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독존기 2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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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70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이계독존기 29화
천수암제, 기연을 얻다 (1)
남궁세가에 도착한 남궁태희가 남궁장천이 있는 가주실로 향했다.
가주실에 가는 동안 남궁혁성이 남궁태희를 보고 다가왔다. 동생이 외간남자와 밤을 새우고 왔으니 궁금증이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자신은 아직 여인과 밤을 지내보지 못했다. 나이가 서른인 남궁혁성으로서는 너무 억울한 일이지만 동생을 시집보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이제까지 어린아이로만 생각했건만 벌써 커서 사내를 알다니 통탄할 일이었다. 오라비로서 질투심을 느낄 만했다.
“태희 이 녀석아! 벌써 어른이 됐구나. 자, 내 품에 안겨 보아라.”
양 팔을 벌린 남궁혁성이 오랜만에 동생을 안아보려는 몸짓을 했다. 당연히 ‘오라버니’ 하면서 안길 것이라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동생은 아예 보지도 않고 무심하게 스쳐 지나가 버렸다.
휘익!
무시당한 남궁혁성이 다시 남궁태희를 불렀다.
“내 동생 태희야, 부끄러워할 것 없다. 여인이라면 당연히 겪어야 하는 과정이니 말이야!”
찌릿!
남궁태희의 눈에서 무시무시한 한광(寒光)이 뻗어 나왔다.
순간 남궁혁성은 움찔 놀랐다. 빙화라고 불리면서 차가운 기운을 풀풀 풍긴 남궁태희였지만 실력 면에서 자신보다 뒤처져 있었다. 아무리 한광을 발한다고 해도 자신이 물러선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그저 차가운 기운을 발산했을 뿐인데 몸이 저절로 뒤로 주춤거렸다.
‘이 녀석, 그새 성장한 거냐?’
남궁혁성은 놀랐다. 지금 보니 자신도 남궁태희의 경지를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동생은 정말 대단한 재질을 가진 재녀(才女)였다. 그래도 단 하루 만에 몰라보게 일취월장해서 돌아왔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군천악의 일격에 당하고 나서 방문을 걸어 잠그고 고민을 하던 동생이 이제 껍질을 깨고 봉황처럼 날아오른 것이다.
“오라버니, 지금 농담할 때가 아니에요.”
“그게 무슨 말이냐? 난 농담을 좋아하지 않는다.”
남궁태희의 말에서 심각함이 느껴졌다. 남궁혁성도 그저 동생이 대견스러워서 말을 했을 뿐이었기에 다시 농담을 이어가지는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우선은 아버님께 먼저 말씀드려야 하니까 오라버니도 따라오세요.”
“알…겠다. 가자꾸나.”
동생이 이토록 정색을 하다니! 농담처럼 한 말로 저토록 정색하니 더욱 궁금했다.
여전히 남궁혁성은 자신만의 생각에 머물러 있었다. 그걸 남궁태희가 알았다면 남궁혁성은 편안히 내일을 맞이하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설마 벌써 합방을……?’
가주실에 들어서는 남궁태희를 본 남궁장천은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네가 벌써……!”
남궁장천의 놀람은 남궁혁성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었다.
그새 남궁혁성이 끼어들었다.
“설마 벌써 합방을… 커억!”
“무슨 소리예요?”
“이놈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남궁혁성은 남궁장천이 놀라기에 자신의 생각과 같은 줄 알고 끼어들다가 두 사람의 파상적인 공세에 뒤로 밀려 넘어졌다. 꼴사나운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남궁장천은 남궁혁성은 안중에도 없이 남궁태희만을 바라보았다.
“벌써 경지에 들어섰구나. 허허… 남궁세가에 검후(劍后)가 탄생할지도 모르겠구나.”
“아…버님!”
남궁혁성도 남궁장천의 말뜻을 그제야 알 수 있었다. 남궁장천이 검후라고 칭할 정도로 남궁태희가 성장했다는 것을 말이다.
남궁혁성도 동생이 경지를 깼다는 것을 알았지만 설마 하는 심정이었다.
“축하한다. 이런 경사가 있을 줄이야……. 그 나이에 벌써 화경의 맛을 보다니 내가 다 흐뭇하구나.”
남궁장천의 얼굴에선 웃음이 가실 줄 몰랐다.
