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서생 7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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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화
6
진용은 일행과의 거리가 이십여 장으로 벌어지자 즉시 실피나를 불러냈다.
“실피나!”
실피나가 환한 웃음을 지으며 나타났다. 마치 실컷 땀 흘리고 시원하게 목욕이라도 한 것처럼 활력 넘치는 표정이었다.
―불렀어? 아웅! 한바탕 신나게 뛰었더니 몸이 좀 풀린 것 같아. 아이! 기분 좋아.
“허튼소리 그만 하고, 주위를 살펴봐! 도망치는 놈들이 있을 거야. 빨리!”
―알았어! 그런 일이라면 이 언니가 최고지. 오호호호!
실피나가 한줄기 바람이 되어 빠르게 사라지자 뒤늦게 세르탄이 구시렁댔다.
‘염병! 누구는 죽어라 뛰어다니느라고 발바닥에 땀이 마를 시간도 없는데…… 뭐? 몸이 좀 풀린 것 같아? 언니? 무슨 정령이 저따위야?’
‘시끄러! 땀나면 내가 나지 세르탄이 나?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세르탄보다 더 도움이 되잖아!’
‘시르! 아까 실피나 때문에 죽을 뻔한 적 잊었어?’
‘그거야 내가 아직 내력이 달려서 그런 것이고, 환각 마법을 펼칠 때만 해도 세르탄이 마안을 가르쳐 줬으면 간단했을 거 아냐?’
‘그건…….’
‘뭐, 뇌전의 능력도 생각보다 별로던데…… 차라리 실피나가 싸우는 것이 훨씬 효과적인 것 같아.’
갑자기 뒤통수가 후끈 달아올랐다. 그러더니 세르탄이 억눌린 목소리로 말했다.
‘…가르쳐 주면 되잖아, 가르쳐 준다고! 씨이……. 아직 뇌전의 기가 부족해 제대로 펼치지도 못하면서 왜 내 탓을 하는 거야? 실피나의 능력 따위는 제대로 된 뇌전의 능력에 비하면 새 발의 피라고!’
진작 그럴 것이지, 개기기는…….
진용은 세르탄이 끝없이 구시렁대자 슬그머니 말을 돌렸다.
‘그건 그렇고, 환타지 중에 폭공지는 언제 가르쳐 줄 거야? 그래도 타공지는 쓸 만하던데.’
그 말이 떨어지자 세르탄이 언제 떠들었냐는 듯 조용해졌다. 그리고 적의 꼬리를 잡을 때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적의 꼬리를 잡은 것은 역시 실피나였다.
―주인아! 저쪽에 못생긴 인간들이 많이 모여 있어!
모여 있다고? 도망가지 않고?
이상하다, 도망을 가던 자들이 멈추다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몇 명이야?”
―응? 몇? 어…… 열…… 넘어.
움찔하며 대답하는 말투가 어째 이상하다. 하지만 은신술이 뛰어난 적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정확한 숫자를 알아야 하기에 다시 물었다.
“정확히 몇 명이냐니까?”
―열…… 하나, 둘, 셋…… 열 하고 셋.
갑자기 세르탄이 웃었다.
‘켈켈켈! 저 멍청한 정령은 열까지밖에 못 세나 봐. 우헤헤헤!’
‘그래도 놈들을 발견한 것은 세르탄이 아니라 실피나라는 걸 잊지 말라구. 그런데 세르탄은 몇까지 셀 줄 알아?’
진용이 지나가듯이 물었다. 그러자 세르탄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백! 좀 무리해서 백여덟까지는 세어봤지! 대마전의 기둥이 백팔 개거든. 음하하하!’
에혀…… 잘났다, 세르탄.
어쨌든 적은 열. 혼자 상대하기에 벅찬 숫자다.
다행히 적은 진용이 뒤쫓아왔음을 모르고 있다. 그것은 작으면서도 큰 차이였다. 결정적일 정도로.
8장. 무영천귀
1
그들이 걸음을 멈춘 곳은 격전지에서 두 개의 산을 넘은 곳이었다.
뒤따라오는 자들은 보이지 않았다. 따라온다고 해도 숲 속에 있는 이상 겁날 것은 없었다.
무영천귀 여덟에 자신이 이끄는 척천단 다섯이면 설사 십천존 본인이라도 자신 있었으니까.
그런 자신감에 상관욱은 일단 걸음을 멈췄다. 인원도 점검할 겸, 계속된 격전으로 인해 손상된 몸을 추스르기 위해서였다.
열 명의 무영천귀 중 둘이 죽고 여덟이 남았다. 남은 여덟 명 중 둘은 제법 큰 부상을 당한 채 안색이 창백하니 굳어 있었다.
