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서생 14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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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62회 작성일소설 읽기 : 마법서생 145화
145화
척등의 눈에 노화가 피어올랐다.
생각 같아서는 단 주먹에 때려죽이고 싶은 마음이다. 하지만 그러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그가 잘 알고 있었다.
마차 안에 있는 자를 빼고도 열일곱.
적혈문 일백 수십 무사를 일각 만에 때려눕힌 자들이다.
지금도 사방에서는 신음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다.
물론 적혈문의 전력에서 그들이 차지하는 비율은 극히 미미하다. 간부 중에선 기껏해야 홍상규와 윤문오를 비롯해 서너 명이 그들 중에 끼어 있을 뿐이니까.
그러나 문제는 백수십 명을 눕힌 적들 중 숨결 하나 흐트러진 자들이 없다는 것이다.
가공할 고수들. 놀랍게도 모두가 절정에 달한 고수들이다!
‘나와 호법들과 장로들이 모두 나선다면 이길 수 있을까?’
자신의 뒤에 늘어선 적혈문의 고수들은 근 삼십여 명에 이른다. 그리고 점점 몰려들고 있는 수하들.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적들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일반 무사들이 일단 힘을 빼고 고수 두 명이 적 한 명을 맡는다면 승산이 있다.
그가 속으로 계산을 끝내고 내심 마지막 결정을 내렸을 때다.
“건방진 자! 감히 이곳이 어딘 줄 알고 함부로 망발이냐!”
뒤에 서 있던 간부들 중 하나가 참지 못하고 앞으로 나섰다. 적혈문의 장로인 참혼마수 역수강이었다.
척등은 그가 허락도 없이 나서는데 그대로 두었다. 어차피 적을 치기로 한 이상 많은 피해를 감수해야 한다. 아마 이긴다 해도 그동안 불만을 품고 있던 원로들이 들고일어날 것이다.
적혈문의 존망을 걸고 싸워야 할 정도로 삼존맹과의 관계가 가치 있는가?
그러니 누군가는 짐을 져야만 할 테고, 역수강이 그 짐을 지면 되었다.
진용은 앞으로 나선 역수강을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척등이 말리지 않는 걸 봐선 나름 결정을 내린 듯했다.
그렇다면 굳이 더 긴말이 필요없었다.
진용은 뒤를 바라보지도 않고 입을 열었다.
“율 대협.”
율천기가 근엄한 표정을 지은 채 앞으로 나섰다.
그는 나서자마자 역수강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진용이 자신의 이름을 부른 이유는 한 가지밖에 없다. 그 이유가 그를 만족하게 했다.
그는 역수강과 일 장의 거리가 되자 자신의 애검 월상(月霜)의 검병에 손을 얹고 천천히 빼 들었다. 시퍼런 검광이 월상의 미끈한 검신을 타고 흘러내렸다.
역수강이 미간을 찌푸리며 그의 검을 바라보고는 냉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는 참혼마수 역수강이라 한다. 이름도 없는 자를 상대하고 싶지 않으니 그대는 이름을 밝혀라!”
참혼마수 역수강. 하남의 동부에선 모르는 자가 없는 이름이다. 공포의 참혼마수라 부르는 자도 있을 정도다. 역수강은 자신의 이름에 적이 겁을 먹기를 바랐다.
하지만 율천기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그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적혈신마 척등이라면 한두 번 들어보긴 했지만.
율천기가 무덤덤한 표정으로 나직이 입을 열었다.
“나는 율천기. 친구들은 벽월(劈月)이라는 이름으로도 부르지.”
순간 역수강의 냉막한 표정이 묘하게 틀어지는가 싶더니 뭔가가 생각났는지 갑자기 눈을 홉떴다.
“벼, 벽월 율천기? 그대가?”
그뿐이 아니었다. 척등은 물론이고 그의 뒤에 서 있던 적혈문의 대부분 고수들도 경악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저자가 십은(十隱) 중 하나인 벽월(劈月) 율천기?!’
말리고 싶었다. 소문대로라면, 아니, 소문의 반만 사실이어도 역수강은 율천기의 적수가 아니었다.
“시작하지.”
그때 율천기가 다시 입을 열고는 주욱 미끄러져 들어갔다.
월상이 허공에 시퍼런 선을 그었다.
찰나간에 역수강을 덮어가는 수십 가닥의 청광!
역수강은 놀란 와중에도 황급히 몸을 놀려 청광의 그물을 벗어나려 발버둥쳤다.
일 초, 이 초, 삼 초.
“커윽!”
단 삼 초 만에 역수강의 몸이 뒤로 튕겨졌다. 다행히 검날이 아닌 검면에 허리를 맞아 죽지는 않았지만, 그는 구부러진 허리를 펴지도 못한 채 피를 한 사발 토해내며 무너졌다.
다른 누군가가 그를 돕기 위해 뛰어들 시간조차 없었다.