남궁혁성은 입을 벌리고 그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검의 절대경지인 화경의 경지에 벌써 발을 들이다니! 그것은 약관의 나이에 경험할 수 없는 지고의 경지였다.
남궁태희는 부끄러웠다. 자신의 경지는 수련을 통해 얻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전부 군천악의 도움 때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군 공자의 도움이 컸어요.”
“호오, 벌써 그런 사이가 된 거냐?”
“그게 아니에욧! 군 공자가 저에게 기연을 안겨주었어요.”
남궁태희는 짧은 여행을 하는 동안 있었던 일들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단 하루지만 그동안 겪은 것은 남궁태희의 일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기연이었다.
남궁장천과 남궁혁성도 묵묵히 듣고 있었다. 처음 천악에게 찾아가서 재대결을 신청했다는 남궁태희의 말에서 안타까움과 분노를 느꼈다.
‘고얀!’
‘내 동생을 또 때린 거냐?’
그러나 창궁무애검법을 한 단계 끌어 올려주고 검황의 전설이 있는 수중동굴로 이끌어주었다는 말에서 그들은 놀람을 넘어 경악을 하고 말았다.
“검황의 전설을 경험하다니 정말 대단하구나. 그래, 선조께서 남기신 유지는 있느냐?”
뚝!
남궁태희는 잠시 말을 멈췄다. 솔직히 검황 남궁무적이 남긴 것은 사랑을 이루지 못한 데서 오는 애한의 글이 다였다.
남궁장천에게 그대로 말하기가 껄끄러웠던 남궁태희는 생전 처음 각색을 해야 했다. 수중동굴은 검황이 그저 조용히 세속의 연을 정리하려고 마련한 장소라고 말이다.
듣고 있던 검왕 남궁장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남궁세가가 자랑하는 2대 검법인 창궁무애검법을 창안했으니 검황으로서 다시 새로운 검법을 만들긴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도 다행이구나. 후인을 위해 내단을 마련해 놓았으니 말이다. 이게 다 남궁세가의 복이니라!”
남궁태희는 거짓말을 한다는 것이 찔리기는 했지만 사실대로 말을 해서 실망을 주는 것보다는 전설로 남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것보다 큰일이 났어요.”
“큰일이라니,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거냐?”
“제검가의 소공자를 군 공자가 죽였어요.”
“뭐라고?”
남궁태희는 제검가의 망나니인 소공자 형무기를 죽인 일에 대해 사실대로 남궁장천에게 설명을 했다. 그가 자신에 대해 질 나쁜 행위를 하는 것을 천악이 막아주었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말이다.
남궁장천은 자신의 딸에게 추태를 부린 형무기에게 분노를 느꼈다. 감히 제검가 따위가 자신의 딸을 능욕하려고 했다는 것에 화가 난 것이다. 그러다 천악이 단죄의 철퇴를 내렸다는 얘기를 하자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라면 당연히 자신의 여인을 지켜야지.”
“아버지, 그런 말이 아니잖아요. 제검가는 명색이 안휘성에서 두 번째 문파예요. 소공자가 죽었으니 그놈들이 무슨 짓을 할지 몰라요.”
“허허, 뭘 걱정하느냐? 그깟 제검가 따위가 대남궁세가를 어찌할 수 있다고 보느냐? 걱정할 필요 없느니라.”
남궁장천은 솔직히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제검가가 비록 남궁세가와 비견되는 안휘성의 문파라고 하지만 역대로 제검가는 남궁세가의 상대가 아니었다. 놈들이 아무리 사력을 다한다고 해도 남궁세가는 굳건하게 버틸 힘이 있었다. 남궁세가로서는 오히려 제검가와 비교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것보다 중요한 일이 있다.”
“뭔데요?”
“지금 세가에 당가의 태상가주가 와 있다.”
“설마 천수암제 당지독 어르신이 와 있다는 소리예요?”
“그렇다. 네가 사… 아니다. 천악이를 보자고 하는구나.”
“군 공자를요? 설마 대결을 원한다는 말이에요?”
“그렇다는구나. 크크큭!”
남궁장천의 사악한 미소를 처음 본 남궁태희는 어색했다. 아버지의 평소 성격과는 완전히 다른 웃음이었다. 도대체 왜 저런 웃음을 짓는지 알 수가 없었다.
