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 속의 엑스트라 144화
무료소설 무림 속의 엑스트라: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11회 작성일소설 읽기 : 무림 속의 엑스트라 144화
144화. 마극삼비 (5)
백단영은 무흔이 준비한 재료를 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 하는 건데?”
“지금 덥죠? 시원한 것 해드릴게요.”
무려 커다란 얼음을 도마에 올려놓았으니 시원한 것을 만든다는 건 짐작하겠지만, 대체 무엇을 만들려는 지는 의문이었다.
무흔은 주방에서 빌린 푸주칼을 들고 얼음판 앞에서 숨을 골랐다.
다음 순간, 그의 기합과 함께 푸주칼이 얼음 위를 비스듬히 움직였다.
슥 슥 슥 슥-
눈에 보이지도 않을 속도로 푸주칼이 얼음판 위를 오갔다. 얼핏 보기에 엄청난 살초를 펼친 것 같은데 딱히 맞아 떨어지는 초식은 없었다.
깜짝 놀랄 속도로 움직이던 푸주칼이 멈추자 얼음판 위로 매끈하게 갈린 얼음조각이 눈처럼 쌓였다.
무흔은 갈린 얼음조각을 그릇에 담았다.
“너, 지난번에 천상문에서 먹었던 팥빙수를 만드는 거니?”
백단영의 질문에 무흔이 고개를 저었다.
“조금 다른 거요.”
이번에는 사과를 하나 꺼내 도마에 올렸다.
무흔은 마찬가지로 푸주칼을 들고 사과를 내리쳤다.
다- 다- 다- 다-
흡사 무 채를 썰 듯 사과가 조각조각 났다. 무흔의 칼질은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빨랐다. 엄청난 솜씨에 백단영은 감탄의 눈빛을 보냈다. 절정에 달한 검법을 저렇게도 써먹을 수 있구나.
무흔은 즙이 된 사과를 얼음조각을 담은 그릇에 쏟아부었다. 그다음 벌꿀과 몇 가지 요리 재료를 첨가했다.
무흔은 숟가락을 두 개 얹어 그녀 앞에 그릇을 내밀었다.
“여기요.”
“이게 뭐지?”
“흠… 슬러시라 하는 건데요. 사과 슬러시.”
“풉.”
백단영이 웃음을 참지 못하고 킥킥 웃었다.
무흔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먹어본 적 있어요?”
“아니.”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백단영은 사과 슬러시를 숟가락으로 떠서 입에 넣었다.
“흐아, 맛있어. 괜찮은데?”
그녀가 환하게 웃으며 다시 슬러시를 퍼서 입에 넣었다.
“원래 이게 무공 수련 후 먹으면 맛이 죽입니다.”
무흔은 으스대며 자신도 숟가락을 놀렸다. 역시 맛이 나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정신없이 슬러시를 먹었다.
그릇이 거의 빌 때쯤 무흔이 고민했던 제안을 꺼냈다.
“이걸 무림다루의 차 메뉴에 넣을 생각인데요. 어때요?”
“나쁘진 않은데…… 겨울에 추워서 먹을 수 있을까?”
“전 여름에 팔 건데요?”
“응?”
백단영은 이해할 수 없는 그의 말에 눈을 깜박였다.
무흔은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았다. 그는 개봉의 한 다루 건물 아래 지하를 깊게 파서 그곳에 얼음을 저장할 석빙고를 건설할 생각이었다. 현대의 냉장고와 보온병의 단열 원리를 이용한 최고의 저장소 말이다.
“그렇게 하면 겨울철 얼음을 여름까지 보관할 수 있어?”
백단영이 의문을 표했다.
무흔이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
“물론 거기에 한 가지가 더 있죠.”
“뭔데?”
“빙공을 쓸 줄 아는 고수가 가끔 빙공으로 내부 얼음이 녹는 것을 막아주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빙공 쓰는 고수? 그게 누군데?”
“저도 이번에 안 사실인데요. 천상심공이 그쪽 계열이더라고요.”
무흔의 말을 곱씹어 보니 그런 것 같기는 했다. 그렇다면 가끔 얼음을 얼리는 역할을 해야 할 사람이 바로 백단영 그녀란 말이 아닌가.
“응? 그럼 넌?”
“전 알다시피 열담이랑 관련 있잖아요.”
무흔은 쏙 빠지겠다는 뜻이다.
기가 막힌 백단영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차피 무림다루 최대 지분을 가진 사람이 아가씨잖아요? 아가씨가 무공을 좀 써보시죠.”
“내가 기껏 다루 운영하려고 무공 익히는 줄 알아?”
“어휴, 왜 그러세요. 제가 보기엔 사람 써는 것보다 얼음 써는 게 훨씬 낫구만.”
생각해보니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 훨씬 바람직한 일이란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때 가서.”
대꾸할 말이 사라진 백단영이 반쯤 수락하고는 슬러시를 마저 먹었다. 확실히 굉장히 맛있었다. 이런 정도라면 아이들은 무척 좋아할 것 같았다.
