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 속의 엑스트라 143화
무료소설 무림 속의 엑스트라: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26회 작성일소설 읽기 : 무림 속의 엑스트라 143화
143화. 마극삼비 (4)
무흔은 행낭에서 금창약을 꺼냈다.
“이거 발라보세요. 외상 치료에 대단히 효과가 좋아요. 무려…… 귀의 어르신께서 개발하신 약이거든요.”
무흔은 연연의방을 들릴 때마다 귀의에게 좋은 약을 얻곤 했다. 그가 몸을 자주 다치는 무림인이기에 귀의도 그에 맞추어 약을 챙겨줬다.
백단영은 솔깃하여 통을 열었다. 하얀빛을 띠는 투명한 금창약이 향기로운 냄새를 풍겼다.
“와, 좋아 보여.”
“그렇죠. 실제 효과도 끝내줍니다.”
마극삼비에게 두들겨 맞아 멍이 수두룩하게 든 두 사람이기에 금창약을 바르는 것은 필수였다. 가만히 있어도 통증이 전해지는 판이니 설사 그 약이 효과가 별로라고 하더라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다만 문제가 발생했다.
붓고 멍든 부위가 전신 곳곳에 존재하다 보니 옷을 입은 상태로 바르기 어렵다는 점이다. 두 사람이 각방을 사용하고 있다면 문제없지만 지금 같은 방을 쓴다.
생각해보니 어쩔 수 없이 오늘은 같은 방에서 잠을 자야 할 판이다. 삼경이 지난 후라 주인장을 깨워서 방을 하나 더 달라고 할 수도 없다.
그런 문제를 금방 깨달은 무흔과 백단영은 서로 눈치를 보며 서먹해졌다.
“에이, 뭐 우리 둘이 같이 야영한 날이 며칠인데요. 거기다 예전에 동굴에 갇혔을 때 껴안고 자기도 했는데…….”
“응? 언제 껴안고 잤어? 너 자꾸 없었던 일 만들지 마.”
백단영이 얼굴을 붉히며 항의했다.
어쨌든 무흔은 밀어붙였다.
“어쨌든 꼭 붙어 잔 적도 많았잖아요. 새삼 같은 방 쓴다고 이상할 것까진…….”
“그, 그렇지?”
무흔이 다시 못을 박았다.
“뭐, 어때요. 전 호위무사잖아요. 아가씨와 호위무사. 하여튼 그런 사이니까.”
“그렇겠지?”
“그렇죠.”
“으으윽.”
그때 그녀가 금방 고통에 몸을 웅크리며 신음을 토했다.
아픔을 삼키는 그녀의 모습이 안쓰러워진 무흔이 금창약을 다시 권했다.
“일단 바를 수 있는 부위부터 바르세요. 나도 바를 테니까.”
아무래도 자신이 먼저 발라야 그녀도 상처에 바를 것 같아 무흔이 상의를 벗었다.
마극삼비가 무기를 사용하지 않았기에 자상은 없으나, 주먹과 장력에 맞아 멍든 부위가 엄청 많았다.
무흔은 가슴팍의 상처에 금창약을 발랐다. 어깨와 팔, 다리는 덤이었다. 대충 혼자서 바를 수 있는 부분을 해결한 무흔은 백단영의 눈치를 봤다.
백단영은 여전히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아가씨, 죄송한데 등에도 좀 발라주세요.”
어쩔 수 없이 백단영이 돌아앉았다. 무흔은 그녀에게 등을 내밀었다. 시퍼렇게 멍든 등을 본 그녀의 목소리에 안타까움이 느껴졌다.
“안 아파? 멍이 심해.”
“안 아프긴요. 그러니 약을 바르는 거죠.”
그녀의 부드러운 손길이 등에 느껴졌다. 멍든 부분에 약이 닿자 느낌이 서늘했다.
“신기하네. 이렇게 많이 다쳤는데도 정작 넌 신음도 안 흘렸잖아.”
백단영이 감탄을 발하며 위로했다.
“귀의의 약을 발랐으니 내일이면 한결 나아질 거예요.”
어쨌든 무흔은 치료가 끝났다. 이제 백단영 차례다. 그는 금창약을 넘기며 말했다.
“바르세요.”
여전히 머뭇거리는 그녀를 두고 무흔은 이부자리를 펴고 누웠다. 눈 내리는 추운 날, 밖에서 잘 수는 없으니 오늘은 어쩔 수 없이 같은 방에서 자야 할 판이다.
그는 이불 위에 누워 몸을 돌리고 눈을 감았다.
“돌아보지 마.”
뒤에서 꼼지락거리는 소음이 들리는 것을 보니 약을 바르고 있나 보다. 괜히 기분이 싱숭생숭해졌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백단영이 그를 불렀다.
“무흔?”
“네?”
“등에 약 발라줘야지.”
“네?”
