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서생 2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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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82회 작성일소설 읽기 : 마법서생 20화
20화
“가세!”
일행의 조장 역할을 하고 있던 덩치가 소리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머리를 낡은 천으로 감싼 자를 의미심장한 눈으로 슬쩍 바라보고는 크게 소리쳤다.
“자, 이게 마지막이니 힘들 내자고!”
감독관이 헛기침을 하며 뒤돌아서려 할 때, 동굴에서 짐꾼 넷이 마지막 석조상을 짊어진 채 밖으로 나왔다. 머리를 낡은 천으로 감싼 자가 섞인 조였다.
그들을 흘겨본 감독관은 조금 전보다는 많이 풀어진 투로 불만을 늘어놓았다.
“큼, 힘은 좀 쓰는군. 그래도 보기가 안 좋아.”
“다음부턴 일꾼을 쓸 때 신경 좀 쓰겠습니다요, 감독관님.”
“저게 마지막인가? 다 실으면 대기하도록. 도주를 만나고 올 테니까.”
“걱정 마시고 다녀오십시오.”
선장은 팔자로 걸어가는 감독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술을 비틀었다.
‘저놈이 은자 백 냥짜리란 것을 알면 속이 뒤집어질 것이다, 돼지 같은 놈.’
2
뱃머리에 부딪친 파도가 포말로 부서진다.
바람을 가득 끌어안은 두 폭의 돛은 포만감으로 잔뜩 부풀어 있다.
파도를 징검다리 삼아 날듯이 나아가는 상선의 구석.
진용은 머리를 감싼 천 조각 사이로 멀어지는 천궁도를 바라보았다.
십 년 육 개월. 삶의 반도 넘게 지낸 곳이 멀어지고 있었다.
언젠가는 벗어나리라 생각했었지만, 막상 자신의 몸이 천궁도가 아닌 선창 위에 있다는 생각이 들자 온갖 상념이 물밀듯이 밀려들었다.
그때였다. 천궁도를 잔떨림이 이는 눈으로 바라보던 진용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저 멀리 천궁도의 절벽 위에 석상처럼 서 있는 사람이 보였다.
‘할아버지!’
구양 할아버지다!
말은 담담히 잘 가라 해놓고 자신이 떠나는 모습을 보고 계신다.
어쩌면 눈물을 흘리고 계실지도 모른다.
겉모습은 강해 보여도 속은 한없이 여린 분. 여린 마음을 내보이지 않기 위해서 수십 년을 무표정한 얼굴로 살아오신 분이다.
부모님을 죽인 형을 죽여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안고 삼십 수년을 살아오셨으니 그 마음은 이미 재가 되어 있으시겠지.
“할 일이 하나 더 생긴 것 같네요, 할아버지. 제가 구해 드릴게요.”
지금도 천궁도의 군병들을 제압할 힘은 있었다.
그러나 천궁도를 벗어난다 해도 도망자라는 꼬리표를 달고 다닐 수는 없는 일이다.
구양 할아버지가 굳이 자신을 몰래 빼돌린 이유가 그 때문 아닌가.
하물며 자신이 강제로 구해준다고 해서 반가워할 할아버지가 아니었다.
게다가 천궁도에는 할아버지를 건드릴 자가 없었다. 할아버지의 말이 사실이라면 모든 일이 끝날 때까지 할아버지에겐 천궁도가 제일 안전한 곳이었다.
“멋진 환송식을 받으며 떠나야죠. 그렇죠?”
진용은 슬쩍 손을 들어서 절벽 쪽을 향해 흔들었다.
그러자 절벽 위에 서 있던 석상도 손을 흔들었다, 마치 잘 다녀오라는 듯이.
“그래요. 다시 돌아올 거예요. 꼭…….”
반 시진가량이 지나자 천궁도의 모습이 까마득히 멀어졌다.
절벽 위의 석상도 이제 보이지 않았다.
옅은 안개가 천궁도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천궁도가 진용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그런데 내가 할아버지의 부탁을 들어드릴 수 있을까?’
문득 구양 할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었던 닷새 전의 일이 떠오르자, 진용은 단호한 표정으로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사람을 죽여달라구요?”
진용이 의아한 표정으로 되묻자 구양 노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더도 덜도 말고 한 사람만 죽이면 된다.”
“강하겠군요.”
그러지 않고서야 저리 어렵게 부탁할 리가 없다.
“강하지. 무척이나. 그는… 구양무경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진용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이었다. 구양무경이라…….
‘응?’
그러다 어느 순간 고개를 번쩍 들고 구양 노인을 바라보았다.