사실 그 정도의 희생으로 혈혈구마 중 셋을 죽이고, 팽가이호를 비롯해 천제성의 고수들을 십여 명 죽였으니 무영천귀에 대한 실험은 대성공이었다.
하지만 마지막에 본 광경이 떠오르자, 상관욱은 자신도 모르게 인상이 와락 구겨졌다.
‘누구였지? 상당한 거리였는데, 그 거리에서 무영천귀에게 부상을 입히다니…….’
십절검존 유태청이 그들과 함께 있다는 것은 매우 뜻밖의 일이었다.
맹에서조차 모르고 있는 일. 알았다면 결코 말을 하지 않았을 리 없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자신이 알고 있는 유태청은 이미 이빨 빠진 호랑이였다. 광혼마가 죽기 전에 한 말이니 그리 틀린 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유태청을 거의 죽음 직전까지 몰고 갔던 우리거늘. 크크크……. 네 따위 놈들에게 뒤통수를 얻어맞다니…….”
그리고 자신이 멀리서 본 바로도 유태청은 결코 자신들을 압도할 만한 기도를 뿜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 누굴까?
팽기한이나 위지홍이 강하긴 하지만 결코 무영천귀 둘을 한순간에 어찌할 정도의 실력은 아니다. 더구나 그렇게 먼 거리에서는 더욱더.
상관욱의 눈이 반짝였다.
두 사람이 더 있었다. 그중 맨 앞에 날아오던 자는 매우 젊은 자였다. 그것도 서생의 복장을 한 자.
‘설마?’
자신이 생각하고도 어이가 없는지 피식 고소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는 몰랐다. 멀리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가 서생복을 입고 있다는 것을.
진용은 바위 위에 우뚝 솟은 나무 위에 올라가 몸을 숨기고 계곡을 내려다보았다.
우거진 숲 속 완만하게 이루어진 공터에 그들이 있었다. 거리는 대충 백여 장.
암울한 어둠의 기운이 풍기는 회의인이 여덟, 그리고 또 다른 자들이 다섯.
하나같이 고수들이다. 팽기한이나 위지홍에는 못 미치지만, 그렇다고 현저하게 차이 날 정도는 아니다.
더구나 은신술에 능하고 합공을 망설이지 않는 자들. 아마도 천제팔성을 비롯한 고수들이 당한 이유는 그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그들 중에는 위지홍이나 팽기한에 근접할 정도의 기운을 지닌 자도 있다. 특히 청의인의 기운은 다른 자들을 압도하고 있다.
‘왜 저런 전력으로 물러났을까?’
의문이 들었다. 저 정도의 전력이라면 결코 자신들의 전력에 뒤떨어지지 않았다. 저런 힘을 가진 자들이 도망친 이유는 뭘까?
무인이 도망을 칠 이유는 한 가지뿐이다. 힘의 차이가 너무 커서 도저히 대적이 되지 않을 때.
그렇지 않고 힘이 되는 데도 도망을 쳤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만한 이유…….
진용은 그간의 과정을 재빨리 되돌아봤다.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
‘자신들의 정체를 밝히고 싶지 않다는 것인가?’
어찌 되었든 아무래도 혼자서 저들을 친다는 것은 힘들 듯했다.
‘저들이 멈출 줄 알았으면 같이 오는 것인데…….’
진용이 그들을 살피는 사이 정광이 헐레벌떡 뒤쫓아왔다. 그가 속삭이듯이 물었다.
“찾았나?”
“예. 일단 멈췄습니다.”
정광은 고개를 내밀어 공터를 바라보았다.
“많이도 있군. 보통 놈들이 아닌 것 같은데?”
당연한 말이다. 그들이 죽인 사람만 봐도 알 수 있는 일.
“어떻게 할 건가? 우리 둘이서 때려잡기에는 머릿수가 너무 많군. 유 노사나 팽 노사가 왔으면 몰라도…….”
그 말대로다. 둘이서 치기에는 너무 많았다. 그리고 강했다.
다른 사람들과 같이 오지 않은 것이 아쉬웠다.
어쩔 수 없었다. 저들이 더 도망가지 않고 멈출 줄 알았다면야 당연히 같이 왔을 테지만, 그때만 해도 도망갈 거라 생각했으니까.
추적을 해서 잡을지 확실하지도 않는 일에 시신을 놔둔 채 산속을 헤맬 수는 없지를 않은가.
어쨌든 그렇다고 빈손으로 되돌아갈 수도 없는 일.
“일단 찔러나 보죠.”
“그러다 안 되면 튀고?”
진용이 고소를 지었다. 말을 해도 꼭 도사답지 않게 하는 정광이다.
작전상 후퇴라는 좋은 말도 있거늘.
