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지존기 16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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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3,060회 작성일소설 읽기 : 대륙지존기 162화
제2장 왕국점령 (5)
회의는 결국 반나절이 지나서야 끝이 났다.
“정면으로 치고 들어가는 것은 무모할 수도 있으니 후방으로 돌아서 옆구리를 치겠어요. 대신 적들도 우리의 존재를 알고 있을 테니 타이슈 자작은 정면으로 치고 들어가 주세요.”
“예? 하지만 제가 가진 병력으로는!”
“적당히 치고 빠지면 되니 위험하지는 않을 거예요. 설마 겁이 나서 국왕 폐하의 안위를 무시한다는 뜻은 아니겠지요.”
“물…론입니다!”
굳이 무리하지 않아도 되는 전투다. 그러나 타이슈 자작은 대충 공격할 수만은 없는 상황이다. 전쟁이 승리로 끝난 뒤 논공행상을 따질 때 타이슈 자작의 행적이 고스란히 밝혀지는 것은 불가피하다. 주변에서 치고 올라오는 귀족들의 질타를 받을 수도 있다. 어떻게 해서든 공적을 세워야 한다. 타이슈 자작으로는 어쩔 도리 없이 따라야 했다.
‘어린 계집의 심기가 참 대단하구나!’
에이프런은 대군을 이끌고 발더스성을 나섰다. 적들에게 행적을 들키지 않도록 야간에 움직이기로 했다. 당연히 진군은 늦는다. 혹시라도 주변에 있을지 모르는 함정을 대비해 철저하게 확인을 했다. 에이프런의 전략은 처음부터 끝까지 안전이었다.
“계획대로 했는데, 또 어디 간 거야?”
이동 중에 무진이 또 사라졌다. 걸핏하면 사라졌다가 나타나니 에이프런은 그것이 못마땅한 듯이 고운 얼굴을 찡그렸다. 더군다나 궁병들이 써야 할 화살까지 1천 발이나 가지고 갔다.
채채챙!
슈슈슈슉!
병장기와 병장기가 부딪치며 요란한 소리를 내었다. 밤이 찾아오기가 무섭게 마르치니 후작이 기습을 해왔다. 잠시간의 소강상태가 무색하게 만드는 파상공세였다.
마르치니 후작으로서는 마지막 선택이나 다름없었다. 카이겔 백작가의 대군이 발더스성에 도착한다는 첩보가 들어왔다. 무슨 일이 있어도 테오도르 국왕의 신변을 확보해야만 전쟁을 유리한 구도로 이끌어갈 수 있었다.
테오도르 국왕은 마르치니 후작의 파상공세에 아찔함을 느꼈다. 한 번의 뼈아픈 패배로 인해서 주력의 차이가 벌어지고 말았다.
이대로는 승산이 없음을 느꼈다. 전투가 치열해질수록 상황이 불리하게 진행되었다. 오기로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테오도르 국왕이 침통한 얼굴로 전장을 바라보았다. 그가 있는 장소도 그리 안전하지만은 않았다. 적이 마력탄이라도 발사하게 되면 목숨을 장담하기 힘들었다.
“내 생애 최악의 날이구나.”
“국왕 폐하! 지금 이대로는 위험합니다! 자리를 피하셔야만 합니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에이프런 백작이 원군을 보낼 것이다!”
“카이겔 백작군이 오기 전에 전멸당할 수도 있습니다!”
테오도르 국왕의 수심이 깊어졌다. 마르치니 후작군의 병력도 이제는 4만이 조금 넘는 수준이다. 카이겔 백작군이 도달하기만 하면 전쟁의 구도는 완전히 바뀌게 된다.
하지만 버티고 있을 시간적인 여유가 없는 상태였다. 이대로는 에이프런 백작이 오기 전에 포로가 되거나 죽을 수도 있었다.
“여기서 후퇴하면 짐의 체면은 어찌되는가!”
