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 속의 엑스트라 5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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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230회 작성일소설 읽기 : 무림 속의 엑스트라 54화
54화. 육지신마 (2)
산불은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다. 불이 나면서 모든 상황이 변했다.
불이 확인되는 순간 흑귀는 검을 내던지고 바로 튀었다. 인질이고 뭐고 신경 쓸 단계가 아니었다. 이미 동료인 녹림팔괴와 백귀가 목숨을 잃은 마당에 그가 챙길 사람도 없다. 대붕산채 일이야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그가 알 바 아니었다.
무흔은 굳이 흑귀를 추격해서 죽일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그가 신경 써야 할 녀석이 아니었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면서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제법 제대로 불이 붙었다.
불은 그의 마지막 안배. 불을 지른 사람은 바로 대호였다. 불 때문에 벌어지는 혼란은 인질을 구해내면 도주에 유리하고 인질을 구해내지 못하면 전환점의 계기가 되니 어떤 경우든 쓸모가 있을 터였다.
물론 이 화재로 오가는 상단을 위협하는 대붕산채 자체를 끝장내버리겠다는 생각도 있었다.
적어도 고산령에서의 일을 빌미로 납치 보복을 일삼는 산적을 내버려 둘 생각이 전혀 없었으니까.
무섭게 번져나가는 불을 바라보던 무흔은 장후성을 비롯한 후기지수가 모여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불을 확인한 그들 역시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무흔은 장후성의 마혈을 풀어주고 몸을 돌렸다. 이어서 장후성이 모용예를 비롯한 다른 사람의 마혈을 풀었다.
이제는 떠날 때다. 무흔은 그들을 본 척도 않고 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남궁이화가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극서생!”
물론 무흔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자연스럽게 몸을 날렸다. 묶인 인질을 구하는 것은 어차피 후기지수들 담당이다.
뒤쪽에서 몇 차례 더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으나 그는 무시하고 숲속으로 들어갔다.
그는 대붕산채가 내려다보이는 봉우리 위로 올라갔다.
활활 타오르는 대붕산채가 보였다. 이제야 불이 난 것을 알아차린 산적들이 불을 끄기 위해 날뛰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저 상황이라면 아마 인질은 무사히 구출되었고 협상은 깨졌을 것이다.
속이 후련했다. 며칠간 백가상단과 백단영에게 누를 끼쳐 답답했던 마음이 사그라 들었다.
한참 산채를 바라보던 무흔은 다시 죽립을 덮어쓰고 길을 떠나려고 일어섰다. 걸음을 옮기려던 무흔의 몸이 일순간 경직됐다.
그의 눈앞. 깡마른 노인이 조용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얼핏 피골이 상접한 이상한 외모임에도 주름진 눈에서는 살벌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헉! 이렇게 가까이 있었는데도 몰랐다니!’
무흔은 죽립 틈 사이로 노인을 살폈다.
노인의 몸에서 은연중에 느껴지는 강력한 기운. 절대로 평범한 노인이 아니었다.
적어도 그와 버금가는, 아니 훨씬 상위의 고수였다. 누구인지 어디에서 왔는지 도무지 짐작되지 않았다. 절대 대붕 산채의 산적이 아니었다.
“클클, 넌 누구냐?”
노인의 입에서는 쇳조각이 부서지는 듯한 거북한 소리가 났다. 묘하게 신경을 거스르는 목소리에 무흔은 귀를 막고 싶었다.
위험을 느낀 무흔은 노인을 상대하지 않고 스쳐 지나가려 했다. 그러나 그때 다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클클, 감히 본좌 육지신마를 무시하는 놈이 있었다니.”
걸음을 옮기던 무흔의 움직임이 멎고 간단한 질문을 쏟아냈다.
“육지신마? 마교인가?”
“흐흐, 그렇다. 마교 서열 이십사 위다.”
무흔은 소설 속에서 접했던 육지신마를 떠올렸다.
특이하게 손가락이 여섯 개인 괴물. 지닌 바 능력보다 그 잔인함 때문에 기억에 남는 자였다. 백단영이 본격적으로 무림을 돌아다니면서 몇 차례나 맞부딪힌 마교의 고수. 하지만 아직 중원에 출현할 때가 아니지 않은가.
무엇보다 흔쾌히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상대의 행동에 무흔은 화들짝 놀랐다.
아직 마교는 본격적으로 중원에 재진출하지 않았다. 일부 몰래 정탐차 들어온 자는 그 신분을 숨기고 움직인다. 그런 상황에서 당당하게 정체를 드러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무흔은 내심 그 이유를 짐작하고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상대는 그를 살려둘 생각이 전혀 없는 것이다. 갑자기 안면에 땀이 쭉 흘렀다.
그나마 죽립을 쓰니 좋은 점이 있다. 표정 변화가 상대에게 발각되지 않는다. 죽립이 없었더라면 그는 표정에서부터 한 수 지고 들어갔을 것이다.
