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독존기 2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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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50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이계독존기 26화
추상락, 임자 만나다 (1)
천악 일행은 가던 길을 멈추고 추상락에게 식사를 제공했다.
추상락은 거지면서도 덩치가 상당했다. 옷을 제대로 입으면 절대로 굶주린 사람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였다.
남궁태희와 금은혜는 추상락의 허리에 매인 매듭을 보고 놀란 눈치였다. 개방에서도 장로 급만이 가질 수 있는 일곱 개의 매듭이 보였기 때문이다. 밑바닥부터 시작하면 평생이 걸려도 오르기 어려운 것이 개방의 장로 자리라고 알려져 있었다.
개방은 매듭이 없는 백의제자부터 시작해서 3결 제자인 분타주, 5결 제자인 총순찰이 상급 지위였다. 대부분은 3결 제자 이하로 10만 개방 방도라고 불렸다. 그 위로 6결 제자는 총순찰 중에서도 상위 서열이고, 그 다음으로 개방 장로들이 일곱 개의 매듭을 가졌다.
갑옷 같은 근육에 각진 얼굴을 한 호안의 거지는 불과 마흔도 되어 보이지 않았다. 그 나이에 개방의 장로가 된 것이 놀라웠다. 필시 범상치 않은 사람이었다.
그것보다 개방의 장로가 이런 산길에 허기져 쓰러져 있다는 것이 이상했다. 개방의 장로라면 어딜 가든 대접을 받을 수 있을뿐더러, 거지라면 구걸을 해서라도 배를 채울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거지가 굶는 것을 뭐라 할 수 없지만 좀 심하잖아.’
남궁태희와 금은혜의 공통적인 생각이었다.
“꺼억!”
식사를 마친 추상락은 이제야 살 것 같았는지 트림을 했다. 그리곤 천악에게 감사의 인사와 더불어 자신을 소개했다.
“개방의 추상락이라고 하오.”
천악도 자신의 이름을 말해 주었다.
“군천악이라고 불리고 있소.”
천악은 거지에게 존대를 하기 뭣해 반공대를 하였다.
추상락도 천악의 말투에 별로 신경을 쓰지는 않았다. 자신의 생명을 구해 준 사람에게 개방의 장로라는 직위로 위협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는 사실 자신이 개방의 장로라는 신분을 제대로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
갑자기 번개처럼 추상락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섬광이 있었다.
풍운마룡 군천악!
“풍운마룡?”
“강호의 별호를 신경 쓰는 편은 아니지만 그렇게 불리고 있소이다.”
추상락은 상당히 공교로운 표정을 지었다. 추상락의 사부인 궁휼이 안휘성 합비에 가서 풍운마룡을 시험해 보라고 한 말이 떠오른 것이다.
추상락에게 시험이란 곧 ‘대결’이었다.
사부의 말을 들어야 했다. 그런데 상대는 자신에게 식사를 제공한 고마운 사람이다. 참으로 공교롭지만 어쩔 수 없었다.
고민을 거듭한 끝에 내린 결론은 한 가지였다. 사부의 말대로 시험해 보기 위해서는 자신의 생각을 군천악에게 전하는 것뿐이었다.
“나는 개방에서 사부의 명을 받고 이곳에 오는 도중에 군 형을 본 것이오. 사부의 명이 무엇인지 군 형은 짐작하겠소?”
“내가 신이 아닌 다음에야 듣지도 않고 아는 재주는 없소.”
“풍운마룡을 시험해 보라고 하셨소. 난 그 말을 따르기 위해 군 형에게 대결을 신청하는 바요.”
씨익!
아무도 모르게 천악은 미소를 지었다.
처음에 길바닥에 쓰러진 추상락을 보고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생겨 도와주려고 했다. 천악은 자신을 귀찮게 하는 것은 극도로 싫어하지만 죽어가는 사람을 외면할 정도로 매몰차지는 않았다. 단, 자신에게 해를 입히는 사람이라면 달랐다. 그 누가 됐든 자신을 향해 이빨을 드러내는 이는 죽일 수 있는 독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천악이었다.
