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남녀 12화
무료소설 이계남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2,207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이계남녀 12화
012 귀접연무관(鬼蝶演武館)(4)
늦은 시각. 아이네스는 파티 중에 2층의 베란다로 나왔다. 언제나 지루한 파티였지만, 이번 자신의 생일 파티는 잊지 못할 것이다. 궁정 수석마법사인 스토레무 경에게서 몸속에 5클래스급의 마나가 있고 이제 새로운 마법들을 배우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5클래스…….”
공주가 다른 사람들보다 마나가 풍부하지만 얼마 전에야 3클래스에 막 진입했었다. 그런데 갑자기 5클래스라니, 이제야 진짜 마법사의 길에 들어선 듯한 느낌이 들었고 너무 기뻐 다른 사람들이 보고 있는 곳에서도 웃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앞으로 배우게 될 많은 것을 생각하던 공주는 황토인들이 사용하는 검술이 떠올랐다.
“검술…….”
하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무도회장 주변을 지키고 있는 기사들을 보면 몸이 울퉁불퉁해서 호감이 가는 모습이 아니었다. 시녀들 중에서는 그 몸매를 두고 남성미가 물씬 풍겨 매력적이니 뭐니 해도 공주로서는 영 적응이 안 되는 모습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검술 수련을 하면서 온몸을 덮는 진득한 땀 냄새도 절대로 풍기고 싶지 않았다.
“흠… 그런데 황토인들은 검술 실력이 강해져도 저런 울퉁불퉁한 몸매는 되지 않던데?”
무혼의 눈을 통해서 본 황토인 남자들의 몸매는 우락부락하지 않았다. 균형이 잘 잡히고 매끈한 몸매를 지니고 있는 그들의 몸은 강해질수록 보기가 좋아졌다.
“차이가 뭘까?”
그들의 몸매를 생각하고 있자니 아주 가끔이지만, 물이나 거울에 비쳤을 때 볼 수 있었던 무혼의 얼굴과 모습이 떠올랐다. 무혼에게는 언제부터인지 호감이 갔다. 산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자 생각에서 깬 아이네스는 무도회장으로 몸을 돌리면서 중얼거렸다.
“그래도 땀 냄새나도록 몸을 혹사하는 것은 싫어.”
그녀는 무도회장으로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5일 후 무혼은 드디어 짐을 들고 집을 나섰다. 공야패는 자신의 아들이 대견스러운 듯 얼굴에 미소를 지울 수 없었고, 그의 아내는 연신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혼아, 쉬는 날이 되면 집에 와야 한다. 알겠지?”
“예, 어머니.”
“가서 열심히 수련하여라. 그리고 한기제, 그 친구가 아무리 아비와 친분이 있다 하더라도 그곳에서는 교두이니 공과 사를 구분해서 잘 행동하도록 하고.”
“알겠습니다, 아버지.”
공야무혼이 자신의 짐을 멘 채로 천마연무관으로 가니 친구들이 모여 있었다. 모두들 자신의 일인 것처럼 기뻐해 주고 있었다.
“야, 가서 최고의 고수가 되는 거야.”
“나도 잘난 친구 하나 둬보자. 하하하!”
그리고 장대암과 교두들에게 인사를 마친 무혼은 언제나 동경의 눈으로 바라봤던 귀접연무관으로 통하는 계단에 올라 걸어가기 시작했다. 꽤 긴 시간을 걸어가니, 산문이 하나 나타났고 그 옆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보였다. 다시 한번 심호흡을 하며 산문으로 다가가니 기다리던 사람은 자신이 알고 있던 사람이었다. 마천태풍도 고명우.
“어… 고 선배님.”
“오, 나를 아나? 아직도 알아봐 주는 사람이 있으니 기쁜데?”
“이곳에서 선배님을 모르는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천마맹호단 출신이면서도 호탕한 성격과 모든 사람에게 차별 없이 대하는 그를 좋아하던 사람들이 많았다. 다른 천마맹호단의 사람들이 수군거리기도 했지만 높은 무공실력을 지닌 그에게 직접 불평을 한 자는 없었다.
무혼이 처음 천마연무관에 왔을 때 그는 이미 유명인이었고 인기인이었다. 그가 수련 중에 펼치는 무술은 많은 아이들의 환호성을 자아냈고 그런 아이들을 보며 그는 항상 밝은 미소를 지어주었다. 무혼의 나이가 15세가 될 때 마천태풍도는 오늘의 무혼처럼 계단을 걸어 귀접연무관으로 향했고 무혼은 그 모습을 잊지 않고 있었다.
“이곳에 오는 것이 좋은 일만은 아니다. 아주 고생문이 활짝 열렸으니 각오해야 할 것이다.”