“너무 무리하지는 마세요. 저들은 강합니다. 게다가 합공도 망설이지 않고 하는 자들이에요. 하나라면 몰라도 둘이면 위지 대협도 장담할 수 없는 고수들입니다.”
“걱정 말게. 나도 삼십육계에는 일가견이 있다네.”
두 사람은 소리없이 나무에서 내려왔다.
그들은 느닷없이 세차게 불어대는 바람 소리에 묻혀 계곡 아래로 접근했다. 실피나가 일으킨 바람이었다.
상관욱은 갑자기 바람이 세게 불어오자 미간을 찌푸렸다.
“바람이 세지는군. 몸도 어느 정도 돌아온 것 같은데, 그만 가자.”
회의인들이 유령처럼 소리없이 일어섰다. 그들 중 키가 작고 눈썹이 거의 없어 기이하게까지 보이는 삼십대 회의인이 상관욱을 돌아보았다.
“상관 단주, 놈들을 놔두고 그냥 가는 거요?”
상관욱은 가늘게 뜬 눈으로 그를 직시했다.
무영천귀를 이끌고 있는 엽시랑이란 자였다.
“엽시랑, 명령권은 나에게 있음을 잊지 마라.”
“쿠쿠쿠, 어찌 모르겠소. 뒤에서 말만 앞세우는 일이 단주의 일이란 걸 말이오.”
“엽.시.랑……!”
“크크……. 갇혀서 산 지 십 년 만에 바깥에 나왔는데, 조금 더 놀다 가도 되지 않겠소? 내 형제들도 둘이나 죽었는데…….”
엽시랑의 말이 떨어지자 옆에서 두 사람의 말싸움을 바라보고 있던 회의인들이 새파란 살기를 흘려냈다.
흥분이었다. 피를 더 보고 싶다는 열망.
“쿠크크크. 대장 말이 맞아. 나머지 놈들도 모두 죽이자고.”
‘이 살귀들이…… 감히!’
마음 같아서는 단칼에 목을 베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무영천귀는 삼존맹 십 년의 결실이었다. 그렇기에 자신이 아무리 지위가 높고 실력이 있어도 자기 마음대로 처리할 수 없는 것이다. 최후의 경우가 아니라면.
그렇더라도 참고만 있기에는 끓어오른 노화가 너무 거셌다.
상관욱은 전신에서 강력한 기세가 뿜어내며 지나가던 바람이 얼어붙을 정도로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
“한 번만 더 불복종하면 대맹주께 무슨 벌을 받더라도 네놈들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일단은 내 명령대로 해!”
바람의 일부가 되어 공터로 접근하던 진용의 귓가에 싸늘한 호통 소리가 들려왔다.
일순간 진용의 눈이 반짝였다.
‘대맹주?’
거리는 십 장 안쪽.
두 손에 가득 내력을 모은 진용은 옆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제가 먼저 치겠습니다. 도장님이 뒤를 맡아주세요.”
정광이 고개를 끄덕였다,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동시에 진용의 신형이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앞으로 쏘아져 갔다.
정광도 발에 잔뜩 힘을 주고 뒤이어 벌어질 일에 대비했다.
그때다. 발밑에서 나뭇가지가 하나 부러졌다.
순간 정광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뚝!
엽시랑을 기세로 압박하던 상관욱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잔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하지만 조금 전에 들려온 소리는 결코 잔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아니다.
게다가 그 소리가 들려온 곳은 위가 아니다. 땅에서다.
비릿한 살소를 흘리며 상관욱의 바라보고 있던 엽시랑도 한순간에 자세를 바꾸고 허리로 손을 가져갔다.
“웬 놈…….”
쾅!
진용의 진로를 막으며 검을 빼 들던 갈의인 하나가 벼락같은 공격에 튕겨졌다.
삼 장을 격하고 일장을 내지른 진용의 신형이 흐릿해지더니 찰나간에 세 개의 그림자를 남기며 흩어져 버렸다.
그러자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회의인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철저하게 진용의 진로가 될 만한 곳을 향해 면이 얇고 폭이 좁은 도검을 휘둘렀다.
보고 하는 공격이 아니었다. 느낌대로,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하는 공격이었다.
그중 두 사람의 공격이 진용의 진로를 정확히 가로막았다.
진용은 자신의 진로를 차단하며 휘둘러오는 두 자루 첨도를 우수 중지로 찍어버리고 신형을 뽑아 올렸다.
떠덩!
주르륵, 두 명의 회의인이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또 다른 자들이 허공에 뜬 진용을 향해 도검을 날렸다.
소리없이, 빠르게!
그때 허공에서 빙글, 공중제비를 한 번 돈 진용의 양손이 아래쪽을 향해 펼쳐졌다.
순간!
번쩍!
새파란 벼락이 달려드는 회의인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