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서생 19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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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274회 작성일소설 읽기 : 마법서생 190화
190화
1장. 비밀
1
짙은 안개가 침묵처럼 동백산을 내리눌렀다.
십 장 밖이 잘 보이지 않았다.
진용은 하는 수 없이 실피나를 불러내 앞장세우고 계곡 안으로 잠입해 들어갔다.
경비무사들을 보긴 했지만 건드리지 않았다. 죽여봐야 공연히 저들의 경각심만 키워줄 뿐,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계곡 안에 들어선 지 반 각이 지나자 시커먼 담장이 보였다. 신혈교의 총단을 감싼 담장이었다.
담장 가까이 다가가는데 안쪽에서 우르릉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무너진 연무장을 정리하는 건가?’
그렇다면 경비는 그만큼 허술할 터. 내심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조금 더 빠르게 움직였다.
담장을 빙 돌아가자 아래쪽에 구멍이 숭숭 뚫린 수백 장 높이의 절벽이 보였다. 순간 진용의 눈이 반짝였다.
만약 이 안에 아버지가 계시다면 과연 어디 계실까?
‘놈들이 마음대로 돌아다니게 놔두지는 않았을 거야.’
분명 그러할 것이다. 놈들은 아버지를 가두고서 아버지가 알고 있는 것을 알아내려 할 게 분명하다. 이곳에 있다면 말이다.
문제는 크고 작은 석굴이 수십 개나 된다는 것. 개중에는 천혈교의 교도들이 생활하는 곳도 있을지 몰랐다.
“실피나, 저 석굴 중에 뇌옥처럼 보이는 곳이 있나 찾아봐.”
―알았어.
진용은 실피나에게 명령을 내리고, 자신은 십여 채의 거대한 전각 중 가장 큰 전각을 골라서 창문을 통해 안으로 스며들었다.
전각의 내부는 소름 끼치도록 붉은빛 일색이었다. 천장도, 바닥도, 벽도 모두가 선홍색 핏빛이었다.
진용은 대들보에 올라서서 굳은 표정으로 내부를 훑어보았다.
그때였다.
덜컹!
전각의 문이 열리더니 혈의인 다섯이 안으로 들어섰다.
진용의 눈이 부릅떠졌다.
‘혈신!’
그랬다. 선두에 선 자. 금면수라탈을 쓴 혈신이었다.
격전 중에 봤던 것보다 훨씬 장대한 체격. 뒷짐을 진 혈신의 걸음걸음마다 전각 내부의 기운이 출렁인다. 그 한 사람의 기운이 거대한 전각의 내부를 뒤덮고 있다.
가경할 광경에 진용의 이가 절로 꽉 다물렸다.
그의 뒤로 야율립과 적유가 보이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중노인과 중년인이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절대 공경의 자세. 숨조차 제대로 쉬기 어려운지 그 네 사람의 안색은 파리하게 굳어 있었다.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삼태천과 차이가 있다지만 그래도 야율립은 십천존의 한 사람이다. 그런 십천존이 숨조차 쉬지 못하고 절대복종하고 있다.
말한다 해서 누가 믿을 것인가.
네 사람의 안색이 조금이나마 펴진 것은 혈신이 대전의 끝에 있는 커다란 태사의에 앉고 난 이후였다.
혈신이 자리에 앉고 나서야 야율립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혈신이시여, 명하신 대로 추적을 멈췄사옵니다.”
혈신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야율립이 용기를 내 다시 물었다.
“하온데 왜 추적을 멈추라 하셨는지요?”
혈신이 금면수라탈 안에서 입을 열었다.
“하찮은 자들을 처리하는 것보다 안을 다스리는 것이 더 급하다.”
졸지에 탕마단과 천제성이 하찮은 무리로 전락해 버렸다. 야율립은 그 말에 마땅히 대꾸하지도 못하고 전전긍긍했다.
그러자 혈신이 말했다.
