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 속의 엑스트라 47화
무료소설 무림 속의 엑스트라: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202회 작성일소설 읽기 : 무림 속의 엑스트라 47화
47화. 고산령 (1)
그 후로도 무흔은 지하 서고에서 책을 뒤적이며 맡은 일을 했다.
이젠 지난번처럼 오해받지 않기 위해 버릴 책은 아예 한쪽 구석에 완전히 구분해서 쌓았다. 처음부터 그러지 않았던 것이 아쉬웠다. 물론 그 덕분에 진풍 녀석이 매화곡 제자에게 미움받은 것은 나쁘지 않았지만.
춘화도를 발견한 백단영의 당황한 표정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아무리 변명해본 들 백단영을 이해시키는 것은 무리다.
백단영의 무거운 표정이 떠올라 그의 마음도 무거워졌다.
생각해보니 그날 이후 백단영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용봉대 수련시간에도 연무장에 나오지 않은 듯했다. 멀리서도 보지 못하다 보니 걱정이 됐다. 어디 아픈 건가? 아니면 정말 싫어졌나? 그러면 큰일인데…….
별별 상념이 머리를 어지럽혔다.
전전긍긍하며 책을 분류하고 있을 때 무흔의 귀로 계단을 내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내공 수준이 급격히 올라가면서 예전보다 확실히 감이 좋아졌다. 지금 들려오는 발소리는 진풍이 아니었다.
“진풍이 아니면 누굴까?”
이곳에 올 다른 인물을 떠올려보았으나 마땅한 사람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사이 한 인물이 안으로 들어왔다. 백단영이었다.
“아, 아가씨?”
“무흔, 곧 휴가 기간이잖아? 어떻게 할 거야?”
휴가 기간이란 말에 무흔은 화들짝 놀랐다.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다. 현실에서는 휴가만 기다리고 있으면서 이곳에서는 신기하게도 그렇지 않다. 예전 소설 내용을 떠올려보니 확실히 휴가가 있긴 했다. 그때 무슨 일이 벌어졌었더라?
휴가를 생각지도 못했던 무흔이 머리를 굴리는 사이 백단영이 말했다.
“난 용봉대원과 함께 움직일 거야. 그러니 내 걱정은 말고 알아서 홀로 지내. 이곳에 계속 머물 것 아니면 상단에 돌아가 있어도 괜찮고.”
“아…… 그, 그게…….”
백단영이 그에게 할 말만 알리고는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버렸다. 확실히 평소보다 분위기가 싸늘했다.
무흔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소 마음이 아프긴 하지만 백단영과의 감정은 그리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그는 그녀의 후원자로 그녀를 살리는 목적에 충실해야 하니까.
과거에 휴가 기간에 무슨 일이 발생했었는지 기억을 더듬었다.
생각나는 별다른 일은 없었다. 그렇다면 굳이 그가 그녀를 따라다녀야 할 당위성은 떨어진다. 하지만 왠지 가족과 지내는 백단영의 모습을 보고 싶긴 했다. 게다가 원래의 자신이 자랐던 장소도 구경해보고 싶은 마음도 억누르기 힘들었다.
“이번 아니면 백가상단에 갈 일이 없을 테니 한번 가보는 게 낫겠지?”
그녀와 둘이서 돌아갈 수 없다는 점은 신경 쓰였지만, 그녀가 따로 움직이라고 말한 이상 어쩔 수 없었다.
홀로 강호를 주유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이참에 홀가분하게 돌아다닐 계획을 세우다 보니 함께 다닐 좋은 사람이 있긴 하다.
***
휴가를 앞두고 엉망이던 부대 분위기는 당일이 되자 바로 파장 분위기로 바뀌었다.
용봉대원이 흩어지면서 연결된 예속 부대원도 한둘 자리를 떠나고 남은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고향이 너무 멀어서 다녀오기 힘든 사람을 제외하고 전부 떠나버린 연무장이 휑했다.
항상 그에게 시비를 걸던 진풍도 보이지 않았다. 그가 알만한 사람으로 유일하게 대호가 남아 있었다.
“넌 고향에 안 가냐?”
대호의 고향은 절강성 쪽이라 말을 타고 무리해서 다녀오겠다면 갈 수 있는 거리이긴 했다.
“난 안 가.”
대호가 바로 고개를 저었다.
무흔은 대호 옆에 주저앉으며 이유를 물었다.
“염치가 없잖아.”
“무슨 염치?”
“무림맹으로 간다고 부모님에게 떵떵 소리치고 왔는데 정작 이곳에서는 용봉대에 들지도 못하고 허드렛일만 하고 앉았으니…….”
“야, 예속 부대 일도 중요해. 절대 허드렛일 아니다.”
“알아. 어쨌든 무공을 수련하는 것은 아니니까.”
“그건 용봉대원도 마찬가지야. 그쪽도 무공을 가르치진 않더라.”
무흔의 말이 나름대로 위안이 되는 듯 대호가 웃음을 머금었다.