“폐하께서 포로가 되시면 마르치니 후작이 승리하게 됩니다! 그보다 더 큰 일은 없을 겁니다! 소니아 왕국의 영원한 보전을 위해서는 폐하의 안위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테오도르 국왕의 결정에 따라서 전쟁의 향방이 달려 있었다. 귀족들도 전장에서 죽고 싶은 마음 따위는 없다. 국왕이 후퇴하기를 원하고 있었다. 그래야만 귀족들도 물러설 수 있는 명분을 얻을 수 있다.
“후방에도 함정이 있는데 어디로 물러선단 말인가!”
“마르치니 후작도 시간이 많지는 않았습니다. 전력을 한곳에 집중해 함정을 무너뜨리면 기회가 있을 겁니다!”
희생을 강요하는 전략이었다. 기사와 병사들의 희생을 발판으로 발더스성으로 돌아가자는 뜻이다. 대의를 위한 희생이기는 하나 그 희생이 너무 큰 전략이다.
테오도르 국왕은 결국 귀족들의 의견을 수렴했다. 그도 허무한 결말은 원치 않았다.
“후퇴한다.”
국왕의 후퇴명령이 있더라도 전방을 막던 병력을 뺄 수는 없는 상황이다. 5천의 병사가 마르치니 후작군의 진군을 늦추는 도구로 사용이 되었다. 뒤를 받치다 죽어야 하는 병사들로서는 억울한 일이었다.
국왕과 귀족들은 안전한 장소에서 병사들을 사지로 보내고 있었다. 병사들의 희생을 강요한 전략으로 길을 뚫었다.
마르치니 후작의 함정은 그리 잘 만들어지지 않았다. 시간도 없었을뿐더러 함정에 필요한 물품도 부족했었다. 단순히 국왕의 발목을 잡는 용도로만 사용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밤중이라 국왕군의 피해는 엄청났다. 수천의 병사들이 죽고 나서야 국왕과 귀족들은 활로를 확보할 수 있었다.
테오도르 국왕은 침통함을 감추지 못했다.
‘이건 내가 원한 상황이 아니다!’
이제까지 계획한 것들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전쟁을 이긴다고 해도 원하던 것들을 이룩할 수 있는 힘이 없을 것이다.
전쟁의 애초 목적은 귀족들의 힘을 축소시키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일환이었다. 그런데 왕권을 강화하기는커녕 숨겨온 힘마저 소모하고 말았다.
‘다음에는 절대 이대로 되지 않는다!’
테오도르 국왕은 포기하지 않았다. 이제까지 인내한 세월만큼이나 기다릴 줄 알았다. 어차피 일이 이렇게 됐다면 발톱을 숨기며 기다리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테오도르 국왕이 새로운 다짐을 할 때.
슈슈슈슈슉! 슈슈슈슈슉!
어둠 속에서 화살이 날아왔다. 일발 일발의 위력이 가공했다.
화살은 병사들의 가슴을 관통하고 날아가 지면을 뚫고 들어갔다. 기사들조차 위력적인 화살 공격에 목숨을 잃었다. 화살은 테오도르 국왕이 자리한 곳을 집중적으로 노리고 있었다. 빗발치는 화살 공격으로 인해 기사들과 병사들이 테오도르 국왕을 지킬 수 없게 만들었다.
화살이 소낙비처럼 쏟아졌다.
“국왕 폐하를 지켜라!”
“어서 놈들을 잡아!”
7서클 궁정마법사 헥토르가 위험을 느끼고 실드 마법을 펼치지 않았다면 테오도르 국왕의 안위를 책임지지 못했을 것이다.
방어마법에 부딪친 화살이 퉁겨나가기는 했지만 헥토르 궁정마법사가 받는 충격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화살에 실린 힘이 상상 이상이었다. 평범한 화살로 여겼다가는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었다.
소나기처럼 퍼붓는 화살 중에 하나가 방어실드를 두드렸다. 화살은 다른 화살과 또 달랐다.
푸욱!
“이…럴 수…가!”
헥토르 궁정마법사는 자신의 가슴을 뚫은 화살을 보고 믿지 못했다. 화살은 너무 빠르고 강했다. 이제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심장이 정지되자, 서클이 붕괴되고 마나는 자연적으로 풀어져 버렸다. 실드 마법이 한순간에 풀려버렸다. 헥토르 궁정마법사의 몸이 썩은 고목처럼 고꾸라졌다.
