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서생 13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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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화
하지만 얼굴이 굳은 것도 잠시뿐이다. 두려울 게 없으니 마음에 거칠 것도 없다.
“훗! 이거 부끄럽군요. 어떻게 아셨습니까?”
추진상이 슬며시 웃으며 말했다.
“풍림당의 추량이 바로 나라오. 풍림당에서 고 천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겠소?”
“추… 량?”
추량. 풍림당주 운가명이 담소를 나누던 중에 말했었다.
“풍림당에도 문제아들이 몇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반풍(反風) 추량입니다. 좀 괴팍하긴 하지만, 쓸 만한 사람이니 언제고 기회가 있으면 만나보십시오. 그는 지금 방성에 있습니다.”
설마 현령 추진상이 그 추량이라니.
미처 생각도 못했던 일이다. 풍림당의 사람들은 대개가 벼슬을 멀리하는 사람들이라는 선입견 때문이다.
진용이 멍하니 바라보자 추진상이 얼굴을 찌푸렸다.
“당주께서 말씀하시지 않았소?”
“함자는 들어보았습니다. 하지만 현령께서 풍림당의 문제아라는 반풍 추량일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무, 문제아?”
언뜻 진용의 입 언저리에 보일 듯 말 듯 웃음이 걸렸다.
‘내가 수천호령사라는 것은 아직 듣지 못했나 보군.’
아마도 운가명이 그것만은 전하지 않은 듯했다. 그랬다면 추진상이 저렇듯 편하게 말을 꺼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부담없는 말투가 훨씬 더 나으니까.
슬쩍 장난기가 발동한 진용이 넌지시 말했다.
“당주께서 그러시더군요. 청개구리 같은 성격이니, 도움을 청할 때 조심하라고 말입니다.”
“으잉? 그 양반이 미쳤나! 흥! 걱정 마시오. 내 그 양반 꼴 보기 싫어서라도 고 천호가 해달라는 대로 다 해줄 테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성격이 괴팍하다더니.
‘어쨌든 일은 잘 처리될 것 같군.’
‘역시 시르는 사악해!’
‘사악한 게 아니고, 상황을 잘 이용할 줄 아는 것뿐이야.’
그때 추진상이 화난 얼굴로 말했다.
“일단 선불로 사흘치 삼십 냥을 주시오, 고 천호.”
“…….”
“왜? 사흘 안에 갈 거요? 아깝소? 도와주는 건 도와주는 거고, 계산은 확실히 해야 하지 않겠소?”
“그야… 그렇죠.”
“뭐, 나도 이러고 싶지 않은데 말이오, 봉… 닭이란 들어왔을 때 잡아야 하는 법이라서 말이지. 험!”
헛기침을 하며 탁자를 톡톡 치는 추진상. 빨리 내놓으라는 추궁이다.
통렬한 일격이었다. 진용을 봉 취급하다니.
“…….”
놀린 데 대한 역공인가?
진용은 쓴웃음을 지으며 주섬주섬 품속에서 열 냥짜리 은원보 세 개를 꺼내 주었다.
추진상이 싱글벙글하며 은자를 소맷자락 속에 집어넣었다. 그러면서 찡긋 눈짓을 잊지 않았다.
“잘하면 상아뿐만 아니라, 십 년 만에 마누라 옷고름에도 노리개를 달아줄 수 있을 것 같군 그래. 고맙소, 고 천호.”
“별말씀을. 하,하,하.”
‘끙, 강적을 만났군!’
‘킬킬킬! 저 인간은 시르보다 더 사악한 것 같다.’
퍽!
‘그냥 잠들어 있어, 세르탄. 너까지 나서지 말고.’
2
달빛조차 구름에 가려지자 천지가 암흑으로 뒤덮였다.
땅에서는 봄을 맞은 개구리들이 귀청을 찢을 듯이 울어대고, 하늘에선 밤새들의 날갯짓 소리와 박쥐들의 푸드덕거림만이 바람 소리와 어우러져 들려온다.
밤바람을 타고 흐르는 은은한 꽃향기. 새콤한 풀 내음.
봄밤의 정취는 항상 그러했다.
그날도 그들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러했다. 때 아닌 인간들의 기척에, 달빛이 구름 사이로 삐죽 졸린 얼굴을 내밀었을 때까지는.
하지만 황금빛 달빛이 구름 사이로 비치고, 언덕 위에 그들이 나타나자 갑자기 천지가 조용해졌다.
대자연의 흐름이 바뀌는 순간, 개구리가 개굴거리는 소리도, 밤새들의 울음소리도 모두가 멈추어 버렸다. 비록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때 언덕 위에 한 사람이 올라섰다.
그의 다리에서 뻗은 희미한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언덕 아래로 굴러간다. 그러다 달빛이 다시 구름에 모습을 감추자 그림자도 사라졌다. 기척도 사라졌다.
그제야 대자연의 수레바퀴는 다시 돌기 시작했다.
개구리들도 울고, 밤새들도 울기 시작했다.