천악은 대화를 통해 추상락이 그다지 악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거지이면서 배가 고파 쓰러져 있었다는 것과 무공을 익혔으면서도 다른 사람을 위협하지 않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보통 호탕하고 뒤끝이 없었다.
“대결이라… 좋소!”
천악이 너무 쉽게 수락하자 추상락의 얼굴엔 화색이 돌았다.
사부가 직접 시험해 보라고 했을 정도면 지닌 실력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 생명의 은인이라 쉽지 않을 것이라는 처음의 생각과는 다르게 흘러가자 매우 만족스러웠다.
남궁태희와 금은혜는 지금까지 보아온 천악의 모습과 너무 다른 모습에 의아했다.
그는 저렇게 친절하고 남을 배려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자신의 공간에 침입하는 자를 가만히 놔둘 정도로 마음이 넓지도 않고, 스스로 필요에 의해 하는 일 외에 다른 일은 모두 귀찮아하는 성격이었다.
‘그건 그렇고, 저 거지가 미쳤나! 감히 누구한테 덤빈다는 거야?’
‘개방의 장로면서 상대의 실력도 파악하지 못하나?’
금은혜는 초상 치를 일을 걱정했다. 추상락이 아무리 강해도 천악의 괴물 같은 신위를 막아낸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곱게 죽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남궁태희의 생각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녀의 경지는 이제 강호의 절대고수 반열에 든 상태였다. 같은 화경의 고수가 아니고서는 그녀의 검을 막아낼 수 있는 무인은 별로 없었다. 그만큼 그녀는 엄청난 기연을 얻은 것이다. 고작 약관을 넘어가는 나이에 화경의 문을 조금이나마 열었다는 것을 다른 무인들이 알았다면 기절초풍했을 것이다.
천악이 대결을 할 장소를 산 위로 결정을 했다.
여기의 낮은 산은 이름도 없는 무명의 산이지만 산 위로 올라가니 대결하기 알맞은 평지가 존재했다. 그곳에서 대결을 하면 무공을 발휘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천악이 여인들에게 당부했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거라.”
“예? 저희도 같이 갈래요!”
금은혜와 남궁태희도 같이 가고 싶었다. 개방 장로와의 대결이었고 천악의 신위를 구경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그러나 천악은 단호했다.
“내 말을 안 듣겠다면 이대로 돌아가.”
“아, 알았어요.”
그녀들은 상당히 실망했다. 이번 소풍으로 많이 친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천악의 성정은 여전했다. 뭐라고 꼬집어서 말을 할 수 없지만 다가서려고 할수록 그 감정이 드러났다.
천악은 그 전과 달라지지 않았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금은혜와 남궁태희의 마음일 것이다. 한쪽이 달라졌는데도 다른 쪽이 아무 변화가 없으니 애가 타는 것은 당연했다.
“허어!”
추상락은 천악의 단호한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여인이란 무공을 수련하는 데 방해가 되는 걸림돌이었다. 수련 시 마음을 심란하게 하고, 다시 추스르는 데도 상당한 시간을 소비하게 된다. 집중력을 가지고 한 곳을 파도 경지에 오르기 어려운 것이 무공인데, 잡생각을 가지고 고수가 된다는 것은 무인의 정신을 더럽히는 짓이라고 생각했다.
추상락은 천악이 대단해 보였다.
‘저런 미인을 둘씩이나 옆에 두고도 평정심을 유지하다니!’
나이 마흔의 추상락이 처음으로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로 남궁태희와 금은혜의 아름다움은 상상을 초월했다. 고작 약관의 나이에 여인에 대한 마음을 초월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 * *
여인들을 남겨두고 천악과 추상락은 산 정상으로 걸어갔다. 걸어가는 동안 그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결을 앞두고 사사로운 마음은 불편함만 가중시킬 뿐이다.