“도대체 왜 천수암제 어르신이 군 공자와 대결을 하겠다는 거죠?”
남궁태희로서는 그 내막을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군천악이 외부에 이름을 알린 것은 남궁세가에 있을 때뿐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당가와 원한을 쌓을 시간도 이유도 없었다.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당가에서 온 녀석 중에 당묘정이라는 아이를 천악이가 혼을 내줬다는구나. 그래서 여기까지 왔다지 뭐냐. 쯧쯧, 나이 먹어서 아이들 싸움에 열을 내다니, 그게 할 짓인지 모르겠다.”
은근히 남궁장천은 당지독을 깔아뭉갰다. 좀 전까지 딸 걱정으로 안절부절못했던 사람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였다. 뭐 묻은 개가 뭐 묻은 개 나무라는 꼴이었다.
남궁장천의 태도에서 두 사람의 감정이 별로 좋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남궁장천으로선 그동안 당한 것을 생각하면 더 심한 말도 할 수 있었다.
“그건 그렇고, 너는 천악이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남궁태희는 얼굴이 조금씩 붉어지고 있었다. 목소리도 높아지는 것을 본 남궁장천과 남궁혁성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언제나 얼음같이 차가운 남궁태희였지만 지금 보니 그 표정이 너무 다양했다. 아주 어린 시절의 표정이 되돌아온 것이다. 본인은 아니라고 하지만 이 정도 되면 눈치 못 채는 것이 바보였다.
“아니냐? 그럼 어쩔 수 없구나. 난 또 천악이를 마음에 둔 줄 알았구나.”
“그, 그건 아니지만 그는 저한테 관심이 없어요.”
남궁태희는 자신도 모르게 말을 해버렸다. 말을 하고 나니 남궁장천의 수법에 넘어갔다는 것을 알고 얼굴이 더욱 화끈거렸다.
“괜찮다. 네가 맘먹고 관심을 표현하면 이 세상 사내 중에 넘어오지 않을 사람이 있겠느냐?”
“하지만…….”
남궁태희는 솔직히 자신 없었다. 자신은 금은혜처럼 사내 앞에서 다정하게 굴지 못하고, 그는 다가오지 않는 사람에게 먼저 친절하게 구는 사람이 아니었다.
“우선은 당가의 노독물이 기다리고 있으니 네가 가서 천악이를 데리고 오너라.”
“제가요?”
“그럼 네가 가지 내가 가랴!”
“알았어요.”
남궁태희가 가주실에서 힘없이 나갔다.
“아버님, 제검가는 그래도 만만히 볼 곳이 아니지 않습니까? 자칫 전쟁을 치르게 될지도 모릅니다.”
“제깟 놈들이 어찌해 볼 정도로 남궁세가는 약하지 않다.”
남궁장천의 말과는 다르게 남궁혁성은 조금 긴장했다. 세가가 정상적인 힘을 가지고 있을 때라면 모르겠지만 지금은 세가의 힘 중 삼분의 일이 소실된 상태였다. 이 상태를 알고 제검가가 공격을 해오면 손해가 만만치 않을 것이다.
‘기우겠지.’
남궁혁성도 그 정도 선에서 생각을 마무리했다.
* * *
천악이 방에서 쉬고 있는데 금은혜가 독대를 요청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천악을 그나마 어려워하지 않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천악은 급한 일이 아니면 되도록 방해하지 말라고 했지만 금은혜가 사업상 중요한 일이라며 들어온 것이다.
“네가 나한테 사업상 중요한 말을 할 것이 있다고?”
금은혜의 평소 행동을 보면 전혀 중요한 일로 보이지 않았다. 도둑질이나 하던 여인이 정색을 하고 그런 말을 하면 못미더운 것이 당연했다.
“저하고 중원의 상권을 획기적으로 바꿀 일을 도모해 보지 않겠어요?”
“어떻게 도모할 건데?”
“저기… 저번에 빙정을 만들었잖아요. 빙정을 대량으로 만들 수 있나요?”
“설마 빙정을 대량으로 만들어서 그걸 팔겠다는 소리인가?”
“그럼 좋구요.”
빙정이라고 하면 무인들 중 특히 북해의 무공을 익힌 이들이 눈에 불을 켜고 찾는 귀물이다. 빙정 한 개만 팔아도 엄청난 이윤을 얻을 수 있었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빙정을 만드는 것을 네가 봤겠지만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내가 그런 수고를 할 이유가 없지.”
