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서생 3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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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35회 작성일소설 읽기 : 마법서생 38화
38화
‘죄송하기는. 솔직히 괜찮은 기분인걸.’
그녀는 한쪽에 놓인 찻잔을 진용의 앞에 옮겨놓고 차를 따랐다.
향기로운 다향이 찻잔에서 피어올랐다. 과연 거부의 집이라 그런지 손님에게 내어놓는 차도 특별했다.
문득, 아버지가 그렇게도 좋아하시던 용정의 향이 저 깊은 추억의 구석에서 우러나온다.
‘십 년이 넘도록 드셔보지 못했을 텐데…….’
용정은커녕 누가 떫은 차 한 잔이라도 드렸을지 싶다.
‘아버지…….’
그때 초연향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내일 아침이면 떠나시겠죠?”
“그럴 생각입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찻잔을 집어 들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왠지 서글픈 표정이었다.
“제가 무엇 때문에 이곳에 왔는지 아세요?”
진용은 아련한 추억을 깊숙이 파묻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연히 알 리가 없다. 그런데 무슨 뜻으로 묻는 걸까?
“저에게 수백 명의 목숨이 달려 있기 때문이에요. 아마 아버지와 조부님은 제가 그 사실을 모르는 줄 알았을 거예요. 사실 저도 상아가 아니었으면 몰랐을 테니,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지요.”
“무슨 뜻입니까?”
초연향이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입을 열었다.
“작년부터 아버지에게 저를 달라는 청이 들어왔었어요. 아마 그 때문에 탁 공자와의 혼사도 거부하셨던 것 같아요.”
진용의 표정이 굳어졌다.
“상아가 그러더군요. 이상한 편지가 왔는데 아버지와 조부님이 그 편지 때문에 고민을 하고 있다고 말이에요. 그러더니 저녁에 몰래 그 편지를 들고 왔어요. 큰일 났다면서…….”
그 엉뚱한 꼬마 계집애가?
“그 서신에는… 해룡선단과의 보다 나은 관계를 위해 저를 달라고 적혀 있었어요. 상아에게는 편지를 다시 가져다 놓으라 하고 절대 입을 열어선 안 된다고 했죠. 그 아이는 제 말이라면 절대 어기지를 않으니 분명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을 거예요.”
진용은 어이없는 표정을 가라앉히고 초연향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녀가 말했다.
“우습죠? 이런 말을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에게 주절대는 제가…….”
진용은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런 말을 자신에게 하는 이유가 뭔지는 모른다.
다만 자신을 바라보는 초연향의 눈빛이 왠지 절박해 보인다.
도대체 왜 저런 눈빛일까?
그런데 왜 나는 화가 나는 거지?
진용은 초연향의 눈을 직시한 채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그러다 어렴풋이 왜 자신이 그러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저 여자를 좋아한다. 정확히 뭐라 표현할 자신은 없지만. 지금껏 한 번도 그런 마음을 가져 볼 여유가 없었으니까. 다만 분명한 것은, 내가 저 여자를 좋아한다는 거다. 그리고…… 지켜주고 싶다는 거다.’
진용은 초연향을 똑바로 바라보고 말했다.
“당신이 원하지 않는다면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주겠소.”
언뜻 초연향의 눈에서 웃음이 떠올랐다. 그것은 기쁨이었다.
금방이라도 기쁨의 눈물을 흘릴 것만 같던 그녀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총방주 어른이 나와 맺어주려는 사람이 누군지 아세요? 바로… 하군상 공자예요.”
“하군상?”
끝내 진용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세상에! 하군상이라고?
그때다. 문득 뇌리를 스치는 생각.
“혹시 그 일을 추진한 사람이 하주령 낭자가 아니오?”
초연향이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제 짐작일 뿐이지만요.”
“탁인효를 차지하기 위해서?”
“그것도 그렇지만, 한 가지 이유가 더 있어요.”
“신안(神眼) 말이오?”
끄덕끄덕.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초연향을 보고 진용이 화난 목소리를 내뱉었다.
“대체 그 여자는 머릿속에 뭐가 들었답니까? 좋으면 자기가 알아서 차지하지, 왜 초 소저까지 끌어들인단 말입니까?”
“철저하게 하려는 거예요. 그리고 저를 다른 곳에 빼앗기지 않겠다는 뜻이기도 하고요.”
“만일 거부한다면?”
“그럼…… 해룡선단에 대한 지원을 끊을 거예요. 사실 해왕방의 뒤에 엄청난 세력이 있다는 소문이 있어요. 아직 확인된 것은 아니지만요.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구룡상방에선 우리 해룡선단이 망하더라도 손을 뻗지 않을 거예요.”