화들짝 놀란 무흔은 심장이 쿵쾅거렸다. 생각해보니 그녀 역시 혼자서 등에 약을 바를 방법이 없다.
“아, 알았어요.”
무흔은 조용히 뒤를 돌아보았다.
은은한 달빛이 내리쬐는 방안에 백단영이 엎드려 있었다. 치렁치렁한 검은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넘기고 뽀얀 등을 드러내고 있었다.
앉아 있을 줄 알았는데 엎드려 누워 앞쪽을 완전히 가리고 있다. 하반신 쪽도 약을 바르느라 입고 있던 무복을 벗어던지고 간편한 옷으로 바꿔 입은 모습이다.
눈부시게 하얀 그녀의 피부에 감탄하기도 잠시 등에 울긋불긋 멍이든 상처에 가슴이 아팠다.
“아가씨께서도 많이 다치셨네요.”
“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백단영의 음성은 비교적 차분했다.
무흔은 금창약을 그녀의 등에 발랐다. 생각해보니 이렇게 그녀의 몸에 손을 댄 기억이 없다. 하지만 야릇한 기분보다 안타까움이 먼저 밀려오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지금 다친 것은 훗날 마교와 본격적으로 싸울 때 다칠 것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닐 터인데.
한편으로는 그녀를 제대로 지켜주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마음을 쓰리게 했다.
저절로 가라앉은 감정을 백단영이 일깨웠다.
“그래도 좋아, 네가 약을 발라주니까.”
“저도 좋네요. 아가씨의 매끄러운 등을 보니까.”
“야!”
백단영이 새침한 표정으로 눈을 찡그리며 그를 쏘아보았다. 어째 그 모습이 더 귀여웠다.
“그런데…… 아가씨.”
“응?”
“궁금한 것 하나 있는데 물어봐도 돼요?”
“물어봐.”
어째 분위기 때문일까. 그녀의 음성이 부드러워졌다.
“연연약방에서 두 번 금침 치료를 받으셨잖아요. 독공 익힐 때랑 대환단 섭취할 때랑.”
“응, 그랬지.”
“그때는 시술을 어떻게 받았어요?”
“뭐가 궁금한데?”
“전 그때 상의를 다 벗고 금침을 받았는데 아가씨도 그러셨나 해서…….”
“야! 넌 꼭 이상한 것만 물어.”
백단영이 부끄러운 듯 한동안 핀잔을 줬다.
“그건 치료하는 거잖아. 별일 없었어. 그냥 지금처럼 엎드려 있으라고 하던데.”
아마 등에 금침을 놓은 모양이다.
무흔은 그녀의 등에 시퍼렇게 새겨진 멍든 부분에 약을 골고루 발랐다. 가는 허리가 눈에 확 들어왔다. 물론 허리 아래쪽은 옷으로 가려졌지만.
“아, 거기는 조금 아파.”
“그래도 발라야죠.”
그는 조심해서 약을 바르면서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다.
눈을 감은 그녀의 얼굴이 편안해 보였다. 그녀와 이러고 있으니 새삼 그녀와 무척 가까운 사이란 기분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슬픔이 밀려들었다.
꼼꼼히 바르다 보니 시간이 꽤 걸렸다.
어깨부터 시작해서 허리까지 완전히 끝낸 다음 그는 금창약을 치웠다.
“다 됐어요.”
어째 그녀에게서 반응이 없었다.
그녀의 얼굴을 보니 완전히 잠에 빠져있었다. 무척 피곤했나 보다.
어이없는 웃음을 비치던 무흔에게 백단영이 벗어놓은 옷가지가 들어왔다. 천상문 한담에서 그녀와 나누었던 짓궂은 농담이 떠올랐다.
선녀의 옷을 숨긴 나무꾼. 그리고 아이를 낳고 잘 살았는데…… 나중에 옷을 내준 순간 어떻게 되었더라? 선녀가 다시 하늘로 올라가는 건 알겠는데 나무꾼은 어떻게 되었지?
무흔은 백단영을 바라보며 아련한 슬픔이 일었다.
자신은 이곳 무림 사람이 아니라 현대 사람이다. 그녀와 그는 이루어질 수 없고 이루어져서도 안 된다. 지금 이곳에서 그는 그녀의 머슴일 뿐이니 그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 어쩌면 스타를 추종하는 팬일 뿐일지도. 그 경계가 허물어지면 오히려 상황은 나빠질 테니.
무흔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서 몸을 눕혔다.
새근새근 잠이 든 그녀의 모습에 마음이 울렁거렸지만 그는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
아침 햇살이 창으로 비치고 나서야 백단영은 잠을 깼다.
“흐악!”
그녀는 자신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언제 잠이 들었는지 제대로 기억나지 않았다. 무흔에게 약을 발라 달라고 엎드려 누웠던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다음에 자신도 모르게 잠이 들었나 보다.