“옛!”
무혼은 계속 이어진 계단을 보았다. 멀리서 어떻게 생겼을까 상상만 했지 한 번도 들어올 수 없었던 특별한 지역이자 누구나 가기를 원했던 귀접연무관으로 향하는 그의 발걸음은 즐겁고 가벼웠다.
날씨가 서서히 더워지고 있을 무렵 24번째 생일을 이틀 남긴 무혼은 오늘도 무공 수련에 여념이 없었다. 귀접연무관의 고된 훈련과 1갑자가 넘는 내공이 그의 몸을 더욱 단련시켜주었고, 균형 잡힌 몸에 흐르는 땀방울은 그의 동작에 맞춰 허공을 노닐다 오전의 햇살을 비추며 흩어지고 있었다.
“어이, 항상 열심이구먼, 공야 아우. 내일부터 보름간 휴가라며?”
또 한 번의 검식을 마치고 숨을 고르고 있는 무혼에게 마천태풍도는 웃음을 띄우고 손을 흔들며 다가오고 있다.
“안녕하세요, 고 형님. 내일 집으로 출발합니다.”
“1년 만의 휴가지? 그런데 집에 가서 뭐 하나? 정인은 있어?”
“정인요? 에이, 제가 무슨…….”
“그래?”
고명우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무혼에게 다가와 한 팔로 목을 감싸 안으며 속삭이듯 이야기했다.
“그럼 내가 소개해 줄까?”
“예?”
“얼굴도 예쁘고 몸매도 끝내주는 아가씨가 있는데 말이야…….”
갑작스러운 소리에 무혼은 실눈을 뜨며 고명우를 보았다. 언제나 말에 또 하나의 다른 의미가 있을 때 보이는 분위기가 고명우를 감싸 돌고 있었다.
“고 형님… 혹시 말이죠?”
“응? 뭐?”
“고 형님이 그 여자에게 찍혔는데 저에게 맡기고 탈출하려고 하시는 거 아닌가요?”
고명우는 씩 웃으면서 숨기길 포기했다는 듯 시원스레 이야기했다.
“헛헛헛. 들켰네? 이제 공야 아우의 눈을 벗어나기가 힘든 것 같군. 실은 말이야. 그게, 나는 별로 마음이 없는데 자꾸 귀찮게 해서. 하하하!”
“그리고 그 여자분이 혹시 화면귀수(花面鬼手) 은소예 소저 아닌가요? 요즘 고 형님을 찾아다닌다는 말을 들은 것도 같은데요.”
“하하하, 그것까지 알고 있었나? 그럼 이야기도 더 쉽군. 동생도 은 소저를 알고 있지?”
화면귀수 은소예를 모를 리 없다. 귀접연무관에서도 상당히 수준 높은 무공실력을 자랑하는 그녀는 화면(花面)이라 불릴 정도의 아름다운 외모와 수려한 몸매로 그녀를 처음 보는 많은 남자들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고 있다.
하지만 처음 보는 남자들에게만 그럴 뿐이다. 그녀의 모습에서 도저히 상상하기 힘든 심한 변덕스러운 성격과 모든 일에 참지 않고 출수부터 하는 그녀의 행동 그리고 귀수라 불릴 정도의 독한 손속으로 그녀를 아는 남자들의 심장을 다른 의미로 두근거리게 한다.
“왜 저를 소개하려 하시는 거죠? 저 말고도 소개해 줄 다른 분들도 있잖아요? 게다가 저의 둘째 누나 나이와 비슷한데…….”
“그게… 나와 친한 사람 중에서 정인이 없는 사람은 몇 명이 안 돼서… 그리고 남자와 여자관계는 나이 차이가 10살이면 친구지. 어차피 나중에 같이 늙어갈 건데 뭐 어떠냐?”
사실 무림에서 10살의 나이 차이는 대단하지 않다. 무공을 익혀서 몸에 활력이 넘치는 내가고수들의 결혼 연령 시기가 남자는 30대에서 40대까지이고 여자도 30세를 넘기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리고 무림인들은 연상의 여인에 대한 거부감도 그다지 있지 않았다.
“그렇지만 무서운 여자와는 인연을 맺고 싶지 않아요. 특히 은 소저와 만나던 남자 몇 명이 약사전 신세를 오래 졌다는 이야기도 있었고… 응? 그런데 고 형님이 아는 분이 많을 텐데 거의 정인이 있다고요?”
“아무나 소개시켜 주면 은 소저에게 매일 맞고 살 것 같거든? 최소한 은 소저보다는 강해야 숨은 쉬고 살 거 아니냐. 그런데 숨 쉬고 살 만한 사람이 몇 명 안 되더라고.”
