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 속의 엑스트라 4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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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210회 작성일소설 읽기 : 무림 속의 엑스트라 44화
44화. 매화곡의 방문 (4)
마주한 순간 백단영은 상대의 기운이 보통이 아님을 눈치챘다.
매화곡의 장문 제자. 구대 문파나 오대세가 사람들은 매화곡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깔볼지 모르지만 그녀는 조금도 긴장을 누그러트릴 수 없었다. 매화곡이 어떤 곳인지 모르지만 그래도 무가 아닌가.
반면 그녀의 출신은 무가가 아닌 상단이다. 그런 이유로 그녀는 배운다는 생각으로 이 비무에 응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백단영은 상단 출신이 아니라 용봉대의 정예였다. 당연히 백단영이 허접스러운 소문파의 제자를 맞아 어렵지 않게 이기리라고 예상했다. 정작 백단영은 가문의 비전 무공은커녕 제대로 된 무공 하나 배우지 못했음에도 말이다.
“으음.”
마주한 은옥상을 노려보며 백단영은 어떤 무공을 사용할지 고민했다.
상대의 묵직한 기세가 그녀를 압박해오자 그녀는 선택할 수 있는 무공이 없었다. 이곳에 오기 전에 배웠던 무공으로 대적하기엔 상대의 기세가 너무 강했다. 그렇다고 운경각에서 읽었던 무공으로 대적하는 것도 무리였다.
제대로 된 무공이 없었던 데다 익힐 시간도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가 머뭇거리고 있을 때 은옥상이 그녀를 향해 공격을 개시했다.
휘익-
은옥상의 검초는 살기가 어린 듯 위협적이었다. 지극히 단순해 보이지만 위력을 담은 일초가 그녀의 목을 향해 찔러왔다.
챙-
백단영은 가까스로 상대의 검을 쳐냈다. 동시에 그녀는 보법을 이용해서 상대의 측면으로 빠르게 돌아갔다. 몸이 움직이는 탄력을 이용해서 그녀의 검이 상대의 허리를 베어갔다.
챙-
두 검이 스치며 불꽃이 일었다.
백단영은 손이 찢어질 듯한 충격을 받았다.
놀랍게도 상대의 내력은 그녀를 가볍게 압도하고 있었다. 어릴 적부터 각종 영약을 먹은 그녀의 내공은 절대 작지 않다. 그런데도 충격을 감당하기 힘들다는 것은 상대의 내공이 일 갑자를 가볍게 상회함을 의미했다.
단 몇 차례의 합을 거치면서 백단영은 은옥상의 의도를 의심하게 됐다. 압도적인 수준 차. 이것은 비무가 아니었다. 상대는 그녀를 실력에서 압도했다. 그녀는 은옥상의 눈동자에서 그녀를 향한 적의를 읽고 내심 당황했다.
무흔은 상황의 심각함을 눈치챘다.
예상대로 은옥상은 백단영을 가지고 놀 실력이었다. 그런 그녀가 백단영의 얼굴을 그어놓겠다고 사실상 공개적으로 선언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어떻게든 막아야겠다고 생각한 무흔은 슬그머니 옆으로 빠져나왔다. 많은 사람이 보고 있는 앞에서 그녀를 도울 수 없기 때문이다.
구경꾼들의 뒤쪽에 서서 무흔은 내력을 끌어올렸다.
여차하면 개입할 준비를 했다.
비무는 어지럽게 돌아갔다. 하지만 모두가 느끼고 있었다. 백단영이 속절없이 밀리고 있으며 간신히 상대의 검을 차단하고 있음을.
챙. 챙. 채챙-
은옥상의 검이 백단영의 가슴을 향했고, 백단영의 검이 급하게 공격을 막았다. 하지만 내력이 실린 검초가 완전히 무산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은옥상은 백단영의 검에 가로막히자 그 힘을 이용해 탄력적으로 튕기며 검로를 변환했다. 반면 백단영의 검은 충격에 억눌려 힘없이 방어가 허물어졌다.
백단영은 이를 악물고 검을 회수하려 했으나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휙-
은옥상의 검이 백단영의 얼굴을 찔러 갔다. 그야말로 최단거리를 가로지른 전광석화 같은 공격이었다.
백단영은 눈앞으로 들어오는 상대의 검날에 깜짝 놀랐다. 늦었다고 생각되는 순간 그녀의 몸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꼼짝 못 하는 상태에 무방비로 노출됐다.
은옥상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걸렸다.
“허억!”
구경하던 모든 사람의 입에서 비명이 터졌다. 그들은 백단영의 뺨을 가로지르는 검을 떠올리며 놀란 표정으로 눈을 부릅떴다.
따당!
약한 소음과 함께 은옥상의 검 끝이 살짝 흔들렸다. 아슬아슬하게 검이 백단영의 얼굴을 스치며 목에 걸렸다.
“으악!”