그래서 수백 명의 목숨이 달려 있다 한 것인가?
초연향은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아버지와 조부님도 그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저에게 차마 말은 못하고 속으로만 가슴 아파하시고 있는 거예요.”
진용은 초연향의 말을 들으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초연향이 희생양이 되게 그냥 놔둘 수는 없다.
더러운 욕심을 챙기려는 자들에게 저 여인을 내어줄 수는 없다.
하군상이라면 자신의 말을 들을 것이다. 그럼 하주령이 문젠가?
‘하주령이라…….’
말없이 반 각이 흘렀을 즈음, 진용은 초연향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제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초연향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냥……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어서 드린 말씀일 뿐이에요. 너무 답답해서……. 고 공자라면 제 마음을 이해해 주실 것 같기도 했구요.”
그러더니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하아, 이제는 좀 괜찮아진 것 같아요. 고 공자께서 그리 말씀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힘이 나는걸요.”
진용이 불쑥 물었다.
“하주령이…… 죽으면 끝나는 일입니까?”
해놓고도 너무 직선적인 자신의 말에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초연향의 눈이 동그래졌다.
“맙소사! 무서운 생각을 하시는군요.”
씁쓸한 마음이 든다. 자신이 생각해도 어이없는 말이 아닌가? 사람 죽이는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다니.
자신이 언제부터 사람 목숨을 이리 가볍게 생각했단 말인가?
초연향은 자신을 질책하는 진용을 바라보더니 간절한 표정으로 나직이 입을 열었다.
“사실 고 공자를 만나자 한 이유는 답답한 마음을 털어놓고 싶기도 했지만, 한 가지 부탁할 게 있어서예요.”
3
방으로 돌아온 진용이 차만 홀짝이자 정광이 넌지시 말을 걸었다.
“왜? 자네가 싫대?”
“도.장.님!”
“아, 뭐 아니면 말고. 에구구, 푹신해서 좋긴 좋네.”
정광이 너스레를 떨며 침상에 몸을 눕히자 진용은 식어버린 찻물을 단숨에 들이켰다.
“혹시…… 혹시 말이에요. 제가 어떻게 되거나 해룡선단에 무슨 일이 있으면 아버지와 상아를 부탁할 게요.”
그녀는 자신에 대해선 부탁을 하지 않았다. 진용은 그게 더 안타까웠다.
사실 하군상은 그리 염려할 것이 없다. 하군상과 맺어주려 했던 목적 자체가 초연향을 구속하기 위함이다. 그렇다면 하주령은 서두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하군상 역시 진용의 말 한마디면 함부로 초연향을 대하지는 않을 터.
‘상대가 하군상이라면 아직 시간은 있다. 일단 아버지의 일을 마무리 짓고…….’
아침이 되자 하군상이 찾아왔다.
그는 두루마리 하나를 진용에게 내밀고 싱긋 웃으며 말했다.
“어젯밤 문서각에서 지나간 문서들을 뒤졌는데 재수가 좋아서 하나 찾았습니다. 도움이 될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죠.”
“고맙습니다.”
“다른 것은 제가 되는대로 수집해 놓겠습니다. 언제든 연락 주십시오.”
진용은 고개를 끄덕이며 넌지시 말했다.
“하 형, 초 소저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
얼떨떨한 표정으로 진용을 바라본 하군상이 피식 웃음을 지었다.
“혹시 걱정되어서 그러십니까? 하하하, 걱정 마십시오. 사실 동생 때문에 향매에게 접근하기는 했지만, 저에겐 혼인을 약속한 여자가 있습니다. 뭐, 아직 아무에게도 말하진 않았지만 말입니다. 설마, 이 나이 되도록 여자 하나 없다고 생각하신 건 아니겠죠?”
진용은 기분이 좋아졌다. 의외로 하군상과의 일은 잘 풀리는 듯싶었다.
“그럼 초 소저를 부탁하겠습니다.”
하군상이 묘한 눈으로 진용을 바라보았다.
“걱정 마시라니까요. 누구도 감히 고 형의 여자를 손대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예?”
고 형의 여자?
“우흐흐……. 하지만 너무 오래 놔두시면 안 됩니다. 아름다운 여자는 오래 방치하면 벌레들이 꼬여드는 법이죠.”
“하 형도 참…….”
넘겨짚은 말이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진용도 빙긋이 웃으며 손가락으로 하군상을 가리켰다.
“하 형만 조심하면 될 것 같은데요.”
“헉! 그 몽둥이 좀 치워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걱정 마시라니까요?”
