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서생 11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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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66회 작성일소설 읽기 : 마법서생 112화
112화
이런 날 그들이 할 일은 단 하나였다. 밖에서 깨울 때까지 방을 나서지 말고 푹 자는 것. 오직 그것뿐이었다. 궁금함을 풀려다 뇌옥에 갇히기 싫은 이상은.
특별한 수문위사가 지키는 동문이 열린 후 안으로 들어선 사람은 셋. 진용과 유태청, 그리고 두 사람을 안내해서 데려온 석장진의 아들 석무심이었다.
그들은 마치 자신의 집인 듯 석무심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면서도 조금의 머뭇거림이 없었다.
오히려 그들을 안내하는 석무심이 주위를 둘러보며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오대세가가 밀집해 있는 곳이 동문 쪽이네. 특히 남궁세가는 동문에서 매우 가까운 곳에 있지.>
유태청의 전음에 진용은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정천무맹에 들어오기 전, 그는 유태청에게 가는 곳의 지리에 대해 알려달라고 했다. 언제 어느 때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는 만큼, 최소한의 지리만은 알아두어야 했기 때문이다.
허공에 떠서 두리번거리고 있는 실피나를 불러낸 것 또한 그와 비슷한 목적이었다.
조금 걱정스런 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주위 상황을 정찰하기에는 실피나가 가장 유용했던 것이다.
실피나는 넓게 원을 그리고 날아다니면서 쉴 새 없이 재잘거리고 있었다.
―주인아! 숨어 있는 인간들이 많아. 열도 넘어. 싸울까?
<얌전히 주위나 살펴봐, 실피나. 싸우러 온 것 아니니까.>
―치잇! 실피나는 심심한데.
<혹시 수상한 행동 하는 사람 있으면 그거나 알려줘. 알았지?>
―전부 수상하게 보이는데?
<끄응. 몰래 다가오는 사람이나, 아니면 지금 숨어 있는 사람들을 피해서 움직이는 사람 있으면 알려달란 말이야. 알았어?>
―알았어. 그런데, 그런 사람하고는 싸워도 돼?
진용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괜히 실피나를 불러낸 것 아닌지 후회가 되기도 했다.
<…너무 심하게 하지는 마. 그리고 내가 말한대로 돌아다니면서 이곳의 구석구석까지 다 외워놔. 할 수 있지?>
갑자기 대답이 없다.
<실피나……?>
―골치 아픈 일은 싫은데……. 건물도 많고…….
열 이상은 잘 세지를 못하는 실피나. 머리 아프다는 말이 나올 만도 했다.
<숫자를 세라는 게 아냐. 그냥 이곳의 모든 것을 눈여겨보았다가 나중에 나에게 알려달란 말이야.>
―…알았어. 해보지 뭐.
진용은 겨우 실피나를 날려 보내고는 앞서가는 석무심을 따라 커다란 전각으로 들어갔다.
동시에 유태청의 전음이 귓전을 울렸다.
<이곳이 바로 창천각이네. 남궁세가의 중추 세력이 머물고 있는 곳이지.>
전각 안의 내실에는 남궁창훈과 석장진, 제갈운문이 서 있었다. 그들은 진용과 유태청이 들어서자 유태청에게 정중한 자세로 공수의 예를 취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유 노사.”
“허허허, 죽기 전에 맹주를 보게 될 줄은 몰랐군.”
“제가 찾아뵈었어야 하는데, 이렇듯 오시라 해서 죄송합니다. 일단 좌정하시지요.”
간단한 인사가 오가고 난 후에야 각자 자리에 앉았다.
진용이 유태청과 나란히 앉자 제갈운문의 눈이 기이한 열기를 담은 채 진용을 향했다.
‘저자가 그 내력을 알 수 없다는 신비의 서생인가?’
남궁창훈와 석장진도 조금은 곤혹해 하는 표정으로 진용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유태청이 이런 자리까지 대동했을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하고 아무런 토를 달지 않았다.
진용은 그들의 눈빛을 느꼈지만 모른 척 방 안을 둘러보았다.
생각보다 크지 않은 방이었다. 화려한 장식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벽에 걸린 웅장한 기세의 산수화와 보검인 듯한 두 자루의 장검만이 그나마 이곳이 무인의 방임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었다.
창천검신(蒼天劍神) 남궁창훈.
그가 단순히 남궁세가의 가주이어서 맹주가 된 것만이 아님을 진용은 방 안의 풍경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사이 석무심이 다섯 명의 찻잔에 차를 따르고 뒤로 물러섰다.