어쨌든 그의 마음은 알 것 같다. 무림맹에서 제대로 자리 잡고 누구나 알아볼 만한 무공 고수가 되기 전까지는 차마 부모님을 뵐 면목이 없다는 것이다.
마치 현실에서 알바에 전전하고 있는 그처럼.
동병상련이란 생각에 그는 대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서 당분간 뭐 할 건데?”
“무공 수련해야지. 어차피 조용하고 좋잖아? 난 가전 무공 숙련도가 기껏 7성 정도거든.”
대호가 주절주절 자기 생각을 늘어놓았다.
요약하면 기껏 7성까지밖에 연마하지 않고, 다른 고절한 무공을 배우려고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상승 무공을 구하기가 쉽지 않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가전 무공을 다시 제대로 수련하는 방법밖에 없다.
“이거 전부 무흔이 네가 펼치는 삼재검법을 보고 깨달은 거야. 12성까지 익히면 과연 다른가 싶더라.”
나쁜 선택은 아니지만 무흔은 대호에게 다른 방법을 제안했다.
“너도 운경각에서 맞는 무공을 한번 찾아봐.”
대호가 바로 손을 저었다.
“난 책 보고는 못 하겠더라. 사부가 옆에서 가르쳐줘야 그나마 할 수 있거든.”
그렇긴 하다. 책을 보는 것과 직접 지도받는 것은 다르다. 직접 지도 받으면 일단 형(形)을 이해하기 유리하다. 게다가 구결의 심득 또한 얻을 수 있으니. 그 시간과 이해도에서 커다란 차이가 있다.
물론 무흔에게는 그런 문제점이 없다.
그는 책을 읽는 순간 기본적인 내용을 완전히 파악하는 5성 단계에 이르게 되니까.
대호가 용봉대 연무장 쪽을 바라보며 화제를 돌렸다.
“너희 아가씨는 벌써 떠난 것 같은데 넌 왜 안 가고 있어?”
무흔은 텅 빈 연무장을 보며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이곳에 혼자 있다고 생각하니 영 기분이 나빴다.
“아가씨는 다른 대원이랑 같이 갔어.”
“버림받았구나?”
“버림은 무슨, 자유를 얻은 거지.”
무흔은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백단영이 누구와 움직였는지는 모른다. 아마도 장후성과 남궁이화 등이라고 짐작할 뿐.
“그래서 넌 어떻게 할 건데?”
대호의 표정에서 이곳에 같이 있어 줬으면 하는 바람이 엿보였다.
물론 그럴 수 없다. 대신에 자신의 속셈을 꺼냈다.
“대호야, 같이 갈까?”
“어딜?”
“하남백가. 내가 머슴이라 제대로 대접을 못 하겠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오가며 둘이 같이 다니면 재미있지 않겠냐?”
정파의 구대 문파나 무림 세가 자식이라면 젊었을 때 한 번씩 한다던 강호 협객행을 한번 흉내 내보고 싶었다.
“둘이서?”
대호가 정확한 의도를 몰라 다시 물었다.
“가는 길에 나쁜 놈들 있으면 막 때려잡고 그러는 거지.”
“아하!”
대충 감을 잡은 모양이다. 대호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머금었다.
무흔이 한마디 더 덧붙였다.
“여기서 죽치고 있는 것보다 낫지 않을까? 무공수련도 실전이 우선이야.”
“크크, 좋아! 우리 둘이 함께라면 성과가 있을 것 같아.”
대호가 일어나서 짐을 싸러 가자고 했다.
무흔은 앞으로의 일정을 머릿속에서 그렸다. 아직 이 세상에 완전히 적응하지 못한 그로서는 대호를 데리고 다니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
무흔은 전장에 맡겨두었던 묵천신검을 찾아 허리에 맸다.
겉보기에 묵천신검은 전혀 명검처럼 보이지 않고, 그냥 꽤 괜찮은 검처럼 보였기에 그가 소지하고 다녀도 어색하지 않았다.
앞으로 한 달. 두 사람은 급할 것이 없었다. 느릿느릿 주변을 구경하며 하남백가가 있는 낙양 쪽으로 여행했다.
그들은 객잔에서 끼니를 때우고 잠을 잤다. 무림맹을 떠나고 나흘이 될 때까지 별다른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닷새째 되는 날 그들은 고산령이란 높은 고개를 넘게 되었다.
높은 산봉우리 사이로 난 험준한 고갯길이었다. 고갯길이 꽤 길고 험했기에 그들은 객잔에서 아침 일찍 출발했다.
“음, 저들은 뭐지?”
대호가 고개 입구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가리켰다.
대략 사오십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고개를 넘을 채비를 하고 있었다. 말을 탄 일부 병사와 물건이 담긴 수레를 보니 상단이나 표국 같기도 했다.
무흔도 다소 어리둥절했다.