추상락은 모르고 있었다. 천악은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일이 아니면 수고를 하지 않는 인물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런 인물에게 먼저 덫에 걸릴 명분을 제공하였으니 뒤끝이 좋을 리가 없었다.
정상은 비로 인해 평지가 된 속 빈 산이었다. 산 정상 주변엔 푸른 숲이 조성되어 있지만 정작 그 정상엔 아무것도 없는 민둥산이었다.
추상락은 주변을 돌아보며 이 정도면 괜찮다는 생각을 했다.
“자, 이제 대결을 해봅시다. 서로 최선을 다하는 것이오.”
추상락은 개방의 장로이지만 다른 장로들과 대결을 많이 해보지 않았다. 나이 서른이 넘어가면서부터는 장로들이 상대가 되지 않았고, 그 이후는 쭉 사부인 개왕과 대결을 해왔다.
오랜만에 대결에 임하는 추상락은 묘하게 두근거렸다. 상대는 겉으로 보기엔 별로 대단해 보이지 않았다. 풍운마룡이라는 별호를 생각해 내지 않았다면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렇다고 자신보다 위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저 무공의 특성상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대결을 하기 전에 미리 말해 둘 것이 있소.”
천악의 말에 추상락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말이오?”
“나는 당신에게는 생명의 은인이 되오. 그리고 당신은 분명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 하겠다고 나에게 말을 했소.”
“무, 물론이오. 난 내 입으로 말을 하고 다시 주워 담는 소인배가 아니오!”
왠지 말을 하면서도 껄끄러운 감정이 솟아나는 추상락이었다. 별다른 말이 아님에도 불안감이 엄습했다.
“이 대결에서 진 사람이 이긴 사람의 말을 한 가지 들어주기로 합시다.”
“좋소. 그런 거라면 상관없소.”
생명의 은인까지 언급하기에 대단한 말을 하려는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들어보니 별로 어렵지 않은 조건이었다.
자신은 개방의 장로이면서 20년 전 신룡무림대회에서 우승한 천재적인 고수였다. 상식적으로 이 청년에게 자신이 진다는 것은 접시 물에 코 박고 죽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추상락은 자신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조건을 거는 천악의 의중이 아리송했다.
“그럼 승낙한 것으로 알겠소.”
“시작하겠소. 내가 나이가 많은 것 같으니 삼 초를 양보하겠소.”
“그러시오.”
천악은 양보하겠다는 것을 마다할 위인이 아니었다.
무인들은 우스운 속성을 가지고 있었다. 기회를 주는데 왜 마다하는가! 그까짓 자존심 때문에 위험에 처하는 것이 더 어리석었다. 그러고 나서 나중에 내가 방심해서 졌다는 구차한 변명을 하는 무인들이 더러 있었다.
추상락은 방심하지 않았다.
개방에는 네 가지의 무상신공(無上神功)이 존재했다. 그것은 혼천강룡신공(混天降龍神功), 옥현귀진현공(玉玄歸眞玄功), 홍무자염신공(洪武紫焰神功), 취팔선공(醉八仙功)이었다.
추상락은 개방의 장로 위의 고수에게만 전수되는 내공심법 중 혼천강룡신공을 전수받았다. 혼천강룡신공은 강룡십팔장을 출수하기 위해선 반드시 익혀야 하는 무상의 신공이었다.
개방의 내공심법은 다른 정파의 내공심법보다 훨씬 강력했다. 장법의 강맹한 위력을 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강해진 것이라고 평가를 하지만 정확한 이유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개방의 시작은 중원의 시작과 맞물려 있다. 어느 시대나 거지는 존재했고 오랜 시간이 지나 지금의 개방이 된 것이다. 오랜 세월 동안 방 내로 흘러 들어온 무공을 다시 발전시키면서 변화가 이루어졌기에 정확히 개방의 내공심법이 언제, 어떻게, 누구에 의해 강력해졌는지 아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
추상락은 혼천강룡신공을 끌어올렸다. 방심해서 당할 정도로 추상락은 멍청하지 않았다. 그의 본능이 지금 위험하다는 경고음을 보내왔기 때문이다.