마법진을 설치하고 마력을 쏟아서 만들어낸 빙정이었다. 보기엔 쉬워도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천악이라고 해도 빙정을 대량으로 만드는 것은 어려운 일이고, 무엇보다 상당히 피곤한 일이었다.
“그럴 줄 알았어요. 그럼 빙정보다는 못하지만 차가운 기운을 발산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나요? 되도록 시간을 오래 유지할 수 있게요.”
금은혜도 빙정이라는 무가지보보다 다른 것을 원하고 있었다. 빙정이 상가에서 유통이 되면 이만저만 피곤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을 노리는 놈들도 있을 것이고, 여러 가지 분쟁을 초래하게 될 수 있었다. 그럴 바에는 다른 쪽으로 방향을 돌리는 것이 좋았다. 그래서 처음부터 강수를 두고 말을 한 것이다. 금은혜는 보기엔 가벼워도 상술에는 일가견이 있는 여인이었다.
“차가운 기운이라… 그 정도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하지만 내가 왜 너를 도와야 하는지 모르겠다. 난 지금도 충분히 잘 살고 있다. 너도 봐서 알지 않나?”
“물론 알아요. 하지만 전 군 오라버니가 더 편하게 일을 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어요.”
“어떻게 돕겠다는 거지? 너는 그저 내 집에서 먹고 노는 백수일 뿐인데.”
말을 해도 정이 가지 않게 하는 천악이었다.
‘내가 식충인가, 먹고 놀게!’
하지만 여기서 화를 내면 진정한 상인이라 할 수 없었다. 언제 어느 때라도 상행위를 위해서는 굽힐 줄도 알고 상대의 비위를 맞출 줄도 알아야 했다.
“저를 그렇게 보셨다니 너무해요. 하지만 괜찮아요. 알려지진 않았지만 저는 상가의 간부직을 맡고 있어요.”
“상가? 네가? 지금 날 웃기려고 그런 말을 하는 거냐?”
구문제독부의 금지옥엽이라는 것을 빼고 금은혜에게 별다른 특별한 점을 찾지 못한 천악은 허탈한 표정이었다. 뭔가 심각한 말을 하려고 온 줄 알았건만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모조리 농담처럼 들린 것이다.
“놀랄걸요. 제가 금천상가의 소가주예요.”
“금천상가?”
금천상가라면 천악도 알았다. 안휘성 내의 도박장을 운영하는 곳이 금천상가였기 때문이다. 거기라면 천악과 악연이 조금 있었다.
“내 돈을 따갔던 곳이군. 그런데 구문제독부에서 금천상가를 만든 줄은 몰랐어.”
금룡화가 소가주면 구문제독이 금천상가의 소유주라는 말이 된다.
명색이 구문제독이었다. 그 정도의 권력과 명성을 가진 자가 천하게 여기는 상가를 꾸렸다는 것 역시 의문이었다.
금은혜가 천악을 백 번째 밤일 대상으로 삼은 것도 금천상가의 도박장에서 있었던 일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봉 잡았다고 생각하고 풍운장원이라는 악마의 소굴에 온 것이 지금에 이르렀던 것이다.
“아무리 구문제독이라고 해도 먹고 사는 것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어요. 또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재력이 필요해요. 이 사실을 아는 외부인은 군 오라버니뿐이에요.”
“날 협박하는 거냐?”
천악의 날카로운 말에 금은혜가 급히 손사래를 쳤다.
“그게 아니에요. 그저 서로 상부상조하자는 거예요.”
“상부상조라… 그건 나에게도 도움이 된다는 소리인데, 넌 나한테 뭘 해줄 수 있지?”
“어차피 대장간을 차렸으면 철이나 재료 등을 구입해야 하잖아요. 더군다나 희귀한 철 등은 구하기도 어렵잖아요. 저희 상가에서 그런 잡다한 일들을 처리해 줄 수 있어요.”
금은혜는 거창한 조건은 제시하지 않았다. 막대한 이권을 가지고 부를 축적시켜줄 있다는 말도 아예 배제했다. 천악에게는 귀찮은 일, 사소한 일을 편하게 처리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는 것이 더 혹할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