“공야무릉을 따르던 자들 중 반기를 들 가능성이 있는 자들은 모두 죽여라.”
중년인, 숙야명이 황급히 나섰다.
“신이 그들을 다스릴 수 있사옵니다. 신께 맡겨주옵소서.”
“공연한 짓이다. 진심으로 굴복하지 않는 자들은 없는 것만 못하다. 두 번 말하지 않는다. 그들이 얼마나 되든 모두 죽여라.”
대전 안의 붉은 기운이 살짝 출렁였다. 숙야명의 안색이 파리하게 죽어갔다.
“명대로… 하겠나이다.”
혈신의 전신에서 시뻘건 빛이 뿜어졌다.
“용서는 오늘 한 번뿐임을 명심하라.”
“존… 명! 쿨럭!”
숙야명이 끝내 한 사발의 피를 뿜어내며 납작 엎드렸다. 그 광경을 본 야율립과 적유의 눈이 공포로 물들었다.
혈신. 자신들이 절대 신으로 모신 혈신의 능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솔직히 말로만 전해진 혈신의 전설을 조금은 의심한 바가 없지 않았다. 어쩌면 자신들이 혈신의 위엄을 이용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들도 오욕이 있는 사람이었기에.
그런데 아니다. 이건 자신들이 어찌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다.
자신들에 비해 그리 뒤지지 않는 숙야명이 항거하지도 못하고 피를 뿜지 않는가 말이다.
야율립과 적유와 중노인 등우광은 숙야명을 따라 황급히 무릎을 꿇었다.
“혈신의 명을 어찌 거역하오리까!”
진용은 이어지는 아연한 광경에 자신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때였다. 혈신의 눈이 허공으로 쳐들렸다.
진용이 있는 대들보를 향해서였다.
순간적으로 진용과 혈신의 눈이 마주쳤다. 미처 피할 틈도 없었다.
그와 동시, 금면수라탈 속 혈신의 눈에서 붉은 빛이 번쩍였다.
진용도 반사적으로 마안을 펼쳤다.
붉은빛과 푸른빛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충돌을 일으켰다.
혈신의 눈이 움찔거린다. 자신도 눈이 타 들어가는 듯하다.
‘아직은 밀려! 일단은 물러서, 시르!’
세르탄이 소리쳤다.
일 대 일이라면 죽을힘을 다해 겨뤄보고 싶었다. 그러나 이곳은 적진이다. 절대고수가 넷이나 더 있다.
진용은 황급히 고개를 돌리고 자신이 들어왔던 창문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풍혼을 최대한으로 펼친 채.
그 바람에 혈신의 붉은 눈에 서린 곤혹함을 보지 못했다.
“설마 마안? 이상한 놈이군. 마계의 능력을 지닌 놈이 또 있다니.”
중얼거리며 고개를 살짝 꼬는 혈신을 야율립 등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혈신의 눈이 어느 곳을 향해 있다.
뭘 보고 저러는 걸까?
네 사람의 눈이 혈신의 눈을 따라 천장으로 향했다.
그제야 대들보와 이어진 곳의 창문이 하나 열려 있는 게 보였다.
“웬 놈이 감히 이곳에 들어온 것이냐!”
야율립이 소리치고, 네 사람이 동시에 몸을 솟구쳤다. 그러자 혈신이 웅웅거리는 음성으로 그들을 붙잡았다.
“그만둬라. 너희들이 잡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재빨리 바닥으로 내려선 야율립이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혈신을 올려다봤다.
“혈신이시여 어찌……?”
야율립은 말하다 말고 황급히 입을 닫았다.
‘감히 혈신의 판단을 의심하다니. 이런 실수를…….’
하지만 혈신은 그다지 기분 나쁘지 않은 듯 웃음기마저 띤 목소리로 말했다.
“우후후후, 그는 마계의 능력을 지닌 자. 그를 잡을 수 있는 자는 하늘 아래 오직 나 혈신뿐이다.”
