 종남파 장문에 있는 그가 웬 청년에게 이렇듯 깍듯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마운현.
마교의 교주.
평범해 보이는 청년의 정체였다.
청년의 입가에는 미소가 자글자글했다.
인품이 참 좋아 보인다, 그런 느낌이 드는 미소였다.
하지만 저 미소 뒤에 감춰진 무섭고도 시린 비수를 진해천이 모를 리 없었다.
마운현이 차를 들이키며 그를 쳐다보았다.
“어떻게, 내가 시킨 것은 잘 살피고 왔나?”
“무, 물론입지요.”
진해천은 정마대전 시작 전, 이미 마운현으로부터 마교의 끄나풀 노릇을 하란 지시를 받은 적이 있었다.
그게 기폭제가 되어 역으로 정파의 끄나풀 노릇을 하게 생겼지만.
“한번 설명해 보게.”
“그게 그러니까…….”
원래대로였다면 다 까발렸을 것이다.
정파가 지금 정확히 무슨 체제이고, 누가 동행했으며, 어떤 전술을 쓰는 지까지.
그러나 진짜 진해천의 목을 쥔 자는 눈앞의 마교 교주 마운현이 아니라 저 멀리 교원 밖에 있을 무림맹주 곽이천이었다.
진해천은 현명한 선택을 했다.
오면서 거짓으로 구상한 내용을 마운현에게 고한 것이다.
설명이 끝난 후, 마운현이 껄껄 웃었다.
여태까지의 은은한 미소와는 무언가 미묘하게 달랐다. 청년의 얼굴을 하고서 노인마냥 껄껄거려서일까.
진해천은 갑자기 숨이 가빠졌다.
누군가 목을 조르는 것 같았다.
이상을 감지하고 그가 눈을 부릅떴을 때, 마운현은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곽이천이 교원 밖에서 대기만 할 것이다?”
“커… 어억!”
“자네, 거짓말이 너무 서투르구먼. 대기만 할 것이었으면 애당초 상황을 이렇게까지 벌릴 작자가 아니야, 곽이천은.”
“사, 살려…….”
“어차피 돌아가도 뒤질 운명이네. 자네가 여기서 얻어갈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말이야.”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숨이 떨어져 나간 시체 한 구가 의자 아래로 힘없이 내리 앉았다.
마운현은 그것을 잠깐 쳐다보다가 더 이상 일 없다는 듯 문을 열고 나갔다.
***
유난히도 바람이 찼다.
눈덩어리를 던지며 놀던 어린아이들이 집을 찾아 돌아갔다.
꽁꽁 얼어붙은 냇가는 과연 흐르기는 했었는지 의문스러웠다.
앙상한 나뭇가지야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눈살을 찌푸려도 시원찮을 그 광경이 무신에게는 희한하게도 절경으로 비춰졌다.
이유는 그의 옆구리에 있었다.
해연수가 곱게 화장을 한 채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있었다.
그녀의 가슴이 닿았다.
옷자락에 덮여 있는데도 크고 부드러운 살결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는 저도 모르게 웃었다.
아랫도리가 성을 내며 고개를 들었다.
큰일 나겠다 싶어 몸서리를 치는데, 그녀의 얼굴이 면전에 와 있었다.
무어라 상황을 살필 새도 없이 작고 뜨뜻한 것이 그의 입술을 덮쳤다.
그는 그녀에게 입맞춤을 당했다.
했든 당했든 강호나 중원에서 입맞춤의 의미는 컸다.
어떤 지역에서는 즉각 혼인이었다.
혼인…….
그래, 생각해 보니 원래 그는 그녀와 혼인을 할 뻔했다.
그가 말을 바꾸면서 취소되기는 했으나 그녀가 다시 강제로 밀어붙였다.
하지만 나쁠 것은 없을 것 같았다.
그녀는 충분히 매혹적이었다.
외모가 다는 아니라고 해도 이 정도면 성격 또한…….
아, 그는 그제야 자각했다.
이 아름다운 외모 뒤에 감춰진 사악한 마음을.
그녀는 광녀라 불리는 강호의 마녀였다.
이대로 정말 혼인을 하게 되면 그게 진짜 큰일이었다.
그는 그녀에게서 달아나려 몸부림쳤다.
얼굴을 뒤로 빼고.
팔은 감추고.
발은 달아나고.
한달음에게 그녀에게서 멀어졌다.
일어나니 얼굴에 식은땀이 한가득이었다.
‘일어나니?’
그는 침상 위에 뉘인 제 몸을 내려다보았다. 이렇게 생생한 꿈은 난생 처음이었다.
그는 왠지 목이 말라져서 손을 뻗었다.
“물 드릴까요?”
“예.”
시녀가 줬겠지 싶어 받아 마시는데, 낯익은 얼굴의 여인이 옆에 앉아 있었다.
바로 이 직전까지도 봤던 여인이었다.
해연수.
무신은 마시던 것을 그대로 뿜었다.
“음, 무사님 입 속에 들어갔다 나온 거라 그런가? 뭔가 달짝지근한 맛이 나요.”