비명과 함께 백단영은 입을 쩍 벌렸다. 그녀는 자신의 목에 겨누어진 검을 보며 눈을 의심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백단영의 얼굴을 향하던 검이 급하게 방향을 바꾸어 목을 향했으며 동시에 검이 목을 베기 직전에 멈춘 것처럼 보였다.
은옥상의 시선이 뒤쪽에 서 있는 무흔을 느릿하게 향했다.
그녀는 백단영의 얼굴을 칼로 긋기 직전 갑자기 날아온 무형의 지력이 검날을 때리며 검의 진로를 방해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물론 그녀가 작심하고 힘껏 휘둘렀다면 그 정도 위력의 지력에 검의 궤적이 흔들리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은옥상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고 검을 내렸다.
“많이 배웠습니다.”
은옥상은 백단영을 향해 읍을 해 보이고는 검을 다시 돌려주었다.
백단영은 검을 늘어트린 채 입술을 잘근 씹었다. 은옥상과 맞서는 순간 직감적으로 자신이 부족하다는 것은 알았다. 하지만 이렇게 일방적으로 밀릴 줄 몰랐다.
더구나 상대에게서 느껴졌던 살기는 의문이었고, 마지막 순간 그녀를 두고 벌였던 상대의 조롱은 참기 힘들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패자는 말할 수 없다.
그녀가 어깨를 축 늘이고 들어가자 걱정이 된 남궁이화의 목소리가 그녀를 깨웠다.
“괜찮아?”
“으응.”
백단영의 주위에서 뭐라고 떠드는 소음이 들려왔으나 그녀에게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은옥상이 장후성을 향해 말했다.
“비무 시간을 갖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사례로 식사를 한 끼 대접하고 싶은데 어떠신지요?”
“아, 그, 그게…….”
장후성은 결정하지 못하고 옆 동료의 눈치를 봤다.
재빨리 구진광이 끼어들었다.
“이야, 은 소저! 실력이 상당하네요. 용봉대에서 이런 인재를 놓치다니요. 함께 식사라…… 좋습니다. 모두 환영할 겁니다.”
구진광이 머뭇거리는 장후성을 떠밀었다. 자연스럽게 모용예가 따라갔다.
남궁이화가 백단영에게 물었다.
“단영아, 넌 어떻게 할래?”
백단영은 힘이 빠진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자신과 겨루었던 은옥상의 얼굴을 다시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 그럼 나도…….”
하지만 백단영이 그녀를 떠밀었다. 어쩔 수 없이 남궁이화도 장후성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장후성과 은옥상이 앞장 서자 용봉대원 몇이 그 뒤를 따랐다.
무흔과 진풍은 매화곡 제자들의 안내자여서 어차피 따라가야 할 처지다. 진풍이 남은 매화곡 제자들을 인솔했다.
“이야, 은 소저 실력을 다시 봤습니다. 제 생각엔 용봉대 대원을 바꿔야 할 것 같네요. 솔직히 백 소저보다 은 소저가 더 합당하다고 생각지 않습니까?”
진풍이 산산에게 듣기 좋은 소리로 아부했다. 매화곡의 산산이 비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호호, 생각보다 용봉대 수준이 높지 않군요.”
“하하, 그렇죠? 그게 다 상단의 딸이…….”
진풍의 뒤에서 무흔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자식이 그것도 말이라고 지껄이고 있다.
“야, 진풍!”
무흔이 진풍의 등을 툭 쳤다.
“왜?”
진풍이 신경질적으로 돌아봤다. 대충 아가씨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으니 방해하지 말라는 경고다.
툭-
그때 진풍의 품에서 책이 하나 뚝 떨어졌다.
“어? 뭔가 떨어졌네요. 이게 뭐예요?”
산산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책을 주웠다. 책은 운경각 지하 서고에서 몰래 가지고 나온 춘화첩이었다.
책이 떨어진 것을 발견한 진풍의 안색이 사색이 됐다. 무심코 책을 주워 책장을 넘기던 산산의 얼굴이 붉게 변했다.
“아, 이게 뭐예요? 이 자식, 완전 변태잖아!”
산산이 씩씩대며 책으로 진풍의 머리를 내려쳤다.
퍽!
그 다음 이어서 손바닥이 진풍의 뺨을 갈겼다.
짝!
졸지에 얻어맞은 진풍은 뺨을 손으로 어르며 극구 부인했다.
“그, 그게 아니라…….”
“아니긴 뭐가 아녜요!”
산산이 버럭 화를 내며 동료를 모아 앞으로 가버렸다.
진풍은 얼이 빠진 표정으로 주춤거렸다. 무흔은 진풍을 스쳐 지나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내가 그거 갖고 가지 말랬지? 말 되게 안 듣는다, 너도.”
무흔은 빠른 걸음걸이로 매화곡 여인들을 따라갔다.
걸음을 걸으며 무흔은 백단영이 있던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제는 모두 헤어진 그곳에 여전히 백단영 혼자 멍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녀의 아픈 심정이 전해진 무흔 역시 마음이 착잡했다.
***
무림맹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객잔에 일행이 모였다.