자신도 말하기 민망한지 얼굴을 슬쩍 긁으면서 말을 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이야기했을 땐 콧방귀만 뀌더니 널 슬쩍 이야기해 보니까 은 소저의 눈빛이 살짝 변하기에 소개시켜 줄 생각을 했지. 어때? 네가 무공연마를 게을리하지 않고 그녀를 이길 실력만 되면 나머지는 문제없잖아?”
“으악! 안 돼요. 문제 많습니다. 전 이 이야기 못 들은 것으로 하겠어요.”
무혼은 등줄기를 따라 서늘한 기운이 느껴지자 몸을 살짝 떨며 대답했다.
‘안 그래도 그 꿈속의 여자 성격이 점점 이상해져서 황당한데 실제 여자까지도 그러면… 으으, 난 청순가련한 여인을 만나고 싶어.’
무가의 딸로 태어나 성격이 괄괄한 두 누나와 선비 집안에서 태어나신 어머니를 보며 자라온 무혼은 드센 누나들에게 질렸었다.
아주 어릴 때는 다른 집안의 어머니들과는 달리 무공이 없는 어머니를 부끄러워한 적도 있었지만, 나이를 먹어갈수록 아버지의 마음이 너무나도 잘 이해가 되는 무혼이었다. 언젠가는 어머니 같은 여인을 만나 아버지와 같은 행복을 누리며 살고 싶은 그였다. 하지만 모두가 전사로 키워지는 연무관에서 그런 여자는 찾기 힘들었다.
‘임무를 받고 중원으로 나가면 나의 반려가 될 여인을 꼭 찾아내고 말 테다.’
무혼이 굳은 결심을 하며 자신의 방으로 가는 것을 보던 고명우는 중얼거렸다.
“공야 아우, 미안해. 나도 어쩔 수가 없어. 내 꿈은 순하고 애교 많은 여자인데 은 소저의 훼방 때문에 되는 일이 없다네. 그런 그녀가 나 말고는 유일하게 동생에게만 관심이 있어서 나도 가슴이 아프다네. 그냥, 운명의 장난이려니 해. 모레는 생일잔치라고 하니 안 되겠고, 며칠 뒤에 은 소저와 함께 갈 테니 그때 보세.”
고명우는 무혼이 들으면 기겁해서 거품을 물고 덤빌 말을 하면서 휘파람과 함께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제 조금 있으면 자신 역시 새로운 인연을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을 품은 가벼운 발걸음이었다.
역시 남자든 여자든 힘이 있고 봐야 했다. 고명우가 만난 모든 여자들을 쫓아낼 무공 실력을 지니고 있던 은소예의 운명은 이렇게 무혼의 운명과 점점 가까워지고 지고 있었다.
자신에게 뻗어오는 음모의 손길을 모른 채 1년 만에 집으로 돌아가는 무혼의 마음은 기쁘기만 했다. 자신의 짐을 챙기니 집에서 기다려주실 부모님과 오랜만에 만날 친구들이 생각났다.
돌아보면 꿈과 같은 시간이었다. 4년 전 갑자기 귀접연무관에 허락이 되어 가족과 친구들의 환호를 받으며 들어온 이곳. 자신이 알지 못했던 높은 곳의 무(武)의 세계는 그에게 무(武)란 무엇인지를 더 깊게 깨닫도록 해주었고 자신의 혈랑검법이 아버지의 그것과 무엇이 다른지 알려주었다.
자신의 젊은 혈기만이 가득한 검을 자신의 마음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과정은 무혼에게 희열로 다가왔고 그 희열은 끝없이 요구되는 수련과 마음가짐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는 힘이 되었다.
그렇게 노력한 지 벌써 4년, 이제 조금만 더 걸음을 내디딘다면 아버지에게 당당한 자신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으리라. 자신을 위해서 어떤 고생도 아끼지 않던 부모님의 입가에 미소를 선사하고 싶었던 무혼이다.
‘앞으로 1년. 1년만 더 수련한다면 아버지께서도 인정하실 수밖에 없는 혈랑검법을 보여드릴 수 있다.’
생각에 잠겨 짐을 챙기던 그의 손에 부딪혀 옆으로 툭 떨어지는 것이 있었다.
“어머니…….”
선비 가문인 어머니의 집안에 내려오는 작은 보물과 같은 물건이다. 7개의 수정이 하나의 모양을 이루는 칠형수옥(七形水玉) 중의 하나이며 이곳으로 출발할 때 어머니가 손에 쥐여주시던 수정 목걸이. 언제나 투명하고 부끄러움이 없이 살라는 의미가 있다는 이 목걸이를 볼 때마다 무혼은 어머니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