바로 곁을 지키는 궁정마법사가 죽자 테오도르 국왕은 아찔함을 느꼈다. 자신을 보호해 줄 수 있는 최후의 방어선이 무너진 것이다.
푸우우욱!
“크윽!”
섬뜩하고 차가운 느낌.
살 속을 비집고 들어가는 이질적인 금속이 테오도르 국왕의 뇌리를 서늘하게 만들었다. 비명성을 내지르기에는 화살을 맞은 부위가 너무나 치명적이다. 미간을 뚫고 들어간 화살이 반대쪽을 뚫고 나왔다. 외마디 비명성이 테오도르 국왕의 마지막이 되었다.
다른 누군가가 손을 쓰기도 전에 테오도르 국왕은 싸늘한 주검이 되어버렸다.
“국…왕… 폐…하!”
국왕의 오른팔이자 왕국의 재상, 안토니 백작은 절규에 가깝도록 소리쳤다.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되는 최악의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되돌릴 수 있다면 되돌려야 했다. 그러나 테오도르 국왕의 죽음은 되돌릴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최악이었다.
국왕이 죽게 되면 지금까지 해왔던 모든 일들이 물거품이 된다. 안토니 백작은 그것을 인정하기 힘들었다. 그의 분노가 마르치니 후작에게 향했다.
“마르치니 후작! 절대 용서치 않겠다!”
테오도르 국왕이 죽은 후 화살은 멈추었다.
협곡 위 수풀로 가려진 지대에서 무진이 서 있었다.
무진은 협곡 위에 도착한 후 주변에 매복하고 있는 마르치니 후작의 궁병들을 가루로 만들었다. 지키고 있는 놈들이 있음을 나타내는 흔적만 남긴 채 남김없이 쓸어버렸다.
테오도르 국왕에게 화살을 발사한 것은 무진이었다. 1천 발의 화살을 무형의 기운을 사용하여 발사한 것이다.
허공섭물의 경우 1갑자의 내공이 있다면 작은 찻잔을 들 수 있을 정도는 된다.
하지만 1천 발의 화살에 강력한 힘을 싫어 무형의 기운으로 조절한다는 것은 3갑자의 내용이 있다고 해도 불가능하다. 천인합일(天人合一)의 경지를 넘어 신화지경에 도달해야만 겨우 가능할 것이다.
일반 궁병들이 쏜 화살이었다면 마법사나 기사들이 막아낼 수 있었다. 그에 반해 무진은 화살 하나하나에 기운을 불어넣어 발사했다. 기사나 마법사라고 해도 쉽지 않은 화살 공격이었다. 병사들을 데려오면 노출이 불가피할 수 있다. 흔적을 남기지 않고 마르치니 후작에게 뒤집어씌우기 위해서는 혼자 움직이는 게 효과적이라고 판단을 한 것이다.
“이제 명분은 생긴 셈이군.”
에이프런이 무력으로 국왕을 폐위시킨다면 곤란함을 겪었을 것이다. 그러나 테오도르 국왕이 적의 함정에 걸려 전장에서 목숨을 잃었다면 그 책임은 모두 다른 사람에게로 향한다. 국왕을 지키지 못한 귀족과, 반란을 일으킨 귀족이 책임을 지게 된다. 일석이조의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원하는 결과를 얻은 무진은 밤의 그림자가 되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스윽!
그 어느 누구도 무진의 존재를 찾을 수는 없다. 남겨진 것은 전부 마르치니 후작군의 흔적들뿐이다. 안토니 백작이 뒤늦게 협곡 위로 기사와 병사를 보냈을 때는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기습 후 병사들이 도망쳤다고 판단을 내렸다. 안토니 백작은 다시 한 번 마르치니 후작의 비열함에 치를 떨었다.
국왕군이 마르치니 후작군의 공격에 위기를 맞는 순간에 에이프런 백작이 카이겔 백작군과 함께 등장했다. 소드 아머를 착용하고 전장을 횡으로 가로지르는 모습은 아름다웠다.
가주의 돌격을 본 카이겔 백작군은 거침없이 전장으로 돌진해 들어갔다.