무흔은 담담한 어조로 상대의 말을 되받았다.
“마교 이십사 위? 그래서 어쩌라고?”
그의 목소리는 흑귀를 상대할 때처럼 높낮이가 없이 중후하고 단조로웠다. 마치 상대를 안중에도 두지 않는 듯한 말투였다.
모두 무흔의 만변귀공에 의해 변조된 목소리다.
육지신마가 묘한 눈초리로 그를 노려봤다. 잠시 무서운 기세를 발하던 육지신마가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는 용봉대의 장후성과 남궁이화라는 두 사람을 추적해왔다.”
갑작스러운 선언에 무흔은 가슴이 섬뜩했다. 그는 동요 없이 조용히 상대를 주시했다. 상대에게서 중요한 정보가 튀어나올 분위기다. 역시나 다시 입을 연 육지신마의 말은 놀라웠다.
“그 이유는 그들이 최근 일어난 우리 마교인의 죽음과 적지 않게 연관되어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바로 적황쌍마와 풍운쌍마다.”
적황쌍마와 풍운쌍마는 어쩌다 보니 그가 죽인 자들이었다. 역시 육지신마가 나타난 이유는 그와 관련되어 있었다.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 무흔을 앞에 두고 육지신마가 말을 이었다.
“적황쌍마는 마교 서열 이십오 위와 이십칠 위였다. 그런데 어이없이 죽었다. 죽은 장소에는 장후성과 남궁이화가 있었고.”
적황쌍마는 흑사방 사건과 청담호 호수에서 그에게 죽었다. 그들의 무공이 어째 고강하더라니 무려 서열 이십오 위와 이십칠 위였나보다.
“그리고 풍운쌍마는 이십팔 위와 이십구 위의 인물이다. 이들 두 사람이 구가장에서 죽었다. 어이없게도 말이지. 이때도 장후성과 남궁이화가 있었다.”
무흔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가 언급한 네 마인 모두 그의 손에 죽은 자들이다.
육지신마가 그를 향해 기이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장후성과 남궁이화가 대단하긴 하지만 그들은 죽은 네 마인의 능력에 미치지 못한다. 그래서 본좌는 암중으로 조사해왔다. 덕분에 오늘도 그들을 살피기 위해 이곳 대붕산채로 왔다. 결과는…….”
무흔은 이어지는 말을 듣지 않아도 무슨 말이 나올지 짐작했다. 아무래도 오늘은 빠져나가기 쉽지 않을 것 같다. 무엇보다 마교가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는 점이 충격이었다. 의외로 알 수 없는 곳에서 위험이 덮쳐오고 있었다.
“결과는…… 너라는 이상한 녀석을 발견했다. 물론 앞서 죽은 마인과 아무런 상관이 없겠지만…….”
다행히 육지신마는 무극서생이 변장한 모습이란 점을 전혀 몰라보는 듯했다.
육지신마가 한 손을 쫙 폈다. 그의 손가락은 다섯이 아니라 여섯 개였다. 무흔은 이것이 별호가 정해진 이유임을 알 수 있었다.
무흔은 상대방과 상종하지 않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몸을 돌리며 무뚝뚝하게 중얼거렸다.
“나는 그들이나 당신에게 관심이 없소.”
그가 막 발걸음을 떼려는 순간 육지신마가 소리를 질렀다.
“멈춰라.”
무흔이 다시 돌아보자 육지신마가 그의 검을 가리켰다.
“나는 그 검에 흥미가 있다. 그 검은 풍운쌍마가 죽었던 구가장의 보검과 많이 닮았거든. 특히 검은색 특유의 칙칙한 빛깔이 말이지. 검을 볼 수 있겠나?”
그는 상대가 이미 자신을 풍운쌍마를 죽인 범인으로 사실상 확신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재빨리 머릿속으로 상대를 가늠했다. 겉으로 보이는 상대는 매우 강하게 느껴졌다. 깡마른 외모 때문인가? 눈에서 폭사하는 강인한 기운은 그의 오금을 저리게 했다.
육지신마의 서열은 이십사 위. 죽은 자들 중 가장 순위가 높았던 황마가 이십오 위다.
무흔은 지금까지 한 번도 황마가 자신보다 약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그가 황마를 죽일 수 있었던 이유도 전적으로 황마의 방심 때문으로 봤다. 즉 정면 승부라면 사실상 불가능이다.
육지신마는 황마보다 더 높은 순위의 고수다. 하지만 왠지 질 것 같다는 기분이 들지 않았다. 몇 차례 고수를 만나 위험을 감수하다 보니 익숙해진 것인가.
무흔은 피식 웃으며 육지신마를 노려봤다. 물론 죽립에 가려진 그의 눈은 보이지 않았고, 죽립 아래로 보이는 입가에 담긴 조소만 보였을 뿐이다.
스릉-
무흔이 검을 뺐다.
“보시오.”
