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 속의 엑스트라 21화
무료소설 무림 속의 엑스트라: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254회 작성일소설 읽기 : 무림 속의 엑스트라 21화
21화. 인질 구출 (1)
수레에 담은 자재를 챙기면서 무흔이 한탄하고 있을 때 진풍이 옆구리를 툭 쳤다.
“어이, 무흔. 조심해라. 너 때문에 산통 다 깨진다.”
진풍이 괜히 옆에 붙어 귓속말로 시비를 걸어왔다.
예상대로 구진광은 아예 뒷짐을 지고 있었다. 완전히 동네 마실 나온 세가 도련님이다. 저래서야 누가 상인이라고 생각할지 의문이긴 하다만 무흔이 신경 쓸 일은 아니다.
무흔이 피식 웃으며 몸을 돌리려 하자 진풍이 재빨리 그의 팔을 잡았다.
“괜히 놈들에게 잡혀 부담 주지 말고. 겁나면 얼른 너희 아가씨 데리고 도망쳐라, 응?”
“뭔 소리야? 너야말로 조심하지?”
어쩔 수 없이 툭탁거리고 있을 때 지나가던 행수가 두 사람을 나무랐다.
“얼른 일 안 하고 뭐 하나?”
무흔은 재빨리 고개를 푹 숙이고 채소를 어깨에 짊어졌다. 이런 일은 어렵지 않다. 그는 식자재를 주방으로 날랐다.
주방에서 무흔은 아낙네들의 환호를 받았다.
요리별로 필요 수량을 척척 나누어 완벽하게 분배했기 때문이다. 식자재로 어떤 것이 얼마나 들어왔는지 이미 파악한 그로서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 모든 것이 그의 탁월한 계산 능력과 무림맹에서 맡았던 식자재 검수 경험 덕분이었다.
특히 그를 좋게 본 사람은 흑사방 주방을 책임진 찬모였다. 오십 대 여인으로 주방에서 사실상 왕처럼 군림했다. 그녀가 한소리 하면 일하는 여인들이 아무도 찍소리를 못했다. 무흔이 바쁘게 돌아다니며 해결하는 것을 눈여겨보던 찬모가 물었다.
“너 어디 소속이니?”
“저는 식자재상 알바…… 아니 자재 운반 일을 하고 있어요.”
무흔은 식은땀을 흘리며 대답했다. 그가 마음에 든 듯 웃음을 짓던 책임 찬모가 그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앞으로는 매일 네 녀석이 배달해라. 알았니?”
“넵.”
무흔은 인사를 꾸벅하고 일을 계속했다.
일하고 있자니 정문 쪽이 시끌벅적해졌다. 대정문에서 협상단이 도착한 것이다. 대정문주와 두 아들, 대정문도로 변신한 장후성과 제갈수에 협상의 공증을 위해 참석한 구대 문파 출신 현공과 후연이다.
흑사방에서도 털북숭이 녀석이 부하를 이끌고 나와서 그들을 맞이했다.
양쪽은 한동안 서로를 노려보며 기세 싸움을 했다. 협상에서 기가 꺾이면 불리하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들에게 이런 분위기는 일상적이었다.
딸이 인질로 잡힌 대정문주가 마지 못해 앞으로 나서 머리를 숙였다.
“흑사방주님은 계십니까?”
“으하하, 잘 오셨소.”
“부방주님께서 친히 나오셨군요. 이쪽은 소림의 현공과 아미의 후연이십니다. 오늘 협상을 공증해줄 분들이십니다.”
소림과 아미라는 말에 부방주가 게슴츠레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쳐다봤다. 별로 탐탁지 않은 표정이었으나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들을 본채로 안내했다.
무흔은 먼 곳에서 일행의 잠입을 곁눈질하며 작전이 무리 없이 돌아가고 있음을 확인했다.
이 작전의 핵심은 협상이 끝나기 전에 대정문주의 딸이 감금된 장소를 찾아 구해내는 것이다.
소주방에서 각종 심부름을 하다 보니 장원 곳곳을 돌아다닐 기회가 생겼다. 무흔은 자연스럽게 장원 내부를 염탐하기 시작했다.
***
흑사방 깊은 곳에서는 회의가 열렸다.
참여자는 모두 여섯. 방주, 부방주 외에 장로가 넷이었다. 장로 하나가 현재 상황을 보고했다.
“대정문에서 온 사람들은 사랑채에 일단 모아두었습니다. 공증을 서기 위해 소림과 아미에서 온 두 사람을 합쳐서 모두 일곱입니다. 숫자로 보아 별다른 계략은 없어 보입니다.”
보고를 접한 흑사방주 석고해의 안색이 확 펴졌다.
“역시 저들이 몸을 사리나 보지?”
“소문에 따르면 기존의 문도가 반수 이상 이탈하여 사실상 대정문을 유지하기 힘든 상황이라 합니다. 지금 상태라면 대정문은 한동안 일어나지 못할 겁니다.”
장로가 자신 있게 장담했다.
석고해는 이 일대에서 잔뼈가 굵은 자였다.