병사의 전투력은 경험과 실력보다 체력이 훨씬 중요하다. 장기간 전투를 치른 마르치니 후작의 병력은 피로가 극에 달해 있었다. 지금까지는 승기를 타고 있어 모르고 있었지만 전황이 바뀌면서 체력의 한계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기세가 급격하게 흔들렸다.
“왕국의 분란을 도모한 반란군을 제압하라!”
에이프런은 페가수스 기사단과 함께 전장을 가로질러 마르치니 후작에게 다가갔다. 거침없는 돌진이었다. 바람을 품은 검이 전우좌우 종횡무진으로 휘둘러졌다. 앞을 막아선 자들은 어김없이 저세상으로 향했다.
부들! 부들!
전장에 선 마르치니 후작은 분노를 주체하기 힘들었다.
“기어이 네년이 내 앞길을 막는구나!”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되는 상황이다. 아니, 애초부터 에이프런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이토록 어려운 전쟁을 치르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모든 것이 에이프런 때문에 뒤틀려버리고 말았다.
그의 생애 최악의 실수가 바로 에이프런을 살려둔 것이 되고 말았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제거해 버렸어야 했다.
“네년만은 반드시 죽여주마! 모두 저년을 공격해!”
마르치니 후작의 신변을 지키는 레드울프 기사단, 블루울프 기사단이 에이프런을 막기 위해서 나섰다. 에이프런의 뒤를 따르던 페가수스 기사단이 레드울프 기사단과 블루울프 기사단을 상대했다.
과거의 명성을 보았을 때 페가수스 기사단은 소니아 왕국 최강의 기사단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현재는 레드울프 기사단과 블루울프 기사단의 명성이 더 높다. 과연 어떤 결과가 벌어질지 귀추가 주목되는 전투였다. 기사단의 승부가 전세를 좌지우지할 것이다.
파아아앙!
“크억!”
양 기사단과 기사단이 충돌하자 시끄러운 파공성이 대지를 울렸다. 그와 동시에 부딪쳤던 레드울프 기사단과 블루울프 기사단은 뒤로 밀려나가고 말았다.
레드울프 기사단의 단장과 블루울프 기사단의 단장은 드러난 현실에 놀라고 있었다. 이제까지 알고 있었던 페가수스 기사단이 아니었다. 맹수의 본능을 되찾은 페가수스 기사단은 레드, 블루울프 기사단을 농락하고 있었다.
삽시간에 30명의 기사가 목숨을 잃었다. 그에 반해 페가수스 기사단은 피해가 전무했다.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다는 것을 믿기 어려웠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실력의 차이보다는 마음가짐의 차이가 더 컸다.
페가수스 기사단은 처음부터 전력을 다했다. 적을 죽이기 위해서 사생결단의 마음을 먹은 것이다.
반면에 레드울프 기사단과 블루울프 기사단은 상대를 얕보는 기색이 있었다. 적을 과소평가하고 태만하게 상대한 것이다.
그로 인해 기사들은 목숨을 잃고, 기세까지 빼앗겨 버리고 말았다.
마르치니 후작의 안색이 붉어졌다. 자신이 오랜 시간 공을 들여 키운 기사단이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힘들었다.
“이런 멍청한 놈들! 도대체 뭐 하고 있는 것이냐!”
마르치니 후작이 호통을 칠 때 진영을 가로지르는 에이프런이 보였다.
그녀는 거센 바람과 같았다. 너무 빨라서 일반 병사들은 물론 기사들도 쉽사리 막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 끝났군요.”
“네년이 죽기 전에 끝나지 않는다!”
“그럼 당신이 먼저 죽겠네요.”
“건…방진!”
마르치니 후작이 검을 뽑았다. 그도 왕국에서 실력을 인정받는 오러 마스터다. 나이가 들어 일선에서 검을 든 적은 없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실제는 달랐다. 마르치니 후작은 훗날을 위해서 비수를 숨기며 실력을 갈고닦고 있었다.
과거에 이런 말을 한 자가 있었다.
노기사는 죽지 않는다. 다만 검을 갈고닦을 뿐이다.
마르치니 후작이야말로 소니아 왕국의 숨겨진 실력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