“그럼 공사할 때 석빙고도 같이 만들겠습니다.”
무흔이 천연덕스럽게 공사 내용을 결정했다. 생각대로만 된다면 개봉의 명물이 제대로 탄생할 것 같았다.
***
느지막이 밥을 먹고 객잔을 떠난 두 사람은 주변의 절을 둘러보기로 했다.
그동안 바삐 움직이느라 느긋하게 세상 구경을 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내린 결정이었다. 사마극과 벌인 사투로 피로해진 심신을 추스를 시간이 필요하다는 판단도 영향을 미쳤다.
눈 덮인 사찰은 예상대로 멋진 안정감을 제공했다.
백단영은 눈과 마음이 정화되는 느낌이었다.
무흔은 그런 백단영을 눈에 담느라 눈이 정화되었지만.
하얀 세상에서 들려오는 스님들의 독경 소리에 무흔은 절로 마음이 차분해졌다. 절에 올 때 바랐던 대로 백단영 역시 한결 안정된 모습을 보였다.
대웅전에서 독경을 읊고 있는 스님을 멀리서 바라보며 두 사람은 각기 상념에 잡혔다.
백단영은 독경 소리에 마음을 열고 반야금강선공을 일으켰다. 조용히 서 있는 상황임에도 혈맥을 흐르는 기운이 거침없었다. 반야금강선공의 요체가 불교와 관련이 있다 보니 독경 소리가 오히려 도움을 주는 듯했다.
무흔은 눈을 감고 기도하는 척하며 백단영의 앞날을 고민했다.
백단영의 성취는 절대 낮지 않다. 이제는 사마극과 비등하게 올라섰다. 지금부터는 그녀가 주도적으로 헤쳐나갈 시점이고, 그가 관여할 부분은 사실상 많지 않다.
아마 앞으로 백단영은 용봉대 소속 후기지수들과 중원을 누비며 마교와 전투를 벌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용봉대는 이 겨울이 가기 전부터 본격적으로 마교를 견제하는 행보를 시작할 것이다.
‘그때는 장후성이 있었는데…….’
그때와 지금의 장후성은 달랐다.
무림맹에서 장후성을 키우려고 애를 쓰겠지만 분명히 예전 소설 때의 수준에 아직 미치지 못했다. 향후 백단영이 강호를 누비는 동안 가장 의지해야 할 사람이 장후성이건만 그런 버팀목이 사라지고 오히려 백단영이 반대로 도와야 할 상황에 빠진 것이다.
‘그렇다면 장후성의 역할을 대신할 자는…….’
현공이나 남궁이화는 그럴 능력이 없다. 고민하던 무흔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무림맹 주변에서 다른 사람을 찾아보던 그는 문득 자신을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예전과 가장 달라진 사람은 놀랍게도 장후성이 아니었고, 백단영도 아니었다. 바로 무흔 자신이었다. 예전 소설에서는 없었거나 있더라도 존재감이 조금도 없었던 무흔이란 호위무사가 지금은 장후성을 뛰어넘고 백단영보다도 높은 초강고수로 등장했다.
‘그렇다면 내가 사마극을 없앤다면 어떻게 될까?’
지금까지 한 번도 생각지 않았던 고민을 하게 됐다. 지금까지는 사마극과 대항할 인물은 당연히 백단영과 장후성이라고 못 박고 있었다. 헌데, 그 기본 가정이 와장창 흔들렸다.
‘사마극을 확실히 이기려면 새로운 무공을 개발해야겠어.’
그 무공을 그가 사용하든 백단영이 사용하든 그것은 차후의 문제다. 새로운 목표가 생긴 그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무흔? 뭐해?”
그가 주먹을 쥐는 장면을 본 백단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흔은 슬그머니 손을 펴며 한바탕 웃음을 터트렸다.
“아하하, 아무것도 아닙니다.”
대웅전을 나온 두 사람은 옆에서 연등을 처마에 매다는 스님을 만났다. 대나무 골대 위로 각종 색상지가 연꽃 모양으로 붙여진 알록달록한 연등이 예뻤다. 처마 곳곳에 매달려 바람에 흔들리는 연등을 보자니 가슴이 평화로웠다.
무흔은 연등에 매달린 꼬리에 적힌 축원시를 읽으면서 미소를 지었다. 대부분 가족의 평온과 국가의 번영을 기원하는 축사가 적혀 있었다.
“우리도 하나 매달까?”
백단영의 제안에 무흔은 은전 한 냥을 내고 연등을 두 개 골랐다. 백단영에게는 분홍빛 연등을, 자신에게는 초록빛 연등으로 나누었다.
두 사람은 서로 등을 돌리고 매달린 연등 꼬리에 각자 원하는 소망을 써넣었다.
무엇을 쓸지 무흔은 고민했다. 그가 이곳 세계에 존재하는 이유는 단 하나, 백단영을 살리기 위함이다. 백단영이 오래오래 사는 것이야말로 그의 유일한 바람이 분명했다.