오랜 기간 무림에서 낭인 생활을 했고 막판에 정착한 곳이 바로 이곳 적산 마을이었다. 지금까지 이십여 년간을 흑사방의 부흥을 위해 불철주야로 노력했다.
그 과정에서 흑사방은 사사건건 대정문과 다퉜다. 산 하나에 두 마리의 호랑이가 있을 수 없는 법. 칼을 갈고 있을 때 사마련의 유혹이 들어왔다.
실상 흑사방의 실력은 대정문과 비등했다. 이를 뒤집은 것은 외부의 다섯 고수였다. 이들 고수는 자신들이 사마련 소속이라 했다. 사마련은 중원 전역의 흑도 문파 연합체다. 정도 무림 연합체인 무림맹과 맞서는 유일한 단체다.
석고해는 그들을 기쁘게 환영했다.
사마련에서 온 자들은 대정문이 가진 비도를 언급하며 대정문을 무너트릴 계책을 알려줬다. 석고해는 대정문을 무너트릴 욕심에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비도를 사마련에 내주는 대신 대정문의 붕괴를 얻어낸 것이다.
“역시! 우리가 이겼다!”
석고해가 흥분해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오늘 대정문 딸내미를 돌려보내면서 비도를 받아 사마련에 드리면 끝입니다.”
“잔치는?”
“대정문에서 고기를 비롯한 식재료를 잔뜩 보내왔습니다. 화친의 증표라나요.”
“흐음, 그래?”
부하들의 설명에 석고해가 턱을 문지르며 생각에 잠겼다.
지난번 대정문을 치고 그 딸을 납치할 때 사마련 소속이라던 다섯 고수의 무공은 정말 놀라웠다. 대정문을 쉽게 굴복시킨 것은 그들의 무공이다. 오늘도 그들이 있는 이상 승리는 확실했다.
그가 기쁨에 넘쳐있을 때 장로들이 우려를 나타냈다.
“대정문이 무너졌다고 하나 문주와 그 자식들이 건재한 이상 복구는 시간문제입니다.”
“사마련에서는 비도를 가져가고 나면 다시 우리를 돕지 않을 겁니다.”
“몇 년 후에는 오히려 우리가 보복당할 거요.”
모두가 하나같이 내키지 않는 목소리를 냈다.
석고해 역시 흥분이 가시자 앞으로가 걱정됐다.
그때였다. 털북숭이 부방주가 단호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엎읍시다.”
“뭐?”
석고해는 귀를 의심하며 부방주를 쳐다봤다.
평소에도 털북숭이 부방주는 과격한 면이 많았다. 흑도라면 당연히 피도 눈물도 없이 과격해야 한다나. 물론 지금까지 그런 부방주를 살살 달래서 여기까지 이끌어 온 사람이 방주 석고해이긴 했지만.
장로 한 녀석이 부방주의 말을 해석했다.
“교섭이고 뭐고 그냥 엎어버리자는 겁니다. 여기 들어온 대정문주와 그 자식들만 없애버리면 미래를 걱정할 일도 없잖습니까?”
석고해는 머리가 찌근거렸다. 약속대로 딸을 내주고 비도를 받아 미래의 후환을 남겨둘 것인가, 아니면 이 자리에서 싹 죽여 해결해버릴 것인가.
그때 그의 상념을 부방주가 다시 깼다.
“엎읍시다.”
“끙! 그럼 대정문주 딸년은 어떻게 하고?”
“딸년도 엎읍시다.”
부방주의 말에 석고해가 혀를 찼다.
“엎읍시다!”
모두가 부방주 말에 동참했다.
석고해는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부방주 저 녀석은 도무지 머리가 없다. 무조건 흑도의 패기를 앞세워 직진이다.
장로 하나가 석고해를 살살 꼬셨다.
“오늘 협상을 엎으면 이득이 큽니다. 막말로 비도를 사마련에 주고 딸도 대정문에 주고 나면 우리에게 남는 게 뭐가 있습니까?”
석고해는 주변의 수하를 둘러봤다.
하나같이 기세등등하게 정상적인 협상을 반대하는 표정이었다. 역시 이래야 흑도다. 흑도가 정정당당하게 협상에 임한 적이 과연 있던가. 무림은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법. 그 근본에는 힘이 존재하고 지금 그들은 사마련의 강력한 힘을 안고 있다.
“사마련 어르신들은 뭐라고 하시냐?”
“그분들은 비도만 주면 상관없답니다.”
석고해는 부방주를 비롯한 장로들의 표정에서 결의를 읽었다.
“좋아. 엎자. 저들을 죽이고 비도를 빼앗자. 그리고 부방장! 네가 먼저 딸년을 엎어서 먹어치우면 안 돼. 기다려.”
“소림과 아미에서 공증을 온 둘은 어떻게 할까요?”
“그냥 묻어버려. 나중에 문제가 생기면 사마련에서 그랬다고 덮어씌우지 뭐.”
석고해의 결정에 모두의 전의가 불타올랐다.