“설마, 할아버지가 말한 구양무경이 십천존 중 한 사람인 천수무적(千手無敵) 구양무경인 것은 아니겠죠?”
강호에 대해 물을 때마다 신털보가 입이 닳도록 읊어대는 이름 중 최상위에 있는 열 사람, 십천존(十天尊)!
그중 한 사람의 이름이 구양무경이다.
그뿐인가? 그는 또한 당금 천하를 삼 분하고 있다는 삼존맹(三尊盟)의 한 축인 만붕성(萬鵬城)의 주인이다.
반면에 자신은 몸뚱어리 하나밖에 없는 청춘.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름이 같다고 해서 그를 생각하다니.
‘나 참, 생각을 해도 꼭……. 할아버지가 아무리 나를 인정해 준다고 해도 그렇지, 설마 그런 말도 안 되는…….’
그때 구양 노인이 고개를 돌려 동굴 밖을 바라보더니 나직하면서도 강한 어조로 짓이기듯이 말했다.
“바로 그다.”
맙소사! 진짜 그라고?
진용은 구양 노인의 옆모습을 멍한 표정으로 한참 동안 바라보다 길게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후우, 세상에……. 할아버지, 설마 제가 그를 죽일 수 있을 거라 생각하신 것은 아니겠죠?”
“지금의 너는 안 되지만 십 년 후의 너라면 가능할 거라 생각한다.”
“저를 너무 과대평가하신 거 아니에요?”
“너를 과대평가한 것이 아니고, 너의 끝을 알 수 없는 잠재력과 그가 지닌 무공의 극성이라 할 수 있는 신수백타를 믿기 때문이다. 신수백타는 네 생각보다 훨씬 강한 무공이니라. 천단심법이 뒤를 받쳐 주지 못할 정도로. 훗날 너 스스로 깨우칠 날이 오면 알게 될 거다. 다만 문제는 그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이지.”
그건 그렇다. 신수백타는 분명 천고의 절기다. 구양 할아버지가 자신있게 십천존의 절기와 나란히 놓을 정도로.
더구나 구양무경의 무공과 극성이라지 않는가?
문제는 구양무경이 삼존맹의 한 축인 만붕성의 성주라는 것. 그의 주위로 다가가는 것만도 쉽지 않을 것이 자명한 일이다.
‘십 년이라…….’
그때 세르탄이 코웃음을 치며 나섰다.
‘흥! 까짓 거, 그 인간이 얼마나 강한지 모르지만, 삼 년만 지나면 인간들 중에 시르를 당할 자가 없을 걸?’
어이가 없다. 구양무경을 아는 자들이 세르탄의 말을 들었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세르탄, 구양무경이 보통 고수인 줄……. 가만?’
그때 문득 스치는 생각.
‘구양무경…… 구양무백……?’
진용이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그 사람하고 할아버지하고 무슨 관계인지 알 수 있을까요?”
구양 노인의 얼굴이 조금씩, 조금씩 일그러졌다. 차마 입을 열기가 어려운 듯. 공연히 물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씀하시기 싫으시면 안 하셔도…….”
질문을 거두려는데, 구양 노인이 어느새 냉정한 표정을 되찾고 무심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한때 그는 나의 형이었던 사람이다. 지금은… 아니, 그때 이후론 아니지만…….”
헉! 진용의 입이 절로 벌어졌다.
“그, 그럼, 할아버지의 형을 죽여달라는 말이에요?”
“그는… 그는 나의 형이기 이전에 원수다. 부모님을 죽인 원수…… 사랑하는 사람들을 죽인 원수…….”
“…….”
“내가 집으로 돌아온 것은 사부님을 따라 장백에 들어간 지 이십 년 만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모든 일이 끝나 있는 상태였다. 집은 폐허가 되어 있었고,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 세상에 남아 있지 않았지. 후후후. 하도 기가 막혀 오열하는 나에게 한 사람이 다가왔다. 그는 어릴 적 같은 학당을 다니던 친구였다. 그 친구는 바로 옆집에 살고 있었지. 다가온 그가 불안한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더니 조심스럽게 말하더구나, ‘네 형이 저지른 일이야, 네 형이! 복면을 하고 있었지만, 무너진 벽 사이로 내가 분명히 봤어!’라고.”
구양 노인은 말을 멈추더니 진용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잇새로 이지러진 목소리를 내뱉었다.
“그날로 나는 형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두 달 열흘 만에 형을 찾을 수 있었지. 그에게 물었다. 당신이 정말 부모님을 해쳤냐고. 사실이라면 왜 그랬냐고. 대체 왜!”