연한 백색 자기잔에서 피어오른 다향이 잔잔히 방 안을 맴돈다. 용정과는 또 다른 은밀함이 녹아 있는 다향이었다.
머리가 맑아지는 듯한 향기.
진용은 물끄러미 손에 들린 연한 녹색의 찻물을 내려다보았다.
아버지하고 언제 이렇게 차를 마실 수 있을까?
그 날이 빨리 왔으면…….
그때 잠시간의 침묵을 깨고 남궁창훈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이렇게 노사를 직접 모신 것은 조언을 얻고자 함입니다.”
“조언? 헐헐헐, 산속에만 처박혀 있던 늙은이가 맹주에게 조언할 것이 있기나 하겠는가?”
“얼마 전에야 천암산의 일에 대해 보고를 받았습니다. 천혈교가 천제성에 복수를 하겠다고 선언한 배경을 조사하던 중 천제성 사람들의 입에서 천암산의 혈투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하더군요. 천하 정파무림의 중심이라는 본 맹이 그렇게 큰일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으니, 참으로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그는 착잡한 심경을 털어내려는 듯 잠깐 말을 끊었다.
그 잠깐 사이, 진용은 언뜻 남궁창훈의 눈빛에서 한차례 거센 파도가 일렁이다 가라앉음을 느꼈다.
분노인가? 자괴인가?
진용의 눈빛이 깊어졌다.
‘아무래도 남궁 맹주에 대한 판단은 유보해야 되겠군.’
눈빛을 갈무리한 남궁창훈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니 천제성을 제외한다면, 노사만큼 그들과 직접적인 관계를 가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찻잔을 내려놓은 유태청이 담담한 표정으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런 일이 있었지. 그 바람에 산을 내려오게 되었으니, 어쨌든 그들과 적지 않은 인연을 맺었다고 봐야겠지. 좋아, 일단 맹주 말을 한번 들어보세.”
남궁창훈은 가볍게 포권을 취해 감사의 마음을 표하고는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며칠 전 본 맹의 원로회의가 있었습니다. 천혈교의 발호를 그대로 두고 볼 수 없다는 게 중론이었지요.”
“흠, 마도의 결집이 우려돼서인가?”
“그렇습니다, 노사. 천혈교의 힘이 강해지면, 지난 삼십 년 동안 기를 펴지 못한 채 웅크리고 있던 마도문파들이 그들을 중심으로 일어설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 일이라면 굳이 나를 만날 필요까지는 없었을 텐데……?”
“문제는 일이 너무 급하게 흐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중을 기해도 모자랄 판에…….”
말을 흐리는 남궁창훈의 표정이 무거워졌다.
“우선 맹 내의 상황을 들으시면 맹주께서 왜 노사를 청했는지 이해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는 천천히 찻잔을 들어 입술을 축이고는 유태청을 바라보았다.
“현재 본 맹 원로들의 의견은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신중파와 그들이 더 크기 전에 시간을 끌지 말고 쳐야 한다는 강경파로 갈라져 있습니다. 하나 신중을 기하자는 사람들도 강경파의 기세가 워낙 드센지라 아무런 말을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해서…….”
그의 눈이 진용을 스쳐 지나갔다.
“노사께 조언도 얻을 겸, 괜찮으시다면 한 가지 청을 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청?”
“노사께서 강호에 다시 나오신 이유가 혹, 천혈교를 상대하시기 위함이 아니신지요?”
“그런 이유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네만, 그렇다고 주된 이유도 아니네.”
“하오면 그들을 상대할 마음이 있다 생각해도 되겠는지요?”
일부가 전체를 좌우하게 만드는, 그러면서도 상대의 마음을 건드리지 않는 교묘한 화술이었다.
유태청은 고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맹주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는 알겠네만, 이빨 빠진 늙은이를 어디에 써먹으려고 그러시는가?”
남궁창훈이 고개를 숙였다.
“제가 어찌 감히……. 다만 노사께서 가시는 길이 그와 같다면 한 가지 도움을 청하고자 하는 것이지요.”
“간단한 일은 아닌 것 같군. 어디 말해보시게.”
숙인 고개를 천천히 쳐든 남궁창훈이 신중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노사께선 천제성의 백리 노성주와 친우지간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오니 천제성의 독자적인 움직임을 잠시만이라도 막아주셨으면 합니다.”
뜬금없는 말이었다. 정천무맹의 맹주가 왜 천제성의 움직임에 신경을 쓴다는 말인가?
“천제성의 움직임을 막아달라? 그들이 내 말을 들을까? 이미 천혈교가 선전포고를 한 마당이거늘.”