당연히 무흔은 검을 넘기지 않았다. 단지 육지신마의 눈앞에 검을 들이댔을 뿐이다. 자신의 검을 순순히 검사하라고 넘겨주는 바보는 무림에서 살아날 수 없다.
시커먼 무거운 빛이 도도하게 빛났다. 멀리 번지고 있는 산불 때문에 검신이 번들거렸다.
“이름이 무엇인가?”
“묵천신검.”
“누가 만들었지?”
“구가장의 천수신장이요.”
무흔의 태연한 답변에 육지신마의 안색이 가볍게 변했다.
“설마…….”
미심쩍은 얼굴로 재차 그를 바라보는 육지신마를 향해 무흔은 번개처럼 검을 휘둘렀다.
번쩍!
검에서 뻗어 나오는 기운이 육지신마를 덮쳤다. 검을 보라고 들이민 상태여서 거리는 매우 가까웠다. 쉽게 피하기 어려운 기습이었다.
그러나 상대의 반응은 빨랐다. 몸을 젖힌 육지신마의 품에서 부채가 튀어나왔다. 테두리가 강철로 싸져 있는 특이한 부채가 활짝 펴지며 묵천신검을 휘감았다.
파바바박-
놀랍게도 묵천신검의 날카로운 공격이 부채에 의해 단번에 와해됐다.
“놀랍구나. 귀곡선(鬼哭扇)에도 밀리지 않다니!”
육지신마가 들고 있는 부채가 귀곡선인 모양이었다. 사실 놀라기는 무흔이 더 놀랐다.
갑작스러운 기습을 육지신마가 피한 것도 보통 일이 아닌 데다 작은 부채로 묵천신검의 공격을 막아낸 것은 예상 밖이었다. 이는 그만큼 육지신마가 대단한 고수임을 대변했다.
무흔은 검을 회수한 후 숨을 골랐다. 기습이 실패로 돌아간 이상 지금부터는 정식으로 겨뤄야 한다.
“맹랑한 녀석이군. 네놈이 풍운쌍마를 죽였느냐?”
무흔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육지신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절대 그들 둘을 동시에 죽일 무위가 아니거늘…….”
단지 무공의 고하로 삶과 죽음이 결정되지 않는다. 만일 그것이 절대적이라면 무흔은 이미 처음에 적황쌍마를 만났을 때 죽었어야 했다.
“침묵은 긍정을 의미하지.”
육지신마가 부채를 쫙 펴면서 기이한 미소를 지었다. 마교 인물을 죽인 범인이 그라고 확신한 듯했다.
촤르르르-
펴지던 부채가 일순간 딱 멈췄다.
무흔은 육지신마가 손가락이 여섯 개인 장점을 이용해서 부채를 더 자유롭게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받은 것은 돌려줘야지.”
육지신마가 귀곡선을 그를 향해 휘저었다.
쐐액-
놀랍게도 작은 은침이 귀곡선에서 폭사되어 순식간에 날아왔다. 기겁한 무흔은 다급하게 검을 휘둘렀다.
픽- 픽- 픽-
은침이 검신에 맞아 아래로 떨어졌다. 동시에 무흔의 신형이 뒤로 휘청했다. 은침에 적지 않은 내력이 실려 있었던 탓이다.
그가 채 자세를 잡기도 전에 다시 귀곡선이 허공에서 춤을 추었다.
슈슉-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은침이 불빛에 반짝이며 허공을 갈랐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타오르는 산채의 불빛이 없이 암흑 속에서 싸웠다면 절대 저 은침을 막을 수 없었을 것이다.
육지신마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마치 그를 향해 바람을 부치듯 귀곡선을 휘둘렀다.
그러자 더 많은 은침이 마치 비처럼 쏟아졌다.
픽- 픽-
은침과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이런 상태로는 더 위험해진다는 사실을 깨달은 무흔은 상대를 향해 거리를 좁혔다. 자연스럽게 잔백수라십이검의 오 검이 펼쳐졌다.
방어에 뛰어난 검로가 펼쳐지며 그의 전면으로 물샐 틈 없는 검막이 형성됐다.
날아오던 은침이 튕겨 나가는 것도 잠시, 무흔의 신형이 순식간에 육지신마를 따라붙었다. 동시에 제 칠 검이 펼쳐졌다.
육지신마 역시 가만히 당하고 있지 않았다.
촤르륵-
부채가 접히면서 일순간 귀곡선이 작은 쇠막대로 변했다. 내력이 동반된 귀곡선과 묵천신검이 허공에서 강한 충돌을 일으켰다.
콰앙-
거대한 기운에 무흔의 몸이 휘청하며 상체가 뒤쪽으로 활처럼 휘어졌다. 무흔은 부딪히는 순간 가슴을 압박하는 거대한 힘을 느꼈다.
사실상 그가 감당하기 힘든 내력이었다.
그의 자세가 순간적으로 흐트러짐을 눈치챈 육지신마의 신형이 그에게 바짝 접근했다.
귀곡선이 그의 가슴을 후려쳤다.
퍼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