등우광은 귀청을 찢을 듯이 울어대는 개구리 울음소리를 들으며 언덕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수십만 평의 대지 위에 거룡이 누워 있었다.
구석구석에서 타오르고 있는 수백 개의 횃불에 붉게 채색된 거대한 전각군이 가슴을 짓누른다.
“남궁세가…….”
가슴이 뛰었다. 차디찬 가슴이 너무 세차게 뛰어 주먹을 움켜쥐어야만 할 정도다.
안휘성의 절대자. 합비에선 황제의 권위보다도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는 대남궁세가.
그러나 그의 가슴이 뛰는 것은 눈앞의 남궁세가 때문이 아니다.
“내가 왔다, 남궁환.”
들릴 듯 말 듯한 음성에 묻어 나오는 이름. 치검 남궁환. 바로 그 때문이었다.
“기억하겠지? 내가 남궁세가를 찾는 날, 남궁세가는 피로 뒤덮일 거라 했는데.”
그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억눌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사람들은 모른다. 남궁세가에 남궁환이 있다는 것을. 그가 있음으로 해서 남궁세가가 대남궁세가라는 것을.
심지어 남궁세가의 사람들조차 잘 모른다. 오히려 그를 미친 놈 취급하고 있다.
웃기는 일이 아닌가!
이십 년 전, 마제라 불리던 자신의 가슴에 검을 꽂은 그를 모르다니. 그러면서도 자신들이 잘나서 대남궁세가인 줄 알다니 말이다.
“흥! 어리석은 놈들. 그가 있다면, 남궁세가는 살 것이고, 없다면 피로 덮인다. 그걸 모른다면 죽어도 싸다.”
그는 하얀 머리칼을 휘날리며 고개를 들었다.
달이 보이지 않았다. 어둠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었다.
“가자, 가서 남궁세가에 피의 하늘이 도래했음을 보여주자.”
그의 뒤에서 무릎을 꿇은 채 기척조차 죽이고 명을 기다리던 자들이 일어섰다.
개구리들이 다시 울음을 멈추고, 밤새들이 숨을 죽였다.
한순간, 마제 등우광을 필두로 일백에 달하는 그림자들이 언덕 아래를 향해 날아갔다.
3
현령의 관사에서 머무르기로 했다는 말에 사람들은 모두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한시라도 빨리 가서 편안한 침상에 몸을 눕히고 싶은 마음뿐.
관청과 관사는 담 하나로 분리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관사에는 오가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추진상이 번거로움을 싫어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보니 그 넓은 관사에는 추진상 부부와 딸 상아, 그리고 세 명의 하인뿐이었다.
진용은 그 점이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관사에는 뒷문이 있었는데, 진용 일행은 마차를 끌고 뒷문을 통해 들어갔다.
밤이 깊었는데도 꼬마 계집아이 하나가 진용 일행이 들어오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아이는 신기하다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가, 마차에서 나오던 정광의 우락부락한 눈과 마주치자 쪼르르 뛰어 도망갔다.
“우와! 무섭게 생긴 도사 할아버지다! 꿈에 나타날라.”
아이를 보고 싱긋 웃으려던 정광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하, 할아버지? 아직 새파란 청춘인데 할아버지라고?”
덥수룩한 수염, 후줄근한 도복. 번뜩이는 눈빛.
마차에서 나온 사람들이 모두 한 번씩은 정광을 쳐다보았다.
‘할아버지 맞네, 뭐’그런 눈빛으로.
상아와 정광의 첫 만남은 그렇게 지나갔다.
유태청은 운아영이 보살피도록 했다. 몸이 좋아졌다고 해도 아직은 겨우 걸어 다니는데 지장이 없을 정도에 불과했다.
유태청도 운아영도 반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운아영은 환호하며 고마워했다.
두충만 쀼루퉁해져서 입술을 한자나 내밀며 바로 옆방에 자기가 머물겠다고 했다가 정광에게 한 대 얻어맞았다.
“이놈아! 그 방이 제일 좋은 방인데, 그 방을 네가 차지하겠다고? 너는…… 나와 같이 지내자.”
‘내가 미쳤수?! 절대 안 돼!’
하지만 진용이 입을 열자 하는 수 없이 정광과 함께 지내기로 했다.
“그럼, 저와 도장님, 두 위사가 한방을 쓰지요.”
진용이 함께 한다면야 저 미친 도사도 함부로 날뛰지 못할 테니까.
그리고 사도굉과 비류명과 서문조양이 한 방을 쓰기로 하고, 나머지 방 두 개는 올 사람들을 위해 남겨놓기로 했다.
첫날 밤, 피곤해선지 사람들의 코를 고는 소리가 방성현령의 관사를 진동시켰다.
“후우, 잠자기는 틀렸군.”
진용은 밖으로 나가 마법으로 건물 전체를 감쌌다. 코 고는 소리가 새어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자신은 세르탄과 함께 폭공지를 연구하면서 밤을 지새우기로 했다. 물론 세르탄은 절대 그럴 생각이 없었지만.