“적어도 약간의 시간이나마 늦출 수는 있지 않겠습니까?”
유태청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간단한 것 같으면서도 쉽지 않은, 조금 묘한 청이었다.
“자세히 들어봤으면 좋겠군. 왜 그들의 움직임에 신경을 쓰는 것인가?”
“그들이 먼저 움직이면, 본 맹의 강경파들은 행여나 주도권을 천제성에 빼앗길까 봐 천혈교에 대한 공격을 더욱 서두를 것입니다. 결국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전쟁이 일어날 것은 불을 보듯 훤한 상황이지요.”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으음…….”
유태청은 침음을 흘리며 턱을 쓰다듬었다.
남궁창훈이 그런 유태청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천제성과 천혈교가 바라는 일이 아닐까 의문이 간다는 점입니다.”
“그들이 바라고 있다? 설마 천제성마저 그런 상황을 바란다는 말인가? 그들이 왜? 맹주가 그런 말을 할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
유태청이 굳은 눈으로 남궁창훈을 직시했다.
단순한 말이 아니다. 정천무맹의 맹주가 천제성의 행사를 의심하고 있다는 말이다.
남궁창훈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제갈운문을 바라보았다. 그제야 제갈운문이 조용히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갈가의 제갈운문이 삼가 유 노사 어른을 뵙습니다. 조금 전에 맹주께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천제성의 고수들이 혈혈구마를 뒤쫓다 천암산에서 싸움이 벌어졌다는 말을 천제성의 사람들에게 들었습니다. 저는 그 일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 일. 하나 조금 생각을 달리해 본 저는 그 이야기에 매우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 이후, 몇몇 사람과 함께 지난 몇 년간 들어온 정보를 다시 꺼내놓고 일일이 되짚어보았지요.”
사람들의 눈이 일제히 제갈운문에게로 향했다.
대체 그 이야기에 무슨 문제가 있단 말인가?
시선이 집중되자 제갈운문이 입을 열었다.
“처음 의문은 간단한 거였습니다. ‘천제성에선 왜 그들이 모두 모이기 전에 제거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었지요.”
유태청이 의아한 듯 물었다.
“그거야 미처 찾지 못해서가 아니겠나?”
“수년 간 집중적인 추적을 했으면서 놓쳤다고요?”
제갈운문이 되묻고는 고개를 저었다.
“제가 아는 천제성의 정보력은 그리 형편없지 않습니다.”
단일 세력으로 천하제일인 곳이 천제성이다. 누가 감히 천제성의 정보력을 형편없다 할 것인가.
“해서 생각해 봤지요. 혹시 그들이 고의로 그들을 그리 몰아간 것은 아닐까?”
위지홍과 만난 이후 그와 함께 요마를 쫓았던 진용은 그의 말을 인정할 수 없었다.
“최소한 위지 대협만큼은 요마를 그리 몰지 않았습니다.”
제갈운문은 이채 띤 눈빛으로 진용을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을지도 모르지. 어쩌면 그도 장기판의 알 하나에 불과했을지 모르니까.”
“그 말씀은, 다른 누군가가 상황을 조장하고 이용했다는 겁니까?”
“바로 그거네. 사실 그들이 한 이야기에는 사소한 의문이 적지 않게 있네. 의문을 하나씩 떼어놓고 보면 그럴 수도 있지, 하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을 정도로. 하나 전체적인 상황을 놓고 보면 모든 의문이 하나로 귀결되네.”
제갈운문이 그쯤에서 잠깐 말을 멈췄다.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그를 향했다.
진용이 그를 압박했다.
“마저 말씀해 보시지요.”
“좀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우리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지난 오 년간 천하 곳곳에서 들어온 정보 중 유 노사와 관련된 정보가 하나도 없었네.”
그는 의아해하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한자한자 내뱉었다.
“유 노사께선 이십 년 전부터 행방을 감춰 계신 곳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는데, 그들은 어떻게 알았을까요? 그들의 정보력이 뛰어나서? 아니면 예지력이라도 있어서?”
그가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정보를 취급해 본 사람들이라면, 황하에 빠진 바늘을 찾는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라는 것을 잘 압니다. 그들이 만일 대대적으로 유 노사를 찾으려 했다면, 어떻게든 우리의 정보망에 걸려들었을 겁니다. 아니면 천제성의 정보망에라도. 한데 그런 전조(前兆)도 없이 그들은 갑자기 유 노사의 거처를 찾아냈고, 움직였습니다. 그리고 천제성 역시 그들이 혈혈구마를 내보내자마자 고수들을 내보냈습니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모든 것이 우연이라고 생각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