몽둥이?
진용은 무심결에 자신의 손가락을 쳐다보았다. 자기가 봐도 좀 굵은 편이었다.
‘세르탄, 다 너 때문이야. 처음부터 주의를 줬어야지.’
‘흥, 조를 땐 언제고…….’
4
구룡상방을 나선 진용은 정광과 함께 내성의 북문을 나섰다.
그 후로도 두 사람은 일 각가량을 아무 말 없이 걸었다.
그리고 대로를 벗어나 지저분한 골목길로 들어간 뒤, 십여 장을 더 가다가 칠이 벗겨진 채 굳게 닫힌 대문 앞에 멈춰 섰다.
“여긴가?”
정광이 묻는 말에도 진용은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집은 그대로 있었다. 그런데 현판이 보이지 않았다.
문이 굳게 닫혀 있기는 했지만, 손때 묻은 문고리에는 먼지가 쌓여 있지 않았다. 누군가가 살고 있기는 살고 있는 모양이다.
누굴까. 누가 살고 있는 것일까?
유모일까? 아니면…….
문을 두드려야 하는데 겁이 난다.
한달음에 달려와 문 앞에 선 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마음이 안정되지 않는다.
‘유모! 안에 있으면 문 좀 열어줘. 용아가 왔단 말이야.’
“후읍!”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손을 들었다.
문고리를 잡아가는 손이 가늘게 떨리는 것처럼 느껴진다.
육신이 떨리는 것이 아니다. 가슴이 떨리고 있는 것이다.
문고리까지의 거리가 백 리도 더 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그때.
“밖에 뉘시우?”
안에서 늙은 할멈의 힘없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저 목소리는……?’
손이 굳었다. 더 나아가지지가 않는다.
“누가 왔나? 그림자가 보이는 걸 봐선 누가 온 것 같은데…….”
유모다! 분명 유모의 목소리다!
유모가 아직도 살아 있었어!
오오오! 고맙습니다, 하늘이시여!
“유… 유모, 나… 야.”
늙은 할멈의 목소리보다 더 떨리는 목소리가 진용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자그마하게.
“누군데 이 할미만 살고 있는 집을 찾아온 거유?”
나라니까! 용아란 말이야, 유모!
목이 메어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진용은 멈췄던 손을 뻗어 문고리를 움켜잡았다.
안에서 유모가 움직이는 느낌이 전신으로 느껴진다.
겨우 문고리에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탕, 탕탕.
문고리로 서너 번 문을 두드렸다.
“조금만 기다리시구려. 이 할미가 몸이 불편해서 그러니.”
떠날 때도 몸이 좋지 않았던 유모다. 아마 그동안 더 안 좋아지신 듯하다.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럴 수밖에…….
정광마저 분위기에 휩쓸려 입을 닫았다.
한순간 무거운 침묵이 북경 외곽의 자그마한 장원 앞에 내려앉았다. 지나가던 바람도 숨을 죽이고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얼마 후.
덜커덩! 끼이이…….
크지 않은 문이 천천히, 답답할 정도로 천천히 열렸다. 십일 년에 가까운 세월, 기다림과 애환으로 멈춘 시간을 굴리면서.
문은 두 자가량 열리다가 멈춰 버렸다.
문과 문 사이에 머리가 하얗게 센 할멈이 진물이 딱지처럼 앉은 눈을 비비며 서 있었다.
“뉘시우?”
할멈은 고개를 들며 다시 물었다. 진용이 답했다.
“나…… 예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젊은 서생을 보고 할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군데 자신을 보고 우는 걸까? 어디서 많이 본 얼굴 같긴 한데…….
“뉘신데……?”
“용아…… 예요.”
“누구? 용아? 그게 누군…….”
진물이 가득한 할멈의 눈이 점점 커져만 간다. 그러더니 몸마저 심하게 떨린다.
할멈은 부들부들 떠는 손으로 진용을 가리키며 입을 벌렸다.
“요, 요오오…….”
“알아…… 보겠어요?”
“요, 용…… 아? 우리 도련님, 용… 아 도련님 말이우?”
알아봤다. 유모가 자신을 알아봤다!
진용은 눈물이 흐르는 것도 잊고 환하게 웃었다.
“예, 유모. 제가, 제가 바로 용아예요.”
“어… 어허…… 어헝! 도련님! 진짜 도련님이 왔구려? 어어헝!”
철푸덕!
너무나 큰 충격 때문인지 유모가 다리 힘을 이기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유모!”
진용은 깜짝 놀라서 황급히 유모의 몸을 끌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