‘이상할 정도로 위압감이 든다.’
천악에게서는 분명 아무런 기운이나 기세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자신을 상대로 서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막상 대결을 하려고 하자 불안감과 더불어 온몸에 소름 돋는 한기가 전신을 자극했다. 개왕과의 대결에서는 느껴보지 못한 신선함이었다.
사실 스승과 제자의 대결에서 생사결과 같은 위험한 일이 발생할 일은 없었다. 20년 전 신룡무림대회의 결승전에서 무당의 직전제자와 대결을 할 때도 이런 느낌은 들지 않았다.
파팟!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할 때 천악이 먼저 움직였다. 그 자리에서 선 채로 공간을 무시한 천악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추상락은 한시도 천악에게 눈을 떼지 않았다.
공격을 하기 위해서는 기가 발생을 하고, 기는 기운으로 외부에 발현이 된다. 또한 공격의 시작은 발에서부터였다. 발이 움직이고 그 다음에 손이 움직인다.
‘헉! 아무런 기운도 없다!’
다시 나타난 천악이 자신의 바로 앞에 당도했다. 추상락이 놀라면서 뒤로 몸을 빼려고 취팔선보(醉八仙步)를 펼쳤다. ‘취한 선인(仙人)들의 여덟 발걸음’이라고 불리는 취팔선보는 말 그대로 신선의 움직임이었다. 예측할 수 없는 움직임이지만 그 동작은 표홀하고 날렵했다.
대신 천악의 귀영보는 말 그대로 귀신의 발걸음이었다. 그림자도 보이지 않고 공간을 무시하는 움직임이 바로 귀영보였다. 귀영보는 눈으로도 기척으로도 찾아낼 수 없는 극강의 보법이었다.
쌔애애앵!
천악의 오른 주먹이 바람을 가르며 추상락의 가슴을 공격해 들어갔다. 취팔선보를 통해 몸을 피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다시 다가온 천악의 갑작스러운 공격에 추상락은 미처 방어를 하지 못했다.
퍼어어억!
“크으윽!”
천악이 내지른 단 한 번의 권에 추상락의 가슴이 움푹 들어갔다. 강철 같은 갑옷으로 무장한 몸일지라도 천악의 패도무비한 권격(拳擊) 앞에서는 종잇장보다 못했다.
천악의 공격 패턴은 단순했다.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빠른 움직임과 무한할 정도의 힘을 바탕으로 공격을 하였다. 원래 무공은 간단한 것이 최고였다. 구태여 기교를 부릴 필요가 천악에게는 없었다.
주르르륵! 차악!
3장이나 밀려난 추상락이 간신히 몸을 유지했다.
바닥을 쉼 없이 뒹굴다가 발로 멈추고 팔로 신형을 붙잡아야 했다.
추상락은 앉은 상태에서 다시 천악을 찾았다. 어느새 천악이 바로 앞으로 다가왔다. 앉아 있는 상태는 거의 무방비였다.
뻐어엉! 타탓!
천악은 추상락의 턱을 발로 차서 들어 올려버렸다.
위로 2장이나 치솟은 추상락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턱이 완전히 부서져 버린 것 같았다.
천악이 위로 솟구쳐서 올라오던 추상락의 몸을 바닥으로 내던져 버렸다.
쿠당탕!
바닥에 처박힌 추상락이 몸을 꿈틀거렸다. 그는 의식이 아직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이건 정말 아니었다.
‘크억! 내가……!’
일방적으로 세 번을 맞았다. 세 번의 공격을 봐주기로 했는데 그 공격을 하나도 피하지 못하고 모두 맞고 말았다.
그는 이제야 천악이 자신이 생각한 것 이상의 고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