원래대로라면 그는 하남백가에서 무림맹으로 올 때 이 길을 지나갔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기억이 지금의 무흔에게는 없다.
무흔이 대답하지 않고 입을 닫고 있자 유심히 상황을 살피던 대호가 감을 잡은 듯 설명했다.
“고개를 넘으려고 사람들이 모인 거야. 이 고갯길에 산적이 있나 봐. 혼자 넘는 것보다 여럿이 함께하면 유리하니까 같이 가려고 모인 거고.”
말을 듣고 보니 모여 있는 사람들이 종류별로 구분됐다.
소규모 상단과 이를 호위하는 무사 몇 명이 전체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나머지 십여 명은 그들과 마찬가지로 지나가는 객이었다. 산적이 있는 곳을 혼자 지나갈 만큼 간이 큰 사람은 없다. 그나마 함께 움직이면 서로 도움 되니까 모여 있는 것이다.
무흔과 대호는 냉큼 사람들 틈에 섞였다.
두 사람이 떠나기만을 기다리며 쉬고 있을 때 중년인 한 사람이 그들에게 다가왔다. 붉은 수실이 달린 멋들어진 장검을 찬 무인이었다.
“무림인이신가요?”
중년인이 그들이 허리에 맨 검을 힐끔 보며 물었다.
무흔이 대답하기 전에 대호가 먼저 대답했다.
“그렇습니다만 무슨 일입니까?”
“사실은 저희가 무사 숫자가 부족해서 도움을 요청할까 합니다.”
영문을 모르는 대호와 무흔의 앞에서 중년인이 먼저 자신을 소개했다.
“저는 낙양 무관 소속 임호군이라 합니다. 현재 비룡상단을 호위하고 있고요. 산동성에서 개봉을 거쳐 낙양으로 돌아가는 중입니다.”
대호가 상단을 호위하는 무사를 쭉 훑으며 의문을 표했다.
“먼 길을 가시는데 의외로 호위하는 분들이 적네요.”
“그게…….”
비룡상단이 산동성에서 출발할 때 호위무사 수는 스물을 넘었다. 그런데 오는 중간에 산적을 만나 한바탕 일을 치르다 보니 절반에 달하는 사상자가 발생했다.
“산적과 대립이 심해졌나 봅니다?”
“그렇죠. 최근에 산적들이 통행료를 올리면서 문제가 불거졌지요. 예전 통행료라면 감수하고 지나갔을 텐데 대폭 올리는 바람에 산적과 한바탕 하게 됐습니다. 그 결과 부상자가 늘어서…….”
대충 어떻게 된 일인지 알 것 같았다. 현재 상단의 호위 숫자로는 이곳 고산령을 쉽게 통과하지 못하리란 생각에 의뢰한 것이다.
“어차피 이 고개를 넘어가실 거라면 저희를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물론 능력에 따라 수고료는 지급해 드립니다.”
임호군의 의도는 두 사람을 호위무사로 하루 채용하겠다는 뜻이었다. 상단 입장에선 무사 수를 불리는 것만으로도 산적을 압박할 수 있으니 효과가 있다고 본 것이다.
어차피 고개를 건너야 하는 무흔과 대호로로서는 오히려 공짜 돈을 버는 것 아닌가. 물론 이 계약이 절대 공짜가 아님은 안다. 돈으로 고용된 용병은 유사시에는 말 그대로 칼받이가 되어야 하니까.
“일당은 두 분 합쳐서 은자 한 냥입니다.”
일당은 적당한 수준이었다.
무흔과 대호가 흔쾌히 수락하자 임호군이 안심하며 질문을 해왔다.
“두 분 소협께선 혹시 출신이 어디십니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임호군이 그들에게 물었다. 아무래도 유명 무림세가 출신이라면 산적과 대항하기에 훨씬 유리하니까.
“아, 저희는 무림맹에서 왔습니다.”
“오오! 무림맹!”
마치 구원자를 만난 것처럼 임호군이 탄성을 터트렸다. 무림맹이란 세 글자가 주는 위압감이 대단히 크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그였다.
“아! 그, 그래서 무림맹 어디에 속해 계십니까? 청룡대? 백호대?”
한껏 기대를 부풀리며 두 사람을 바라보는 임호군에게 무흔이 조용히 대답했다.
“운경각이라고 무림맹 서고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어째 이상함을 느낀 임호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직책으로 보니 무사가 아니라 문사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옆에 있는 덩치 큰 이 남자는 다르겠거니 하며 그다음 대답을 기다렸다.
대호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저는 대원들의 병장기를 준비하고 갈고 닦아주는…….”
“아, 됐습니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임호군은 더는 듣고 싶지 않았다. 옆의 덩치 큰 이 남자도 정상적인 무림맹 무인이 아닌 것이 확실했다.
일당으로 약속한 은자 한 냥이 아까웠다. 이 두 사람은 그냥 머릿수를 채우는 이상의 의미를 기대하기 힘든 자들이다. 그의 얼굴에 다시 수심이 깃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