“고 공자가 죽이지 말라 했으니 목숨은 거두지 않겠다.”
율천기는 무너진 역수강을 바라보며 엄숙한 선언을 하듯 한마디 하고 월상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쓰윽, 척등을 바라보고는 뒤돌아섰다.
어둠이 내려앉은 듯 적혈문의 거대한 연무장이 정적에 휩싸였다.
척등은 이를 악물고 진용을 바라보았다.
십은 중 한 사람인 벽월 율천기에게 명을 내리는 서생.
자신이 말한다 해서 누가 이 사실을 믿을까?
이대로 굽혀야 하나?
그럴 순 없다. 그리하면 만붕성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이들을 상대하면 살 가능성이라도 있지만, 만붕성을 배신하면 죽는다. 그것만이 진실이다.
결국 이러나저러나 자신이 내릴 결정은 한 가지뿐. 아마 저들도 자신이 그런 결정을 내릴 거라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분명히!
그가 비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한 가지뿐이네. 그게 뭔지는 그대도 알 거라 생각하네. 그러니 이해하게.”
진용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익히 그럴 거라 생각한 일이다.
“굳이 일반 무사들을 희생시킬 필요는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만…….”
척등의 표정이 보일 듯 말 듯 흔들렸다.
진용은 척등의 흔들리는 표정을 바라보고는 천천히 손을 들었다.
순간 푸르스름한 뇌전이 그의 다섯 손가락 끝에 둥근 구슬처럼 뭉쳤다.
척등과 적혈문의 무사들이 모두 눈을 부릅떴다.
율천기와 포은상을 비롯해서 삼탁의 고수들도 모두 진용의 손끝을 바라보았다.
저 괴물 같은 인간이 뭘 하려는 거지? 하는 눈으로.
그때 진용의 신형이 갑자기 흐릿하게 보이는가 싶더니, 십여 개로 늘어나 보이는 손이 일 장 허공에서 떨쳐졌다. 그러자 그의 손가락 끝에 숨겨져 있던 폭죽이 일시에 터지기라도 한 듯 시퍼런 뇌전이 사방으로 쏘아졌다.
쩌저저적! 콰과과광!
쏘아진 뇌전은 삼십여 장의 원을 그리며 연무장 바닥의 청석을 시커멓게 태워 버렸다.
입조심하려 어지간하면 입을 열지 않던 세르탄이 자신도 모르게 감탄성을 터뜨렸다.
‘오호! 시르, 제법인데? 뇌전의 능력에 풍환법을 섞어 쓰다니.’
굉음이 가라앉은 연무장은 튀어 오른 돌가루가 떨어지는 소리조차 들릴 정도로 조용해졌다.
효과 만점이었다. 생각보다도 괜찮은 반응이었다.
분분히 물러선 적혈문 무사들의 얼굴에 공포가 어려 있다.
“삼십 장……. 고 공자가 작정했군. 삼십 장 안은 지옥이라, 그 말인가?”
북리종이 중얼거리자 삼탁의 고수들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진용은 못 들은 척 무심한 표정으로 척등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저 선 안에 들어온 자의 생사는 저희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이런 방법을 택한 저의 마음을 이해해 주시길. 물론 문주께서 결단을 내리셔야 하겠지만 말입니다.”
척등은 창백하게 굳은 표정으로 진용을 노려보았다.
공포에 질린 무사들의 표정이 보지 않아도 느껴진다. 단 일수에 기가 꺾여 버렸다. 기가 꺾인 무사들은 그저 연무장의 청석을 붉게 물들이는 데 일조할 뿐.
내심 세운 계획이 시작도 하기 전에 틀어져 버린 것인가?
적혈문의 무사들은 남다른 투지를 자랑했는데, 자신이 그렇게 키웠는데, 그 모두가 단 일수에 공염불이 되어버린 것인가?
이제는 설령 수하들이 싸운다 해도 자신이 말려야 할 판이었다. 수하들을 모조리 사지로 내몰 작정이 아니라면.
젠장!
그는 마지못한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불필요한 희생은 줄여야겠지.”
진용이 무심한 얼굴에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시작할까요?”
너무도 자연스런 말투로. 마치 비무를 즐기듯이.
그의 말이 떨어지자 삼탁의 고수들이 적혈대전의 앞에 늘어서 있는 적혈문의 호법과 장로들을 향해 다가갔다. 오직 척등만 놔둔 채.
―대장은 대장이 상대한다.
그들이 나름대로 정한 규칙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진용의 무공이 대체 얼마나 강한지, 한계가 어딘지, 어떤 희한한 무공을 지녔는지 궁금한 만큼 자주 실전을 지켜봐야 한다는 것이 진짜 이유였지만.
진용도 어렴풋이 그들의 뜻을 알기에 고소를 머금고 척등을 바라보았다.
그가 자신의 허리에서 도신이 붉은 도를 빼 들고 있었다.