야율립은 문득 한 사람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혹시 천뢰서생 고진용?’
“하오면 어찌하는 게 좋을지…….”
“놔두어라. 그는 때가 되면 내가 직접 잡아서 어찌 된 일인지 알아볼 것인즉…….”
‘그 늙은 인간에게 소멸당한 마기를 보충하는 것이 급하니 잠시 동안은 그냥 놔둘 것이다. 어차피 이곳까지 들어온 이상, 알고자 하는 것을 얻기 전에는 바로 떠나지 않을 터…….’
혈신은 마음속의 말은 하지 않은 채 몸을 일으켰다.
“그대들은 나가서 오늘 중으로 모든 것을 마무리 짓도록 해라!”
붉은 기운이 너울지며 대전 안의 대기가 춤을 췄다.
야율립 등은 황급히 머리를 조아리며 동시에 외쳤다.
“신혈의 세상을 위해!”
진용은 전각을 빠져나온 후 두 채의 전각을 넘어가고 나서야 뒤를 쫓는 자가 없다는 것을 알고 신형을 멈췄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단지 눈이 마주쳤을 뿐인데도 손발이 저려왔다.
‘시르…….’
진용이 마음을 진정시키며 실피나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세르탄이 떨리는 목소리로 진용을 불렀다.
진용이 혈신을 생각하느라 대답을 하지 않자 세르탄이 말을 이었다.
‘그 작자… 마계의 힘을 얻은 자야.’
진용은 그 말에 깜짝 놀라 물었다.
‘뭐라고? 마계의 힘을 얻었다고? 어떻게?’
‘그냥 짐작하는 건데……. 나보다 천 년 전에 마계에서 반란을 일으켰던 마족이 하나 있었거든. 휼탄이라고. 그도 봉인이 되었다고 들었어. 나중에 봉인석이 없어져서 난리가 났었지. 나중에 들었는데, 아버지가 휼탄의 봉인석을 몰래 빼돌렸다는 소문이 있었어. 그래서 생각한 건데, 혹시 아버지가 이곳에다 휼탄의 봉인석을 버린 것이 아닐까?’
세르탄이 오랜만에 떠버리다운 말투로 빠르게 지껄였다. 그런데 그 내용이 진용을 어이없게 했다.
‘그래서, 또 다른 마계의 봉인석이 이곳으로 떨어졌다?’
‘가능성은 그것밖에 없잖아?’
‘하긴……. 그건 그렇고, 세르탄 아버지 대체 왜 그러는 거야? 왜 봉인석을 함부로 버리는 거야?’
‘질투가 심한 편이거든.’
‘뭐?’
‘사실 휼탄이 반란을 일으킨 게 엄마 때문이었대. 아버지가 강제로 휼탄에게서 엄마를 빼앗았거든. 아마 휼탄이 봉인에서 풀리면 한바탕 난리를 피울까 봐 버린 걸 거야.’
진용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러니까, 결국 마왕의 질투심으로 강호가 시끄러워진 것이 아닌가 말이다.
그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죽어나가는 것을 생각하면, 마왕이 아니라 마왕 할아비라도 작신 두들겨 패주고 싶었다.
하지만 당장의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후우, 좌우간 문제는 문제다. 저자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십천존 중 다섯 사람은 뭉쳐야 할 텐데…….’
진용이 고심하느라 조용하자 세르탄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시르, 꼭 그 방법만 있는 건 아니야.’
‘뭐? 다른 방법이 있단 말이야?’
‘어, 시르하고 나하고 함께 힘을 키우면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진용이 심각한 와중에도 피식 웃었다.
‘나야 그렇다지만, 네가 어떻게?’
‘어……. 나가면 되지.’
드디어 세르탄이 숨기고 있던 사실을 드러내는 것 같다.