***
대정문과 흑사방의 협상이 시작되면서 주방은 요리 준비로 쉴 틈 없이 바빠졌다. 회담이 끝나고 연회가 벌어지면 바로 음식을 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덕분에 남궁이화와 백단영은 문주 딸을 찾아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예상과 달리 주방을 벗어나기 힘들어져 작전에 중대한 차질이 발생했다.
견디다 못한 남궁이화가 구진광 쪽으로 신호를 보냈다.
그나마 물건 나르기가 끝난 구진광과 무흔, 진풍은 여유가 있는 편이었다. 흑사방 내부를 수색하고자 그들은 주방을 빠져나왔다.
“너희 둘은 저쪽으로 가봐라. 난 이쪽을 살펴볼 테니.”
구진광이 무흔과 진풍에게 명령했다. 무흔과 진풍의 무공이 약하기에 둘이 함께 움직이도록 배려한 것이다.
하필이면 진풍과 함께 수색하게 되어 무흔은 기분이 언짢아졌다.
“무흔, 잘해라. 작전에 피해 주지 말고.”
이 녀석은 오늘 온종일 저 이야기뿐이다. 그쪽이나 잘할 것이지.
무흔은 대답 없이 정원 뒤로 돌아갔다. 우거진 나무 사이로 띄엄띄엄 별채가 보였다. 여기저기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과 건물마다 삼엄하게 경계를 펼치는 자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흑사방 방도가 이렇게 많았었나.
하지만 절대 무흔을 속일 수 없다.
그는 식자재를 준비했기에 이곳에 있는 사람 수를 알고 있다. 지금 본채 회담 참석자와 본채와 정문을 경계하는 자들 수를 제외하면 남은 수가 나온다. 이를 장원 전체의 면적으로 나누면 단위 면적당 경계 인원이 쉽게 도출되는 것이다.
결과는 이쪽을 제외한 후원이나 별채에는 경계 인원이 그리 많지 않았다. 즉 이곳 경계만 뚫으면 어렵지 않다.
몇 차례 경계 뚫기에 실패하고 풀이 죽은 진풍이 먼저 제안했다.
“우리가 굳이 같이 다니며 뒤질 필요 있겠냐? 따로 수색하자고. 어때?”
어째 녀석의 안면에 비릿한 미소가 감도는 것을 보니 뭔가 꿍꿍이가 있어 보였다.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또 제 무덤 파지나 않으면 다행인데.
어쨌든 무흔도 함께 다니기 싫었다.
“그러지.”
“큭큭, 걸리지 말고 잘해라. 걸리면 혼자 덮어쓰고.”
진풍이 묘한 웃음소리를 내뱉고는 저쪽 별채로 먼저 움직였다.
무흔은 반대쪽 전각 담벼락으로 몸을 숨겼다. 그가 막 전각 내부로 들어가려 할 때 저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너 누구냐? 뭐 하는 녀석이냐?”
무흔의 몸이 굳었다. 어째 재수 없게 시작하자마자 바로 걸리나. 심호흡을 몇 번 하고 무흔은 변명거리를 생각해낸 다음 뒤로 돌아섰다.
“어?”
그의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무흔은 미간을 모으고 담벼락 옆으로 고개를 쓱 내밀었다.
“너 뭐야?”
우락부락한 장한 하나가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 앞에는 진풍이 고양이 앞의 쥐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진풍 저 녀석, 피해 주지 말라더니 제일 먼저 걸렸군. 과연 혼자 덮어쓰나 볼까? 무흔은 쓴웃음을 지으며 둘의 상황을 주시했다.
둘이서 티격태격 말다툼이 벌어졌다. 말다툼이라기보다 진풍이 일방적으로 꾸지람을 듣는 상황이었지만. 아마 일 도우러 온 녀석이 왜 여기까지 들어왔냐는 타박일 것이다.
몇 대 쥐어박히던 진풍이 갑자기 귓속말로 녀석에게 중얼중얼 속삭였다.
장한이 고개를 옆으로 쓱 돌리더니 무흔이 있는 쪽을 노려봤다.
깜짝 놀란 무흔은 황급히 담 뒤로 고개를 숨겼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무리 진풍이더라도 이쪽에 첩자가 있다는 소리를 하진 않을 거라며 스스로 위안했다.
어째 상황이 조용했다.
심상치 않은 기분 속에 무흔은 조심스럽게 다시 고개를 내밀었다. 방금까지 그쪽에 있던 진풍과 장한이 사라지고 없었다.
호흡을 가라앉히고 애초의 목적대로 인질이 있을 만한 곳을 가늠한 다음 그는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몇 발자국 이동했을까.
턱-
억센 손이 그의 어깨를 뒤에서 잡았다.
무흔이 깜짝 놀라는 순간 상대의 주먹이 그의 가슴을 강하게 가격했다.
퍽-
“컥!”
무흔은 신음을 터트리며 주저앉았다. 방금 진풍과 실랑이를 벌이던 장한이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네놈이 대정문의 첩자란 소리를 들었다.”
장한이 기세등등한 목소리와 함께 커다란 박도를 들어 그의 목에 댔다.
무흔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