‘이제 자야지, 시르.’
‘어째 빠진 것이 있는 것 같아. 다시 한번 불러봐.’
‘또? 벌써 다섯 번째야, 시르.’
‘싫으면 다른 것을 말해보던가. 마공지도 좋고, 천공지도 좋고…….’
‘…그냥 하지 뭐.’
-드래곤[龍] 잡아서 날걸로 먹을 놈! 아마 비늘도 시르 이빨에는 끼지 않을 거야!
세르탄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만날 진용에게 당하고만 살아야 하는 자신이 한심하기만 했다. 자기 나이가 몇인데 이렇게 당해야만 한단 말인가? 그래도 명색이 마계의 대전사였던 자신이…….
그때 문득 스치는 생각.
응? 가만? 나이? 내가 왜 여태 그 생각을 못했지?
좋은 생각이 떠오른 듯 세르탄이 은근한 목소리로 진용에게 물었다.
‘시르, 내가 사천 년은 더 잠들어 있었겠지?’
‘글쎄, 잘은 몰라도 최소한 그 정도는 잤을걸?’
‘그럼, 시르 말대로 천 년에 열 살이라 해도 오십은 넘었겠다, 그지? 안 그래?’
‘그렇게 생각할 수도…….’
진용이 인정하는 듯하자 세르탄이 들뜬 어조로 소리쳤다. 이제야 진용을 누를 기회를 잡았다는 듯 자신있게.
‘그러니까, 내가 시르의 머릿속에 들어 있다고 해서 함부로 말하지 마란 말이야. 알았어?’
세르탄은 만세라도 부르고 싶었다.
이제 시르에게서 어른 대접을 받을 수 있게 되리라!
왜 진작 이런 생각을 못했지? 멍청하게 말이야!
‘내 말 맞지, 시르? 음하하하!’
진용은 잠시 세르탄이 기분을 더 내도록 놔두었다.
시간이 흐르자 서서히 세르탄의 열기가 가라앉는다. 진용은 그제야 조용히 말했다. 한숨까지 쉬어가며.
‘후우, 그건 그런데…… 세르탄, 내가 문제 하나 내볼까?’
세르탄은 자신감이 넘치는 말투로 대답했다.
‘뭘? 내봐! 마계의 대전사, 세르탄님이 풀어줄 테니까!’
그래, 마음껏 올라가라. 마음껏!
진용이 문제를 냈다.
‘내가 말이야……. 열 살 먹었을 적에 돌처럼 굳었는데, 천 년이 지나서 깨어났다고 생각해 봐.’
응? 뭔가 이상하다. 경고가 울린다.
저 영악한 시르가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일까?
수상하다, 수상해!
‘…그래서?’
‘사람들이, 깨어난 나를 열 살 취급할까, 아니면 천열 살 취급할까?’
‘그, 그거야…….’
‘어려워? 그럼 다시 물을게. 내 자신은 나를 열 살 먹었다고 생각할까, 천열 살 먹었다고 생각할까?’
자신감이 사라진 세르탄이 말을 더듬자 진용이 조금 더 강해진 말투로 말했다.
자, 이제 곤두박질쳐서 떨어져 봐. 기분이 어떤지.
‘아마 나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여전히 열 살밖에 되지 않았을 거야. 그지?’
이, 이런! 안 되는데…….
‘…….’
‘그래, 안 그래? 열 살 맞지!’
푹, 떨궈진 목소리로 세르탄이 답했다.
‘그… 그래.’
제길! 처음부터 말싸움하는 게 아니었는데…….
후회해도 이미 가라앉은 배였다.
진용이 세르탄을 꾹꾹 짓눌렀다.
‘그러니까, 잔머리 굴리지 마. 알았어?’
‘…….’
-어디서, 까불고 있어?
‘폭공지, 오늘 끝내 버리자구! 천천히 열 번 정도 계속해서 불러봐!’
기분이 좋은, 아주 유익한 밤이었다.
다음 날, 진용은 날이 밝자마자 추진상을 찾아갔다.
“금의위에 연락을 취했으면 합니다.”
“아무리 빨라도 보름은 걸릴 것이오.”
보름이면 백 오십 냥이군!
추진상의 얼굴에 즐거워하는 빛이 역력하다.
“아마 지금쯤은 정주에 내려와 있을 겁니다. 아마 사나흘이면 되지 않을까 합니다.”
조금 아까워하는 눈빛. 진용은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고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추가로 풍림당의 연락망을 이용할 일이 있습니다. 물론 적절한 대가는 치르겠습니다.”
추진상이 정색하고 말했다.
“풍림당은 돈 받고 움직이는 곳이 아니오.”
“저는 또 추 현령께서 그러시니 풍림당도 그런 줄 알았지요.”
추진상은 어깨를 으쓱하는 진용을 노려보았다. 그러더니 피식 웃으며 말했다.
“한 방 맞았구려.”
“다른 대가를 치를 생각도 있습니다. 어쩌면 이미 진행되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도독께서 승낙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