진용은 빠르게 머리를 굴리고는 나직한 목소리로 천천히 물었다.
‘무슨 말이지? 세르탄이 나올 수 있단 말이야?’
‘적당한 인간만 찾으면.’
‘적당한 인간?’
‘어. 내가 오랫동안 생각해 봤는데, 죽지 않은 몸에 자기 의지를 잃은 인간이면, 내가 옮겨가서 내 의지를 심으면 될 것 같기도 해. 물론 시르가 도와줘야겠지만.’
‘그러니까, 다른 인간의 몸에 빙의(憑依)하겠다?’
‘어차피 죽을 사람이라면 상관없을 것 아냐?’
‘좋아, 다 좋아! 그런데 왜 여태 그런 말을 하지 않은 거지?’
‘그게… 어… 그게… 아직까지는 힘을 찾지 못해서…….’
‘오라, 이제는 그만큼 힘을 찾았다? 나 몰래? 혹시 내가 얻을 힘을 가로챈 것 아냐?’
‘아냐! 절.대. 아냐!’
‘맹세할 수 있어?’
‘맹세할게! 그럼! 맹세하고말고!’
왠지 찜찜했지만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세르탄이 머릿속에서 빠져나가는 거야 자신 역시 반기는 바이니까.
진짜 문제는, 인륜으로 따졌을 때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죽지 않았다고 해도 누가 그렇게 하기를 바랄 것인가.
진용의 생각을 눈치 챘는지 세르탄이 초조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거기다 그 사람이 승낙하면 더 좋겠지.’
세르탄의 정신을 받아들일 사람이 승낙한다?
그렇다면 문제가 조금은 달라진다.
그래도 왠지 꺼림칙했다.
진용은 곧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알 수 있었다.
‘그러고 나서 세르탄이 난리 피우면 누가 막으라고? 마계의 말썽꾸러기가 강호의 말썽꾸러기가 될 텐데. 안 돼!’
세르탄이 빽 소리쳤다.
‘말썽 안 피우면 될 거 아냐! 대전사의 명예를 걸고 약속할 게!’
‘그 정도로는 안 돼. 마족이 약속을 지키는지 안 지키는지 누가 알아?’
세르탄이 갑자기 목소리를 누그러뜨리고 말했다.
‘그럼… 엄마의 이름을 걸고 마계의 언약을 할 게. 나는 한 번도 엄마의 이름을 걸고 한 약속은 어긴 적이 없어. 정말이야.’
떨리는 목소리였다.
진용은 왠지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세르탄은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어린(?) 마족이 아닌가?
비록 말썽꾸러기라지만, 자신이 느끼기에 그리 악한 것 같지도 않고 말이다.
게다가 자신 역시 지금과 같은 상태로 죽을 때까지 살아갈 수도 없는 일.
‘좋아, 그럼 엄마를 걸고 약속해. 대신 내 곁에서 십 리 이상 떨어져서는 안 돼. 언제 말썽피울지 모르니까. 그리고 약속을 어기면 나를 형님으로 모시고 평생 조용히 살겠다고 맹세해.’
‘컥!’
‘안 할 거야?’
‘하, 할게.’
‘그럼 해봐. 내가 똑바로 들을 수 있게 해야 돼. 엉뚱한 짓 하면 없던 일로 할 거니까.’
세르탄이 희열에 찬 목소리로 재빨리 대답했다.
‘알았어. 험, 험, 나 마계의 대전사 세르탄은 엄마 소르미의 이름을 걸고 마계의 언약을 하노니…….’
그렇게 마계의 지고한 약속이라는 마계의 언약이 끝나갈 즈음 실피나가 돌아왔다.
―주인아! 팔뚝만 한 쇠창살로 막힌 곳을 찾았어.
진용은 세르탄이 ‘…조용히 살 것임을 약속하노라’라는 말로 언약을 끝맺자 즉시 몸을 일으켰다.
“실피나, 앞장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