“……”
진용은 입을 꼭 다문 채 구양 노인을 바라보았다.
구양 노인의 노안에 수많은 상념이 어렸다 스러졌다. 억눌린 격정이 가슴을 겹겹이 둘러싼 그물을 뚫고 새어 나오고 있는 것만 같았다.
북받치는 심정을 참으려는 듯, 구양 노인은 눈을 한 번 질끈 감고는 만 근 바위를 들어 올리듯 천천히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그리고 분노조차 스러져 허탈하게까지 보이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가 그러더구나. 빚을 갚고 빼앗긴 것을 되찾으려 했을 뿐이라고. 허허허, 빚이라니……. 아무리 친자식이 아니라지만, 삼십 년을 키워준 양부모를 죽여야 할 정도의 빚이 대체 뭐란 말이냐?”
구양 노인은 잠시 말을 멈추고 처연한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그동안 봐온 구양 노인이 아니었다. 냉정한 표정 뒤에 저런 모습이 숨겨져 있었다니…….
희미하게 말을 끝맺는 구양 노인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린다.
진용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사람을 죽여야 한다는 것이 아직은 마음에 와 닿지 않았다. 그러나 상대는 삼십 년을 키워준 양부모를 죽인 자.
“십 년이 걸릴지 얼마가 걸릴지는 몰라도 최대한 노력은 하겠어요. 하지만 반드시 성공한다는 보장은 해드릴 수가 없어요.”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꼭 들어드리고 싶었다.
그리고 한편으로 생각하면, 십천존을 상대한다는 것이 어쩌면 마냥 나쁜 일만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적어도 그 정도는 되어야 의욕이 솟을 거 아니겠어?
아버지도 그랬다.
“우리 용아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아 남겼다.”
‘그래, 높은 곳을 향해 나아가는 거다! 나는 남자잖아?]
진용은 지그시 주먹을 움켜쥐고 이제는 보이지도 않는 안개 너머의 천궁도를 바라보았다.
‘할아버지, 용아는 강해질 거예요. 할아버지가 바라는 그 이상으로…….’
3
천궁도를 떠난 지 하루가 흘렀다. 이제 육지까지는 하루거리다.
그동안 뱃사람 누구도 진용이에게 신경을 쓰는 사람은 없었다. 분명 죄수와 선원이 바뀌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을 텐데도 누구 하나 말을 걸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지만 의문을 품지는 않았다. 알아서 좋은 일이 아니니 어쩌면 의식적으로 피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사실 진용도 그게 오히려 편했다.
철썩! 처얼썩!
아침부터 조금씩 바람이 세어진다 싶더니, 정오가 되고부터 파도가 점차 높아졌다.
뱃머리에서 튕겨진 차가운 바닷물이 뱃전을 흥건하게 적시고, 두 폭의 돛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펄럭거렸다. 행여나 배가 뒤집히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로.
구석에 혼자 외떨어져 앉아 있던 진용은 찢어질 듯 펄럭이는 돛을 바라보다 선실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태평하게 선실에 처박혀 낮잠을 자던 선원들이 하나둘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런데 분위기가 어째 이상했다. 선실을 나오는 그들의 얼굴에 긴장감이 떠올라 있었다.
긴장한 표정으로 뭐라 소리치는 선원들.
진용은 자세를 바로 하고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갈수록 바람이 거세진다! 선장님을 불러!”
당황한 목소리. 어지간한 일로는 흔들리지 않는다는 뱃사람들이 긴장을 하다못해 당황하고 있었다.
한 사람이 선장이 머무르는 선실로 들어가려 할 때였다. 선장이 술기운에 붉어진 얼굴로 선실을 박차고 나왔다.
“뭐, 뭐야? 왜 이리 바람이 세진 거야?”
“글쎄 말입니다. 태풍이 올 날씨가 아닌데…….”
“재수없는 소리 하지 마! 일단 돛을 반쯤 내리고 상황을 지켜보자구. 바람에 염기가 적은 걸 보니 그리 걱정할 정도는 아닌 것 같다. 일단 물건들을 밧줄로 묶어놔라!”
선장이 빠르게 외치자 선원들이 돛에 달려들었다.
바람이 너무 세다 보니 돛이 찢어지거나 돛대가 부러질 염려가 있었다. 게다가 자칫 배가 뒤집히기라도 하면 모두가 죽은 목숨이었다.
돛을 반쯤 내리자 날듯이 나아가던 속도가 줄어들었다.
그러나 바람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거세졌다. 선창을 기어오르는 파도가 금방이라도 배를 집어삼킬 듯이 혀를 날름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