그들은 번잡한 아래층을 지나 한적한 이 층에 자리 잡았다.
“이곳이 요리를 잘하기로 꽤 유명합니다.”
풍류객답게 구진광은 유명한 맛집을 꿰고 있었다.
무흔과 진풍은 그들과 떨어진 한쪽 구석에 따로 앉았다. 용봉대가 아니었기에 저들과 같은 상에 앉을 수 없었다. 특히 무흔은 백단영이 없는 저 자리에 낄 생각 자체가 없었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마교 소교주인 은옥상. 그녀에게 찍히는 것만은 조심해야 하기 때문이지만.
음식을 주문하고 기다리는 동안 장후성 쪽 탁자에서는 자연스럽게 비무에 관한 이야기가 시작됐다.
“은 소저, 정말 대단하시네요. 태어나자마자 무공을 배우셨나 봅니다.”
구진광이 침을 발라가며 은옥상에게 아부했다. 그에 은옥상은 별것 아니란 투로 대답했다.
“저희 매화곡도 꽤 하거든요. 전 무림맹이 엄청 강할 줄 알았어요.”
무림맹 전체를 싸잡아 내리는 것 같아 구진광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안면을 찌푸렸다. 은옥상은 타인의 반응은 전혀 상관 않고 말을 이었다.
“오늘 저랑 겨루었던 백단영 소저는 용봉대 내부에서 어느 정도 수준인가요?”
구진광이 재빨리 대답했다.
“알다시피 백 소저는 무가 출신이 아니라 상단 출신입니다. 그래서 끝에서 세는 게 빠르죠. 하하.”
“아하, 그래서 그렇게 약했군요.”
은옥상은 백단영을 완전히 깔아뭉갠 후 장후성을 향해 물었다.
“장 소협은 어느 정도인가요? 당연히 첫 번째겠죠? 그럼 이곳 무림맹 전체에서는 어느 정도 되시나요?”
장후성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을 망설이고 있을 때 남궁이화가 끼어들었다.
“은 소저, 오늘 백 소저랑 겨룰 때 마지막 초식은 다소 심한 것 아닌가요?”
“네? 뭐가요?”
“자칫하면 백 소저가 얼굴을 다칠 뻔했잖아요.”
“아, 그거요? 제가 비무 들어가며 미리 말씀드렸을 텐데요? 제 검법이 다소 잔혹하다고요. 저희 문파 비전절기가 그러하니 어쩔 수 없죠. 제가 미리 말하지 않은 것도 아니고 알았으면 당연히 사전에 대비해야죠.”
뻔뻔스러운 대답에 남궁이화가 머리를 쓸어 넘기며 적대감을 불태웠다.
은옥상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장후성에게 시선을 돌렸다.
“정말 백 소저가 다쳤으면 어떻게 하실 생각이었어요?”
장후성은 상대방의 의도를 명확하게 알 수 없어 제대로 답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은근슬쩍 질문을 피했다.
“은 소저의 고절하신 솜씨를 보니 그럴 일이 없다고 생각됩니다만.”
“남궁 소저가 심했다고 저를 다그치잖아요? 솔직히 운이 좋았죠, 백 소저가. 비무 중에 불상사가 일어날 뻔했는데 장 소협은 아무런 생각이 없었나 보죠?”
“비무는 서로에게 공정한 무공 대결이라 생각합니다. 비무 중에 다른 사람이 끼어들 수 없지요.”
“아하, 그래서 오늘 가만히 계셨군요?”
장후성은 무슨 의미인지 몰라 잠자코 있었다.
은옥상의 입가에 살짝 비웃음이 걸렸다. 그녀는 물을 한잔 마시고는 재차 말을 이었다.
“알다시피 저는 오늘 백 소저와 모용 소저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을 비무 상대로 골랐어요. 만일 모용 소저였어도 장 소협은 똑같이 가만히 있었을까요?”
모용예의 안면에 살짝 불쾌감이 일었다.
장후성 역시 기분 나쁜 표정으로 대답했다.
“누구였던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비무에 함부로 끼어들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니까요.”
“호호, 기억해 두겠어요. 자, 밥이나 먹죠.”
마침 요리가 들어왔다.
요리가 분배되는 중에 은옥상의 시선이 저쪽 구석에 앉은 무흔을 잠시 향했다.
무흔도 밥을 먹기 시작했다.
그는 저쪽 탁자에서 오가는 대화에 기분이 팍 나빠졌다. 어째 모두가 백단영을 무시하는 발언뿐이었다.
그와 달리 진풍은 오히려 맞장구를 치듯 비웃음을 머금었다.
무흔은 짜증을 팍팍 내다가 이쪽을 바라보는 은옥상과 눈길이 마주쳤다.
‘젠장, 내가 지법을 날린 사실을 알고 있어.’
하긴 은옥상 정도의 고수라면 모를 수 없다. 그나마 무흔이 고강한 무공의 소유자란 사실을 모두 앞에서 밝히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할까.
마침 그때 산산이 벌떡 일어나서 무흔이 앉은 탁자로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