만수무강이라 쓰려고 했으나 어째 고리타분한 느낌이다. 그는 붓을 들고 영(永)을 썼다. 길다는 뜻이니 즉 그녀가 오래 살라는 염원을 한 글자로 표현한 셈이다.
“뭐라고 썼어?”
백단영이 자신의 연등을 슬쩍 감추며 물었다.
“흐음, 그게…….”
무흔은 그대로 말해주기가 쑥스러워 말꼬리를 흐리다가 마지못해 쓴 것을 보여주었다.
무흔의 연등을 본 그녀가 잠시 눈을 돌리지 못했다.
당연히 무흔 역시 그녀의 연등이 궁금해졌다. 쓱 보려고 고개를 내밀었더니 화들짝 놀라서 연등을 뒤로 감추었다.
그냥 내버려 둘 무흔이 아니었다.
잠시 엎치락뒤치락 몸싸움 비슷한 장면이 일다가 그녀를 제압한 무흔이 연등을 빼앗아 두 연등을 나란히 눈높이에 들었다.
놀랍게도 마찬가지로 똑같이 영(永)자가 적혀 있었다.
“어째 우리 둘은 생각하는 게 같은가 봐.”
기분이 좋은 듯 백단영의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두 사람은 처마 빈 곳에 연등을 매달았다. 영자가 쓰인 분홍빛과 초록빛의 두 연등이 예쁘게 걸렸다.
아래에서 연등을 올려다보며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아름다웠다.
과연 그녀는 무슨 의미로 영자를 적었을까.
백단영이 오래오래 살라고 적어 넣은 그와는 아마 다른 의미가 아닐까. 무흔은 그런 생각을 하며 미소를 머금었다.
백단영은 연등을 올려다보며 흐뭇한 기분을 만끽했다. 무흔이 무슨 이유로 영자를 썼는지 모르지만 자신과 같은 생각으로 썼다고 믿기로 했다. 그녀의 영(永)자는 두 사람의 좋은 관계가 영원히 지속하기를 바란다는 소망이었다.
***
그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한 여곽에서 사마극은 가부좌를 틀고 명상에 잠겨 있었다.
지금 그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수하인 마극삼비가 깨진 것은 사실 큰 타격이 아니었다. 백단영과 무흔의 능력이 예상외로 향상되었다는 점을 간과한 덕분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최근 들어 승승장구하면서 마극삼비가 나태해진 이유도 있었으니까. 정말 목숨 걸고 붙었다면 과연 어떻게 되었을지는 모른다.
허나 그에겐 마극삼비가 절대 밀리지 않으리란 자신감이 있었다.
그보다 그가 집중한 점은 그의 공격을 막은 무흔의 무공이었다.
무려 마교의 최고 무공이라 불리는 천마패를 무력화시킨 무공이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무공이 낯설지 않았다. 흡사 서로 상성이 어울려 융화되는 그런 기분이었다.
“마공이었나?”
그것마저 의심됐다.
상단 사람이자 무림맹 사람인 무흔은 마공과 거리가 멀다. 그런데 어째 그 무공이 마공과 유사한 성질을 지녔다는 특유의 감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크으, 거참.”
사마극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설사 마공이라도 마공 최고봉에 자리한 천마패를 상대할 수 없다. 즉 무흔의 무공은 다른 방향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천마패는 지극히 패도적인 무공이었다. 그 어떤 무공도 위력 면에서 넘보기 힘든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 무공을 부드럽게, 그야말로 물 흐르듯 무력화시켰다.
물론 무흔의 무공이 천마패를 압도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밀렸다. 하지만 그런 정도만으로도 그는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런 종류의 무공은 정파라면…… 무당이나 화산의 도가 계열 무공 가운데 일부 있다고 했던가. 무흔과 무당의 연관성을 찾아보던 사마극은 금방 고개를 저었다.
무흔은 무당과 전혀 접점이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정파 쪽 외에 사파 쪽이라면 은옥상이 익히는 천마류가 그런 성질을 띠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은옥상이 부드러움을 기반으로 하는 천마류를 익힌 이유는 단순했다. 여인에게 더 적합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천마패를 익힌 그에게 대항하기 위해서다.
동일한 무공인 천마패를 익혀 힘 대 힘으로 대결한다면 은옥상이 불리하기 때문이다.
“어? 은옥상?”
순간 사마극은 무흔과 은옥상의 접점을 찾아냈다. 무흔과 은옥상은 여러 번 만났다.
“설마 그녀가 천마류를 알려줬을까?”
이내 사마극은 웃으며 다시 고개를 저었다.
마교 최강의 무공이 외부로 유출되는 일은 있을 수 없었으니까, 또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으니까.
정답을 찾아내지 못한 사마극은 다른 생각으로 넘어갔다.
정작 그를 혼란에 빠트린 것은 무흔이 아니었다.
바로 백단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