해연수가 얼굴에 묻은 물을 손으로 닦더니 그것을 날름 핥았다. 음미하듯 혀를 굴리기도 했다.
무신은 갑자기 더 식은땀이 나는 것 같았다.
보면 볼수록 이상했다.
아니, 무서웠다.
그는 괜히 하하하하하! 웃으며 벌떡 일어섰다.
“멀쩡하군요!”
“하나도 안 멀쩡하시거든요?”
그러고 보니 그는 자신이 왜 멀쩡하단 말을 써야 하는지도 몰랐다.
빙룡정에서 나와 눈사태를 피했고, 그 후에는…….
기억이 나질 않았다.
해연수가 그를 따라 일어나더니 그의 이마를 짚었다.
물기가 묻었던 손인데도 왜인지 따뜻했다.
“머리에 열도 아직 있으신 게, 좀 더 누워 있으셔야겠어요.”
“저한테 무슨 짓을 하셨습니까?”
“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저한테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기억 안 나시다 보다.”
해연수가 선녀도 울고 갈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무신에겐 악귀의 그것이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등골이 서늘했다.
“갑자기 쓰러지셨대요. 빙룡정에서 나오시고.”
“제가요?”
“네.”
“왜요?”
“내공을 너무 끌어다 써서 그런 게 아닐까요?”
뻔한 질문에 뻔한 답이었다.
하지만 분명 멀쩡했던 것 같은데 쓰러졌다니 이해가 안 가기는 했다.
‘마지막 폭발 때 해 소저 말처럼 있는 것 없는 것 다 끌어다 써서인가.’
무신은 대강 이유를 찾아내며 괜히 또 하하하하하! 웃었다.
눈앞의 마귀부터 처리하는 게 우선이었다.
“이제는 멀쩡합니다.”
“아직 머리에 열이 있다니까요. 얼른 누우세요.”
“피 칠갑을 하고도 뛰어다니는 게 무사입니다, 무사. 머리에 열이야 훌훌 털면 금방 낫습니다.”
해연수가 훽 침상 쪽으로 돌아서며 말했다.
“뭐, 그럼 제 얼굴에 물 뱉으신 거 아버지한테 다 말씀드리구요.”
“예?”
“그러니까 빨리 이리 오세요.”
무신은 얌전히 가 그녀의 지시에 따랐다.
새삼, 아무리 강한 힘을 가져도 여인네 혓바닥 앞에선 삼류무사만도 못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원래 이리 휘둘리는 남자가 아닌데.’
아닌 척 해봤자 주도권은 그녀에게 가 있었다.
그는 살 떨리는 침상 교제를 즐기다, 해질 무렵 해영월과 만났다.
정확히는 해영월이 그를 찾아왔다.
“벌써 백년가약을 맺었구먼! 하하!”
“전혀 아닙니다만…….”
그의 목소리는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제 얼굴에 물 뱉은 것을 발설하겠다며 옆구리를 콕콕 찌르는 해연수 탓이었다.
해영월이 뒤늦게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몸은 좀 괜찮은가?”
“따님의 정성스런 간호에 씻은 듯 다 나았습니다.”
“그래? 내 딸이 그리 간호를 잘하던가?”
‘간호를 빙자한 소꿉놀이였습니다만…….’
이번에도 무신의 목소리는 속에서만 맴돌았다.
검신의 위세가 말이 아니었다.
“그럼 잠깐 나를 따라오겠나? 빙룡의 뿔을 보관해 두었네.”
“예.”
빙룡의 뿔과의 재회보다도 마귀로부터 벗어날 기회라는 게 무신에게 더 크게 다가왔다.
그는 냉큼 해영월의 뒤를 따랐다.
하지만 그의 옆구리에 이미 해연수가 철석같이 붙어 있었다.
아까 그 악몽의 재림이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내궁 중에서도 가장 깊숙한 공간으로 이동했다.
걸음이 이어질수록 무언가 거칠고 사나운 기운이 코끝을 간질였다.
그는 그렇게만 느꼈는데, 해연수는 달랐다. 더는 안 되겠단 얼굴이었다.
“가슴이 너무 답답해요.”
“빙룡의 숨결이 아직 남아 있는 탓일 게다. 연수는 이만 돌아가거라.”
“죄송해요, 무사님.”
그녀는 오히려 무신에게 고개를 숙이며 뒤로 멀어져 갔다.
저렇게 보니 상냥한 것도 같았다.
‘아니. 절대. 전혀. 농간에 걸려들면 안 돼.’
무신은 정신을 바짝 차리며 비로소 당도했다.
빙룡의 뿔이 그 고귀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자네 것은 수백 년을 묵은 빙룡에게서 나와서 그런지 뭔가 더 성질이 센 느낌이야.”
“그렇습니까?”
“단순히 느낌만은 아닐세.”
“예?”
해영월이 난감하단 얼굴로 말했다.
“얼마나 성질이 세면 빙궁 내 어떤 대장장이의 망치질도 먹혀들질 않았네. 이러다 검으로 만들지 못할지도 모르겠어.”
그것이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됐다.
무신의 머릿속에는, 빙룡의 뿔의 할아버지라도 검으로 제작해 줄 대장장이가 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