적혈신마 척등의 무기는 날 길이만 석 자에, 도신 넓이가 여섯 치에 이르는 한 자루 붉은 강도였다.
사람들은 척등의 도를 보고 인혈을 먹여서 붉어졌다고도 하고, 담금질을 할 때 이무기를 잡아 그 피를 사용해서 붉게 변했다고도 했다.
이무기의 뼈를 가르고 인혈을 머금었다는 칼, 척혈마도(剔血魔刀).
그것이 바로 척등이 지닌 도의 이름이었다.
적혈문이라는 이름도, 그의 별호가 적혈신마가 된 것도 모두가 척혈마도로 인해서였다.
척등은 진용을 노려보며 척혈마도를 빼 들었다. 붉은 도신이 모습을 드러내자 진용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시르, 제법 날카롭게 생겼다. 손 벨라. 조심해.’
저런 보도를 보고 기껏 생각한다는 게 손 벨 걱정이라니.
진용은 세르탄의 어이없는 걱정을 들으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제야 척등은 진용의 손이 일반 무사의 손과 다르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가 감탄한 눈으로 탄성을 발했다.
“진짜 멋진 주먹!”
“고생을 좀 했죠.”
“그런 주먹을 가질 수 있다면 어떤 고생도 힘들게 생각되지 않았을 것 같군.”
‘클클, 눈은 있어서……. 그게 바로 이 대전사 어르신의 환상타공지를 익혀서라고.’
세르탄이 방정을 떨어댔다. 진용이 말했다.
“사실 기분은 별롭니다. 속은 것 같아서 말이죠.”
‘시르! 누가 속였다는 거야?’
‘아니면 왜 아직도 손이 작아지지 않는 거지?’
‘그거야 아직 환상타공지를 완벽하게 익히지 못해서 그렇지.’
‘그럼 나머지도 빨리 가르쳐 줘. 그래야 이렇게 무식한 손이 제대로 돌아올 것 아냐?’
‘…….’
세르탄은 입을 꾹 다물었다. 말해봐야 본전도 못 찾을 게 뻔한 일. 입을 다무는 게 최선이었다.
―눈치만 늘어서는…….
진용은 조금 실망한 마음으로 척등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이미 삼탁의 무인들은 적혈문의 고수들과 격전을 벌이고 있고, 적혈문의 무사들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자신과 척등을 주시하고 있었다.
더 이상 시간을 끌 수는 없었다. 시간을 오래 끌면 일반 무사들이 움직일지도 모른다.
진용은 척등과의 거리가 이 장으로 줄어들자 서서히 건곤천단심법을 끌어올렸다.
푸르스름한 강기가 그의 주먹을 휘돌며 작은 회오리를 만들었다.
그걸 본 척등이 먼저 공격을 감행했다.
더 이상은 말이 필요없었다.
쉬아악!
척혈마도가 핏빛 강기를 발산하며 진용을 향해 휘둘러졌다.
건곤천단공이 실린 진용의 손가락이 결을 짚듯 척혈마도의 동선을 따라가며 도신을 두드렸다.
따다다앙!
청명하면서도 묵직한 도명(刀鳴)이 울렸다.
붉고 푸른 강기의 파편이 너울지며 퍼져 나간다.
척등의 눈에 경악이 떠올랐다.
강기마저 어린 척혈신도를 맨손으로 쳐내는 무식한 수법이라니. 그로선 상상도 못한 수법이었다.
더구나 도신을 통해 전해지는 짜릿한 떨림. 시간이 갈수록 강해진 떨림이 손목까지 기어오른다.
이를 악물고 진정시키려 하지만 쉽지가 않다.
자신도 모르게 주춤 한 걸음 물러선 척등의 얼굴이 와락 이지러졌다.
진용은 한 점 흔들림없이 척등을 바라보며 주욱 앞으로 나아갔다.
척등이 이를 악물고 다시 척혈마도를 휘둘렀다. 붉은 그림자가 세 줄기로 갈라져 진용을 베어갔다.
척혈팔도식 중 척혈참마(剔血斬魔)의 식(式).
순간 스윽, 푸르스름한 건곤천단의 기운이 실린 진용의 두 손이 나아가던 기세 그대로 좌우로 엇갈렸다.
백수신타에 뇌전의 능력이 실린 채!
뇌전건곤(雷電乾坤)!
붉은 도강의 동선이 흔들렸다. 제멋대로 방향을 틀어버린 도가 그의 심맥조차 흔들어 버렸다.
척등은 대경하며 뒤로 빠르게 물러섰다.
진용이 다시 쇄도했다. 숨 돌릴 여유조차 주지 않고!
“지독한……! 타앗!”
억눌린 기합성이 척등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척혈마도에서 구명 삼식이 연달아 풀어져 나온다.
삭혼(削魂), 파혼(破魂), 무혼(無魂).
줄기줄기 붉은 도강이 그물처럼 펼쳐지고, 결국에는 붉은 도막이 진용의 앞을 가로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