그대로 엎드려서 곱게 잤다면야 별문제 아니겠지만 당연히 그렇게 잤을 리가 없다.
하필이면 이날따라 고약해진 잠버릇 탓인지 온 방 안을 굴러다니며 잠을 잤다. 그것도 상의는 걸치지 않고 하의는 민망한 차림새.
게다가 굴러다니던 마지막에는 무려 무흔의 몸에 한쪽 다리를 올려놓고 잤다. 그녀가 깬 곳이 무흔의 이부자리였으니, 무흔이 그녀에게 굴러온 것이 아니라 그녀가 굴러간 것이 확실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무흔이 아직 깨기 전이란 사실이다. 설마 자던 중간에 무흔이 깨서 자신을 보지는 않았겠지?
그녀는 무흔의 자는 모습을 조심스럽게 살피다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얼른 옆에 개어둔 옷을 챙겨입었다. 다행히 찌뿌둥하고 아프던 몸은 많이 좋아졌다. 역시 금창약을 바르고 자기를 천만다행이었다.
무흔을 깨울까 고민하다가 포기했다. 그를 안고 자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서다.
마음이 안정되자 백단영은 어제 있었던 마극삼비와의 전투를 머릿속으로 재구성했다.
“검강이…….”
어제 극한의 상황에서 펼쳤던 검강. 그 느낌을 다시 끌어내고 싶었다.
백단영은 연검을 쥐고 방을 나섰다.
객잔 밖은 온통 하얀 세상이었다.
눈이 그치고 하늘은 푸르렀다. 햇빛에 반사된, 쌓인 눈이 빛났다. 언제 그런 사투가 벌어졌던가 싶게 세상은 평온했다.
그녀는 눈 덮인 벌판 가운데에서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내력을 불어넣자 연검의 주변에 흐릿한 하얀 강기가 일렁였다. 최근에 수련 중에 이런 강기는 많이 시도해봤다. 하지만 이것은 강제로 짜낸 것일 뿐 자연스럽게 형성된 강기가 아니다. 물 흐르듯 저절로 검강이 형성되며 검의 날카로움을 대신해야 그것이 바로 검강이다.
휙- 휙-
백단영은 연검을 휘둘렀다.
어제처럼 자연스럽게 검강이 뻗어 나가지 않았다. 아직 깨달음이 부족한 것일까.
그녀는 초식을 멈추고 다시 연검을 노려보며 정신을 집중했다.
다시 검 끝에 강기가 형성됐다. 이번에는 조금 전보다 강기의 길이가 길어지고 색상이 더 하얗게 변했다.
“하압!”
그녀는 기합과 함께 천상비연검법을 펼쳤다. 전력을 다해 휘두른 검이 허공을 가르면서 검강이 쭉 뻗어 나갔다.
“아아! 된다!”
그녀는 한 단계 성장했다는 감격 속에 다음 초식을 펼쳤다.
번쩍- 번쩍-
검강이 쭉 뻗어 나가며 사방을 갈랐다.
그녀의 검초는 예전에 펼치던 것과 차원이 다른 위력을 발휘했다.
내친김에 그녀는 무흔천상보와 천상비연검법을 동시에 펼치기 시작했다. 사방 십여 장에 검강이 난무했다.
콰아아앙-
검강이 할퀸 눈 덮인 바닥이 깊게 패며 눈보라가 피어올랐다.
파란 하늘과 하얀 대지 사이에서 추는 백단영의 검무는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보는 이는 아무도 없었으나 세상에 감동을 주는 순간이었다.
“하아!”
백단영은 가쁜 숨을 고르며 검을 거두었다.
겨울임에도 온몸에서 땀이 비 오듯 떨어졌다.
마침내 커다란 벽을 깬 느낌에 만족스러웠다. 예전과 달리 이제는 사마극이라도 상대할 수 있겠다는 기분이 들었다.
햇빛 속에서 반짝이는 미소를 지으며 객잔 쪽으로 몸을 돌리던 백단영은 해를 등지고 그녀를 향해 손뼉을 치는 한 사람을 발견했다. 언제나 그녀에게 힘을 주는 무흔이었다.
“드디어 검강을 완성하셨네요.”
“아직 부족해. 익숙해지려면 멀었어.”
물론 벽을 깬 이상 다음 단계는 시간이 흐르면 된다. 그 사실을 알기에 백단영은 의기양양하게 몸을 쭉 폈다.
“네가 보기엔 어때?”
“멋있었어요. 선녀가 내려온 것 같은.”
무흔의 찬사에 그녀는 살짝 얼굴을 붉혔다. 언제부터일까. 무흔의 칭찬이 그 무엇보다 그녀의 마음을 들뜨게 만든 것은.
무흔이 웃으며 그녀의 팔을 끌었다.
“제가 맛난 것 해드릴 테니까 얼른 가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